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바벨탑에 내린 심판 (창 11:1~9)

  • 잡초 잡초
  • 358
  • 0

첨부 1


바벨탑에 내린 심판 (창 11:1~9)
  

시작하는 말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먼저 영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목은 「타이타닉」입니다.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극화한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좀 돌려서 1912년으로 돌아가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일 것입니다. 그 1912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 때에‘해가 지지 않는’나라 대영제국(Great Britain)이 해양제국으로서의 명예를 만방에 자랑하기 위해서 만든 배가‘타이타닉 호’였습니다. 

그들의 능력, 그들의 지혜, 그들의 왕권을 동원해서 명실공히 최고임을 뽐낼만한 배라고 만든 것이 타이타닉 호였습니다. 가장 호화스럽고 가장 크고 가장 튼튼하다고 만든 여객선이었습니다. 90여 년 전 그 옛날에 만든 것이지만 지금으로 쳐도 엄청나게 큰 배입니다. 46,328톤에 길이가 259미터, 깊이가 20미터, 폭이 28미터나 됩니다. 그들은 이런 배를 만들어 놓고 자랑을 한 것입니다. ‘

절대로 침몰할 수 없는 배’라고 했습니다. 입빠른 사람은‘하나님도 침몰시킬 수 없는 배’라고까지 떠들었습니다. 처음 출항할 때 온 세상이 떠들썩했습니다. 그리고 이 배가 출항하면서 또 하나의 기록을 내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속력이었습니다. 될 수 있는대로 빨리빨리 대서양을 횡단해서 이 배가 크고 강하고 화려할 뿐만 아니라 속력에서도 최고다, 하는 것을 뽐내고자 했습니다. 

목적지인 뉴욕 항에 도착하는 대로‘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배다’라는 기사가 신문에 날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빨리 항해하라고 선주는 선장을 다그쳤습니다. 무조건 빨리 가라, 최고속도로 가라, 합니다. 마침내 이 배는 파선하고 맙니다. 산산조각이 나고 맙니다. 2208명의 승선자 중에서 1513명이 이 배와 함께 수장되었습니다. 해양사고로는 최대였습니다. 자, 이제 한번 생각해봅시다. 이 배가 왜 침몰된 것 같습니까. 여기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인을 향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과학을 숭상하는 현대인, 자신의 두뇌를 자랑하는 교만한 현대인을 향한 메시지가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유명해진 것입니다. 인간의 교만에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통하여 주시는 유사한 상징적 의미와 메시지에 귀를 기우려 볼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기를 기도합니다. 

본 문

오늘의 성경말씀은 노아홍수의 큰 심판을 기억하고 있는 홍수 이후의 인간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직접 홍수를 본 사람은 없지마는 홍수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에게는 하나의 악몽으로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방으로 동방으로 옮겨갔습니다. 그리하여 시날 평지를 만났을 때‘이만하면 우리의 거처로 삼을만하겠다’고 생각해서 거기에 정착하여 이제 성을 쌓게 됩니다. 성을 쌓을 때 그들의 잠재의식이 작용합니다.‘다시 홍수가 난다면 어떡할까?’그래서 생각했습니다.

‘홍수가 나더라도 우리가 끄떡없을 그러한 성을 쌓자.’본문에‘탑’이라고 말씀하지마는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바를 보아도 그것은 탑은 아니었습니다.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성이었습니다. 둥글게 둥글게 쌓아 올라간 것입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하늘에 닿기까지’쌓아 올렸습니다. 오늘의 상식으로 말하자면‘구름 위에까지’입니다. 비는 구름에서부터 오니까요. 그래서 비록 다시 홍수가 나더라도 끄떡없이 안정을 유지하며 평안하게 살아가자, 하는 뜻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홍수 자체는 참으로 비참한 사건입니다. 천지가 개벽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노아의 홍수’라고 하는 이 같은 엄청난 사건을 저들이 어떻게 이해했느냐 입니다. 그들은 홍수라고 하는 재난, 이것만 생각하고 그 원인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문제는 그 원인인데 말입니다. 홍수로 진멸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진멸하시기로 들면 홍수뿐이겠습니까. 

불로라도 진멸하실 것입니다. 원인이 문제인 것입니다. 죄 때문에 홍수가 있었으니 죄 없으면 되는 것입니다. 죄에서 떠나는 것이 재난을 면하는 길이지 이제 탑을 쌓는다고 될성부를 일입니까, 산을 만든다고 될 일입니까, 배를 만든다고 될 일입니까. 노아 홍수의 원인, 도대체 그 원인으로 돌아가서 해결을 보아야 하는데 그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원인은 헤아리지 않고 재난만 면해보고자 하는 이 얄팍한 속셈이 이같이 또 다른 큰 죄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이 일을 주장하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길이지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앉는다고 해결될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하는 거기에 관점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 없는, 불신앙적인 안정을 꾀하려고 했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노아홍수가 끝날 때 하나님께서 무지개를 보여주시면서 이것을 표적으로 다시는 이 땅을 물로 심판하는 일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가 올 때마다 그들도 무지개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평안함에 거해야지 탑을 쌓고 올라가겠다는 미련한 생각을 하다니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 그 축복을 받아들이고 믿고 생각했더라면 이같이 부질없는 일은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오늘도 우리 인간에게‘바벨탑’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 세대에 있는 문제를 그 옛날에 있었던 바벨탑 사건에서 다시 한 번 조명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벨탑의 의미를 봅시다. 먼저는 공업화, 산업화에 내재한 인간의 교만이‘바벨탑’입니다. 저들은 탑을 쌓았습니다. 그렇게 쌓는다는 것은 산을 만든다는 것이고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벽돌을 만들었습니다. 벽돌의 제조가 당시로서는 보통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생각에 돌이 건축자재 중 제일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래서‘돌집’하면‘아, 좋은 집이다’라고 생각을 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아니 랍니다. 만리장성을 보면 쌓아놓은 것은 돌이고 그 위 풍화를 제일 많이 받는 부분에 깔아놓은 것은 벽돌입니다. 흙을 빚어서 구워 만든 것입니다. 돌은 보기에 좋아 보이지마는 풍화작용에 약합니다. 결이 있기 때문에 물을 빨아들이면서 차츰 부서집니다. 그러나 벽돌은 구워 만든 것이므로 거의 영구적인 것입니다. 

놀랍도록 오래가는 것입니다. 바벨탑 쌓는 사람들이 평지에서 흙을 빚어 구워서 벽돌을 만들어 이것을 가지고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공업화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인간의 기술, 능력을 다하여 협동해 쌓아 올라가는데“하늘에 닿게 하여”하고 교만을 떨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집 좀 근사하게 지었다고, 탑하나 쌓았다고 그것으로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하늘에 닿게 한다.’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장차 홍수가 일어나더라도 거기 올라가 살면 안전하리라 - 이런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계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모름지기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인간의 자본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지혜나, 시간이나, 건강이나 할 것 없이 그 무엇에도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특별히 훌륭한 학자가, 천재라고 요란하게 소문난 그 학자가 치매에 걸려 멍청해진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도대체 어느 부분이 고장 났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듯 바보가 될 수 있나 싶었습니다.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인간,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간능력의 한계, 과학적 지식의 한계, 기술의 한계를 알아야 합니다. 한계를 모르고 날뛰다가 마침내 지구는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이대로는 지구가 더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도 거덜내는 통에 못 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럭저럭 살다 가겠습니다마는 다음세대 사람들이 딱합니다. 

걱정입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인간의 산업적 교만, 기술적 교만이 우리 우주의, 이 지구의 운명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봅시다. 가끔 신문에서 보는데, 등산가가 에베레스트산 같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잠깐 깃발 하나 꽂고 내려오는데, 와서는“산을 정복했다”라고 말합니다. 산이 코웃음 칠 일이지요. 잠깐 왔다 내려가면서 정복이라니, 그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 - 인간의 하는 일이 다 이런 것입니다. 달나라에 잠깐 발붙였다 돌아오고서는“달을 정복했다”합니다. 말조심할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하나님께 불경입니다. 어디다 대고‘정복’이라 말합니까. 몹쓸 교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교만에 대한 심판, 그것이 바벨탑사건입니다. 

4절에 보시면‘우리 이름을 내자’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이름 내기를 좋아합니다. 특별히 우리네는 더 그런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그동안 북한과의 관계에서 교회계통의 기관들이 식량이나 의약품, 생필품들을 많이 도왔습니다. 그래서 고맙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웃지 못할 일은, 쌀 좀 가지고 가서 국경지역 도시인 단동(丹東)에 갖다놓고‘어느 교회 아무개’라고, 보내는 사람 이름 쓴 종이포대들을 만들고 거기에 쌀을 담는데 사흘 걸리고, 이것들을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 갖다놓고 이번에는 북한 정부가 다 뜯어버리는 데 사흘 걸린다고 합니다.

김동길 교수의 표현대로 ‘이게 뭡니까?’ “왜들 이러는 것입니까?”이것이 기독교인들입니다. 명예욕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입니다. 동물적 욕구를 넘어서는 것이 인간의 명예욕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극복하지 아니하면 참으로 문제가 됩니다. 이름, 그 소용없습니다. 잊어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스스로 자기를 높이겠다 하여‘온천하에 이름을 내자’한 사람들, 위대해지겠다고 하는 교만 -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지 않으셨습니다.

저들은 또“흩어짐을 면하자”하였습니다. 이것은 집단화내지 도시화(urbanization)를 의미합니다. 집단이기주의입니다. 우리끼리 똘똘뭉쳐서 절대로 흩어지지 말자, 그래서 강해지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해지자고 한다고 강해집니까. 하나 되자고 해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까. 언젠가도 말했습니다만「대부」라는 영화가 있지요. 마피아들의 생태를 주제로 한 영화입니다. 거기 보면 마피아들이 끼리끼리 늘 싸웁니다. 싸울 때마다 양쪽이 다 피해를 입어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우리 싸우지 말자, 우리 마피아들끼리 싸워서야 쓰겠느냐, 하여 일곱 패밀리 대표가 자리를 함께하고 연합을 꾀합니다. 우리는 절대 싸우지 말자, 형제관계로 지내자, 하고 그들은 연합하는 의식을 취하는데 대단합니다. 대표들이 많은 사람들 보는 자리에서 각각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서 컵에다 모았습니다. 

일곱 사람이 이렇게 하니 컵이 피로 가득 찹니다. 이것을 손가락으로 휘젓고는 돌아가면서 마십니다. 우리는 혈맹이다, 피를 마셨다, 한 형제다, 절대 싸우지 말자- 맹세합니다. 그런데 그러고도 한번 별것도 아닌 사소한 일로 충돌하기 시작하더니 서로 싸우고, 다섯이 죽고 두 사람이 남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불의한 일에는 하나 됨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사람들은 절대로 하나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에는‘Win-Lose' 라고 말했습니다.‘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다’했습니다. 요새 와서는‘Win-Win'이라고 합니다. 시대가 변했습니다. 이 지구촌은 아예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과거처럼 이기는 자가 있고, 지는 자가 있고, 사는 자가 있고 죽는 자가 있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Win-Win입니다. 

다같이 살고 다같이 죽는 것입니다. 오로지‘Win-Win’이 있을 뿐입니다. 다같이 이기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누가 더 잘살고 못살고 하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누가 살고, 누가 웃고 누가 뺏기고 하는 세대가 아닙니다. 21세기는 다같이 살든지 다같이 죽든지입니다. 아무쪼록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우리만 흩어짐을 면하자’- 이런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런 유혹과 시험을 극복하는 성도들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마무리하는 말

이제 하나님께서 저 교만한 사람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런데 심판의 방법이 아주 고차원적입니다. 보통으로는(성경에 보면) 유황불로 멸하시든지 지진을 내리시든지 재난을 내리시든지 전쟁, 기근, 혹은 질병 등으로 심판하십니다마는 오늘본문에 보는 심판은 문화적 심판입니다. 언어를 혼잡케 하셨습니다. 혼미하게 하셨습니다. 생각을 혼미하게 해서 스스로 흩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뜻이 있습니다. 언어의 혼잡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멀어지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이란 무슨 지식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사랑하면 아무 말이 없이도 통하게 됩니다. 서로 교만하고 자기생각에 집착하면 아무리 좋은 지식을 가지고도 대화는 없습니다. 그래서 부부싸움 할때도 보면 둘 다 목소리가 올라갑니다. 상대방의 말은 듣지를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뿐이지 듣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화가 안됩니다. 가슴이 막혔는데 대화가 될리가 없지요. 

외국 사람하고 사는 한국인 여자를 미국에서 만난 일이 있습니다. 고등학교밖에 못나온 사람인데 아주 지식이 많은 미국 변호사하고 삽니다. 어떻게 사는지 본인한테 물어보았습니다.“영어가 유창하지 못한데 불편하지 않느냐고? 대화가 되느냐고 했더니, 목사님, 사랑을 말로 하는 것입니까.”합니다. 내가 깜짝놀랐습니다.“가슴으로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합니다. 뭐, 눈높이, 학력높이, 하는데 웃기는 말입니다. 눈높이 맞추다가 끝나고 맙니다. 소용없습니다. 오직 마음입니다.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 우선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황새와 여우가 한때 좋은 사이로 지냈습니다. 여우가 황새를 초대하여 접시에 음식을 담아 내놓았습니다. 황새가 어떻게 먹겠습니까. 황세는 입맛도 못다시고 돌아갔습니다. 다음에 황새가 여우를 초대했습니다. 황새는 아예 호리병에다 음식을 담아 내놓았습니다. 자기는 주둥이가 기니까 그것을 먹지만 여우야 어떻게 먹겠습니까. 

각각 자기입장을 고집하면 아무것도 안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악어와 사자가 싸우면 어느놈이 이길 것 같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물속에서 싸우면 악어가 이기고 육지에서 싸우면 사자가 이깁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이와같이, 우리 사람들이 조금만 입장을 바꾸어보면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 입장만 생각하니 분열과 아픔이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보면 교회분열의 가장 큰 시초가 로마교회의 동 ․ 서 분열입니다. 한쪽은 헬라문화요 한쪽은 라틴 문화입니다. 저마다 자기문화에 집착하고 상대방을 자기문화로 밀고 나갔습니다. 이 문화적 차이, 다시 말하면 언어적 차이가 교회분열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열은 심판입니다. 이기주의에 대한 심판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으나 성령이 임할 때 언어가 하나로 통일되었습니다. 방언이라는 것으로 말입니다. 성령이 감동할 때, 가슴이 뜨거워질 때 저들의 언어는 그대로 하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됨은 목적이 아닙니다. 결과입니다. 겸손과 믿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 됨입니다. 여러분, 이 세대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이 어려운 현실 속에서 마땅히 겸손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열어야 하겠습니다. 이제는 누구도 정죄하지 맙시다. 누가 죽고 누가 산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는 다 한 배를 탔습니다. 배는 지금 가라앉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무것도 꾸짖지 말고 서로 얼싸안아야 될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서로 수용하고 서로 용서하고, 그리하여 마음이 하나가 되고 겸손해질 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삶속에 바벨탑을 쌓지 맙시다. 아니 우리 사이에 있는 바벨탑을 허물고 Win-Win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