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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면 (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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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려면(Resurrection Before Dawn)
성경 : 요 20:1-2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예수 그리스도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요 19:19) 이라는 죄명(罪名) 아닌 죄명으로 십자가 수난을 당하시고 성경 예언대로 새로 만들어진 부자의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덤에 갇혀 있을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 이라고 스스로 선언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무덤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이제 인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망의 권세, 마귀의 권세 아래 복종하던 인류는 이제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롬 5:17). 

  예수님의 부활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확정시켜줄 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 가운데로 들어감을 보장해 주는 대사건입니다.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은 교회의 머리로서 교회를 다스리고 계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예배와 선교와 봉사와 양육과 친교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시며, 마침내 이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요한복음은 이와 같은 지상 최대의 사건인 예수님의 부활 기사를 보도함에 있어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습니다. 20장의 첫 부분은 막달라 마리아와 두 제자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들로 하여금 맨 처음에 예수님의 빈 무덤에 대한 기사를 접하면서부터 서서히 예수 부활을 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1절=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부활 사건은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밝히는 구절입니다. 그날은 안식일이 지난 후 첫날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안식일이 토요일이었으므로 그 다음날은 당연히 일요일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날을 기념하여 주의 날로 모여 예배를 드렸고, 이는 교회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6:2에서 매주일 첫날을 연보를 모으는 날로 언급하고 있고, 행 20:7을 보면 이날은 초대교회가 떡을 떼기 위해 모이고 강론을 하며 보낸 날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이 기록되어 초대교회에 회람될 때는 이미 토요일 안식일에서 일요일 주일로 바뀌어 모이던 때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부활의 날이 인류가 사망권세를 극복하고 새로운 생명의 역사로 나아가는 감격스러운 첫째 날이 됨을 보여주기 위하여 부활 사건을 서술하는 첫머리에 의도적으로 ‘안식 후 첫날 일찍이’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경위를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에 나타난 단어들은 매우 무겁습니다. ‘어두울 때’, ‘무덤’, 시신이 없어진 사건, 슬픔에 잠긴 여인 등등, 예수님께서 사탄의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날의 정황과는 거리가 먼 광경들입니다. 

  본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 라는 여인도 사실은 부활의 아침과는 어울리지 않는 캐릭터입니다. 그는 여자요, 흉악히 귀신 들렸던 사람이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으며 머리로 그 발을 씻던 죄인이었습니다. 실제로 여러 여자들이 그날 아침에 무덤을 찾았는데, 요한복음의 저자는 굳이 막달라 마리아 한 사람만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기라성 같은 사도들을 제쳐두고 이런 여인을 주연으로 등장시킨 배경에는 분명 저자의 의도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저자가 사용한 평이한 언어들의 배후에 숨어 있는 상징적인 의미를 생각하며 본문의 교훈을 찾아보려 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하는 것이나 이를 사도들에게 알리는 일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무덤 앞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맞아주시는 예수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주시는 은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일찍이’ 나와야 함 (적용적해석: 지체하지 않는 신앙)
  
1절=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막달라 마리아는 주일 아침 ‘일찍이’ 무덤에 왔습니다.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최초의 영예를 누리게 된 것은 안식일이 끝난 후 첫날 이른 새벽시간에 ‘일찍이’ 예수님의 시신을 찾아 무덤에 나온 것에서 시작됩니다. 

  마리아는 무슨 이유로 새날이 시작하자마자 그렇게 일찍 서둘러 무덤에 나왔습니까?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그토록 따르던 성도로서, 그녀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사건으로 인해 깨어질대로 깨어졌고, 그녀의 두 손과 두 발은 무덤에 뉘인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막 16:1,2) 더 이상 침상에 누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시신이 썩기 전에는 그 사람의 영혼이 몸을 떠나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사흘 정도는 시신을 돌보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예수님이 돌아가신 날은 유월절과 안식일이 임박하여 예수의 시신을 충분하게 돌 볼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에 서둘러 시신을 돌보기 위해 무덤을 찾은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런 모습에서 우리는 주님께 나오는 자가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 나오는 데 지체해야 할 이유는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는 예수님께로 ‘일찍이’ 나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내일이나 다음 기회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지금이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입니다. 
  고후 6:2=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죄인이 예수께로 나오는 데 지체하면 할수록 그 사람이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될 확률은 줄어들게 됩니다. 성경은 이것을 거듭하여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 3:13=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특히,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영생의 소식을 전하는 것은 그 사람이 나이 어릴수록 더욱 값진 일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9:14=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막달라 마리아가 주일 아침 일찍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자원하는 일에 빨라야 합니다.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손길에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에도 빨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염려와 근심을 주께 맡기는 일에도 빨라야 합니다(벧전 5:7). 마귀의 세력과 영적 전투를 벌리는 일에도 뒤쳐지거나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기자의 결심을 들어보십시오. 그는 새벽 이른 시간에 주님을 찾고 주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영적으로 부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 63:6-7). 

  지체하지 않고 ‘일찍이’ 주님께 나아와 부활하신 주님의 평강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아직 어두울 때에’ 주님께 나와야 함 (적용적해석: 어둠 속에 있는 자 만나주심)
  
1절=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한 시간은 날이 ‘아직 어두울 때’ 이었습니다. 아직 날이 밝기 전, 어둠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이른 새벽 시간이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에는 온통 예수님으로 가득하여, 어둠이나 캄캄함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가 ‘어두울 때’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마리아의 과거가 너무나 어둡고 캄캄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두울’(스코티아) 이라는 단어는 본절에서 분명 상징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자연의 빛이 없어 아직 캄캄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마 10:27의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는 ‘어두운 데서’ 라는 표현이 ‘비밀스럽게’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요 1:5에서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라는 표현에서는 ‘어둠’에 해당하는 ‘스코티아’는 죄악된 세상을 가리키며,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사실이 아직 드러나기 전의 아침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묘사하면서 다른 복음서처럼 ‘새벽에’(마 28:1), ‘안식일이 지나매’(막 16:1), ‘첫날 새벽에’(눅 24:1) 라고 하지 않고 ‘아직 어두울 때에’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아직 부활의 비밀이 드러나지 않은 때임을 효과적으로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요한은 이런 표현을 통하여 예수님 부활하시기 전의 세상은 죄와 사망권세로 압제하고 있는 사탄의 세력에 의해 암울한 상태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요 8:12).

  사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한 때 어둠의 세력에 의해 철저히 지배당한 적이 있었던 경험을 가진 불행한 여자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녀가 일곱 귀신에 사로잡혀 고통받고 있었다고 알려줍니다(막 16:9). 예수님께서 마리아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자유케 해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세상의 빛(요 8:12)이라는 사실을 이미 체험적으로 배워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리아에게는 어떤 어둠의 세력도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십자가 현장에서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뒤에도 끝까지 남아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았으며(요 19:25), 다른 여인들보다 먼저 예수님의 무덤에 들어가 시신이 없어진 것을 가장 먼저 파악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떤 사람보다 이런 막달라 마리아에게 가장 먼저 나타나셨습니다(막 16:9).  

  성도 여러분!  주님의 복음은 우리를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전환시켜 줍니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행 26:18).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오는 자는 더 이상 어둠에 다니지 않고 빛 안에 행하게 됩니다(벧전 1:2:9).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어둠의 권세로부터 자유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둠의 세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어둠의 영향권에서 탈출할 길이 없습니다. 
  세상을 보십시오. 악한 영 마귀와 귀신들은 인간의 타락한 심성과 인간 내부에서 우러나오는 끝없는 정욕을 이용하여 모든 인류를 자신들의 노예로 삼아 마음껏 부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 라고 단정합니다.

  롬 3:10-18=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그들의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여러분, 이처럼 어둠 가운데 있던 저와 여러분을 주님께서 빛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일곱 귀신에 시달리며 쓰레기 인생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광명한 세상으로 인도되었듯이, 우리 또한 흑암 속에서 소망 없는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 영생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아직 어둠에 있을 때에 주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안식 후 첫날 아침 일찍이 마리아가 ‘아직 어두울 때에’ 주님의 무덤을 찾아 나온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오이코스들이 ‘아직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 나오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3. 장애물이 있더라도 나와야 함 (적용적해석: 장애 극복 신앙)

  무덤을 향해 달려가던 마리아의 마음속에는 큰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이른 새벽부터 준비했지만, 막상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무거운 돌을 어떻게 굴려낼 것인지는 대책이 서지 않았습니다(막 16:3).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일반 성인의 키보다도 더 큰 바위였습니다. 무덤 입구의 바닥에는 홈이 파여 있어 여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돌문을 옮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덤은 로마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의 엄명으로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된 무덤입니다. 무슨 수로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를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무덤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아직 어두울 때, 인적이 없는 어두운 길, 그것도 무덤을 찾아 나서는 것조차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덤 문을 막고 있는 큰 돌에 대한 걱정이 있었지만 그것조차 마리아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에게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은 그 어떤 장애물도 능히 극복하는 신앙과 헌신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로 나오는 데는 언제나 이런 저런 장애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종교를 가진 가족 때문에, 어떤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또 어떤 사람은 끊지 못하는 죄 때문에 교회를 찾아나오기를 꺼려합니다. 이런 장애물은 처음 교회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이것들을 이기고 주님께 나오는 사람들은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기존의 신자들이 주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와 주님과 깊은 교제의 삶을 나누고자 할 때에도 이런 장애물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마리아의 경우에는 돌문과 로마 군인들이 장애물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경우에는 어떤 장애물이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는 장애 극복 신앙을 가진 자에게 주어집니다. 마리아가 무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육중한 돌문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었고, 로마 경비병들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모든 장애물을 제거해놓으셨던 것입니다.
  마 28: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마 28: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무덤 입구를 가로막고 있던 돌을 굴려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이 연합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후 안심하고 잠들어 있는 시간에 주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무덤은 빈 무덤(the Empty Tomb)이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주님의 시신을 싸고 있던 두건과 세마포만 덩거러니 놓여 있었을 뿐입니다.

  아직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몰랐던 마리아는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1-2절).

  예수님은 온갖 장애물을 이기고 끝까지 주님을 찾아 나선 마리아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른 아침 어둠을 헤치고 달려온 막달라 마리아를 극적으로 만나주셨습니다. 마리아의 연약한 신앙을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귀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17절=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성도 여러분!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난 사람은 주님의 부활 소식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자들에게로 달려가는 마리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에게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안이 벙벙한 채 반신반의하는 제자들 앞에서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듭거듭 외치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마리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벽 일찍이 어둠을 헤치고 주님께로 나와야 하겠습니다. 온갖 장애물을 이기고 나아와 부활하신 주님을 기어이 만나야 하겠습니다. “마리아야!” 라고 부르시는 주님의 따뜻한 음성을 들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에 이 기쁜 소식을 마음껏 전하는 주님의 증인,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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