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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의 기둥 (갈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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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둥 (갈 2:9)


신앙생활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될 수 있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세 기둥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을 소개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야고보는 주님의 육신의 형제입니다. 게바는 베드로를 말하고 요한은 베드로와 함께 했던 사랑의 사도 요한을 말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순서상 게바가 먼저 나오고 그 다음 요한이고 그 다음이 야고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야고보가 먼저 나오고 사도 중에 가장 유명했던 베드로와 요한이 뒤에 나옵니다. 야고보는 주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은 주님을 메시야로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신 후 부활을 목격하고서 믿는 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도들 보다 늦게 믿은 그의 신앙과 생활이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는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는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나중 믿은 사람인데 먼저 믿은 사람보다 믿음이 더 좋고 생활이 더 아름다운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건물이 견고하려면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둥이 든든히 바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견고하려면 교회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로 확고하게 갈아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예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범사를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에 기둥과 같은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 있었던 것처럼 기둥감이 많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성전에 기둥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예루살렘 교회에 기둥과 같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교회에는 기둥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가정의 기둥이 되기를 바랍니다. 회사의 기둥도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우리 교회에서 이 나라의 기둥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원합니다.

기둥이 없으면 건물은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기둥이 약하면 그 건물은 오래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큰 지진이 와도 기둥이 떡 버티고 있으면 그 건물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기둥과 같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늘 교회를 찾아오고, 기도하고, 헌신하여 기둥처럼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교회의 기둥처럼 쓰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실제로 기둥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에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세 사람의 이름만 언급하고 있다. 그 외에 더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언급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은 세 사람이었습니다. 
기둥이 많다는 말은 그 만큼 건물이 크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기둥 같은 성도가 늘어나면 교회는 더욱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기둥이 튼튼하다는 말은 그만큼 건물이 튼튼하다는 말입니다. 교회에 기둥 같은 성도들이 영적으로 튼튼하면 교회는 그만큼 건강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교회의 기둥은 어떠해야 하는지 함께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기둥에 합당한 종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나무나 기둥으로 삼는 것이 아닙니다. 보기에는 튼튼해 보여도 내구성이 약한 나무가 있습니다. 기껏해야 이쑤시개 정도로 쓰임 받는 나무로는 기둥을 만들 수 없습니다. 호주에 가면 투칼립스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는 얼마나 단단한지 도끼로 자를 수 없는 나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전에는 멸망의 자식들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감람나무인 우리들이 좋은 감람나무이신 예수님께 접붙임이 되어서 종자가 변하게 된 것입니다. 

2. 자라야 합니다.

아무리 종자가 좋아도 작은 나무는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지팡이 할 정도의 나무로 기둥을 한다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부러질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자라지 못했는데 교회의 기둥의 역할을 하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잘 못하면 부러지고 맙니다. 기둥처럼 일했는데 무거운 짐을 견디지 못하고 신앙도 포기해 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신도 부러지고 교회도 망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의 역할을 하려면 자라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닮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세례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눅 1:80에 보니 그가 이스라엘에 나타나는 날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외치기 전에 자라고 강해 갔으며 빈들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의 출생과 성장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40절에 보니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자라셨고 강하여 가셨습니다. 

교회의 기둥으로 쓰임 받는 사람들은 신앙이 자라야 합니다. 신앙은 자녀의 신앙이 있고, 청년의 신앙이 있고, 아비의 신앙이 있습니다. 자녀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늘 남의 도움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것처럼 영적인 보호자가 필요합니다. 청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강해서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거나 남을 돌보지는 못합니다. 아비의 신앙을 가진 사람은 영적으로 강하고 그 강한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뿐만 아니라 영적인 자녀들을 출산하고 그들을 돌보고 타인의 보호자가 되어줍니다. 

3. 곧아야 합니다.

종자도 좋고 많이 자랐지만 삐뚤삐뚤 자랐다면 기둥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하늘로 쭉 곧게 뻗은 나무가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삐뚤어진 생각, 삐뚤어진 말투, 삐뚤어진 행동을 하는 사람은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교회의 기둥이 되면 교회가 이상해지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 부정적인 생각, 부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삐뚤어진 나무와 같습니다. 교회를 역기능적으로 만드는 가장 치명적인 독 중에 하나가 부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긍정의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절대 긍정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같은 지역, 같은 빌딩에서 구두를 닦는 두 소년이 있었습니다. 한 소년은 구두를 늘 몇 켤레밖에 구해오지 못하는데, 다른 한 소년은 가득 가득 받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한 소년은 “구두 안 닦으십니까?”하고 부정적인 질문을 하니 사람들이 "안 닦아."라고 부정적으로 대답했고, 다른 한 소년은 “구두 닦으시지요?”라고 긍정적으로 물으니 사람들이 “닦아.” 라고 긍정적으로 대답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이런 대화가 있습니다. “얘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한 늑대는 긍정적이어서 성공하고 잘되는 늑대이고, 한 늑대는 부정적이어서 실패하고 안 되는 늑대란다”, “아빠, 그런데 그 두 마리 늑대 중에서 어느 늑대가 이기는 거야?”, “네가 먹이를 주는 늑대가 이긴단다.” 무슨 뜻입니까? ‘나는 이겨. 나는 승리해. 나는 잘 돼.’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면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은 언제나 긍정 200%의 믿음입니다. 해피데이를 하든 무슨 일을 하든 “아멘”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4. 이겨야 합니다.

계3:12에 보면 이기는 자는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시험과 환란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잘 이겨야 교회의 기둥으로 쓰임을 받는 것 입니다.
배의 돛은 해변가 숲의 많은 나무 가운데 가장 앞에 있는 나무를 사용한다고 들었습니다. 수많은 바람을 이겨내면서 나무는 강해집니다. 때로는 태풍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런 연단을 통해서 나무는 강해지고 그래서 돛으로 사용해도 이상이 없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게 됩니다. 누구도 예외 없이 시험을 통과하게 됩니다. 시험이 왔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견디는 사람은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지만 시험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은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신앙생활 잘하는 것 같아도 나중은 모르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다가도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신앙을 버리고 주님을 떠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시험은 주로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어떤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고 시험 들게 하더라도 우리는 믿음과 사랑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군에 있을 때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훈련소 시절에도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때 서울 모 대학에 다니다 군에 온, 같은 내무반의 한 훈련병이 목사님을 얼마나 핍박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한 번은 방독면을 쓰지 않고 가스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훈련을 받았는데 그때 그 사람이 죽을 뻔했습니다. 그날 그 사람이 목사님에게 달려와서 눈물을 흘리며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자기도 교인이었는데 자기를 전도한 청년회장이 아주 부끄러운 짓을 하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했답니다. ‘이제 보니 교인들은 위선자구나.’ 그래서 그 때부터 교회를 떠났을 뿐 아니라 교회와 교인들을 아주 싫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가 손해를 봅니다. 청년회장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고 여러분의 목사인 저도 사람이니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 실수를 붙잡고 매달리면 자기가 망합니다. 목사님이 실수하든 장로님이 실수하든 그것 때문에 여러분이 손해 보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넘어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야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사실 요즘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시험도 아닙니다. 요즘 신앙인들은 초대교회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집에서 쫓겨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도 아닌데 시험에 들어서 교회를 옮기는 일도 흔하고, 신앙을 포기하는 일도 흔합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걱정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성도들의 신앙이 너무나 나약해졌습니다. 초대교회 때는 목숨까지 걸고 믿음과 교회를 지켰는데 요즘은 조그마한 일만 있어도 교회를 옮기고 신앙을 포기합니다. 한번 신앙을 가지면 죽어도 버리지 않겠다는 마음이 별로 없습니다. 내 교회의식이 없습니다. 여기 아니면 교회가 없냐는 식입니다. 시험을 이겨야 교회의 기둥이 될 수 있습니다. 

5. 다듬어져야 합니다.

기둥으로 쓸 나무를 선택하면 모든 가지를 쳐내고 몸통만 남깁니다. 그리고 몸통을 아주 매끄럽게 다듬습니다. 그래야 기둥으로 쓸 수 있는 것입니다.
시냇가의 조약돌이 물살에 의해서 다른 돌들과 부딪히면서 매끄러운 돌이 되듯이 신앙생활도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부딪히면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잘 통과한 사람들은 내면은 강하지만 외면은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만약 잘 다듬어지지 않아서 날카로운 것이 많은 나무가 기둥이 된다면 그 건물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가시에 찔리고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기둥이 되는 사람들이 날카롭고 찌르는 가시를 가지고 있다면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 받으려고 왔다가 상처를 받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난 부분을 잘 다듬어서 기둥으로 쓰시기 위해서 나를 깨는 상대를 붙이시는 것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나는 매끄러운 기둥으로 다듬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오히려 감사해야 합니다. 

6. 굵어야 합니다.

나무가 종자도 좋고 강하고 곧고 매끄러운데 지팡이처럼 얇다면 큰 건물에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통이 커야 기둥이 되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이 째째한 사람은 기둥이 될 수 없습니다. 작은 일에 시험 들고 넘어지는 사람은 얇은 사람이다. 자기 맘에 좀 안들면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자기 맘에 잘 안 들어도 통 크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웬만한 일은 넉넉하게 소화를 해내는 사람이 성전의 기둥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통이 작으니까 작은 일에도 시험이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통이 큰 사람은 큰 꿈을 갖고 크게 생각하고 크게 말합니다. 
기도를 해도 큰 기도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입을 크게 열기를 원하시는 분입니다. 

7.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기둥감인데 들판에 있다면 그 나무는 기둥이 아닙니다. 기둥은 건물 안에 있으면서 건물의 하중을 받쳐줘야 하는 것입니다.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은 하나님 앞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집에 있어야 합니다. 교회 중직자 즉 장로, 권사, 안수집사의 조건 중에 하나가 ‘주의 전에 있기를 힘쓰는가?’입니다. 예배 시간에 교회 오면 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일이 있을 때 교회만 가면 찾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교회의 기둥인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에 자주 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처럼 세상에서 천 날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면 교회를 자꾸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집회를 인도하고 난 후에 끝나는 시간이 낮이든 밤이든 곧바로 집으로 갑니다. 어떤 때는 경상도에서 혹은 전라도에서 밤 11시에 끝났는데도 그곳에서 잠을 자지 않고 집으로 갑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랑하는 가족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날 밤은 집회 장소에 있는 숙소에서 잠을 자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만나기 위해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운전해서 집으로 갑니다. 
교회 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면 교회를 자꾸만 찾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의 기둥은 교회를 사랑하고 늘 교회에 있어야 합니다. 

8. 짐을 짊어져야 합니다.

기둥은 건물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기둥이 짊을 지지 않는다면 그 건물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기둥들은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큰 일이 있을 때 중직자들이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을 보여줘야 성도들이 보고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둥과 같은 사람들이 짐을 지지 않는데 어떻게 다른 평신도들이 짐을 지겠습니까?

사울왕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울 때 골리앗 때문에 40일 동안이나 부끄러움을 당했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문제는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이스라엘의 대표로 나가서 골리앗과 싸웠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이 나타나기 까지 아무도 십자가를 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 전쟁에 승리하게 하기 위하여 다윗의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여서 다윗을 전쟁터네 보냈습니다. 전쟁터에 도착한 다윗은 골리앗의 조롱소리를 듣고 견딜 수 없는 의분을 품었습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를 던져서 골리앗을 쓰러뜨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십자가를 짊어졌던 다윗 때문에 그 전쟁에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위기 가운데서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의 모습을 보시고 그를 이스라엘의 기둥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은 교회에 어려움이 있으면 팔을 걷고 뛰어나가 무거운 짐을 지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슬슬 피하는 사람, 뒤에서 구경이나 하는 사람은 기둥이 아닙니다. 기도의 짐을 지십시오. 물질의 짐도 지십시오. 헌신의 짐을 지십시오. 전도의 짐도 지십시오.

9.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기둥이 옮겨 다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건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건물은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기둥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시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과 악인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시청각 교재가 나옵니다. 의인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입니다. 여기서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고 물가는 말씀이 있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바람이 불면 흔들리기는 하지만 자리를 옮기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람에 나는 겨는 다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 따라 사라져 버립니다. 자기 자리가 없는 것이 바람에 나는 겨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복인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교회의 문제 점 중에 하나가 떠돌이 신자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통계에서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 교회 저 교회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그분들이 한 교회에 정착해서 신앙의 뿌리를 내리고 교회 생활을 잘한다면 한국교회가 얼마나 힘을 얻겠습니까? 얼마 전 우리 교회에서 나간 분이 출석했던 교회 목사님을 만난 일이 있습니다. 그분이 신앙생활 잘하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그 목사님 교회는 2년 다녔고 다른 교회로 옮겼다가 또 한 번 옮긴 상태라고 합니다. 우리교회를 나간지가 약 5년 정도 된 것 같은데 그 사이에 벌써 세 번째 교회라니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인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은 핍박이 극심했으나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교회를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루살렘교회의 기둥이 된 것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사정 때문에 교회를 옮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작은 감정적인 부딪힘 때문에 교회를 옮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 그런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 집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들어가야 할 내 집은 하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때로는 내가 사는 집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내 집보다 더 좋은 집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리를 지키고 내 교회를 사랑해야 합니다. 

10. 협력해야 합니다.

기둥이 하나 밖에 없는 건물은 아주 작은 건물입니다. 거의 모든 건물은 여러 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건물의 하중을 여러 개의 기둥들이 나누어서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고 견딜 수 있습니다. 

협력을 잘하면 안정감이 있는 교회가 됩니다. 외발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세요. 얼마나 불안합니까? 두발 자전거는 외발 자전거보다 훨씬 안정감이 있습니다. 네발 자동차는 외발 자전거나 두발 자전거 보다 훨씬 더 안정감이 있습니다.
어느 한 기둥이 건물의 하중을 다 짊어지면 안 됩니다. 그건 너무 불안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짐도 여러 사람이 나누어서 짊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안정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짐을 나눠집시다. 혹시 교회의 짐을 전혀 지고 있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이제부터라도 짐을 나눠지기를 바랍니다. 

11.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합니다. 

솔로몬 성전 앞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서있습니다. 오른쪽 기둥은 야긴이고, 왼쪽 기둥은 보아스입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 두 기둥은 성전의 하중을 자신들이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저가 세우리라’, ‘그에게 능력이 있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람들도 야긴과 보아스가 되어야 합니다. 자신이 교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이 세우신다’,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가장 뛰어난 사도였습니다. 그는 놀라운 사역을 한 사역자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면서 기둥처럼 쓰임 받아도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하나님에게 능력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탁월한 재주가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재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인정하는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서 쓰임 받지만 자신의 능력을 가지고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실 수가 없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위대한 미술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게 된 배경은 그의 겸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중심 때문에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미켈란젤로가 마리아 상을 만든 다음 스스로 도취되어 “사람이 만든 작품이 어찌 이렇게 훌륭할 수 있는가?”하며 마리아 가슴 띠에 자기 이름을 기록하고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흥분해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의 눈앞에 푸른 하늘과 뭉게구름, 아름다운 산천, 꽃과 벌, 광활한 세계가 펼쳐졌습니다. 그 순간 그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대하고 놀라운 이 우주를 지으시고도 사인하지 않으셨는데, 나는 이 작은 작품 하나를 만들어 놓고 거기에 도취되어 사인을 하다니…….’ 그 후로 미켈란젤로는 모든 작품에 그의 이름을 기록도 하지 않고 사인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린 것입니다. 그의 이런 자세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미술계의 기둥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예루살렘교회에 세 개의 기둥이 있음을 말하지만 예루살렘 교회가 막 세워질 때는 바나바까지 합쳐서 네 개의 기둥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는 기도의 기둥입니다. 그는 낙타 무릎이 되도록 기도했던 사람입니다. 교회는 기도의 용사들이 많아야 합니다. 기도에 모든 것을 걸고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의 기둥들이 많을 때 교회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전도의 기둥입니다. 베드로는 성령 받은 후에 자주 복음을 전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요한과 함께 다닐 때도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베드로가 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전도의 기둥들이 나와야 합니다. 1년에 몇 십 명, 몇 백 명, 몇 천 명 전도하는 전도왕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전도하지는 못해도 전도가 생활화 된 전도의 기둥들이 나와야 합니다. 요한은 사랑의 기둥이었습니다. 그의 별명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요한은 베드로나 바울처럼 능력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교회가 평안합니다. 사랑이 충만하면 희생하게 됩니다. 우리교회에 사랑의 기둥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바나바는 헌신의 기둥입니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기의 밭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교회에는 이런 헌신자들이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든든히 서게 되는 것입니다. 
기왕에 무슨 일을 하려거든 자신이 하는 일을 남보다 더 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학교를 다녀도, 직장을 다녀도 남보다 더 잘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사업을 해도 남보다 더 잘하려고 애를 쓰십시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왕에 신앙생활 하는 거 하나님의 교회의 기둥이 되도록 하십시오. 그래서 마지막 심판대에서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듣고 상급도 풍성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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