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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보기도 (출 17: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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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보기도 (출 17:8~16)


I. 싸움은 승리의 기회이다

한 학생이 자전거를 도둑맞고 새로 산 자전거 장금장치를 사기위해 철물점에 갔습니다. "아저씨, 절단기로 안짤릴 만한 쇠사슬이 없을까요?" "응, 그럼 보통 쇠사슬말고 아예 특수 쇠사슬로 해." "그래요? 그럼 그걸로 하나 주세요." "잠시 기려요 학생." 그 아저씨 길게 걸려있던 쇠사슬을 알맞은 크기만큼 절단기로 뚝 짤라 주었습니다. 이 학생 깨달은게 있지요. '아! 절단기로 안짤려지는 쇠사슬이란 없는 것이구나!'

여러분! 문제없는 인생도 없지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 또한 없습니다. 언제나 문제는 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출애굽을 하던 그 시점에서만 해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애굽이 이스라엘의 자궁이었다면 출애굽은 이스라엘이란 어린아이가 막 태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너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고 했습니다. 출애굽과정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만 있으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행하시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능하게 일하시는가? 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 왕과 애굽을 칠 때도, 홍해가 갈라질 때도, 추격해 오던 애굽군대가 멸망할 때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일을 구경하고 박수를 치고 기뻐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사정이 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나가 싸우라고 명령했습니다. 지금 당신 앞에 싸움이라는 과제가 주어졌습니까? 신앙생활에 어려움이 있습니까? 시험이 있습니까? 그만큼 당신이 성장했다는 겁니다. 더 큰 인물로 만들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장의 기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승리를 위해서는 많은 싸움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시작하는 8절 말씀을 보면 "때에 아멜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즈음 출애굽의 여정에서 그들에게 두 가지의 큰 장애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애굽을 떠날 때 떠날 수 없도록 뒤에서 물고 늘어지는 애굽의 바로 왕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전진해 나가려 할 때에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나서는 원수가 있었습니다. 아말렉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죄악된 세상을 떠나기 위하여 이 세상의 여러 가지 유혹으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얻기 위하여 나가려 할 때에 뭔가 뒤에서 붙들고 늘어지는 무엇이 있다면 애굽의 바로 왕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되기 위하여 전진하기 위하여 앞으로 달려나가는데 앞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나서는 것이 있다면 아말렉일 것입니다. 

본문 출애굽기 17장 8절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여기 주어가 아말렉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르비딤에 있는 상황에서 아말렉이 싸움을 걸어온 것입니다. 싸움을 걸어오는 것은 충분히 이길 가능성이 있을 때 걸어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말렉이 보기에 이스라엘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허술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광야로 나온 백성들이 군대를 제대로 갖추고 있었을 리가 없었습니다. 전투경험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기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8절은 "그 때에 아말렉이 와서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간단히 보고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건을 보고하고 있는 신명기 25장 17-18절은 아말렉 족속이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공격했는지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나오는 길에 아말렉이 네게 행한 일을 기억하라 곧 그들이 너를 길에서 만나 네가 피곤할 때에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아말렉 군대가 오랜 행진으로 지친 이스라엘의 등 뒤에서 공격했고 그것도 특별히 기진맥진한 사람들이 대오에서 뒤로 떨어질 때마다 후방에서 기습을 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아말렉 족속이 이미 싸움을 많이 해보았고 전술에 능한 전사들이었음을 말해줍니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우리는 그때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해야 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항상 푸는 방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싸움에 승리함으로 성장해 가는 것 이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한 뜻입니다.

II. 아말렉과의 전쟁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을 막고 나서는 아말렉의 정체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창세기 36장 12절 말씀에 보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여기 보면 아말렉은 에서의 손자라고 되어있습니다.

에서가 누구입니까? 배고픈 창자를 채우기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던 사람입니다. 장자의 명분은 또 무엇입니까? 상속권을 의미합니다. 제사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야의 족보를 말합니다.

내가 배가 고픈데 영적인 상속 따위가 무슨 의미가 있더란 말인가? 예배가 밥 먹여주나?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이 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 하나님도 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무관심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 현실주의자,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바로 에서와 같은 사람 아니겠습니까?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 이것이 아말렉입니다. 영적인 축복, 영적인 과제, 영적인 사명엔 무관심하고 늘 현실의 문제만 크게 보입니다. 급박하게 느껴집니다. 바로 이런 사상이 에서요, 바로 이런 가치관이 아말렉의 가치관입니다.

야곱은 누구입니까? "나는 은혜받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님의 축복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내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빼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이 하나님 지향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면, 에서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에서와 야곱이 싸우듯이 우리 안에는 언제나 에서의 가치관과 야곱의 가치관이 맞서서 싸웁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세상의 가치, 거룩한 마음과 육신의 정욕, 영원한 가치와 현실 주위가 늘 내 안에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본문의 전쟁은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치루어야 할 영적 전쟁의 모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말렉이 어떤 존재였는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했다"(신25:17-18)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대를 지배하고 있던 애굽이란 세력을 물리치고 대열을 지어 출애굽 했을 때에 주변 강대국들조차도 이스라엘을 두려워했습니다. '저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은 살아계신 분이야. 저들이 믿는 하나님은 대단히 위대하신 분이야.'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습니다. 넘실대는 홍해를 가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진격해 들어갔을 대에 추격해 오는 애굽의 병거들이 물에 수장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이 없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존중할 줄 모르는 족속이 아말렉이었습니다. 

본문을 살펴 보십시다.
출애굽 이후 처음으로 겪는 전쟁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마치 동화와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과 아말렉이 르비딤에서 전쟁을 하게 되는데, 여호수아는 군대를 통솔하여 직접 전쟁을 하고,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게 됩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하게 되자 함께 있던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편에서, 다른 사람은 저편에서 모세의 팔을 붙잡았더니 모세의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않았고, 결국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씀이 이해됩니까?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이 사실을 잘 압니다. 기도하면 동화와 같은 일이 실제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이 가능해 집니다. 기도하면 세상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기적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God is the Key. 기도는 열쇠입니다. 
Jesus is the Key. 열쇠는 작은 것이로되 큰 일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보물창고를 여는 열쇠가 있다면 작은 것이지만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쟁에서 승리하는 아주 중요한 영적인 원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사건을 책에 기록하고 기념하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전쟁을 수행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게 하라고 명령합니다. 앞으로 여호수아가 끊임없는 전쟁을 반복하며 가나안 땅을 정복해 가게 될 터인데 영적 전쟁의 비밀을 가르쳐 주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싸워 이겼다는 교훈이 아닙니다. 오고오는 세대속에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악한 마귀와 영적 전쟁을 한바탕 치루게 될 때에 어떻게 승리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비밀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것을 보면 악한 사단의 전략과 비슷합니다. 
보십시오. 아말렉 족속은 전면전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을 지어 가는 동안 피곤하여 뒤에 처진 사람들을 골라 공격했습니다. 뒤에 처진 사람들, 약하고 병든 사람들, 피곤에 지쳐있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아말렉의 주공격 대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사단도 아말렉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공격합니다. 사단의 공격대상이 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본문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의 행렬 뒤에 축 처진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행렬에서 뒤처진 사람들, 은혜의 자리에서 멀어진 사람들, 교회의 비전에서 멀리 처진 사람들, 믿음의 확신없이 방황하는 사람들, 중심자리에 몸을 던지지 못하고 삶을 실어놓지 못하고 변죽이나 울리며 구경꾼처럼 신앙생활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악한 사단, 아말렉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지요.

오늘도 사단은 말씀으로 무장하고 성령으로 무장하고 공동체 중심에 서서 서로 서로 붙들어 주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건드리지도 못합니다. 가까이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가 시험에 들 때도 같은 경우였습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가야바 집으로 끌려갈 때 베드로는 멀찍이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멀찍이"라는 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님 가까이 다가서서 주님과 함께 교재하며 말씀을 나누며 그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따랐더라면 시험에 들지 않았을 것을. 멀찍이 따라갔을 때에 한 계집종의 이야기에 주님을 부인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III. 모세가 손을 들면

본문을 보면 아말렉과의 전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일방적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밀고 밀리는 팽팽한 싸움을 했습니다. 

9절에 "내일"이란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전쟁은 며칠 간 계속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세가 손을 들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지는 겁니다. 여호수아가 어떤 전략을 가지고 있느냐? 군대의 숫자가 많으냐 적으냐, 어떤 무기로 싸우느냐 등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1) 항복

11절을 보면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라고 말합니다. 여기 모세가 손을 든다는 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먼저 항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내가 죽으면 망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상에서는 내가 죽으면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살고 민족이 삽니다. 세상 전쟁에서는 항복하면 그걸로 끝장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전쟁에서는 두 손 들고 항복하면 승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나는 사령관이 아닙니다. 나는 지휘관이 아닙니다. 이 전쟁의 승과 패는 오직 하나님 당신 손에 달려 있습니다. 나는 내 사업장에 사장이 아니올시다. 나는 우리 가정에 호주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당신에게 항복합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항복하는 것입니다. 

(2) 어디를 향하여?

모세가 손을 들었다? 누구를 향하여 손을 들었을까요?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고, 백성들 - 특별히 전쟁을 하고 있는 여호수아와 군인들을 향하여 손을 들었을 것입니다. 

① 백성들을 향하여 사령관이 손을 들었다는 것은 
모세가 "손을 들었다" 것은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지도자들에게, 가정의 어버이들에게 축복의 권세를 주십니다. 믿음을 가지고 거룩한 손을 들어 내 자식을 축복하면, 셀 가족들을 축복하면, 교우들을 축복하면, 한국교회와 이 민족을 축복하면, 여러분의 축복을 하나님이, 성령님이 보증을 해 주십니다. 여러분의 입술의 기도에 책임을 져 주십니다. 여러분의 손 끝에 주신 축복의 열매를 주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② 하나님을 향하여 
"손을 들었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무리 피곤해도 기도를 멈추면 안된다. 내 기도의 손이 올라가면 우리 가정에 승리가 올라갈 것이지만 내가 피곤하여 내 기도의 손이 멈추어지면 나는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구나. "영적인 전쟁은 기도의 싸움이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손을 들고 있는 모세가 피곤할 수밖에 없지요. 그때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모세의 형이었고 한 사람은 모세의 매형이었지요. 세 사람 다 노인이었습니다. 무슨 힘이 남아 있어서 누가 누구의 팔을 붙들어 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러나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람의 팔을 붙들어 줄 때에 놀라운 영적인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 살아가다가 나 혼자 서 있기도 힘든데 내가 누구의 팔을 붙들어 준단 얘기인가? 나 혼자 일어서 있기도 힘에 지치겠는데 내가 또 누구의 팔을 붙들어 준단 말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목사의 팔을 붙들어 주면, 내 남편의 팔을 붙들기 시작하면, 내 아내의 팔을 붙들어 주면, 내 셀리더의 팔을 붙들기 시작하면, 힘에 지쳐 쓰러져 있는 셀가족들의 서로의 팔을 붙들기 시작하면 거기에 성령께서 기름을 부어 주십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3) 능력의 지팡이
모세의 손 역시 우리와 똑같은데 아론과 훌이 손을 들면 안되었나요? 젊은 장수가 올라가 손을 들면 왜 안되었나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는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손을 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였습니까? 애굽에 10대 재앙을 내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수행하던 지팡이였습니다. 홍해를 가른 지팡이였습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냈던 기적의 지팡이였습니다. 모세는 그 지팡이를 잡은 손을 들어 하나님의 능력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다시금 권능으로 역사해 주시도록 중보 기도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능력의 손을 들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권능에 접촉되어질 때에 하나님의 권세에 연결되어질 때에 우리의 기도는 오늘도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이 물러가게 될 것입니다. 병든자가 낫게 될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게 될 것입니다. 안되던 일이 될 것입니다. 닫힌 문이 열려지게 되는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4) 기도는 노동
기도는 수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손을 드는 기도는 수고의 기도입니다. 

손들어 보셨습니까? 저는 어린시절 개구쟁이여서 손 많이 들어봤습니다. "교실에서 손들고 있어?" 손들고도 장난치니까? "류영모는 복도에 나가서 손들고 있어?" 손 많이 들었습니다. 손을 드는데 얼마나 팔이 아픈지, 선생님만 안보시면 몰래 팔을 내려야만 또 들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이게 손 든 것입니다. 

기도는 수고입니다. 수고를 아까와 하는 사람은 능력있는 기도를 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기도가 잘 안됩니다. 우리는 무릎을 꿇어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어나 피곤한 시간에 집에서 기도하면 좋잖아요. 그것은 기도가 안됩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교회에 나와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불을 박차는 그 시간 눈꼽을 떼는 그 시간, 졸린 눈으로 신발을 찾는 그 시간, 이미 놀라운 기도를 당신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수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중보기도를 하길 원할 때에 차를 타고 가며 오며 기도할 수 있고 밥을 먹으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있는 기도를 드리려고 하면 중보기도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정말 교회 비전에 사로잡히길 원한다면 비전채플 중보기도실을 방문하셔야 합니다. 목장 가족들이 함께 방문하여 엎드려 기도하게 될 때에 그 수고를 통하여 하나님은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도 지난 두달여 동안 투병생활을 하면 지금껏 없던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 일정으로 열심히 뛰면 모든 것이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약해지고 보니 - 우리 장로님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구나. 우리 부교역자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나는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없구나. 겸손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들이 내 손을 붙들어 주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부족한 종의 팔을 붙들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여러분의 자식이 힘없이 풀썩 쓰러질 때에, 어느날 갑자기 응급실로 여러분의 아이를 안고 달려갈 때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아이의 손을 붙들고 중보기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잘되리라 생각했던 사업이 위태로워져 갈 때에, 우리 주변에 소중한 사람이 비틀거리고 방황할 때에, 우리 가족이 남편이 삶의 좌표를 잃어버리고 흔들거리고 있을 때에 나의 잔소리나 나의 구박은 아무런 능력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엎드려 기도하는 것만이 능력이 되는 것이고 사랑하는 가족이 병들어 신음하는 자식이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힐 때만이 그들이 새힘을 얻고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을 얼마나 여러번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까? 서로를 위해서 붙들어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VI. 기도하게 싸워라

모세가 아말렉과의 싸움에서 취했던 조치는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조치는 여호수아로 하여금 군인들을 이끌고 골짜기로 내려가서 아말렉을 맞서 싸우는 골짜기의 전쟁이었습니다. 
두 번째 조치는 모세 자신은 아론과 훌을 데리고 언덕 위에 올라가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손을 들고 기도하는 산 위의 전쟁이었습니다. 
골짜기의 전쟁과 산 위의 전쟁, 양면 작전이 함께 조화를 이룰 때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인 전쟁에서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고 열매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골짜기의 전쟁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호수아의 전술, 여호수아의 작전, 그들이 가지고 싸웠던 무기, 군인의 숫자 - 이것이 전쟁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의 전쟁이 있습니다. 
언덕 위의 전쟁입니다. 산 위의 전쟁, 기도의 전쟁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또 일부 사람들은 골짜기의 전쟁을 무시하고 산 위의 전쟁만 있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마다 보따리 싸 들고 금식하러 산 위로 올라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론 그런 일들로 인하여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그것이 현실도피적인 기도라 한다면, 자신이 헝클어 놓았던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책임전가하는 기도라면 그 기도는 능력으로 연결되어질 수 없습니다. 

산 위의 전쟁과 함께 산 아래에서 책임을 감당할 때에 자신이 해야될 모든 일들을 감당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양심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 산 위의 전쟁은 능력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요즘 입시철이 되면 교회들 마다 새벽예배 숫자가 좀 늘어난다고 합니다. 철야기도 시간에도 안보이던 교인들이 보인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이 시험을 목전에 두고 있는데 기도하지 않는 어미와 아비가 있다면 얼마나 무책임한 부모이겠습니까? 마땅히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현실도피적인, 신비주의적인 기도라면 어쩌면 의미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우리 자식이 너무나 공부를 안 하는 것 잘 아시지요. 이 어미가 기도하는 이 시간에도 쿨쿨 잠을 자고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환상중에 이 아이가 공부를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꿈속에서 세계 최고의 과외 선생님이 나타나서 모든 정답을 가르쳐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그래도 내 자식이 공부하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시험고사장에서 아는 문제는 하나도 없을 것이고 연필을 굴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연필을 굴릴 때 정확하게 정답에 가서 연필이 멈출 수 있도록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린다면 무책임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도는 절대로 듣지 않습니다. 

"하나님 내가 어미가 되어서 내 자식을 격려하고 지혜와 총명으로 인도하지 못한 죄를 회개합니다. 하나님 내 자식이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남들처럼 가진 것이 없어서 내 자식을 학원에도 보내지 못했고 과외공부도 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하나님 아버지 친히 지혜를 주셔서 이 아이가 자신의 인생을 책임있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고 뿌린 모든 씨앗에 대해서 성실하게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어떤 성적을 주신다 하더라도 우리는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과 계획이 있음을 압니다. 그 점수를 가지고 좋은 대학, 하나님 비전에 맞고 우리 아이 실력에 맞는 장래가 촉망되어지는 과를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옵소서." 이게 어미의 기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골짜기의 전쟁과 산 위의 전쟁이 조화를 이룰 때에 우리의 기도는 능력있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골짜기의 전쟁과 산 위의 전쟁 가운데 우선순위를 둔다면 어떤 기도를 먼저하고 어떤 전쟁을 먼저 해야 할까요? 현실이 중요하지요. 발등에 떨어진 불이 중요하지요. 그러나 시간은 흘러갑니다. 겨울에 쌓인 눈은 봄이 오면 녹게 되어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시간과 함께 해결되어지게 될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의 능력에 접촉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산 위에서 기도하게 될 때에 사령관인 모세가 왜 전쟁에서 진두지휘하지 않고 산 위에서 기도했던가? 기도하는 자는 역사의 조연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진정한 사령관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도하는 사람은 이 시대 진정한 사령관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능력이 그리스도의 손에 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스러운 노력이 아버지의 손에 있습니다. 그분은 천지우주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주를 운행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젊은 아이들이 하는 우스개 소리 가운데 그런 얘기가 있습니다. 
거북이 한 마리가 한양으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한참 가다 보니까 지렁이가 저도 한양에 가겠다고 꿈틀거리면서 올라갑니다. 저게 어느 세월에 한양에 가겠나? 싶어서 "야~ 타!" 그랬습니다. 지렁이가 거북이 등뒤에 탔습니다. 한참을 가는데 굼벵이란 녀석이 저도 한양에 가겠다고 몸을 뒹굴리며 뒤뚱거리고 있습니다. 불쌍해서 "야~ 너도 타!" 굼벵이가 거북이 등위에 탔더니 지렁이가 굼벵이한테 "야, 꽉 잡아 되게 빨라. 번개같애. 잘못하면 떨어진다." 그러더랍니다. 

거북이가 빨라봤자 거북이지요. 비행기도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리 없습니다. 제트기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알리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만 살아가면 거북이지요. 굼벵이지요. 지렁이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행기 같은 성령의 능력이 있습니다. 제트기 같은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권세가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들 가운데는 '지도자인 모세는 어디 갔는가? 비겁하게 우리만 전쟁터에 내 보내고 모세 혼자 저 언덕 위에 홀로 앉아서 기도한다고.' 아마 모세를 비판한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손이 올라가는 것이 승리의 비밀임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가끔 목사님들이 모여서 어떻게 하면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부흥시킬 수 있을 것인가? 토의를 하다가 제게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제게 간증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18년을 돌이켜 보며 우리교회 역사를 가만히 뒤돌아봅니다. 승리의 순간보다는 실패한 순간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저보고 어떻게 실패했는가를 간증하라고 그러면 할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성공했는가? 간증하라면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얘기가 있습니다. 순간순간 마다 기도밖에 없구나. 기도하고 나가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승리했습니다. 이제는 되었다 싶어서 기도를 게을리하면 백발백중 실패입니다. 이 고백 외에는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교회를 위해서 할 일이 생겼습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교회도 승리하고 여러분의 기업도 가정도 여러분도 믿음생활에서도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에 실패하면 우리 모두 실패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손을 들면 우리 가운데 하나님께서 승리를 줄 것입니다. 피곤하다고 기도의 손을 멈추면 우리는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세 손에 신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전쟁터에서 믿음 생활에서 우리가 하루 살아가는 유혹과 시험이 많은 이 인생여정 속에서 예배의 승리없이 기도생활의 승리없이 내 삶의 승리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내가 기도하기 전까지는 기도보다 더 중요한 어떤 일도 없습니다. 내가 허리가 끊어지는 기도를 하기 전까지, 기도보다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그 어떤 일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고 피흘리며 전쟁터에 나가게 될 때에 기도보다 위대한 일들을 여러분들이 보게 될 줄로 믿습니다. 

다짐하십시다. 우리교회, 나, 우리 모두, 기도보다 앞장서지 아니하겠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앞장서지 않겠다. 성령보다 앞장서지 아니하겠다. 그래야만이 우리가 아말렉을 함께 무찌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주경가들은 "무명 용사의 승리다" 그렇게 이름하는 것이지요. 여호수아도 중요했습니다. 모세도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성경배후에 아론과 훌이 모세 팔을 붙들었던 그 손이 여호와 닛시, 승리의 깃발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지않습니까? 

여러분 보십시오. 모세가 흰 도포자락입고 손을 번쩍 들었습니다. 그리고 노인되는 아론과 훌이 역시 흰옷을 입고 팔을 붙들었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셔야 되겠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셔야 되겠습니다. 노인이 함께 흔들흔들 거리면서 두루마기 자락을 흔들거리고 있을 때에 밑에서 볼 때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다. 하나님의 승리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구나. 

여러분들이 저 지하실에서, 이 예배당에 엎드려 앉아서 교회를 가슴에 끌어안고 민족을 가슴에 끌어안고 우리교회에 주신 비전을 가슴에 끌어안고 우리교회에 주신 영적인 과제를 가슴에 끌어안고 흔들거리며 여러분들이 기도할 때에 보라 승리의 깃발이다. 여호와 닛시! 여러분들의 기도의 소리가 천국에 꽂혀지는 여호와 닛시의 깃발이 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 혼자 일어서 있기도 힘든데 노병들이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든데 모세의 팔을 붙들어 온종일 서서 기도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중보기도는 수고를 동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보기도는 믿음이 성숙한 사람, 인격이 성숙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똑같이 엎드려 울면서 기도합니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이웃을 위하여 쓰러지고 넘어져 있는 내 가족들을 위하여 우리 공동체를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먼 곳에 가서 헌신하는 선교사님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 기도의 내용을 아시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웃을 위하여 먼저 기도한다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아시지만 하나님은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웃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성숙한 인격을 의미합니다. 

한 노처녀가 있었습니다. 시집갈 때가 되어 훌륭한 남편감을 구하기 위해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보기도학교를 마치고 난 다음 이기적인 기도, 자신의 기도제목만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이제는 이웃을 위해서 기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까지 나를 위해서 신랑감을 위해서만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나만을 위해서 기도하지 아니하고 내 어머니를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우리 어머니에게 훌륭한 사윗감을 허락해 주셔서 훌륭한 사위를 통하여 인생의 행복을 맛보게 하여 주십시오. 언제나 내 인생의 문제만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사실에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내 여동생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 여동생에게 훌륭한 형부감을 속히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자신도 시집을 잘 갈 수 있다는 비전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중보기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보여주는 단 적인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영적인 거성 스펄전 목사님의 목회를 배우기 위하여 수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여 그토록 아름다운 목회를 그토록 승리에 넘치는 목회를 할 수 있습니까?" 그때마다 스펄전 목사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기도실로 데려 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실에 모여서 중보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팔을 붙드는 아론들이었고 연약한 성도들의 팔을 붙드는 훌이었습니다. 저들이야 말로 승리의 장본인들이 되었던 것이지요. 천국문에 가면 스펄전 목사님이 섬기던 교회 성전이 세워져 있을 것이고 기도하던 그 사람들의 이름이 성전 기둥에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욥이란 사람을 알지요. 욥기서 1장부터 고난이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욥기 1장부터 마지막 42장 초반이 지나기까지 욥은 끊임없이 고난의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욥기 42장 10절에 욥이 그 벗들을 용서합니다. 도무지 용서가 안되는 벗들을 용서하고 "벗들을 위하여 빌매" 벗들의 이름을 부르며 중보기도했을 때에 그토록 끈질기게 떠나지 않던 욥의 문제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욥의 고통이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온갖 문제가 해결되어지게 되었습니다. 갑절의 복을 받아 누리는 놀라운 결론으로 욥기는 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V. 한소망의 팔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

세계 제2차 대전이 한창 격전이었을 때에 영국의 유명한 수상 위스턴 처어칠이 탄광촌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헬멧을 쓰고 깊은 갱 속에 내려갔을 때에 수상이 갱 속에 왔다는 사실 때문에 일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습니다. 저들 앞에 유명한 연설을 하게 되지요. "먼 훗날 후세의 사가들은 그대의 후손들은 빗발치는 전쟁터에서 조국이 풍전등화로 위기를 당하고 있을 때에 당신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라고 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잠수함을 탔소. 나는 전함을 타고 싸웠습니다. 나는 최전방에 나아가 철책선을 지키며 지뢰를 밟으며 빗발치는 총알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피흘리며 싸웠소 라고 말할 것이오. 그때 여러분 또한 자랑스럽게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그 군인들을 전선으로 실어 나르는 그 기차를 움직이게 하기 위하여 나는 석탄을 캐고 있었다. 방아쇠를 당기는 군인들의 손을 녹이기 위해서 나는 석탄을 캐고 있었다. 저들이 막사에 들어가 따뜻하게 그 밤을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는 깊은 갱 속에 들어가 석탄을 캐고 있었다. 먼 훗날 후세의 사가들은 그대들이 전쟁의 승리자임을 간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어느날 문득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되겠지요. 나는 너희 교회를 쓰길 원했어. 한소망교회 부흥의 불꽃을 통하여 넘어진 한국교회를 일으키기를 원했어. 잠자는 한국교회를 깨우기를 원했어. 잠든 한국교회가 깨어나 민족을 살리고 나는 한민족을 통하여 세계를 경영하는 위대한 경영의 너희 민족, 너희 교회, 너희 가정, 를 쓰길 원했다. 한소망교회가 영광스런 그 일들을 감당할 때에 그대들은 무엇을 했는가? 여러분들은 자랑스럽게 대답하십시오.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쓰러져 넘어져 울고 있는 셀 가족들을 일으켜 세우기 위하여 함께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끌어안고 나라를 가슴에 끌어안고 교회를 가슴에 품고 나는 새벽마다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천국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에 한소망 성전 기둥에 여러분 모두의 이름이 새겨져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르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출17:16) 본문의 주어가 누구인지 알아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싸우신 것입니다. 아말렉 족속은 하나님의 성민 이스라엘을 공격함으로써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 대대 후손이 모두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아말렉의 역할을 자청하지 마십시오. 뒤에 처지는 백성도 되지 말고, 뒤에 처진 백성을 공격하는 사람도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들 기도가 여러분의 장기입니까? 내일 아침부터 교회 나와 엎드려 기도하십시다. 여러분이야말로 진정한 이 시대의 지도자 모세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작은 것이지만 피흘려 주님의 제단에 쌓기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물질을 드리십시오. 여러분이야말로 이 시대 진정한 여호수아입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론과 훌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힘내세요. 장로님 우리 한번 해보십시다. 집사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박수 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함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피곤한 팔을 붙들어 주는 아론과 훌, 진정한 여러분 이 시대의 승리자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출애굽기 기사 가운데 불평이 없는 기사, 원망이 없는 기사로 유명합니다. 처음으로 원망 불평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령한 싸움에 동참했을 때에 젊은이들이 피 흘리기를 마다하지 아니하고 골짜기의 전쟁을 치루고 있었고 노병들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아픈 팔을 서로 붙들고 몸부림하며 기도하고 있을 때에 그들의 심장속에는 불평이 없었습니다. 원망이 없었습니다. 

왜 불평이 생깁니까? 왜 원망이 아직도 여러분의 심장에 자리잡고 있습니까? 영적인 전쟁을 게을리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비전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힘써서 싸움하기를 여러분들이 게을리하기 때문은 아닐는지요. 이런 영적인 전쟁을 하나님이 외면하셨나요? 승리는 이스라엘에 돌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승리의 깃발을 꽂고 여호와는 나의 깃발, 여호와는 나의 승리의 깃발. 

세계 야구대회에서 우리가 우승했을 때에 선수들이 일제히 달려나가서 그들이 섰던 그 자리에 깃발을 꽂았습니다. 온 국민들의 콧잔등을 시큰케 하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도했던 모세가 앉았던 자리에 깃발을 꽂지 않았습니다. 싸움하고 돌아오는 여호수아를 위하여 개선문을 만들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이기셨다고. 하나님이 싸우셨다고. 여호와는 나의 깃발, 승리의 깃발, 야훼 닛시의 깃발을 꽂았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하나님이 이기셨다는 승리의 깃발을 꽂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 중보기도의 경험을 얻는 시간입니다. 기도의 능력을 맛보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기도의 능력이 임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특별히 중보기도의 기름부으심이 여러분 모두에게 넘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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