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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시 1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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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시 126:5~6)


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오늘은 총동원 전도주일 28일전 주일입니다. 이제 앞으로 총동원 전도주일이 딱 한 달 남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태신자를 정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그 이름을 드리는 날입니다. 오늘 예배에 들어오실 때 여러분들께 분홍색 또는 초록색 전도대상자 카드를 드렸습니다. 여러분께서 전도대상자를 작정 하셨을 줄 압니다. 오늘 영상 하나를 보시고 전도 대상자 이름을 적어내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계획을 하더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먹고 그것을 하나님께 표현하면 하나님은 그 걸음을 인도하시지만, 마음을 먹지 않고 아무런 결심이나 다짐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아무런 일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화이브 생명운동을 우리가 전개하고 있습니다. 다섯 사람,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다섯 번 찾아가자 사실 다섯 명 전도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한 분이 한 명씩, 한 사람을 가슴에 품고 한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자.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만약에 한 분을 정하고 그분을 위해서 하루에 다섯 번을 기도하고 11월 8일 까지 다섯 번 방문 한다고 한다면, 또 그분의 이름을 가슴에 담고 하나님께서 내놓고 기도한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분명히 11월 8일에 그분을 이 자리에 오게 하시고 그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 하지만 한국의 가을은 참 아름답습니다. 요즘 들녘을 보면 너무너무 풍성한 것을 보면서 이 가을이 가져다주는 추수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이 가을에 추수의 기쁨을 진정으로 맛 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씨앗을 뿌린 농부입니다. 어느 누구보다도 농부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추수를 원하고 좋은 열매를 원한다고 할지라도 농부가 해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씨앗을 뿌릴 곳에 가서 밭들 다 갈아엎고 흙을 부드럽게 만듭니다. 그런 후에 씨앗을 뿌립니다. 

보통 가을에 농사지으시는 분들이 특별히 벼농사를 짓는 분들은 벼를 다 수확하고 난 다음에 그것을 갈아엎습니다. 그러면 땅 속에 있던 해충들이 바깥으로 나오고 겨울 내 다 얼어 죽고 그래서 봄에는 그것을 부드럽게 만든 다음에 모를 심습니다. 어떤 분들은 겨울에 또는 이른 봄에 하기도 합니다. 배추나 무를 심으신 분들도 다 거두고 난 다음에 갈아엎거나 아니면 내년 봄에 다시 갈아엎어서 부드럽게 합니다. 딱딱한 곳에 씨앗을 아무리 뿌려 봤자 뿌리를 내려 열매를 거둘 수 없습니다. 흙을 부드럽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저께 이상만 목사님을 모시고 관계 중심 전도라는 귀한 세미나를 들었습니다. 지난 주일에도 제가 말씀을 드렸지만 관계 중심 전도는 우리가 전도하려고 하는 사람과 부드럽게 좋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말을 잘하고 내가 아무리 능력이 있고 돈이 많고 전도를 잘 한다 할지라도 내가 전도하려는 분과 좋은 관계가 맺혀져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 분을 전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마이크를 들고 전철이나 거리에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 보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좋은 분들께 찾아가 전도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통계도 그렇게 세계 통계도 그렇지만 대중 집회를 통해서 교회 나오는 사람의 숫자는 5%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지하철이나 역 광장에서 많은 곳에서 복음을 듣고 내가 예수 믿겠다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70% 이상이 친구의 권유로 아는 분의 권유로 또는 친지의 권유로 교회를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가장 효과적으로 전도하는 것은 관계를 맺은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흙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과 똑같습니다. 흙을 부드럽게 만들어 놓으면 씨앗을 심으면 99%가 납니다. 

평상시에 주변에 있는 분들과 관계를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여러분이 복음을 제시하거나 교회를 소개하면 그 분들은 거의가 다 주님의 전으로 오게 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추수를 한 다음에는 씨앗을 심기 전에 밭을 부드럽게 해야 하듯이 여러분이 전도를 하기 원한다면 누군가와 관계를 잘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관계 중심 전도의 가장 중요한 전제였습니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려면

첫 번째, 관계를 잘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한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

지난 주일에는 제가 거기까지 말씀을 드렸고 오늘은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이제 인격적인 관계가 잘 형성이 되었다고 한다면 이제는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농부가 아무리 좋은 씨앗을 가지고 있어도 아무리 밭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할지라도 그 씨앗을 주머니에 아니면 봉투에 그냥 담아놓고 있으면 절대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물을 흘리면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 다시 말해서 기쁨으로 단을, 곡식을 거두는 자는 누구냐 하면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여러분과 제가 씨앗을 뿌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나가서 남들에게 복음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생명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 입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마28:17-19에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너희는 가라. 주님께서 여러분과 저에게 먼저 예수를 만나게 하시고 생명의 씨앗을 주셨습니다. 우리 가슴속에 생명의 씨앗이 있는데 우리는 이제 관계를 잘 맺어 마음 밭을 부드럽게 한 사람에게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평안을 준다. 그런데 이 평안은 세상이 너희들에게 주는 평안과 같지 않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세사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세상에 너희를 보낸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우리를 세상에 보낸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의 씨앗을 들고 가야 할 곳은 어디인가?

여러분과 제가 이제 복음의 씨앗을 들고 세상으로 가야합니다. 다시 말해서 열매를 얻기 위해서 추수하는 기쁨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가 세상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가야할 사람은 다름 사람이 아니고 여러분과 저 입니다.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을 잘 못하고 사람들만 만나면 얼굴이 빨개지고 논리적이지 못하고 훈련을 잘 받지 못해 제가 전도를 잘 못합니다. 

전도는 전도 훈련을 받고 목사님이나 권사님이나 장로님들이나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이 전도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탁월한 목사가 있고 헌신적인 장로님들이 계시고 또 훈련 많이 받은 교인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이 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의 씨앗을 전달하는 유일한 사람일까요?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기 전 장군으로 있을 때였습니다. 2차 대전 때 어느날 부하 장군들과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장군 하나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장군님 이번에 이 전투에서의 승리는 탁월한 우리 지휘관들의 전략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일반 사병들을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때 아이젠하워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말은 틀린 것일세. 물론 지휘관의 탁월한 지휘 능력도 중요하지만 전쟁은 자네와 내가 일선에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은 맨 앞에 총을 들고 나가 싸우는 한 명 한 명의 병사가 중요하네. 그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전진했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한 거야." 

한 분 한 분이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사랑하는 교우들이 여러분이 살고 있는 삶의 전선에 나아가 여러분이 생명의 씨앗을 부드럽게 만든 세상의 밭에 여러분들이 심어야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상으로 가야한다면 세상은 어디를 의미할까요? 농부를 씨앗을 갖고 집안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방안에다 씨앗을 뿌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농부가 씨앗을 들고 나가는 곳은 들이나 밭이나 산입니다. 바람 불고 춥고 뙤약볕이 나고 고난이 있고 맹수가 올 수 있는 위험한 곳입니다. 방안은 편안하고 안전하고 좋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생명의 씨앗을 갔고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방안이 아닙니다. 교회 안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가야할 곳은 바깥입니다. 세상이라는 것이지요. 주님은 우리보고 교회 안에 들어와 은혜 받고 축복 받고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이야기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우리보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초막을 짓고 그 변화산에서 머물기를 원했던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가자, 내려가자 예수님은 제자들을 이끌고 세상으로 내려와 내려오시자마자 병자를 고치고 복음을 증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고 싶었던 곳은 변화산이 아니고 세상이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이 있다고 한다면 바로 세상입니다. 아파하고 고통당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신음하는 이 세상, 여러분의 삶의 주변 아닙니까? 눈물을 흘리며 씨앗을 뿌리러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도날드 반하우수(Donald Barnhaus)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이 펜실베니아에서 목회를 하시는 데 유명한 설교가 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목사님에게 예수를 안 믿는 그리고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비판하는 무신론자 친구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 분이 암에 걸려 거의 죽음에 이를 때 잘 아는 친구 의사인 장로님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 의사 장로님이 도날드 목사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그 친구가 죽어가고 있으니 병문안 가서 기도 한번 해 주면 어떠냐? 

평상시에 교회를 비판하고 성경을 비판하고 하나님이 없다고 한 이 사람,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더니 환자가 누워서 바라봅니다. 이 목사님이 들어가자마자 침대 머리맡에 의자를 갖다 놓고 팔짱을 끼고 환자를 쳐다봅니다. 30분 이상 계속해서 쳐다보기만 하니까 이 환자가 이야기를 합니다. "자네 왜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가? 내게 할 말이 있지? 한 번 말을 해봐. 자네 여기 왜 왔나? "

그러자 반하우수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가 온 이유는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핍박하고 무시하는 불신자가 죽을 때 지옥에 어떻게 가나 해서 그 모습을 보려고 왔네." 이 말을 듣고 이 환자가 눈을 감고 가만히 있다가 30분 쯤 지나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 목사님의 말을 듣고 이 사람이 30분 동안 마음에 번민이 있었지요? 

그 친구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몇 십년동안 기다렸던 이 목사님의 말 한마디에 불신자가 지옥에 가는 자가 어떻게 죽어가는 가를 보려고 왔다는 이 말에 성령님이 감동감화 시켜서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30분이 지나가 목사님의 손을 잡고 여보게 미안하네. 나를 위해 기도해 줄 수 있겠나? 거기서 반하수 목사님이 그 분의 손을 잡고 눈물로 기도할 때 그 분이 회개하며 죽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고 천국에 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어디인가요? 주님이 없다고 부정하고 하나님 욕하고 예수님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 직장을 잃고 육신의 질병 때문에 부부간에 문제 때문에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우리 주위에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너무나도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분들이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입니다. 그분들이 있는 곳이 들이고 그분들이 있는 곳이 산이고 그분들이 있는 곳이 밭입니다. 평상시에 우리가 그 분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좋은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이번에 그 분들을 찾아갈 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로 돌아올 줄 믿습니다. 

두 번째, 오늘 본문에 보면 우리가 그분들에게 찾아갈 때 울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울며 씨앗을 뿌리러 나가는 자는, 이 두 구절에 두 번 반복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는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전도는 울면서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씨앗을 뿌리러 나가는 자는 울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운다는 말은 머리고 전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전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주위에 매일 강도짓하고 사기치고 거짓말하는 사람이 생각을 해 보세요. 머리로 생각하기에 그 사람은 구원 받을 사람이 아니야, 감옥에 가야할 사람이라고, 그 사람이 예수 믿고 변화되는 것은 말도 안 돼, 그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해 깨달아야 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머리로 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머리로 사람을 대하면 율법주의자가 되게 되어있습니다. 판단하게 되어있습니다.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유대 사람들이 데리고 왔습니다. 율법학자들이 돌을 들어 내 치려고 할 때 예수님은 뭐라고 했습니까?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율법으로 판단하는 자 머리로 사람을 판단하는 자는 율법주의자가 되어 사람을 용서하고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뛰어넘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에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앞섰습니다. 가슴으로 사람을 대했다는 이야기 입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린다는 말은 가슴으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이야기 입니다. 남들의 허물과 죄를 보면 너무 안타깝고 그 사람이 죽어서 지옥 갈 것이 너무 안타깝고, 예수 몰라 방황하고 주님을 몰라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고 그들이 고통당하고 괴로워 할 것이 내 것으로 알고 그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가슴이 따뜻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군가를 전도하고 싶으면 머리로 판단했던 것을 다 내려놓으시고 그 영혼이 고통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주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주님은 여러분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게 만들고 그 눈물을 주님이 받으시고 그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수고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무 힘들게 일하면 눈물이 나오는 것을 경험하셨지요. 사람은 힘들 때 눈물도 흘리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전도하게 되면, 그를 찾아가 발로, 가슴으로, 손을 내밀고 수고하게 되어있습니다. 수고할 때 눈물을 주님은 기억하십니다.

세 번째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고난과 희생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고난당하지 않고 희생하지 않고 헌신하지 않고 누군가를 전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강단에서 아무리 설교를 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고 감동 받지 않고, 전도해야 하는 구나 머리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절대 전도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희생을 해야지. 내가 시간을 내고 재물을 내고 눈물을 흘리며 땀을 내려는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은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니까 전도는 생각이 아니라 전도는 행동인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수고가 구체적으로 있지 아니하면 열매는 절대 거둘 수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화이브 생명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무릎으로 기도하고 발로 찾아가고 손으로 선물을 사다주고 가슴으로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이어주고 입술로 자랑하며 전하는 이런 수고와 희생과 헌신과 눈물이 있을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흘린 눈물을 받으시고 분명히 열매를 맺게 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울지 않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지 우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습니다. 구세군을 창시한 윌리암 부스라는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문제는 울지 않는 사람이다. 우는 사람은 모든 문제가 해결이 되지만 울지 않는 사람은 늘 문제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웁니다. 자기 자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개의 눈물을 흘립니다. 자기가 부족함을 깨닫는 사람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어져 가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울며 그를 전도하려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걸머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실 때 예수님을 보고 우는 여인들을 향해 이렇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여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 주님은 내 주위에 주님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보고 우리와 우리 자녀를 위해 울라. 주님은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 울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마음의 정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흘리는 눈물은 그냥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모두다 주님이 가슴에 담습니다. 여러분이 흘린 눈물과 땀방울의 양만큼 주님은 여러분이 정한 그분을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정하고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는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을 반드시 얻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고 돌아오리라고 되어있습니다. 두 번이나 똑같이 기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눈물과 기쁨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눈물과 기쁨은 서로 상반 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을 흘리는 자는 언젠가 기쁨을 얻게 되어 있습니다.

아기를 낳는 여자들을 보세요. 얼마나 고통을 느낍니까? 얼마나 힘듭니까? 눈물을 흘리며 거의 생명을 잃을 것처럼 고통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래서 해산하는 분만실에 가 보면 여자분들 다시는 아기를 낳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통당하다가도 아기를 낳고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 몇 시간 전에 아팠던 고통과 눈물은 온데간데없고 새 생명 때문에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기쁨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 맛을 모릅니다. 

여러분과 제가 누군가를 전도해서 그가 교회 나와 변화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믿음생활 잘 하는 기쁨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전도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해산의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기쁨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제가 눈물 흘려가며 희생하며 전도한 것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이사야서 55장 11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이와 같이 헛되이 내게로 되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기뻐하는 뜻을 이루며 내가 보낸 일에 형통함이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간 말이 헛되이 빈 말이 되어 돌아오지 않습니다.

눈물 흘려가며 땀 흘려가며 희생하며 수고의 땀방울을 흘려가며 복음을 증언하게 되면 그것이 헛되이 빈 것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마지막,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곡식 단을 거두고 돌아오리라고 했습니다. 

곡식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열매 아닙니까? 우리가 전도하게 되면 수고의 땀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게 되면 반드시 11월 8일 이 자리에 죽어져가는 영혼들이 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전도하게 되면 결실이 분명하게 있습니다. 그분들이 와서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분들이 와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런 영적인 축복이 첫 번째 곡식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 곡식은 그분들이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풍성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솔직히 나 예수 믿고 저주 받았어요. 나 예수 믿고 이혼 했고 망했고 나 예수 믿고 이 세상에서 다 잘못됐다. 나 예수 믿고 번민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게 하고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과 제가 예수를 믿게 되면 누군가에게 복음을 증언하게 되면 그 생명을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 생명이 더 풍성해질 줄로 믿습니다. 

11월 8일, 28일 남았습니다. 이제 광고시간에 여러분이 정한 태신자를 적어내는 시간이 있습니다. 눈물로 씨앗을 뿌리면 반드시 여러분에게 기쁨으로 상급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확장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때문에 생명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일이 저와 여러분, 우리 때문에 이루어지게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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