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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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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약 4:1~10)


저는 딸이 없기 때문에 다른 교인들의 따님들, 특히 목양실 교역자들의 어린 따님들을 교회에서 만나게 되면 정말 반갑고 사랑스럽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 아이들에게 '화이트 초콜릿' 한 통만 주면 금세 저와 친해집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 관계에 거의 진전이 없는 아이가 딱 한 명 있는데 바로 대학부 교역자 최성희 전도사님의 둘째 따님인 송도연 양입니다.
  
이 아이는 제가 아무리 먼저 인사하고 말을 붙여 보려고 해도 그저 새침하게 외면하면서 저의 애간장(?)을 태우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원로목사님도 좀 친해 보려 하다가 두 손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몇 번 시도해 본 후에는 '아, 이 아이는 원래 너무 수줍어서 자기 아빠, 엄마, 언니 외에는 아무하고도 사귀지 않는가 보다.'라고 생각하고는 아예 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주일에 목양실 바로 옆에 있는 친교실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도연이가 어떤 대학생 쯤 되어 보이는 언니들 둘과 아주 재미있게 대화를 하고 있는데 평소에 그처럼 새침하던 아이가 아주 깔깔 웃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저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어서 그 언니들에게 "도대체 어떻게 하면 도연이랑 그렇게 친해질 수 있어요?"라고 물어 보았더니, "조금 시간은 걸리지만 인내하면서 기다리면 될 수 있어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있은 후로는 저도 도연이와 친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다시 새롭게 가지고 시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원로목사님처럼 평생 헛수고가 될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지만 그 아이를 볼 때마다 제 속에서 솟아오르는 사랑스러움은 어쩔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도 바로 그처럼 우리와 가까이 사귀며 사랑해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줄 모르고 찾으려 하는 의지도 없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 편에서 먼저 일방적인 사랑을 부어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사랑에 이끌리어 당신 앞으로 가까이 나아오도록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마치 친한 벗처럼 사귀면서 살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기도로 구하면서 찾아오는 자에게 응답으로써 가까이 해 주십니다.

본문 1절부터 3절에 기록하기를 "1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2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고 했습니다.

1절과 2절 상반절은 기도할 줄 모르는 자들이 범하게 되는 대표적인 죄를 보여 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단어들은 1절 하반절의 "정욕"과 2절 상반절의 "욕심"입니다.
  
여기 "정욕"이란 단어는 어떤 '육체적 욕망'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나쁜 욕심'을 뜻하는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2절의 "욕심"이란 단어와 사실상 동의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그런 '나쁜 욕심'을 자기 마음속에서 가장 가깝고도 익숙한 대상으로 사귈 때, 그 결과는 "싸움"과 "다툼"이 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들은 사실 조금 번역이 완화된 것으로 원래의 뜻을 직역하자면 각각 '전쟁(war)'과 '싸움(fighting)'에 해당되는 단어들입니다.
문자 그대로 '신체적이고도 물리적인 싸움'인 것입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이 격렬한 단어를 바로 사람들 사이, 그 중에서도 특히 여기서는 교회 안의 교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말다툼을 묘사하기 위하여 동원한 것입니다.

야고보서 앞 장들에서 이미 우리는 '말과 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여러 번 보았습니다.
분명 초대교회 당시에도 말로 인한 분쟁, 말로 싸우는 다툼이 교인들 간에 큰 문제가 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17세기의 유대인 철학자 스피노자 같은 사람은 "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 기쁨, 평화, 절제, 박애를 선포하는 기독교 신앙을 자랑스럽게 고백한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와 같은 미움에 가득 찬 적개심으로 서로 싸우는지 알 수가 없다. 그들이 고백한다는 여러 덕들보다는 오히려 서로 그처럼 지독한 증오를 발휘하는 것이 마치 그들 신앙생활의 영역 중에서 가장 능숙한 것처럼 내게는 보인다."라고까지 비꼬아 말했던 것이었습니다.
정도는 어떠했든지 간에 야고보 역시 초대 교회 안에서 바로 그와 같이 '개인의 욕심'이 앞선 다툼들을 보면서 몸서리를 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2절의 말씀은 다시 번역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말 성경에는 이 2절의 문장을 크게 세 개의 절(節, clause)로 번역해 두었지만, 그렇게 하면 전후관계의 의미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2절의 말씀은 두 개의 절로 나누는 것이 더 적합합니다.
즉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라고 나누기보다는,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니 너희는 살인한다 / 너희가 탐을 내어도 능히 취하지 못하니 너희는 다투고 싸운다"라고 나누는 것입니다.
  
즉 이 두 절들의 전체 의미를 요약하자면 자기가 '얻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하여 '욕심과 탐심'만이 가득한 사람은 절로 미움과 증오심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싸우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왜 사람 사이에서, 아니 교인들 사이에서조차 그처럼 죽을 둥 살 둥 다투고 싸우게까지 만드는 욕심이 그 마음을 주도하게 됩니까?
그것은 신자라 하면서도 하나님께 바로 구할 줄 모르기 때문에, 즉 합당하게 기도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2절 하반절부터 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라"는 말씀이 지적해 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마음에 늘 욕구불만만 가득 차 있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기도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말한 후에 '아, 참, 너희들도 명색이 신자이니까 기도는 하고 있겠지.'라고 일단 인정해 준 후에 "하지만 그 기도의 동기가 너희들의 욕심에 있으니까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정곡을 찔러 말한 것입니다.
  
사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정욕'과 '욕심'을 따라 드리는 옳지 않은 기도까지 일일이 응답해 주신다면 이 세상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바로 그런 까닭에 많은 기도들이 그 기도한 사람의 소원대로 응답되지는 않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가까운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서로 '말이 통하고 마음이 맞아야' 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신자는 그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그 하나님과 '영적 교통'이 이루어져야만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하고 그 마음속에서 자신의 욕심이 지르는 소리가 더 시끄러우면 하나님과 가까워지기는커녕 한 교회 안의 교인들 사이에서도 항상 다투고 싸우기만 하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앤드류 머레이는 말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 마음에서 세상을 사모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우리 입술의 기도 소리보다 높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의 대화도 없이 서로 눈만 멀뚱하니 바라보는 사이가 어떻게 친구지간이 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욕심이 요구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영혼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그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인자(仁慈)만을 의지하면서 나아오는 자에게 큰 은혜를 베푸시면서 가까이 해 주십니다.

본문 4절부터 6절 상반절에 "4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 5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6a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이 세상과 하나님을 동시에 "벗" 즉 친구로 삼을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일부다처의 행위와 같은 것이며 8절에서 말하고 있는 대로 "두 마음을 품은 자"가 되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과 벗"이 되는 것은 곧 바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것과 직통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사람의 악한 본성은 항상 스스로 '세상과 친구'가 되려 하며 '하나님과는 원수'가 되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점을 철저히 밝혀 두시기 위하여 "간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여기서 "여자들"이라고 한 것은 바로 구약의 호세아서 등에 나와 있는 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기를 마치 신랑이 자기 '신부'를 고른 것 같이 하셨다는 비유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숭배하면서 세상과 짝한 모습을 두고 하나님께서는 바로 "행음"이라고, 즉 간음을 저지른 여인과 같다고 적나라하게 추궁하시는 장면을 호세아서 2장 이하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똑같은 맥락에서 우리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거절하는 자들을 가리켜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12:39)라고 정죄하셨던 것입니다. 

5절의 말씀은 원문의 문장이 조금 애매하기는 하지만 바로 이 문맥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제대로 그 뜻을 살필 수 있습니다.
우선 이 절에서 "성령"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단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내리신 개개인의 '영혼'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은 큰 차이가 나게 됩니다.
후자를 택한다면 이 5절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각 사람의 영혼이 질투하면서 탐욕을 부린다고 하신 말씀을 너희가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해석은 앞서 1절과 2절에 나왔던 사람의 욕심 많은 본성에 대한 말씀과 중복이 되며, 그보다는 지금 우리 개역 성경에 번역된 것처럼 "성령"으로 보는 것이 바로 앞에 있는 4절의 문맥과 더 잘 연결됩니다.
즉 사람이 세상과 짝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모습을 볼 때, 성령께서도 마치 간음한 아내를 두고 질투하는 남편처럼 그 영혼을 도로 찾기를 간절히 사모한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부정을 저지른 아내를 보는 남편의 심정이란 것이 어떤 것이겠습니까?
참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밉고 그 배신감에 잠도 오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죄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로 그런 입장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실로 놀랍도록 너그러우신 반응을 보여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6절 상반절에 기록된 대로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는 뜻밖의 반응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저주하셔야 할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간음한 여자' 같은 우리들을 향하여 오히려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실로 신비한 감정의 소유자이신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을 가리켜 어거스틴은 표현하기를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받고 싶어 하시는 것을 스스로 우리에게 내려 주신다."라고 했습니다.
즉 세상과 친구가 되려 하는 우리를 향하여 불같이 타오르는 당신의 질투심을 오히려 당신의 자비, 온유, 권고, 끝없는 사랑 등의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 주심으로써 하나님 편에서 스스로 다 덮어 버리시는 것입니다.

세상 친구나 연인 사이에서도 한 쪽이 큰 잘못을 저지르거나 잠시 다른 사람에게 한눈을 팔게 됨으로써 그 관계가 깨어질 위기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피해나 배신을 당한 쪽이 끝까지 그 분노를 간직하고 있으면 아무리 잘못한 쪽이 사과를 해도 그 둘 사이는 영원히 갈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반면에 오히려 잘못을 당한 쪽이 상대방을 기꺼이 용서해 주려고 마음을 열면 그 둘 사이의 관계는 훨씬 더 간단하고도 빠르게 회복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와 각종 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신의 택하신 자녀를 사랑해 주지 않으실 수 없는, 당신 스스로도 어쩌실 수가 없는 무한한 인자(仁慈)의 소유자이십니다.
그리고 진정 하나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성도는 하나님의 이런 성품을 확실히 믿고 끝까지 의지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먼저 떠났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되었으며 악인이 되었으며 배교자가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바로 그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가운데 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간음한 여인' 같은 배신자들을 그래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여전히 당신의 친구로 되찾으시고자 아직도 기다려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친구가 나를 극진히 사랑해 주고 어찌하든지 내게 좋게 해 주고자 하는데도 그 심정조차 몰라주어서야 어찌 그의 친구가 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내가 잘못을 저지른 친구가 그래도 나를 기꺼이 용서해 주려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내 쪽에서 그런 친구의 넓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 관계는 다시는 회복될 가망성도 없이 영영히 깨어져 버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저와 여러분은 정말 아직 '은혜 받을 기회'가 있을 때에 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도 오히려 당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써 '당신의 사랑을 확증'해 주신 이 하늘 아버지의 인자하심만을 의지하고 나아감으로써 미워하셔야 마땅할 죄인에게 오히려 더 크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진정 맛보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겸손한 회개로써 다가오는 자에게 참된 기쁨을 주시면서 가까이 해 주십니다.

6절 하반절 이하 10절에 "6b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8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의 벗이 되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겠느냐?'라고 양자택일을 촉구하던 말씀이 여기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마귀를 대적하라"고 훨씬 더 강력한 톤의 명령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처럼 어찌하든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꼭 나타내보여야 하는 자세 한 가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 "겸손한" 자세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은 거부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아무리 인애와 자비가 한이 없으신 하나님이시지만, 아무리 '간음한 여인' 같은 죄인도 기꺼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만 여전히 자기 마음에 '교만'을 품고 나아오는 사람만큼은 아예 '손사래를 치시면서 절대거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진정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서 그 관계를 회복하고 그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교만'만큼은 절대로, 눈곱만큼도 품고 있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반면에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라고 그 '교만'의 정반대인 '겸손'만이 그 무한한 사랑과 은혜를 받기 위한 유일하고도 필수적인 조건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제일 마지막에 나오는 10절의 "주 앞에서 낮추라"는 말씀 역시 당신 앞에 가까이 다가오는 자에게 겸손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당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은혜 받기 위해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히 알겠는데, 그 겸손이란 것이 구체적으로 과연 어떻게 나타나는 것이겠습니까?
8절과 9절 말씀은 그것이 바로 '회개'라고 가르쳐 줍니다.
"죄인" 된 자, 즉 '간음한 여인 같은 자'와 "두 마음을 품은 자" 즉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던 자'들은 '그 손을 깨끗이 하고 그 마음을 성결케 하는 회개'를 통해서만 진정 하나님 쪽으로 확실히 가까이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속에 '겸손'이 있는 참된 회개는 겉으로 반드시 '슬픔과 애통과 눈물'이 동반되어질 수밖에 없다고 9절은 말씀하면서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옛날에 어른 앞에서 젊은이들이 큰 소리를 내어 웃는 것을 두고 방정맞다고 했던 경우처럼 하나님 앞에서 그 자녀 된 신자들이 웃으면서 즐거워하는 것은 큰 실례가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그저 인간적인 교제에서 나오는 웃음과 즐거움만 알고 있는 교인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즉 회개하고 용서 받은 자의 감격과 기쁨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가운데 누리고 있는 '은혜'라는 것은 결코 진정한 은혜가 아닌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장 10절에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는 '영적 근심'을 가지는 성도라야 '구원에 이르게 되는' 진정한 은혜의 기쁨을 맛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자신은 어떠합니까?
어쩌면 오늘날의 현대 교회들 안에서는 그저 '사람끼리만 가까워지는 교제'에서 나오는 피상적인 즐거움, 허허로운 웃음소리만 가득 넘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꼭 있어야 할 죄에 대한 근심이나 회개의 눈물은 한 방울도 없이 그저 '기쁨, 평안, 감사'라는 미사여구만 남발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무시하면서 '내일 죽으리니 오늘 먹고 즐기자'라고 하는 것이나 오십보백보가 아니겠습니까?
오로지 애통하는 진정의 회개만이 하나님의 약속된 은혜를 통하여 나오는 참된 즐거움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겸손만이 오히려 그 탕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면서 그를 다시 당신의 '아들로 높여 주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친구나 연인에게 용서를 빌 때에도 입으로는 미안하다고 하면서 목은 꼿꼿하고 자세는 건방지다면 그 관계가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아주 멀어지고 말 것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도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약속하시면서 당신의 자녀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오로지 겸손한 회개로 나아감으로써 그 하늘 아버지와 참된 기쁜 교제를 나누게 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마귀는 우리가 '대적해야' 우리를 피합니다.
만약 우리가 마귀를 원수로 알고 대적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절로 마귀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 편에서도 '우리를 가까이'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점점 더 가까워지지 않으면 사실상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 편에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어떤 조건으로 성립됨으로써 하나님 편에서도 우리와 가까이 해 주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 편에서는 그 관계에 방해가 될 모든 우리의 죄 문제를 당신의 은혜로써 다 해결해 놓으시고 그 관계를 성립시키는 모든 조건들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다 충족시켜 놓으신 후에 그저 우리 쪽에서 그 사랑에 반응하여 당신께 가까이 나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고맙기 짝이 없는 부르심에도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가장 악하고 교만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높은 사람과 친분을 가지게 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그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는 사람은 어떠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하나님 편에서 먼저 내 쪽으로 손을 내밀어 주시면서 기다려 주고 계시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며 과분하기 짝이 없는 특권이겠습니까?

친구 지간에도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거나 오랫동안 연락도 없으면 그 관계는 자연히 소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과의 아무 영적 교통이 없는 사람, 하나님의 인자하신 심정을 전혀 받아 줄 모르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하여 죄송한 마음조차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교회에 출석은 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하나님과 점점 더 멀어지게 될 뿐인 것입니다. 
  
원래 '간음한 여인'처럼 당신을 떠나 버렸던 이스라엘을 향하여 '사랑의 질투'까지 하시면서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기도로써 가까이, 의지하는 믿음으로써 더 가까이, 애통하는 회개로써 더욱 가까이 나아감으로써 그 하늘 아버지를 자녀로서 사귀게 되는 택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모든 축복과 은혜와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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