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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유에 오신 예수님 (눅 2:1-7, 고후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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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유에 오신 예수님
         (Laid in a Manger)
성경 : 눅 2:1-7,  고후 8:7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 되었더라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메리 크리스마스!  성탄절을 맞아 성도 여러분들의 가정과 섬기시는 구역 위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으로부터 2000 여년 전 베들레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메시야 오시기를 기다려 왔으나, 정작 그가 오셨을 때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알게 해 주신 몇몇 사람만이 오신 왕을 영접했을 뿐입니다.
  
  특히 그가 가난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 태어나신  것은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지금 세계는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메리 크리스마스’ 라는 아름다운 인사말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탄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저 Happy Holiday, Season's Greetings와 같은 말들로 대체하고 있습니다. 본래 크리스마스는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날이란 뜻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마구간의 구유에 오신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봄으로써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기는 강림절 주일을 맞고자 합니다.  


1.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 (적용적해석: 예수님 맞을 여유 없는 인간의 마음)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오늘 본문은 로마 황제 아구스도가 천하에 호적령을 내린 역사적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역사적 사실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신 것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입니다(2절). 
  당시 요셉은 만삭(滿朔)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나사렛에서 멀리 베들레헴까지 가야 했고, 베들레헴에 몰려든 인파 때문에 변변한 숙소를 찾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마구간에서 아기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었음이라.” 평범한 표현이지만, 이 말은 예수님 맞을 여유가 없는 인간들의 마음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만을 생각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동물입니다. 탄생하신 이가 아기 예수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의 천사라 해도 좋습니다. 곧 해산할 만삭의 임산부입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는 두 부부를 위한 여관방 하나 남아 있지 못한 것입니까? 그들을 어떻게 마구간으로 가게 내버려둘 수 있단 말입니까? 

  물론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은 호적하러 찾아온 다윗의 후손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있을 곳’이 없었다는 것은 여유공간이 없이 사람들로 붐볐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같은 딱한 임산부가 몇 명이나 있었겠습니까? 우리는 ‘있을 곳이 없었다’ 라는 표현에서 돈으로 마음이 어두워진 그 시대의 단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냉대하는 일그러진 사회상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여관 주인은 방을 차지한 손님들에게 프레미엄을 붙여 대목 장사를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마구간에 오신 예수님은 사랑 없는 세계에 사랑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해산하는 여인에게 방 한칸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사랑이 메마른 땅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선민(選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와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공의와 사랑으로 행해야 했습니다. 율법에 무어라 했습니까? “네 동족이 빈한하게 되어 빈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객이나 우거하는 자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레 25:35) 하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 사람들은 이 율법을 귀담아 듣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해산하려는 마리아를 모른 체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 정신이 사라진 비정한 사회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유대 사회는 종교의 빈 껍데기만 남은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사회였습니다. 걸핏하면 이웃과 싸우고 욕하는 사회였습니다(마 5:21-26). 자기보다 못한 계층사람들을 배타시하는 사회였습니다(마 5:46-48). 완고한 율법주의 종교의 가르침 때문에 서로 정죄하고 비판거리만 찾는 사회였습니다(마 7:1-6). 부모에 대한 도리도 증발되고(마 15:1-6), 입으로만 하나님을 들먹이던 사회였습니다(마 15:8).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사회가 이러할진대 당시의 불신 로마나 다른 세계는 어떠했겠습니까? 사탄의 권세 아래 온갖 죄악과 불의가 득세했었습니다. 한 예로, 로마의 대철학자 세네카에게 어떤 귀족이 ‘자기의 노예들이 불쌍해보인다’고 말하자, 세네카는 “그런 쓸데 없는 생각이 들거든 목욕탕에 가서 즐기고 속히 잊어버리라”고 가르쳤다 합니다. 

  여러분, 이런 세상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진정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맞아드릴 여유가 없는 삭막한 곳이지만,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려고 친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의 마음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어느 교회에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성탄 이브 행사의 밤이었습니다. 주일학교 유년부에서 성극을 하게 되었는데 그 성극을 지도하시던 선생님은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고민이란 '반 아이들이 어떻게 하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성탄 축하행사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반에는 말이 어눌한 아이가 문제였습니다. 고민 끝에 선생님은 그 아이의 배역을 간단한 말 몇 마디만으로 해낼 수 있도록 처리했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방이 없습니다.” 
  이 말만 해도 되도록 내용을 각색해서 그 아이에게 몇 번이나 다짐 다짐을 해서 무대에 올려 보냈지만, 내심 초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더러 시킨 말만 하라고 그렇게 다짐시켰는데 한마디를 더 보태는 것입니다. 
  “방이 없습니다. 방이 없습니다. 빈방이 없습니다.” 그래 놓고서는 “그런데 제가 잘 방은 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순간 교인들이 와르르 웃었고, 교사는 발을 동동 굴렀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이 한마디 말이 그 날의 성탄절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웃던 교인들은 이내 심각한 얼굴로 성탄절의 메시지를 새기고 있었습니다. 어떤 해의 성탄절보다 뜻 깊은 밤이었습니다. 

  이번 성탄절기에는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님 맞아드릴 여유공간을 반드시 확보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영접을 받기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며, 주님을 모시고 식탁에 동참하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었음 (적용적해석: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의 친구)
  7절=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가난한 시골 청년 요셉은 사관을 얻을 길이 없어 급하게 마구간을 빌어 해산실로 썼습니다. 아기가 태어나자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습니다. 
   '강보‘라는 말은 ’찢다‘ 라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입니다. 요셉부부는 신생아를 감아 덮을 천도 없이, 가지고 있던 옷을 찢어 아기 예수를 쌌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구유‘(파트네)는 가축의 먹이를 넣어주는 여물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은 영광스러운 하늘보좌에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와 같은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에 누이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낮고 천한 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이셨던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어주십니다. 

  미국의 어느 화려한 예배당입니다. 한 흑인 여인이 성탄절 예배를 드리려고 예배당 안에 들어가려다가 제지를 당했습니다. 백인교회이므로 흑인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인은 벤치에 앉아 기도를 하는데 눈물이 쏟아져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누군가 어깨를 두드리며 왜 우느냐고 물었습니다.  여인은 울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너처럼 쫓겨났단다.” 그 흑인 여인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습니다. 아! 그분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여러분,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예수님은 부자이십니다. 그는 창조주요 만왕의 왕이십니다. 금도 주님의 것이요 은도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비천한 우리들의 구세주가 되시고 친구가 되기 위하여 친히 낮아지셨습니다. 친히 비천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생동안 가난하고 비천하게 사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라고 탄식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마음 놓고 주무실 장소조차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도 다른 사람의 나귀를 빌려 타셨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유월절 만찬을 드실 때도 남의 다락방을 빌렸습니다. 심지어 무덤에 묻힐 때에도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을 빌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그토록 가난해지고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을 맞이할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세상 재물에  마음이 가 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명예와 권세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지금의 마음으로 구유에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테레사 수녀는 인도의 굶주린 군중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길거리에 내버려진 고아들을 돌보는 것이 매일의 일과였습니다. 그의 생활신조는 ‘가난한 삶들 가운데서도 가장 가난한 자에게’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보통 사람들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일을 날마다 되풀이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해서 계속하여 일년 365일 똑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습니까?” 
  그때 테레사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저 불쌍한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낮고 천한 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친구들입니다. 그들을 위해 예수님은 천한 신분으로 오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 오시는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돌려서 낮고 가난한 자의 진정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탄 절기에 다시 한번 그들을 살펴보고, 그들의 손을 잡아줍시다.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강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습니다.    


3. 우리의 부요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 (적용적해석: 낮고 천한 자를 영화롭게 하심)
  다시 한번 고후 8:9 말씀을 보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마구간 구유에 오신 것이 단순히 우리의 비천함과 동질성 확보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본래 부요하신 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믿는 모든 사람들을 고귀하게 하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낮고 천한 자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태어나신 장소는 냄새나는 마구간이었으나, 그곳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난 곳이 되었습니다. 목자들이 양을 지키던 들에서는 하늘의 천군 천사들의 노래가 울려퍼졌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동방박사들을 인도하던 신비의 별은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비추었고, 동방박사들은 예수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면서 경배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드러났습니다. 갈릴리 가나 혼인 잔치집은 손님으로 참석하셨던 예수님 때문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광야로 나온 수천 명의 사람들은 엄청난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고,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크게 나타났습니다.  

   존 파이어펜트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완전히 실패로 인생을 마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첫 출발은 의외로 훌륭하였습니다. 그는 자기 할아버지가 설립한 예일대학을 졸업한 후 상당한 열정을 가지고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에게 너무 너그럽게 대했다는 이유로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변호사로도 실패하였습니다. 손님들에게 너무 너그럽고 정의감이 투철해서 돈벌이되는 사건을 맡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는 사업가로도 실패하였습니다. 물건 값을 제대로 쳐서 받지 못해 이윤을 낼 수 없었고 외상을 너무 잘 주었기에.... 또한 그는 정치가로도 실패하였습니다. 노예 제도 폐지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거듭한 존 파이어펜트였지만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이 확고히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사회정의를 위해 힘을 썼고, 사랑을 베푸는 인간이 되기를 바랐으며 인간 정신의 힘에 대한 믿음을 지녔습니다. 그러기에 패배라고 믿었던 그 당시의 일들이 대부분 이루어졌습니다. 교육은 개혁되었으며 소송절차는 개선되었고 신용거래법도 개정되었으며 노예제도는 완전히 폐지되었습니다.
  그의 기념품이 있습니다. 성탄절이면 울려퍼지는 노래 “징글벨”. 바로 그가 만든 노래입니다. 세계 수 십억의 사람들이 성탄절이 오면 누구나 한번쯤 불러보는 이 기쁨의 노래를 완전한 실패자가 만들었다면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그는 위대한 성공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가난한 자들을 위해 친히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부요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내 심령 안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내 마음이 천국이 됩니다. 큰 기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 가정이 비록 천하고 가난하다 할지라도 우리 가정에 예수님이 임재하실 때 평화의 동산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계실 때 기쁨이 있고, 삶의 변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진심으로 맞아들일 때 우리의 삶은 천국으로 변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을 영화롭게 만들어 주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며칠이면 크리스마스입니다. 세상은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쏟아붓는 맘몬의식으로 성탄절을 도배해버린지 오래입니다. 요란하고 야단스러운 구경거리들은 즐비하지만, 정작 성탄의 주인공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명심합시다. 예수님은 사회의 가장 그늘진 곳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친구로 오셔서 그들의 삶을 천국으로 변화시키려 하십니다. 

  주님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의 마음을 낮은 데로 돌립시다. 가난하고 천한 자들의 친구가 되는 것이 주님을 만나게 되는 지름길입니다. 성탄절이 가난한 자와 병든 자, 소외된 자의 성탄절이 되게 하십시오. 그럴 때 이 복된 성탄에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박순오 목사, 대구서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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