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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6) : 기쁨 (빌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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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6) : 기쁨 (빌 4:4~5)


기쁨은 삶의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반대로 슬픔은 우리의 삶에서 이런 기쁨을 여지없이 빼앗아 갑니다. 심리학자들의 정의에 의하면 “슬픔은 보통 잃어버린 사람이나 잃어버린 관계 혹은 잃어버린 목표에 따른 상실을 경험할 때 그것에 반응하여 발생하는 당혹스러운 감정의 덩어리”라고 합니다. 슬픔을 질병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슬픔은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슬픔은 우리의 감정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무기력하게 만들고 우리를 외로움과 고립감, 공허함속에 던져 버립니다. <나니아 연대기>라는 책과 영화의 작가였던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C.S.루이스 교수는 뒤늦게 결혼한 Joy라는 그의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면서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슬픔을 그의 책 ‘헤아려 본 슬픔’(A Grief Oberserved)에서 다음과 같이 절절하게 묘사합니다. 

“슬픔이 마치 두려움과 같은 느낌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무섭지는 않으나 그 감정은 무서울 때와 흡사하다. 똑같이 속이 울렁거리고 안절부절 못하여 입이 벌어진다. 나는 연신 침을 삼킨다. 어떤 때는 은근히 취하거나 뇌진탕이 일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상과 나 사이에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장막이 드리워져 있다. 다른 사람이 뭐라 말하든 받아드리기 힘들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게다. 만사가 너무 재미없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내 곁에 있어주기를 바란다. 집이 텅 빌 때가 무섭다. 그러나 사람들이 있어주되 저희들끼리만 이야기하고 나는 가만 내버려두면 좋겠다.

슬픔은 또한 게으른 것이라고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았다. 일상이 기계적으로 굴러가는 직장에서의 일을 제외하면 나는 최소한의 애쓰는 일도 하기 싫다. 글쓰기는 고사하고 편지 한 장 읽는 것조차 버겁다. 수염 깍는 일조차 하기 잃다. 내 뺨이 텁수룩하건 매끈하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이 바로 슬픔의 얼굴입니다. 그런데 이런 슬픔은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관계의 상실 그리고 목표의 상실을 경험하지 않는 인생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런 보편적인 슬픔을 극복하고 기뻐하는 인생을 살수는 없을까요?

오늘의 성경 본문은 바울이라는 사람이 감옥에서 어쩌면 사형 언도를 받을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개척한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보내면서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뻐하십시오”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감옥이 빼앗아가지 못하고 죽음의 위협도 빼앗아가지 못한 그의 기쁨의 인생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기쁨의 삶을 사는 비밀, 그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1. 인간관계의 관용을 학습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쁨을 상실하는 데는 수많은 이유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광범한 이유는 인간관계의 상처입니다. 누눈가가 오늘 이 시대(포스트모던)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고슴도치에 비유한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슴도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는 떼를 지어 이동합니다. 곰도, 사자도, 사슴(엘크)도 심지어 양도 떼를 지어 이동합니다. 그러나 고슴도치만은 홀로 다닙니다. 고독을 즐겨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고슴도치도 외로움을 타는 계절이 찾아오면 다른 고슴도치를 접근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기 등에 가지고 다니는 그 많은 바늘로 인하여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우리는 고슴도치와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처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상처를 최소화하거나 예방하는 처방은 없을까요? 성경은 그 처방이 바로 관용을 학습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 본문 5절을 함께 읽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란 우리 이웃의 허물을 파헤치는 것이 아니라 그 허물을 덮는 것입니다. 관용의 실천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관용을 우리에게 권하면서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을 덧붙였을까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가까이 계신 주님이 우리를 도우실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모두 주님 앞에 서서 우리 인생을 결산하는 날이 올 터인데 그때 우리가 주님 앞에 제일 먼저 구할 것이 무엇일까요? 관용입니다. 그렇다면 그때 내게 필요한 관용을 지금부터 나도 이웃들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가깝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빌리면 이웃의 티를 지적하기에 앞서 내 눈의 들보를 직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관용할 수 있습니다.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관용과 용서로 이웃들에게 다가 서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바로 기쁨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관계의 관용을 학습하십시다.

2. 주 안에 사는 것을 학습해야 합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 4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성경은 이 말씀에서 그냥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여기 바울이 <주안에>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역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용서와 기쁨의 삶의 완벽한 모델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분은 십자가에 달리시면서도 당신은 십자가에 단 사람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용서 하소서>라고 기도하신 분이 아니십니까? 우리가 바로 그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이 되었다면 우리도 용서하며 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유일한 귀감, 유일한 모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주 안에서>기뻐하라고, 용서하라고 가르치신 또 하나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우리의 힘만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는 우리가 용서할 일이 생길 때 까지는 ''''''''''''''''아름다운 생각''''''''''''''''(a lovely idea)이다. 

그러나 내가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용서할 일이 생기면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생각도 쉽게 실천될 수 있는 생각도 아니라”고. 그러나 용서를 온 몸으로 실천하신 살아계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면 그분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이 용서할 능력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신비는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영으로 거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빌2:13을 읽어 보실까요?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누구라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자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2:20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그분, 살아계신 우리의 주님만이 우리가 용서할 수 없는 이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도우실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4:1에서 “주안에 서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는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정말 기뻐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정말 용서하는 삶을 살고 싶으십니까? 주안에서 사는 것을 학습하십시오. 그분과 매일 교통하며 그분의 도움을 받는 삶을 연습하셔야 합니다.

3. 예수를 인생의 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이렇게 주안에서의 기쁨의 삶을 사시려면 예수님을 나의 인생의 주로 인정하시고 영접하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을 인생의 주로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기쁨의 삶과 연관된다는 말이겠습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을 주로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인생을 위하여 다시 사신 분이심을 인정하는 것을 뜻합니다. 

롬10:9의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네가 만일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제가 처음 기독교 신앙에 관심(정확하게 말하면 영어에 대한 관심으로)을 가지고 선교사님이 인도하는 성경공부에 나갈 때 한번은 그분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한국 교인들은 교회 밖에서는 즐겁게 대화하다가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다 울상이 되고 울고 그러느냐?”고. 대답이 궁해서 제가 “아마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을 묵상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하자 그분은 다시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시 사신 것을 잊었나요?”라고. 그분의 말씀이 옳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새 생명 새 인생을 주시고자 다시 사셔서 그의 영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분이라면 우리는 그분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고 기쁨으로 그분의 인도를 받는 삶을 사셔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옥스퍼드의 교수였던 C.S.루이스의 이야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정말 안타깝고 때로는 자기 아내를 바로 살려내지 못하는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지만, 매 순간 순간 기도할 때마다 그 아내가 슬픔을 이겨내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시고 자기 아내는 여전히 “그 하나님의 품안에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루이스는 그의 책 “헤아려본 슬픔”의 마지막에서 자기 아내의 임종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내 아내는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저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화롭습니다.>내 아내는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단순히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구원하신 주님께 드리는 미소였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의 샘으로 돌아갔다.” 

후일 다른 글에서 루이스는 자기 아내와의 이 아름다운 작별은 두 사람이 어느 날 예수를 자신들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을 자신들의 인생속에 받아 드렸을 때 주셨던 기쁨을 <예기치 못한 기쁨, Surprised by Joy>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사실은 인생의 가장 슬픔의 순간에서도 떠나지 않고 두 사람을 지켜 주었던 기쁨이라고 말합니다. 이 기쁨이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그러면 오늘 무신론자요 불가지론자였던 루이스가 영접한 예수님, 그분을 당신도 인생의 구주와 주님으로 선택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름다운 선택, 아름다운 기쁨의 인생을 선물로 누리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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