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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 (롬 1: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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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 (롬 1:24~32)


제가 알파코스에서 종종 사용하는 유머가 있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립니다. “여러분! 강도하고 마누라하고 누가 더 무서울까요?” 그런 질문을 합니다. 뭐 그리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한 중년신사가 월급을 받아서 두툼한 봉투를 주머니를 넣고 퇴근하는 길이었습니다. 집 앞 골목을 막 도는데 누군가가 칼을 들이대고 돈을 내 놓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을 끝까지 돈을 내놓지 않습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 돈을 내 놓을 수 없다.” 강도가 “너는 돈이 생명보다 더 귀하냐?”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이 신사가 이야기 합니다. “우리 마누라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냐? 내가 집 앞 골목에서 월급을 잃어버렸다고 하면 우리 마누라가 믿어줄 거 같으냐?” 그 때 기가 막힌 강도가 한 마디 합니다. “야, 이 자식아! 그러면 내가 밤새도록 싸돌아다니는데 내가 한 건도 못하고 돌아왔다면 우리 마누라는 믿어 줄 것 같으냐?”

강도보다 마누라가 더 무섭습니다. 그런데 마누라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죄입니다. 죄는 마누라보다 더 무섭습니다. 지진, 해일, 쓰나미보다 무서운 것이 죄입니다. 지진과 해일이 인도, 필리핀 등을 한 번 지나고 나니까 수많은 집들이 허물어지고 수많은 생명이 죽는데 그것은 일회적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죄가 한번 뿌리를 내리면 그것은 영원히 반복됩니다. 죄는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끌고 갑니다. 그래서 죄가 더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 죄가 왜 무섭습니까? 죄는 전염되기 때문입니다. 신종플루보다 죄는 더 빨리 전염이 됩니다. 신종플루는 그래도 건강한 사람에게는 별로 영향이 없는 것 같습니다. 연세가 아주 많은 분들, 노약자들, 다른 지병을 가지고 계신 분들이 병균이 들어올 때 그것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죄는 그렇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나 연약한 사람이나, 부요한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이나, 유식자나 무식자나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죄는 전염이 될 수 있습니다. 죄에 전염되면 그 영혼만이 아니라 그 주위 사람들까지 큰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또한 죄는 유혹의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죄는 아주 달콤하고 매력적입니다.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만약 죄가 길의 똥과 같다면 누가 죄에 가까이 가겠습니까? 냄새나고 옷에 묻을까봐 피해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똥과 같지 않습니다. 죄는 아름다운 국화처럼 빛납니다. 만지고 싶고, 가지고 싶고, 냄새 맡고 싶고, 소유하고 싶은 것이 죄의 매력입니다. 사람들은 죄에 끌려갑니다. 죄는 강력한 유인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끌고 갑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죄의 유혹에 많은 사람들이 허물어져 버리고 맙니다. 이 사회에 유명한 정치인들, 유명한 지식인들, 유명한 재벌들도 그 죄 앞에서는 꼼짝 못하고 그 유혹에 끌려가는 것입니다.

또한 죄는 권세가 있습니다. 인간이 처음 죄를 지을 때는 죄를 선택하는 것 같지만 죄를 한번 짓고 나면 그 다음에는 죄에 끌려갑니다. 죄가 주인 노릇합니다. 죄가 그를 마음 놓고 그를 지배하고 조종하고 다스립니다. 결국 죄의 종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에 보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죄가 무서운 것은 죄에는 형벌이 따라온다는 점입니다. 페널티가 있습니다. 형벌이 따라옵니다. 그래서 참으로 인간들은 누구나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라고 했습니다. 반드시 그 죄는 심판대 앞에 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자장면 집에 들어갔다면 자장면을 먹고 그냥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반드시 카운터 앞에 가서 계산을 해야 합니다.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죗값을 치르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그 카운터 앞을 지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을 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죄란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또한 죄란 분리성이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가정이 분리됩니다. 가정이 깨어집니다. 금술 좋은 부부들도 죄가 들어오면 결국 부부관계가 파괴되어 버립니다. 얼굴도 안 보려하고 말도 안 하려하고 서로 헤어지려 합니다. 가족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원수같이 되어 버립니다. 죄가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가 들어오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죄의 장막이 가로막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도 없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가오실 수도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 59장에 보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이 아니오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성경은 고발하고 있습니다. 죄는 벽을 만들고 분리시킵니다. 그래서 죄가 무서운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부탁하건데 여러분은 가능하면 죄를 멀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합니다. 죄를 가까이 하지 마십시오. 죄를 주머니에 넣고 다니지 마십시오. 마음에 담지 마십시오. 죄를 멀리 떨쳐 버리십시오. 죄의 유혹이 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를 물리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죄를 용납하면 안 됩니다. 마치 불나방이 촛불 앞에 모여드는 것과 같습니다. 그 불꽃만을 보고 달려와서 자기 날개가 다 타는 것도 모르고, 자기 몸이 불타는 것도 모르고 촛불에 달려들다가 결국 죽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오늘도 죄의 향락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 초등학교 때 보면 교실 중간에 난로를 피웁니다. 쇠난로를 피우는데 어떤 때는 연탄을 집어넣기도 하고, 나무를 잘라서 집어넣기도 합니다. 그러면 어떨 때는 아주 뜨겁게 열이 오릅니다. 누가 밀치고 들어오면 자신도 모르게 난로 가까이 밀리기도 합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오면 나일론 옷이 타서 속이 다 나오기도 합니다. 옛날 옷은 나일론이 많아서 불가에 가기만 하면 녹아서 구멍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 안의 스펀지가 다 나옵니다. 여러분! 불에 타는 것도 모르고 우리는 불 가까이 갈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가까이 하시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불행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죄가 여러분의 마음에, 여러분의 가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늘 말씀으로 경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는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죄를 자백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내 죄를 쏟아놓는 것입니다. 입술로 내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 죄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죄이던지 하나님은 그것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쏟아놓는 것입니다. 

요한 1서 1장 9절에 보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입술로 고백하면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의 씻음을 받아야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가 무릎 꿇고 내 죄를 내려놓을 때 주님께서 그 모든 죄악을 씻어버리시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 죄가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멀리 던져 버리신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를 회개치 않을 때 그 죄는 바로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받지 못한 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지 못한 죄는 마치 물건을 쌓아놓든지 그대로 존재하게 됩니다. 차곡차곡 쌓입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지 않고 계속 쌓아놓으면 결국 그 죄는 때가 되면 진노의 둑이 무너지듯이 우리에게 심판으로 다가오게 됩니다. 오늘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죄의 진노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그 진노의 때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두 주 전에 로마서 강해 네 번째 말씀을 함께 묵상했던 것을 되살려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먼저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와 경건치 않은 사람들을 쫓아서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 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2장 5절에 보니까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고 그 임할 진노를 쌓아간다면 그는 결국 불행한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또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가 하나님을 몰랐다고, 이것이 죄인 줄 몰랐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1장 19절과 20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만한 우리 속에 이미 잠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이 만물 안에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한 신성이 이미 분명히 다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모른다고 핑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핑계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세 번째로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에서 이제 떠나야 할 것이다. 우리 인간의 죄의 목록을 묵상했었습니다. 

로마서 2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봅시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감사할 줄로 모릅니다.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으로 어두워져버렸습니다. 죄를 죄인 줄 알지 못합니다. 어두움에 갇혀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참한 모습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매주 묵상해 가면서  좀 더 깊은 진리를 향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서를 보면 크게 4가지 단계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를 벌거벗기시는 단계입니다. 마치 우리가 병원에 가서 X-레이를 찍거나 CT촬영이나 MRI 촬영을 할 때, 때론 속옷까지 벗으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가운만 입고 옷을 다 벗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옷을 벗으면 얼마나 부끄럽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성경을 통해서 말씀의 거울 앞에 우리 자신을 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는 상습적으로 내가 죄인이라는 표현을 많이 씁니다. 정말 내 자신이 어떤 죄인인지, 적나라하게 죄인인가를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서 정말 우리가 어떤 죄인인지를 아주 적나라하게, 실감 있게 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부끄러운 인간에게 그리스도의 의의 옷으로 감싸주십니다.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그리고 세 번째 단계는 우리를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십니다. 죄를 이기기 위한 성령 충만의 사람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로 우리를 그의 제단 위에 올려질 거룩한 산 제물이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거룩한 산 제물은 거룩해야 합니다. 흠이 없어야 합니다. 정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날마다 성화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로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의 네 단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주님께서는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 자신들을 벌거벗기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은 어떠할까요? 우리가 세 가지로 묵상해 보기를 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버림받는 존재가 됩니다. 버림받습니다. 본문 2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에 정욕대로 내버려 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적인 범죄 앞에 그들을 버려두신다는 것입니다. 정욕 앞에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건너뛰어 26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두신다고 했습니다. 또 한 가지 2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내버려 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종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경고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끝까지 거역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학적인 말로 유기라고 합니다. 어떤 미혼모가 되어서 아기를 낳아 고아원 앞에 내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버려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지 모릅니다. 예를 들면 겨울에 아이들이 종종 눈이 오면 추운 줄도 모르고 옷도 두둑히 안 입고 그냥 밖에 나가서 막 눈싸움하고 놉니다. 그러면 엄마가 몇 번이나 말립니다. “야! 너 그렇게 놀면 감기 걸리고 동상 걸려, 그냥 집에 들어와서 쉬어야 돼. 옷을 입고 나가던지.” 그래도 아이가 말을 안 듣습니다. 만약 그냥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손이 동상에 걸립니다. 감기에 걸리고 때로는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부모가 더 이상 만류할 수 없을 때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를 권면하고 권면하다가 끝까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냥 포기해 버립니다. 이것을 포기한다. 유기시킨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내버려둘 때 이것이 우리에게 위기인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은혜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는 것입니다. 은혜 중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때로 우리가 잘못할 때는 징계도 하시고, 채찍질도 하시고, 꾸지람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직까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품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실 때 우리는 은혜에서 떨어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경사진 도로가 있는데 그 경사진 도로에 리어카를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리어카를 붙든 손을 놓아버리면 그 리어카는 경사를 내려가서 아마 골짜기에 쳐 박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리어카를 붙들고 계시듯이 우리를 은혜 안에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감사인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하나님이 그 붙든 리어카를 놓아버리는 순간에 우리는 그 죄로 인해 골짜기에 쳐 박히고 종말을 맞이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그는 바로 철저하게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여러분이 잘못할 때 여러분을 징계하시고 채찍질하신다면 오히려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인간은 그 하나님의 징계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면서 순종의 무릎을 꿇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포기는 바로 심판인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간섭은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두 번째 모습은 무엇입니까? 순리를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진리를 거짓으로 바꿉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꿉니다. 또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합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을 창조하신 분을 우리는 조물주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존재를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여러분! 조물주와 피조물은 그 본질이 다른 것입니다. 조물주이신 하나님은 피조물인 인간에게 생명과 모든 것을 심어주셨습니다. 당연히 우리는 모든 영광을 조물주이신 하나님께 돌려야함에도 불구하고, 조물주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피조물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섬기고, 인간이나 어떤 우상을 경배하고 숭배하는 것이 바로 잘못된 인간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바로 이런 순리가 아니라 역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리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이 순리입니다. 봄이 오면 그 다음에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봄이 온 다음에 갑자기 겨울이 온다면 역리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인간들은 마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자리에 피조물을 올려놓고 우상을 숭배하듯이 그들의 인생 속에서도 역리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본문 26절, 27절에 보면 아주 부끄러운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26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습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좀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여자들이 순리로 써야 될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들은 남자를 만나 결혼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동일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한다면 이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원리를 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역리인 것입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순리대로 살아야 됨에도 불구하고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성적인 타락, 동성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성이 극단에 달해 이제는 동성애를 통해서 사람들은 어떤 쾌락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남자가 남자와 함께 어떤 부끄러운 일을 행한다는 것은 동성애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동성애를 성적 타락의 극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모습은 성적 타락의 시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죄악보다도 강력하게 성적인 유혹이 많은 사람을 찾아옵니다. 해서 때로는 심지어 그리스도인까지도, 믿는 사람들까지도 이 성적인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무방비로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성적인 문제 때문에 가정이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를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성적인 유혹인 것입니다. 이런 성적인 타락, 이것이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요즘 언론지상을 들썩이는 몇 가지 사건이 있습니다. 여러분! ‘나영이 사건’이라고 잘 아실 것입니다. 나영이라는 어린 8살짜리 아이가 어느 날 아침에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고 있는데 52세의 한 남자가 그 아이를 강제로 이끌고 뒷골목 교회의 화장실로 들어가 그 아이를 강제로 성폭행했습니다. 결국 그 아이가 생식기가 파열되고 앞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불구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그 아이의 인생을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너무 너무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법원에서는 그 범죄자에게 12년의 형을 내렸는데 그것이 너무 가볍다고 네티즌과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어떻게 한 사람의 생애를 저렇게 장애자로 만들어 놓았는데 12년으로 끝날 수가 있느냐? 그것도 12년 살다가 모범수라고 8년으로 줄고, 광복절 특사라고 6년 만에 나오고, 이런 경우가 다반사라는 것입니다. 또 돈 있는 변호사를 사면 때로 무죄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잘못된 모습입니다.

나영이 사건 뿐만이 아닙니다. 요즘 ‘은지 사건’이라는 것이 언론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 2년 전에 10살 된 은지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지적장애자였습니다. 무언가 구분력이 부족합니다. 시골 외딴 곳에 엄마와 함께 둘이 살고 있는데 그 동네에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그 어린 10살짜리 아이를 성폭행했습니다. 그리고 40대 버스 기사는 그 아이만이 아니라 그 어머니까지 성폭행했습니다. 그래서 학교 선생님이 그 사실을 알고 사회에 호소했지만 아무도 거기에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사회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안타까운 이야기입니까?

몇 해 전 미국에서는 한 어머니가 남자 애인을 사귀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그 엄마의 딸이 엄마의 애인과 사귀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엄마가 그 소식을 듣고 감옥에서 나와서 딸과 싸움이 났습니다. 결국 경찰에 고발까지 하게 되고 재판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딸과 엄마가 애인을 두고 싸움이 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회가 어디까지 가려고 그럴까요? 얼마나 사람들이 이 성욕에 노출되어 있습니까?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무방비로 대책 없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우리가 성적으로 얼마나 깨끗할 수 있는가?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 때문이 아니라, 권력 때문이 아니라, 아마 이 성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범죄를 쌓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는 숨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는 숨길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순리를 역리로 쓰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치 질서, 동성애, 이 부끄러운 일들이 이 사회에 얼마든지 버젓이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그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이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 28절 말씀을 함께 읽어 봅니다.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었는데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그 타락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은 수많은 죄악의 열매들을 맺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1장 29절부터 32절까지는 인간들이 쌓아가는 수많은 죄악의 열매들을 우리에게 고발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 하나님을 모시지 않은 인생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바로 이런 죄악의 열매들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29절부터 31절까지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아마 인간의 죄는 이보다 수백까지, 수 천 가지가 많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21가지만 여기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을 떠난 중생들은 이런 죄악의 담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 죄악들은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본질적인 죄악입니다. “곧 불의” 불의란 하나님의 의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악의’입니다. ‘추악함’, 아주 더러운 모습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더러워서 어떤 사람은 인간을 ‘악의 공장’이라고까지 명명했습니다. ‘탐욕’,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탐욕의 탑을 쌓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본질적인 죄악들입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는 죄악들이 있습니다. 29절 중간에 보면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이것은 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시기해서 괴롭힙니다. 살인하고 분쟁하고 남을 속입니다. 이것이 다 타인에 대한 죄악입니다. 또한 그 이후에는 공동체 속에서 나타나는 죄악입니다. 

29절 후반부에 보면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라고 나옵니다. 수군수군하는 것은 뒤에서 들리지 않게 헐뜯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마 교회 생활하면서 이런 수군수군하는 죄를 가장 많이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들리지는 않지만 남을 헐뜯는 것이 바로 수군수군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 권사님들이 쑥을 캐 오셔서 떡을 하고 계셨습니다. 제가 가서 그랬습니다. “권사님, 여기서 쑥덕쑥덕하시면 안 됩니다.” 수군수군하거나 쑥덕쑥덕하시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됩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죄입니다. 그런가하면 비방하는 것은 공개적으로 남을 폄하하고 헐뜯는 것입니다. 공동체 안의 죄에 해당됩니다.

또한 ‘능욕’은 남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잘난 체하고 남을 멸시하는 것이며 이 또한 죄악입니다. ‘자랑하는 것’, ‘악을 도모하는 것’, ‘부모를 거역하는 것’ 이것도 가정을 깨뜨리는 죄악입니다. 31절에 보니 ‘우매한 자’, 어리석은 자입니다. 또 ‘배약하는 자’ 신뢰를 저버리고 약속을 깨뜨리는 자입니다.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 이것은 그 마음에 인정이 없는 사람입니다. 잔인함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이런 모든 죄악들은 32절에 보니 “사형에 해당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도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백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씻지 않으면 우리는 죄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하면 죄의 유혹을 떨쳐낼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요한1서 3장 8절에 보니까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마귀에게 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오신 것은 마귀의 일을 깨뜨리고 멸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할 때 우리는 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죄의 유혹이 찾아올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하시기 바랍니다. 죄의 달콤함을 느끼려고 하지 마시고 죄를 향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십시오.

로마서 8장 1절에 보니까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실하게 그를 신뢰한다면 우리는 죄를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죄를 이기게 만들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멀리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혼탁한 세상 가운데서, 이 수많은 죄악의 담을 쌓아가는 세상 속에서 오늘도 주님만을 바라보시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날마다 거룩하게 빚어짐을 당하는, 성화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가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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