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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편견 (막 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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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막 6:1~6)


예수님의 고향은 나사렛이다. 가버나움으로부터 약 40km 떨어진 곳이다. 예수님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지만 성장지는 나사렛이다. 그곳에서 30세까지 성장하셨다.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그는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의 직업을 이어 받아 목수로 일하셨다. 

예수님의 고향 방문은 두 번째라 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문은 예수님의 갈릴리 지역 1차 사역 초기였다(눅 4:16-30). 그때도 예수님은 고향에서 환대를 받지 못했다. 그후 약 1년 정ㄷ의 시간이 흐른 후 2차 갈릴리 사역 마지막 시기에 다시 방문을 하셨는데 제자들과 함께 동행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갈릴리 뿐 아니라 유대 모든 곳으로 퍼졌기 때문에 이번 방문은 금의환향과 같은 방문인 것이다. 적어도 예수는 나사렛이 나은 위대한 선지자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고향에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나사렛의 회당장은 예수님에게 설교를 부탁하였다. 안식일이 되자 동네 많은 사람들이 회당으로 모였다. 예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듣고 놀랐다. 

막 6: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예수님의 가르침은 누구에게 배우고 경력이 쌓여서 탁월한 교사가 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랬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의 교훈을 기록한 산상수훈(마5-7)의 말씀을 들은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제자인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다.

마 7:28-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그러나 오늘 본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낄 수 있다. 고향 사람들은 놀라긴 했어도 은혜는 받지 못했다. 그들 마음 속에 시기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이전의 한 동네에서 함께 지내던, 마리아의 아들, 요셉의 장남이 분명한데 너무나 달라져서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칭찬과 격려 대신에 비난 비하의 말들을 쏟아 부었다.

막 6:2-3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예수님께서는 고향 사람들의 이와 같은 반응에 대하여 실망하셨다. 

막 6:4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그렇다면 나사렛 동네의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배척하였는가? 그것은 예수님께 대한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었다. 

편견이란 말은?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견해를 말한다. 편견은 두 가지 원인으로 생긴다. 첫째는 너무 몰라서, 둘째는 너무 많이 알아서 생긴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알았다. 그의 부모, 그의 어린 시절, 그의 직업, 그의 성격, 그의 형제등.. 물론 그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앞에 나타난 예수는 그들의 기대를 너무가 넘어선 거인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인간적 선입견, 편견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사람들만 고쳐주시고 더 이상 능력을 행하시지 않으셨다. 

막 6:5-6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이에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

고향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려는 선의는 무산되고 말았다. 예수님께서 섭섭한 마음을 안고 제자들과 함께 그곳을 떠나 다른 촌으로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는 사역을 감당하셨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향 방문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발견하게 된다. 


1.인간의 이성과 사고를 통해 구원의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2절에서, 회당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 감탄했으나 배척했다. 이유는 주의 말씀이 귀로 들려서 뇌에까지는 전달되었으나 심령까지는 받아 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구원의 은혜는 마음으로 믿는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증거했다.

롬 10:9-10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여러분! 신앙은 이성적 사고의 결과가 아니다. 겸손한 마음과 구원에 대한 진실한 갈망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회당에 나온 것은 잘 한 것이요. 말씀을 들은 것도 잘한 일이지만 마음으로 받아 들이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 이유는 역시 그들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었던 편견 때문이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안목으로 판단할 때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위대한 종교사상가,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으로 존경하고 추앙할 수는 있으나 신앙의 대상으로 고백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 이성의 한계인 것이다. 


2.편견은 불신앙의 죄에 해당된다.

3절에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편견이 불신앙을 낳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에 대한 무지로 인해 배척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너무 가까이 있었고,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지 못한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이런 일들에 대해 선지자 이사야는 이미 예언하였다. 

사 53:2-3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는 소수의 무리들에게는 찬양과 감사의 대상이 된다. 앞서서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경험한 자들 - 거라사 지방의 광인, 12년 혈루증에서 회복된 여인, 딸을 다시 받은 가버나움 회당장 야이로 - 그들은 예수를 단순히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영원히 나사렛의 목수가 아니다.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친히 낮아지셔서 나사렛의 목수가 되신 분이셨다. 바울은 이렇게 증거했다. 

빌 2:6-8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히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나사렛 사람들은 굴러 들어온 복을 스스로 차버린 어리석음을 자초하고 말았다. 복을 잃은 것에 그친 것이 아니라 불신앙의 죄에 빠졌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행동은 교회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특별히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닌 사람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 말씀을 들고 놀라긴 하지만 의외로 불신앙 가운데 있음을 보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찬송가도 다 부를 줄 알고, 모든 것이 익숙하기 때문에 불신앙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의 신앙이 불신앙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늘 겸손히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3.믿음이 없는 곳에는 이적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5절에서,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더 이상 권능을 행치 않으셨다. 이유는 그들의 불신앙 때문이었다.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쳐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평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척하는 불신앙 가운데서는 권능 행하심도 없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지난 주일 말씀에서도, 회당장 야이로에게 주님께서 강하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을 때 역사가 나타나는 것이다. 

마14장, 밤 중에 예수께서 호수 위로 걸어오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인 줄 알고 믿음으로 물 위를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가 바람 소리에 놀라 파도를 볼 때 빠져들기 시작했다. 그 때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나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한다면 순수한 믿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육체의 자랑거리를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했다. 육신적으로 신뢰하는 것들과 자신도 모르게 자리 잡고 있는 불신앙적 편견들도 과감히 끊어버려야 한다. 오직 순수한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할 때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권능을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말씀을 정리하고자 한다. 
데니 디드로란 사람이, ‘무지는 편견보다 진리에 가깝다’라고 했다. 
트라이언 에드워즈란 사람은, ‘편견은 진실을 볼 수 없도록 가리는 최악의 마귀이다’ 라고 했다. 
편견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성 격언인 것이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결론 메시지는 이렇다. 

1)진리 지식에 대한 겸손한 마음과 진실한 갈망이 필요하다.
편견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에 자리에 앉지 못하게 하는 마귀의 공작이란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귀로 듣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말씀을 듣는 옥토와 같은 심령이 되길 바란다.

2)편견은 불신앙의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타성에 붙은 형식적인 신앙은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일 수 있다. 예배의 자리에 있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신앙 연륜이나, 직분이 신앙을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까지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뤄야 한다.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민감해야 한다. 사데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3)믿음 만큼 역사가 나타난다.
편견은 믿음의 역사를 일으키지 못한다. 편견이 클수록 자신에게는 불행한 것이다. 유대교의 지도자였던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 나왔던 것처럼 체면을 버리고 예수 앞에 엎드려야 한다. 그분은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나사렛에서 자라셨고, 목수의 일을 하셨다. 그렇게 하심은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고 그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하심인 것이다. 

찬송가 257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편견)을 깨치고 지극히 화평한 맘으로 
찬송을 부름은 어린양 예수의 그피로 속죄함 얻었네. 
속죄함 속죄함 주 예수 내 죄를 속했네. 할렐루야 
소리를 합하여 함께 찬송하세 그 피로 속죄함 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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