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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도행전적 교회 (2) (행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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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도행전적 교회 (2)
      (The Characteristics of the Apostolic Church)
성경 : 행 4: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우리는 지금 우리 서현교회를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이상적인 교회에 보다 근접한 교회로 세워나가기 위하여 성경의 기록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이 제시하시는 참교회의 모델은 사도행전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사도행전에서 보여주신 바로 그 교회!  그 교회는 예수님의 교회가 현실로 이루어진 교회입니다. 비록 완전한 교회는 아니었고 실수와 허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 교회는 예수님이 주인이신 교회요,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요,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교회였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교회의 특징은 1)성령으로 충만한 공동체(2장),  2)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2장), 그리고 3)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3장)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폭발적인 성장과 팽창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외적, 내적 시련에 직면하면서 그 시련들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제3장~7장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외적인 시련과 내적인 시련에 번갈아가며 직면하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외적인 시련은 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유대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 세력인 산헤드린(Sanhedrin)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내적인 시련은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나 히브리파 헬라파 간의 갈등표출 등과 같이 교회의 성장과정에서 내부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들입니다.   

  이 시간에는 사도행전을 계속하여 읽어 내려가며 사도행전적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4. 고난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 (4장)

  4: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그들을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행전 교회의 네 번째 특징은 고난 속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의 당국자들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진리를 가르치는 것을 매우 싫어했습니다. 

  여기 “싫어하여”(디아포메노이)는 문장의 맨 앞에 나와 강조되고 있는데, ‘심히 화가나서 어떻게 할 줄을 몰라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사용하여 사도들을 감옥에 가두기도 하고, 위협하여 그 말씀을 전하지 못하도록 욱박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이성적이지 못하고 감정적이면서 집단이기주의적인 차원에서 사도들을 다루었습니다.

  그들은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사도들에게 위압적인 자세로 힐문했습니다.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4:7). 그러나 성령충만한 사도들은 담대히 외쳤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4:10).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4:12). 주의 종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는 일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 또한 예수님을 전하다가 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세상의 권세자들은 성도들을 칼로 찌르거나 성전의 높은 꼭대기에서 떨어뜨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어떤 고난 속에서도 복음 전하기를 쉬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는다고 고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더 큰 고통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성도들은 복음을 전한 대가로 칭찬과 명예와 물질적 보상을 받기는커녕, 감옥에 갇히며 매맞으며 목숨을 내놓는 수모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오히려 담대하였습니다. 이는 성령에 충만한 결과였고, 복음 전파가 목숨의 보전보다 더 중요하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고전 4:11-13).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하여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 고난이 옵니다. 초대교회의 특징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는 영원히 편안한 곳이 아닙니다. 진정한 주님의 교회는 고난 속에, 불 속에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위기 속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고난당하는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받는 성도에게 위기를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십니다. 교회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굴복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진정한 모습은 고난받는 모습입니다. 고난받는 교회의 모습이 있을 때 세상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순히 좋은 위치나 성공하고 멋지게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 교회는 극심한 고난 속에서도 지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공동체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자리와 타이틀에 연연하지 않고 계속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서현교회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복음전도를 쉬지 않는 공동체여야 하겠습니다. 


5. 거룩과 정직을 추구하는 공동체 (5장)
  
5:3-4=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사도행전적 교회의 다섯 번째 특징은 거룩과 정직을 추구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효율적이고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속임수를 쓰는 것은 주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에는 엄청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인 중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땅을 판 돈의 일부를 감추고 ‘전부를 헌금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사람들을 속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지식의 말씀을 주셔서 그들의 거짓된 마음을 알게 하셔서 그들을 책망케 하셨고, 두 사람은 차례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원해서 부동산을 팔아 헌금했습니다. 매우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슴 아픈 것은 그들이 헌금한 동기가 영적인 질투에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당시 성도들에게 존경받던 바나바라는 사람이 아름답게 헌금하는 모습을 보고(행 4:36-37) 부러웠던 것입니다.  

  헌금이란 부러워서 하는 것이 아니고 의무적으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커서 스스로 감사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바나바를 칭찬하는 성도들의 소리에 질투가 나서 위선적인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이들 부부를 죽이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거룩과 정직과 순결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적 교회는 거룩과 정직을 계속하여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신학자인 칼빈 선생은 다음과 같이 아나니아의 죄를 고발했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업신 여긴 죄. 둘째, 하나님께 거짓된 봉헌을 한 죄. 셋째, 교회에서 명예를 얻으려는 패역한 허영심에 물든 죄. 넷째, 주님의 사랑을 배신한 죄. 다섯째, 위선의 죄.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룩한 교회를 죄로 오염시키려 한 죄. 

  이 사건은 사탄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5:3). 사탄은 복음의 전진 기지가 될 교회의 내부에 틈을 타 교회를 약화시키려 하였습니다. 사탄은 아나니아 부부의 공명심을 이용하여, 교회 내에 시기와 분열과 거짓의 독소를 퍼뜨림으로써 교회의 순수성과 일치를 깨뜨리려 하였던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그냥 방치하셨더라면 성도들의 봉사의 동기가 순수한 사랑이 아닌 불순한 자만심과 공명심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음모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보호하시기 위해, 사탄의 하수인이 되어 성령과 교회를 기만한 아나니아 부부를 엄격히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사건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까?  온 교회에 하나님께 대한 큰 두려움이 임하게 되었습니다(5:11). 즉,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친히 교회를 감찰하신다는 인식이 온 성도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현대 교회의 위기는 거짓말에 대한 불감증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큰 거짓말 뿐 아니라 작은 거짓말이 아무런 가책도 없이 버젓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수단이야 인간적이더라도, 약간의 부정과 거짓이 개입되더라도, 그 목적과 결과만 좋으면 그만 아니겠느냐는 안이한 의식이 팽배합니다. 

  교회마다 교인의 숫자를 부풀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각 교단의 교인 수 통계를 합치면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0%에 육박한다는 웃지 못할 통계치도 있습니다. 
  간증 집회에 얼굴이 알려진 강사들의 간증은 매우 정교한 과장법을 사용합니다. 성도들 간에도 작은 거짓말 정도에 양심의 가책을 받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십일조란 이름으로 드려지는 헌금이 정확하지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교회 안에 목회자나 중직자들의 성적 범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수많은 스캔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교회 재산 문제로 분쟁이 일고 있는 교회가 줄을 잇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교회는 다시 태어나고 거듭나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능력을 되찾으려면 내적 순결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해 무디신 분이 아니십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가 죄악된 수단과 방법으로 오염되는 것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십니다. 

  교회와 교인들은 이 세상의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직자와 성도는 보증수표의 대명사가 되어야 하고, 장로와 집사와 권사는 이 민족의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서현교회는 거룩과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교회의 본질 회복에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 위에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이 크게 임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6. 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우는 공동체 (6장)
  
6:2-4=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행전 교회의 여섯 번째 특징은 사도들의 동역자들을 세워 사도들의 사역을 돕도록 했다는 데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이 임하고 부흥이 되면서 급격히 대형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많아지면서 문제도 생겨났습니다. 교회에서 생기는 갈등은 주로 조직의 갈등이요 은사의 갈등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는 현지 출신인 히브리파 유대인들과 외지에서 온 헬라파 유대인들로 구성이 되어 있었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은 두 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집사 일곱을 뽑았습니다. 집사들은 성도들을 돌아보아 구제 사역이 골고루 이루어지도록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교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대목입니다. 사도들의 목회 사역을 돕기 위해 새로운 은사, 즉 평신도 사역이 도입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목회자는 양떼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꿈을 갖게 하는 존재입니다. 이를 위해 목회자는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전무해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손발은 누가 맡을 것입니까? 헌신된 평신도들입니다. 
  목회자는 감독이나 코치와 같습니다. 선수들을 훈련시키고 전략을 세우고 선수를 선발해서 임무를 주고 경기에 임하게 하는 것이 감독의 직무입니다. 선수들의 움직임이 답답하다고 감독이 경기장에 뛰어들면 안 됩니다. 

  평신도들은 현장에서 뛰는 운동선수와 같습니다. 감독에게 훈련받은 대로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며, 감독이 지시한 전략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역은 평신도들입니다. 그들은 매일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평신도가 변하면 세상이 변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행전적인 교회는 적절한 일꾼들을 세워 사역을 맡기는 공동체입니다. 세움 받는 일꾼은 반드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며 칭찬받는 사람” 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드시 주의 종의 동역자들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에서는 사도들이 성령 충만한 평신도들과 환상적인 팀워크를 이루었습니다.   

  우리 서현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헌신된 평신도들입니다. 우리 교회의 초창기부터 온 몸을 다해 헌신하셨던 리더들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바나바나 갈렙처럼 조용하면서도 뜨겁게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평신도들 중에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가 되거나 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 셀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에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아름다운 동역자들을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동에 젖습니다. 때로 끝없이 계속되는 목회 사역에 눌려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분들의 전화 한 통화, 문자 메시지 한 줄, 또는 말없이 웃어주는 한 번의 미소가 신선한 청량제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브리스가 부부를 가리켜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다”(롬 16:3) 라고 증언했습니다. 서현의 브리스가와 아굴라들은 오늘도 242구역에서, 여러 사역팀에서, 그리고 주일학교와 찬양대에서 헌신적으로 동역하고 있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온전한 관심은 주의 몸된 교회 위에 있습니다. 주님이 꿈꾸시는 교회, 그리고 사도들이 주님으로부터 배워서 세운 사도행전의 교회는 이처럼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서현교회는 과연 사도행전적인 특징을 얼마나 나타내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의 삶을 사는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사도행전적 교회는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교회입니다. 거룩과 정직을 위해 목숨을 건 공동체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와 같은 가치관을 얼마나 수용하고 있습니까?

  사도행전적 교회는 주의 종의 동역자를 세워서 평신도 사역을 활성화하는 공동체입니다. 성령과 지혜와 믿음이 충만한 성실한 일꾼들을 양육하여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일꾼들로 세워나가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교회에 무엇보다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를 바로 이러한 사도행전적 교회로 성장시켜 나가는 사역에 성도 여러분들의 헌신적인 참여를 기다립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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