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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창 2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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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창 28:10~22)

 
요즈음 망둥어 낚시 고등어 낚시를 한다고 야단들입니다. 그런 분 들 얘기를 들어보면 마음이 복잡하거나 머리가 아플 때 넓은 바닷가에 가서 모든 생각을 접어두고 낚시를 하다보면 마음이 시원해지기도 합니다. 거기에 집중하다보면 잡다한 것들을 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씩은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낚시를 하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곤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물고기의 IQ입니다. 여러분 물고기의 IQ가 얼만지 아십니까? 0.3입니다. 그 0.3이 어느 정도냐 하면 바로 옆에서 다른 물고기들이 낚시에 걸려 물 밖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금방 또 입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해하기 힘든 것은 잡혔던 놈을 놓아주면 그 놈이 돌아서서 또 미끼를 무는 것입니다. 이것이 IQ 0.3의 물고기입니다. 

이 정도면 참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이걸 두고 누가 그럽니다. 정치인의 IQ는 얼마나 될까? 역시 0.3이라고 합니다. 왜냐 동료 정치인이 뇌물을 먹고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또 뇌물을 먹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10년 전에도, 작년에도, 오늘도 여전히 끌려가는 정치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일은 내일도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IQ가 0.3을 넘지 못하는 사람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지난날의 그 은혜를 새까맣게 잊어버리기도 하는가 하면 옆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복 받는 것을 보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게 물고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사는데 있어서 정말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복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복을 찾으니 그 복을 찾을 수나 있겠습니까? 말하자면 행복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행복하길 바라고 있으니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소유가 복이 아닌데 가지려고만 하고, 지식이 복이 아닌데 무조건 배우려고만 하고, 사실은 건강도, 명예도 권세도 복의 전부가 아니건만 이것들이 복의 전부인 줄로 착각을 해서 목숨을 겁니다. 건강만 있으면 뭐합니까? 영혼이 죽었는데...명예가 있고 권세만 있으면 뭐합니까? 정신이 썩었는데...이게 한편으로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둘째로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과 그 불행은 복받을만한 그릇은 준비되지 않았는데 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복을 받으려면 먼저 복받을만한 성품, 복받을만한 인격, 복받을만한 마음씨의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사람이 복받을만한 그릇이 되고야 복을 받을 텐데 아무리 봐도 그 사람 복 받을 수 없을 것 같고, 그 마음씨 가지고는 안 되겠고, 그 천성 그대로라면 있던 복도 달아나겠는데 자꾸 복을 달라고 한다면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행한 일입니까? 

셋째, 이보다 더 불행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복이 있고, 그 복이 넘치는데도 그 복을 복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경우입니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때가 좋았지. 그때가 행복했는데...’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지금은 불행하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미래도 암담하다는 이야기이고요 이게 불행한 것입니다. 행복한 사람이라면 ‘최소한 어제보다는 오늘이 낫고, 오늘보다 내일은 더 나을 것이다.’이런 생각을 해야 되는데 거꾸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불행합니다. 이미 내가 복을 받아 살고 있는데 그런 자기가 복되다는 것을 모르고 살고 있으니 그 사람이 얼마나 불행한 것입니까? 이 사람은 평생 불행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복을 생각하고 그 다음에 복 받는 사람, 그 존재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 봐야 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한평생 복이 무엇인지 배워가는 것입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배워야 다 배울지도 모르는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란 엄밀히 말하자면 복된 자로 양육되어지는 과정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표 속에서 이런 일도 당하고 저런 일도 겪으면서 복이 무엇인지 알아가고 또 복된 자로 키워지고 다듬어진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드시고 그에 맞는 복을 주시면서 우리의 인생을 다하게 하십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은 복의 가장 일차적인 상징을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직까지 우리문화의식 속에는 돈이 복의 일차적인 상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의 기도 중에도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도가 부귀영화를 달라고 몸부림을 치며 기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 봐야합니다. 우리 모두가 돈을 원한다 해도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다 돈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있던 것도 하나님이 가져가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후에 무엇이 정말 복인지를 알고 난 다음에 돌려주십니다. 돈이 얼마나 귀하다는 걸 알고 돈을 제대로 쓸 줄 알 때에야 돈을 주십니다. 돈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자에게 돈을 준다는 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줘서는 안 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위험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칼을 쓸 줄도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칼을 주는 부모가 있습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고 실행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사람에게야 돈이 필요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돈이란 위험한 저주일 뿐입니다. 

 간혹 이런 사람들 있습니다. 한 때는 부자로 떵떵거렸는데 어느 순간 돈이 빠져 나가더니 가난뱅이가 되어버렸는데 왜 이렇게 되었는지 자기도 모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이 돈을 가져가신 것입니다. 제대로 쓸 줄 모르고 위험하니까 빼앗은 것입니다. 이걸 깨달으면 회복될 텐데 못 깨달으니 문제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의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정확한 판단과 계획에 의해서 이렇게 복을 주셨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그와 함께 하심으로 그 복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성경에 야곱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전형적인 복 추구적인 인간입니다. 말하자면 복을 받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정말 그의 복을 향한 집념만큼은 대단합니다. 아버지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아버지가 자기 머리에 손을 얹고 장자의 복을 빌어주면 자기의 일생은 복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그의 믿음은 대단하지 않습니까? 교묘하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속이고 그것도 어머니하고 합작을 해서 마침내 복을 받아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이 믿음만큼은 여러분들에게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년 송구영신 예배를 드리면서 저는 축복안수기도를 했습니다. 송구영신예배 때에 딱 한번만입니다. 기도가 끝나면 몸살이 나고 온 몸에 땀이 흘러서 감기가 걸릴 정도가 되어도 꼭 했습니다. 각자 적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한 해를 살아가는데 복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몇 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데 문제는 복 받을 준비가 되어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복 받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고 있는데 제가 아무리 축복기도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복을 안 받겠다고 하는 데는 어떻게 합니까? 이러면 문제입니다. 

자, 어쨌든 야곱이 아버지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장자로서 받아야 할 축복을 빼앗긴 형님이 동생을 죽이겠답니다. 여기서부터 좋은 관계가 다 깨집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님을 농간하고 멀리 하란에 있는 외삼촌 집을 향해 혼자서 도망치듯 길을 떠납니다. 야곱 인생에 외로움의 시작입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혼자 떠나는 것이 얼마나 외롭고 힘든지 아십니까?

지금 야곱이 아마도 그런 처지인 것 같습니다. 혼자 모르는 광야를 가다가 해가지고 배가 고픕니다. 돌을 베게 삼아 누웠습니다. 광야라는 곳이 밤이 되면 더욱 무서운 곳입니다. 낮에는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지만 밤에는 짐승들만의 세계가 광야입니다. 그 무서운 곳에 야곱이 돌 베게 하고 누워서 겨우겨우 잠들었을 무렵 꿈을 꾸는데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줄 것이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며, 네게 허락한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런데 여러분, 보세요. 복 받은 야곱의 모습이 어떻습니까? 고향을 떠나 땅도 없고 집도 없고 가정도 없습니다. 이게 복 받은 야곱의 실상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말하는 복의 형편과는 전혀 거리가 먼 상태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복 받았다고 하는 정말 중요한 문제가 이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발견되는 사실입니다만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야곱에게 임한 복의 실체입니다. 

복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이후로 그의 가는 길에 함께하셨고 그의 모든 사업에 함께하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알만큼 그는 복의 근본이 됐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듀크대학 교수인[존 웨스터 호프(John Westerhoff)]는 신앙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신앙의 처음을 <귀속적 신앙(Affiliative Faith)>이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내가 내 신앙을 가지는 게 아닙니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을 따라서 기도하고, 부모님이 교회가자고 해서 교회가고, 성경도 봅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할 때 누군가로부터 배우는 것을 귀속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그런 순간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음에는 <탐구적 신앙(Searching Faith)>으로 바뀝니다. 배운 것에서 이제는 내 스스로 판단해봅니다. 옳은가 그른가를 내 스스로 탐구하며 찾아가는 그런 기간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성숙한 신앙(Mature Faith)>의 단계에 이릅니다. 이젠 독립된 신앙으로 누가 가르쳐주기만 바라는 그런 귀속적 신앙에 매여 있어서는 안 되고 많은 경험 속에서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스스로 기도해서 응답을 얻고, 고난이 오면 좌절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겨나가는 성숙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시련을 당하지만 시련을 통하여 전에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되고 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느끼게 되고 전에 끊지 못했던 것을 끊게도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 그런고로 어떤 사건에서든지 조용히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야곱이 돌 베게하고 누운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야곱이 깨닫는 장면이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이 말은 중요합니다. 무엇을 깨달은 것입니까? 성숙한 신앙에 대하여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야곱은 하나님에 대하여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을 통하여 말로만 듣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체험을 통하여 실제로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만 알았던 하나님을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인정하는 순간이 야곱에게는 복된 삶의 진정한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이 아니라 삶을 통하여 체득하는 지식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정말 중요한 사실은 그 복을 깨달은 야곱의 신앙고백입니다. 20절부터 시작됩니다만 22절을 보면 “내가 기중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단을 쌓고, 십일조를 바치겠다는 것이지요. 사실 야곱이 보여주는 십일조의 신앙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창14:20에 보면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을 쳐부수고 돌아올 때 제사장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축복합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댁]에게 바칩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십일조의 신앙을 직접 하나님 앞에 자기의 신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배운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이론적이고 추상적이었습니까?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을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어머니와만 함께 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자세로 설 때만이 아니라 심지어 죄를 짓고 고향을 떠나는 죄인인데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오늘 나와 함께 하시는 분이심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내가 고백하고 행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진정 복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신앙은 부모님의 신앙도 아니고, 그 누구의 것도 아니라 나의 것입니다. 내가 의로워서 복 받은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버리지 않으시고 받아주시고 함께 하신 것이 바로 내가 얻은 복입니다. 아니 어쩌면 내가 죄인임을 알고 고백하며 겸손해 질수록 하나님의 복은 더욱 크게 내게 올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야곱은 이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다. 과연 나와 함께 계시다.” 바로 그것을 깨닫는 그 사람이 복된 사람이요, 깨닫는 바로 그 자리가 복된 자리 베델입니다. 하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기에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의로울 때만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 멀리 갈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형통하는 날에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게 아닙니다. 실패한 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을지라도 지금 여기에 나와 함께 하십니다. 오늘 이 사실을 믿는 믿음이 여러분에게 있다면 그것이 곧 복입니다. 그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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