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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차별은 믿음이 아닙니다 (약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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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은 믿음이 아닙니다 (약 2:1~5)


[존 맥스웰]이라는 리더십 전문가가 쓴 책 중에<인재 경영의 법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인데 서재에 있어서 다시 한 번 꺼내 봤습니다. 이 책에서 [존 맥스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결국“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을 키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보면서 경영이라는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경제문제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경영>이라는 말의 개념을 <사업>이라는 말과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사업>이라는 것은 돈을 벌고 돈을 관리하는 것이요, <경영>이라는 것은 사람을 벌고 사람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사업이 잘 됐다.”하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돈을 벌었다 하는 말이요, “경영이 잘됐다.”하는 말은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행복하게 됐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사업가 기질의 사람이 있고, 경영가기질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기질이 더 훌륭한 것 같습니까? 사업의 능력 보다 경영의 능력이 더 필요 하다고 생각합니다. 경영을 잘 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각자가 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는 그런 환경, 그런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사업을 잘하는 사업가 보다 경영을 잘하는 경영인의 마인드가 되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합니다. 사업가는 망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지만 경영인은 망해도 사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를 보고 인생의 성공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재 경영의 철칙이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사람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도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사람 중에 내가 생각하기를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보다 유능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까? 

사람들의 심리가 묘하다고 합니다. 많은 지인들 중에 아주 절친한 사이라고 자부하면서 남에게 떳떳하게 소개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학력이든, 재산이든, 심지어 얼굴이든지 간에 꼭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랍니다. 그러니까 주위에 자기보다 잘 살거나 자기보다 많이 배우거나 자기보다 잘생기고 자기보다 예쁜 사람이 많지만 가장 친한 친구로는 두지 않는다는 이야깁니다. 요즈음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주로 대학생이 되면 단체 미팅이라는 걸 하게 됩니다. 

남녀가 단체 미팅을 할 때 주선자들이 있게 마련인데 자기들 보다 잘생기거나 예쁜 사람은 절대 안 데리고 나온다잖아요. 그래서 미팅의 수준은 항상 주선자의 수준이라고 하잖아요. 이게 통상적인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인재경영에 성공하려면 이게 아니라는 것이죠. 나보다 능력이 있는 사람을 만나야하고 자기보다 유능한 사람을 쓸 줄 알아야 성공한답니다. 

이게 바로 인재경영의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하면 유명한[앤드류 카네기]는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
“나는 나의 비문에<자기보다 더 유능한 사람을 쓸 줄 아는 지혜를 지녔던 인물 카네기, 여기 고이 잠들다>라고 적고 싶다.”

자, 이처럼 사람을 만나고 그 사람을 경영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다음에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나 지식 또 창의력, 기술 등을 최대한도로 극대화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서로 끄집어내어 실제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능력이란 어디서 나오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서로의 능력이 활용되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뢰성입니다. 믿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전적으로 믿어준다 할 때 용기가 생기고 일의 의욕도 생기고 또 삶에 보람도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가진 능력을 다하려고 해도 아무도 나를 믿어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 훌륭한 능력, 그 많은 지식도 다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여 실제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신뢰라는 것입니다.

이 신뢰성이 인간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입니다. 믿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소위 대 기업이라고 하는 이십대 기업을 조사해 보면 그 가운데 중역에 있는 31%가 가족이랍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결국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족이 아니기에 소외되는 것입니다. 이게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인간관계가 망가져 가는 불 신뢰의 현 주소가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데 경제가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경제라는 것이 돈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경제활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신용입니다.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고 못하고는 그 나라국민들의 신뢰지수에 정비례한다는 겁니다. 근래 몇 년간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이 참 좋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리 썩 좋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좋아질 것입니까? 서로 신뢰해야합니다. 국민이 국가를 신뢰하여 투자하고 국가가 국민을 서로 신뢰하여 일할 자리를 많이 만들어 주는 만큼 경제는 나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일을 하고자 하는 동기도 생기고 충성된 사람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유명한 달란트 비유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 비유에서 주목할 것은 주인이 종들에게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씩을 각각주고 가서 장사해가지고 돌아왔을 때 주인이 종들에게 하는 칭찬이 있습니다.“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하고 칭찬합니다. 

이 비유를 보면서 발견할 수 있는 진리가 있습니다. 결국 주인이 누구에게 일을 맡깁니까? 착하고 충성 된 종에게 입니다. 누구에게 돈과 기술과 건강과 능력을 맡긴다는 것입니까? 착하고 충성된 자, 곧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 신뢰지수에 따라서 일을 맡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신뢰의 관계란 이런 것입니다. 그 신뢰의 지수만큼 오고가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에 이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할 수 있을 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신뢰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신뢰합니까? 무엇으로 우리가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신뢰할 수 있게 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까? 무엇입니까? 우리의 믿음의 행위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행위로 증거 되어야한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내가 지닌 하나님에 대한 신뢰지수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이 임한다는 사실입니다.

자, 이제 그러면 생각해 봅니다. 이 신뢰의 뿌리는 어디입니까? 모든 신뢰의 그 근원을 오늘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장 1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그 믿음에 모든 관계의 신뢰의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그 믿음이 있지요? 하나님이 아버지 되심을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구주되심을 믿습니다. 

나를 위한 십자가의 그 사랑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과 지혜와 그 경륜을 믿습니다. 이 믿음이 기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둘째로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십자가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하자면 나 자신에 대한 정체의식입니다. 

나는 나를 누구라고 믿고 있느냐 말입니다. 세상에 거저 막 굴러다니는 나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그래서 아무렇게 막 살아도 되는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위해 죽으신 나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나입니다. 그런고로 나는 소중한 존재라는 자신의 정체감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합니다. 내가 누군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고 나서 이웃도 믿을 수 있어야합니다. 다른 사람을 믿는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나 외형적인 첫인상으로 판단하거나 다가가지 말고 순전히 믿음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여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이래야 한다는 것입니까? 여기에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라는 중요한 동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 누구도 신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믿음 안에 있는 나를 믿기 때문에 이웃에 대해서도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신앙인 생활입니다. 이제 여기에 중요하고도 구체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2절, 3절을 보면 재밌는 말씀이 나오는데“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 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이것은 악한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행위는 차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이런 차별적으로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똑 같은 하나님의 자녀일 뿐입니다. 

예로부터 가족 중심의 삶을 중시했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 가족에게는 관대하지만 남의 가족에게는 엄격한 경우가 많습니다. 일종의 편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느 시집 간 딸 자랑을 늘어놓는 어머니가 있습니다.“내 딸은 시집을 참 잘 갔어. 사위가 얼마나 착한지 아침에 출근할 때도 딸이 피곤할까봐 깨우지도 않고 자기가 라면 하나 끓여먹고 출근하지요, 내 딸은 10시쯤 일어나서 미장원가서 오전 내내 있다가 점심시간에 사위 회사식당에 가서 사위와 함께 점심 먹고 집에 와서 한숨자고 저녁에 사위가 퇴근하면 저녁 먹으러 나가고...사위가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딸이 하자는 대로 다 하니까 정말 시집을 잘 가서 고생 안하고 살아요.”,“그런데 우리 아들 녀석이 장가를 잘못 가서 고생문이 훤하게 열렸지 뭐예요. 

글쎄 며느리가 매일 아침 늦잠 자느라고 10시에나 일어나니 아들 녀석이 아침도 못 얻어먹고 출근하고 나면 며느리는 미장원가서 머리하고 점심해먹기 싫다고 남편 회사로 쪼르르 달려가서 점심 먹고 쇼핑하고 집에 와서 또 낮잠을 잔다오. 그리고 저녁에 아들이 들어오면 밥도 안 해놓고 나가서 사먹자고 한다니 집에서 따뜻한 밥 한번 못 얻어먹는 아들이 불쌍해서 죽겠어, 장가잘못 가는 바람에....”그럽니다. 

같은 상황이 이렇게 다르게 받아들여 질 수가 있는 겁니까? 딸은 귀엽고 사랑스러운데 며느리는 못 됐고 밉기만 합니다. 이게 아무렇지도 않은 우리들의 편견의 일면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편견이나 차별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차별, 그 반대의 마음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5절 말씀이 바로 그 마음을 대변하고 있습니다.“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여기서 가난한 자라 함은 우리의 차별로 인해 소외된 자들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여 별 것 없다고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은 믿음으로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 무언가 대단한 사람보다 훨씬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난한 자에게 오히려 신뢰가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난 속에서 잃어버린 진실을 되찾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가운데 믿음이 더 좋아질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눈에 보이는 차별을 벗어나서 거품 같은 것, 위선 같은 것, 체면 같은 것, 쓸데없는 것 다 벗어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서로 껴안고 사랑할 때 진실하게 됩니다. 

거기에 신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적으로 자랑할 것이 있는 사람의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있는 사람,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계속되는 5절입니다.“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우리 눈에 보이는 대로 차별하여 서로 대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되고 말 것입니다. 더욱이 매사를 차별의 눈으로 본다면 믿음은 어느 새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차별은 믿음의 생각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인간적인 눈으로 평가하여 차별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믿음의 행위가 아님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에 들어오는 모든 성도들은 믿음 이외의 것은 요구하지도 말고 믿음만 보여주고 믿음으로만 볼 수 있는 공동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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