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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의 힘, 누리며 사십니까? (히 4: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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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 힘, 누리며 사십니까? (히 4:12~13) 
 

1. 탤런트 정영숙 권사의 도전

지난 주 수요일, <동행(同行)>이라는 프로그램에 간증자로 소개를 받은 정영숙 권사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빈손으로 단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탤런트니까, 한 두 시간 정도는 원고나 메모 없이도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하다가, “그럴지도 성경책 정도는 들고 올라가야 할 텐데 빈손이라니 …, 간증을 많이 해 본 베테랑이겠구나!”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기대감을 접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간증을 시작하기 전에 성경 본문을 하나 말했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절.” 그리고는 곧바로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를 옛 개역성경 본문으로 암송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는 “그래, 저 정도쯤은 외울 수 있어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은 후 “기도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런데 정 권사는 또 다른 성경 본문을 제법 길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성경을 읽나 보다’ 하고는 실눈을 떠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녀 역시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족히 다섯 구절 이상은 됨직한 본문을 그녀는 암송하면서 성경 말씀으로 기도를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성경을 암송하는 것에 놀란 저는 그때부터 존경하는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았습니다. 

그 분과 한 시간 이상을 함께 식사하면서 이런 저런 말을 주고받았지만, 실물로는 처음 만나는 연예인이라는 것 이상의 감동은 제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작부터 성경 말씀으로, 기도도 성경말씀으로, 그리고 간증 중간 중간에 어느 간증자보다 더 많이 성경을 암송하는 것을 듣고 보면서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를 간증 중간에 말했습니다. 

‘몇 대째 믿는 가정에서 태어난 모태 신앙인이라는 것, 대학 2학년까지 소리 내어 기도 한 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는 것, 그러다가 30대 후반에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신앙에 철이 들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간증 중에 이런 말도 했습니다. 

자신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던 불교에서 개종한 어느 할머니 신자가 그 성경 공부 모임을 통하여 “성경 말씀 50장을 암송하자, 성경 구절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것을 보았노라”고! 그 할머니처럼 자신 역시 성경 암송과 성경 공부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주시는 놀라운 복들을 경험하고 있노라고 했습니다.

탤런트 정영숙 권사! 그녀는 60대 중반의 할머니(?) 탤런트로서 능숙하게 대중을 요리하는 ‘전문 간증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경험하고, 말씀대로 살고,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주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아주 오래전부터 “성경 중심”이라는 모토를 가진 교단에 소속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날 간증을 들으면서 “정말 우리 교회가 말씀 중심의 교회인가?”를 自問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을 강조하여, 공부를 시키고, 외우게 하고, 성도들이 삶의 현장에서 그 말씀을 體驗해야 한다’는 면에서 ‘정말 그러 했는가?’, 

즉 “정말 성도들로 하여금 말씀을 사랑하게 하고, 그 말씀을 중심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었는가?”를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성경 말씀을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합니까? 말씀을 공부하고 외워서 생활에서 그 풍요함과 능력을 정말 경험하면서 살고 있는지요?

2. 말씀의 힘

1) 말씀은 살아있다!

오늘 본문 12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이 옛 개역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과 같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요. 그러나 이 표현은 성경 말씀이 살아 활동하는 인격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 요한복음 1장 1, 2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할 때 그 말씀이 인격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과도 다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뜻은 ‘인격’을 가리키기보다 ‘능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말씀이 살아 ‘꿈틀거린다, 움직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는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말씀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온 세계와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는 에스겔 선지자가 서 있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을 산 사람이 되게 했고, 그들로 하나님의 군대가 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능력으로 영적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자들을 살립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병든 자를 치료하고, 문제 가정을 회복시키며,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변화시킵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한 전도자가 기차 안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평소 기독교와 교회에 대해서 否定的이든 한 사람이 기차 안에서 까지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에 분노하여 전도지를 받자마자 찢어서 창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기차가 지나간 후, 自殺하려고 철길로 나온 한 사람이 그 찢어진 전도지의 일부분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가 집어든 전도지 조각에는 요한복음 14잘 6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까지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읽던 그 사람은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인생의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란 말인가? 죽기 전에 그 양반이나 한 번 만나보고 죽자”고 생각하고 교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처음 드린 예배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만약 이 사람이 자살하러 간 그 철길에서 찢어진 전도지를 줍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가 집어든 종이가 세상의 상품을 파는 광고 문구였다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들도 성경 말씀을 가까이 하여 이 놀라운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2) 말씀은 수술도구와 같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 여기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 둘 다를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수술하여 새롭게 하며, 우리의 육신까지도 수술하여 새롭게 하는 일종의 ‘수술칼(메스-mes)’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영혼의 문제 등 내면의 문제를 살피고 치료하여 고칩니다. 그리고 육신의 질병을 치료합니다. 본문에서 “관절”이란 뼈와 뼈를 연결하는 것이고, “골수”란 뼈 속을 채우는 부드러운 젤라틴 질을 말하는 것으로, 이 “관절과 골수”라는 표현은 넓게 보면 사람의 육신을 말하며, 좀 더 깊이 보면 육신의 가장 깊은 곳, 쉽게 수술하기 어려운 부분을 뜻합니다. 그렇지만 그 깊은 곳, 어려운 부분까지도 주님의 말씀은 치료하고 고친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의 병원에는 진료과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먼저 사람의 內面에 內在하는 문제들이 얼마나 다양하고 또 복잡합니까? 거기다가 육신을 치료하는 진료과 역시 이 세상의 종합병원보다 더 많아야 할 것입니다. 아직 발견되지 않고 정의되지 않은 병들까지 주님은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종합병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병원에 전문 진료과가 몇 개인지를 세어보았습니다. ‘가정의학과, 간내과, 간담도췌장외과, 두경부갑상선내분비외과, 이비인후 갑상선 두경부외과’ 등을 비롯하여 모두 39개 진료과가 있더라고요? 

그렇다면 여러분, 사람의 영혼과 내면, 그리고 사람의 전 육신을 다루는 주님의 병원에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진료과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무튼 오늘 본문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의 내면과 육신의 질병이 아무리 많고 복잡해도, 우리 주님은 “성경 말씀”이라고 하는 예리한 메스로 그 모든 문제를 수술하여 고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의 영혼과 내면을 새롭게 만들고, 그의 육신을 치료하여 변화시키는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말씀의 능력을 믿습니까? 주님의 말씀이 사람의 영혼, 내면의 것들, 인격 등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우리 주변에는 주님을 만나고 말씀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서 주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가 엄청나게 달라진 사람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정치깡패로 열아홉 번이나 교도소에서 수감되었다가 변화되어 <한국 다메섹 선교회>를 이끌고 계시는 “최국일” 목사님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이 열아홉 번째로 감옥 생활을 하던 중, 폐결핵에 걸려 마산 결핵 요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치료받던 중, 요양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던 교회의 어느 자매를 만났습니다. 

이 자매는 그에게 복음만 전한 것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찾아와 정성스럽게 간호까지 해주었습니다. 부모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순교당한 것으로 교회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이 여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감방 생활을 했고, 형을 마친 후, 그녀와 결혼하여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在所者 宣敎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한국 다메섹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이 선교회를 통하여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혀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는 출소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희망을 주는 동시에 그들을 신앙으로 지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80대 노인이 된 최국일 목사님은 아직도 이 일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킵니다. 어디 그 뿐 입니까? 주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을 치료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저는 그 예는 들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예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고, 또 다른 이유는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는 일이 육신을 고치는 일보다 어렵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 절대로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게 더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있기 때문에 예를 들 필요가 없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과 19범,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던 사람을 변화시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헌신케 한 주님의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여러분도 경험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또한 주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의 질병을 고치는 것을 경험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은 투시경이다!

세 번째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은 …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라고 합니다. 옛 개역성경에는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했습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핀다’는 뜻인데, 바로 앞의 “좌우의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한다.” 는 말씀이 의학적인 표현이었다면, 이 부분은 법률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판단한다”, “감찰한다”는 말은 고대에서 재판관의 태도, 능력, 권리, 행동과 관련된 말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재판관이 피고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살피듯, 주님의 말씀이 한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정확하고 분명하게 살피는 재판관과도 같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투시경”이라는 것을 떠올렸습니다. 미국과 영국의 어느 공항의 경우, 테러나 마약 문제 등과 관련하여 공항 검색대에 일종의 투시경을 설치했습니다. 이것은 승객이 양팔을 벌리고 서 있으면 신체의 은밀한 부분까지 다 볼 수 있는 장치라고 하는데요, 인권을 침해한다는 것으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 번 중국 단기 선교 갔을 때, 미용 팀에 ‘헤어드라이’기가 필요해서 현지 목사님과 그것을 사려고 온 시장을 다 누빈 적이 있습니다. 그때 곳곳에서 “투시 안경”을 판다는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국내의 한 업체가 이것을 輸入해다가 인터넷으로 팔았는데, 물량이 모자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시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 마음의 생각과 뜻을 判斷한다”는 말씀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투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 보고,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커페이스(poker face)”라는 말을 아시죠? 포커 게임을 하는 사람들 중에 고수는 자신이 좋은 패를 쥐든 나쁜 패를 쥐든 얼굴의 변화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제가 보기에 여러분들 중에도 고수가 많은 것 같습니다. 도대체 그 마음과 생각과 뜻이 어떠한지, 내면의 상태가 어떤지를 전혀 짐작하기가 어려운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학 시절, S대학교 법대를 다니면서 열심히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한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E대 국악과에서 황병기 교수에게 가야금을 배우던 참 참한 한 여자 선배가 있었는데, 두 사람이 서로 연애를 하더니 여 선배가 대학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선생님이 되자 둘은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1년 뒤에 두 사람에게서 들려온 소식은 주위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놀란 이유는 먼저 두 사람이 결혼 1년 만에 이혼했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 놀란 이유는 그 남자 선배가 S대생도 법대생도 아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자기 부인이 된 사람을 비롯해서 다른 사람들을 철저히 속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상대방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말씀 앞에 감출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그 어떤 문제도 없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무언가를 감추려고 한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들 앞에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되지 않도록 늘 주와 말씀 앞에 진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예배 자리와 말씀 앞에서까지 표정 관리를 하시지 말고, 마음과 생각의 깊은 곳에 그 무엇인가를 감추면서 스스로 속이지 마시고, 주님과 말씀 앞에 있는 여러분의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주님의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감추고 숨기면 주님의 은혜와 복도 숨습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내 모습 이대로 날 받으옵소서”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런 여러분을 받으시고 복주실 것입니다.

4) 말씀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게 한다!

마지막 네 번째로 오늘 본문은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는 “드러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어느 분은 이 말을 “수없이 벌거벗겨지고 넘어지고 구르고 자빠지고 분내고 욕하고 머리를 쥐어뜯고 체면과 자존심과 염치를 차례차례 포기하는 아픔을 경험한 원초적인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사실 이 “드러난다”는 말은 고대의 ‘레슬링 용어’입니다. 이것은 레슬링의 기술 중 하나로서, 상대방을 제압하기 위해 그의 목을 뒤로 젖히는 것을 뜻합니다. 즉 주님의 말씀은 우리를 완전히 제압해 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두 손, 두 발, 그리고 온 몸까지 꼼짝 못하게 制壓하여 우리가 “항복”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 이것이 주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릭 워렌 목사는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신앙의 본질 역시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입니다. 사실 항복이나 복종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복이라는 것은 게임이나 시합에서 지는 것이 아니라, 미리 포기하고 무릎을 꿇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얍복 나루터의 야곱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나루터에서 밤새우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철저하게 항복했습니다. 

그 후, 그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깨닫고 ‘주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된다’면서 주님께 매달리는 씨름 아닌 씨름, 레슬링 아닌 레슬링을 함으로서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야곱처럼 하나님께 항복하는 것이 행복의 지름길인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드리는 것이 바로 항복이지요. 그리고 항복한 사람은 무릎만 꿇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나 자신의 권위나 그 전부를 포기합니다. 그처럼, 성도는 주님께 항복한 사람이요, 그리스도의 포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전부가 다 드러난다는 말씀은 주님께 완전히 制壓당하여 항복한다는 것이고, 이 말씀은 결국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선다는 뜻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살아온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지요. 이것이 말씀의 힘이고 말씀의 유익입니다. 나를 가리고 덮고 감추게 한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벌거벗은 몸으로 주님을 만나 주님께 가장 가까이 있게 하는 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이 힘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말씀을 중심으로 한 삶

일전에도 한 번 소개했습니다만, 랜디 피터슨(Randy Petersen)과 윌리엄 피터슨(William J. Petersen)이 지은 <말씀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서희연 역, 엔크리스토). 이 책은 묻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비전? 이념? 돈? 권력? 이 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라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일깨워 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실제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99명의 평범하거나 위대한 인물들과 그들을 변화시킨 99개의 성경 말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성도들을 핍박했던 사람, 어거스틴 같이 방탕하게 살았던 사람, 존 뉴턴 같은 노예 상인, 마르틴 루터처럼 성질이 정말 급한 사람, 존 웨슬리같이 우둔한 사람, 에이미 카마이클 같은 병자와 전신마비 障碍人인 조닉 에릭슨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인종, 시대, 생활환경, 사고방식, 시대 상황 등 모든 것이 천차만별로 너무나 다른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하여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성경 말씀을 통해 인생의 전환을 맞이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出版社는 書評을 통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이 어떻게 당신을 변화시키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이것은 지금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있으며, 그 말씀으로 인해 변화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경 말씀을 통하여 변화를 경험했다면, 그 변화는 당연히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말씀으로 인하여 변화된 사람은 또 다른 변화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시작하면서 지난주에 만난 정영숙 권사는 정말 말씀의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공부하고 외움으로서 그 말씀을 자기 것으로 삼은 사람, 말씀의 능력을 누리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이 주는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이 그런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말씀으로 인하여 남다른 복을 누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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