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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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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 (창 21:1~7) 
 
  
하나님의 3가지 약속 

어느 가정에 시험만 보면 꼴찌 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의 아버지가 너무나 답답하고 화가 난 나머지 아들을 불러놓고 약속을 합니다. "애야, 너 이번 시험에 꼴찌를 면하면 너희 소원을 한 가지 들어주겠다. 만약 또 꼴찌를 한다면 너는 그날로부터 내 아들이 아니다" 드디어 시험을 치르고 아들이 성적표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 아버지는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들에게 묻습니다. "아들아, 이번에는 성적이 어떠니?" 그때 아들이 대답합니다. "아저씨 누구세요"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할 말을 잃어버립니다. 왜입니까? 이번에도 꼴찌를 했기 때문이죠. 이아들도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와 약속을 지켜 아버지를 한번 웃게 해볼 만한데 말입니다. 

구약성경 창세기의 아브람 이야기를 읽다보면 '약속'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아브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고 3가지의 약속을 합니다. 그 약속을 기록한 것이 창세기 12: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로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본문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한 첫 약속은 '내가 너를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겠다' 는 것입니다.  현재 아브람이 살아가고 있는 땅은 국가 공동체가 아닙니다. 아주 작은 '씨족공동체'죠. 하나님은 아주 보잘 것 없는 한 가정을 통해서 큰 민족, 곧 한 나라를 세워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두 번째 약속은 '내가 너의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이다'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한 가정을 통하여 큰 민족은 물론 아브람이라는 한 개인의 이름도 널리 알리겠다 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그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알아준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요? 또 그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알고 불러준다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이죠. 그런 의미에서 옆 사람의 이름을 한번 여쭤 보시죠. 그리고 이름을 부르며 이렇게 인사해봅시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창대하게 할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아브람에게 어떤 별명이 붙었나요? '믿음의 조상'이죠. 이렇게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셨습니다. 

오늘 여러분이 축복한 사람의 이름이 가는 곳곳마다 창대해지를 축복합니다.  세 번째 약속은 '내가 너를 복이 되게 할 것이다' 입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이전의 개역성경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어떤 일에 있어서 출발점으로 삼겠다는 것이죠.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자랑스럽고 행복한 일입니다. 

저는 대한국민 국민이지만 막상 우리나라의 지도를 그리려고 연필을 들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반면 이스라엘 지도는 너무 단순해서 쉽게 그립니다. 먼저 지중해 해안선을 그립니다. 그리고 갈릴리 호수를 그리고 요단강을 그립니다. 마지막으로 사해를 그리면 이스라엘의 대략적인 지도가 완성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있어요. 갈리리 호수의 물의 근원이 어디인가? 바로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헐몬산의 눈 녹은 물이 근원이죠. 

이 작은 물줄기가 갈릴리 호수를 이루고 요단을 흘러 사해바다를 이룹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큰 민족 이룰 것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사실이 있어요. 하나님은 아브람을 막연하게 부른 것이 아니라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고, 큰 민족을 이루게 하고, 어디를 가든지 복의 근원이 되도록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과 더불어 아브람을 부르신 것이죠.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에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약속의 말씀을 주실지 기대하며 예배하는 여러분 되기기를 바랍니다. 

불신앙의 장벽, 하나님의 설득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셨는데 그 약속이 언제 이루어졌나요? 약속이 아주 쉽게 이루어졌나요? 저의 답은 아니 성경의 답은 '아니오!' 입니다. 하나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지기까지 아브람에게 많은 장벽들이 있었어요. 

첫 번째 '아들의 장벽'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 '약속하셨어요. 이 약속이 이루지기 위해 아브람에게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아들이죠. 아들이 있어야 대를 이어 많은 자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람의 현실은 아들이 없었던 것이죠. 아브람은 아들 없는 장벽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나요? 아브람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한 사건을 통해 그의 얄팍한 지식을 발견합니다. 자기의 종을 자기의 상속자로 삼으려 하는 것이죠. 

창세기 15:3에서 아브람은 자기에게 아들 없음을 두고 하나님께 항변합니다.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지 않으셨으니 자기의 종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아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겠다는 겁니다. 이때 하나님은 엘리에셀이 아브람의 상속자가 '아니다'라 말합니다. 참 상속자는 '너의 몸에서 난 자(창15:4)'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런 후에 아이기 생기지 않아 불안해하며 엘리에셀을 상속자를 삼으려는 아브람을 장막에서 이끌어 냅니다. 아브람을 캄캄한 어둠 속에 홀로 서게 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말씀 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아브람에게 어떻게 하나요? 현장학습 하는 것이죠. 아브람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설득하고 있죠. 그것도 캄캄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저와 같이 너의 자손들이 번성하여 큰 민족 이루게 될 것을  확인해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와 같은 얼마나 자상한 하나님입니까? 

어머니와 같은 너무나도 포근한 가슴을 가지 하나님이 아닌가요? 뭔가에 충족되지 않고, 뭔가에 갈급해하는 여러분들이 이런 하나님을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상함과 포근한 하나님을 느낀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신뢰를 회복하게 됩니다. 창세기 15:6은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겼다."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회복된 셈이죠. 그런데 우리가 아브람의 이야기를 계속 읽다보면 이러한 믿음의 회복도 잠시 잠깐인 것을 알게 됩니다. 

두 번째 '의심의 장벽'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계속해서 확인해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람은 물론 그의 아내 사래까지 하나님을 향한 의심의 장벽을 쌓아갑니다. 먼저 아브람의 의심의 장벽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에는 늘 의심하는 습성이 남아 있는 듯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심은 우리의 삶에 유익보다는 무익함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브람 역시 한 인간이기에 의심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습성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해 큰 민족 이루어질 것을 거듭 확인합니다. 

그 가운데 한 이야기가 아브람과 사래의 이름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십니다. 그런 후에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17:5)'으로 바꾸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새 이름 '아브라함'을 정해주신 겁니다. 무슨 뜻이죠? '민족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의 이름 속에는 그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를 잘 담고 있어요.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우리 각자의 이름 속에는 그 이름에 걸맞게 살라는 소원이 담겨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신 사건은' '아브라함'을 통하여 '큰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하나님의 소원이 담겨져 있죠. 아브라함과 더불어 그의 아내 사래의 이름도 바꾸라 하셨어요. '사래'를 '사라'로 바꾸신 것이죠. 사라의 뜻이 무엇인가요? '민족의 어머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로 바꾼 후에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가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를 여러 민족의 어머니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여러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창17: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몸을 통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 약속하십니다. 아브라함 부부를 통해 큰 민족 이룰 것을 거듭 강조하며 확인시키고 계시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아브라함의 자세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아들이 사라에게 있을 것이라 했을 때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창 17:17)." 아브라함은 생물학적으로 계산합니다. 

'내 나이 99세, 나의 아내 사라의 나이  90세...과연 아들의 생산이 가능한가?'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땅 바닥에 엎드리어 웃을 수밖에 없었죠. 그리고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급한 마음에 그의 여종 하갈의 몸에서 낳은 이스마엘을 '상속자'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대답합니다. '이스마엘이 상속자가 아니야!' '너와 사라의 몸에서 난 아들이 큰 민족을 이룰 약속의 사람이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사라의 몸에서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면서 약속을 더 구체화 하십니다. 

그 아이의 이름이 무엇인가요? '이삭(창17:19)', '웃음' 이라는 뜻이죠. 저는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네요. 하나님 참 재미있는 분이다. 아브라함, 사라, 이삭과 같은 이름을 짓지 않나. 작명가(作名家) 하나님이라 할까요? 또 코미디언이라 할까요? 생물학적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사람에게 아들이 있다고 했을 때 비웃는 듯한 아브라함에게 '너 나의 말에 웃었으니 아들 낳으면 이름 이삭이라 해라'하니 말입니다. 여하튼 아들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의심은 계속되었고, 이와 더불어 하나님의 설득과 약속의 확인 역시 계속 반복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우리가 살펴볼 두 번째 의심의 주인공은 사라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이 아들을 줄 것이라 할 때 웃어버리는 불신앙을 저지릅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하나님이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납니다. 그때를 시점해서 아브라함은 어떤 세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라 생각이 되어 집니다.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물과 음식을 대접하게 되죠. 음식을 먹은 세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에 있냐?' 묻습니다. 

그런 후에 아브라함에게 말하기를 "내년 이맘때...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0)" 합니다. 이사라가 듣게 되었던 것이죠. 사라가 어떻게 반응하나요?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18:12)." 사라 역시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이해해버립니다. '나와 나의 남편은 노쇠하였는데, 나는 생리가 끊어져서 여성의 역할이 다 되었는데 무슨 말 하는 거야!' 그런 후에 사라 역시 남편 아브라함처럼 속으로 웃어버리죠. 

하나님을 의심하는 것이 어찌 부부가 그리 똑 같은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있어요. 아브라함 부부처럼 아무리 사소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도 하찮게 여기면 안 됩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하찮게 여기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두고 진지하게 설득하며 확인시키는데 아브라함 부부는 웃어 넘겨버리고 있는 것이죠. 우리가 쓰는 표현으로 '하나님 저 양반, 웃기고 있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비웃는 것이죠. 여러분, '비웃음'이 무엇인지 아세요? 제가 오늘 가르쳐 드릴터이니 잊어버리지 마세요. '비 오늘날에 웃는 웃음'을 비웃음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비오는 날에는 상대방을 보면서 절대로 웃으면 안 됩니다. 그러다가 한 대 맞습니다. 언젠가 이런 얼음장 같은 유머를 하다가 저희 고등부 학생들에게 왕따 당할 뻔 했으니까 혹 교회학교를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들이나 학생들을 가정에 둔 학부모님들은 이런 유머를 절대로 쓰지 마세요. 

사실 '비웃음' 이라는 뜻은 '흉을 보듯이 빈정거리거나 업신여기며 웃는 웃음이죠.'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업신여기며 웃은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비웃음, 특별히 사라의 비웃음에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아브라함에게 말합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창18:13)." 무슨 의미입니까? '왜 의심하고 비웃느냐'라는 말입니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창18:14)." 이렇듯 갑작스러운 하나님의 반격에 사라는 상당히 당황스러워합니다. 아마도 사라가 분위기를 파악한 듯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부인하죠.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어떻게 말합니까? '아니, 너 웃었어!' 참 재미있는 장면이라 여겨집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사라에게 분명 말씀하였어요.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런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이라는 불신앙으로 모두 차단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가능성을 막아버립니다. 그리고고 스스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얼굴에 웃음을 잃어버리고 근심에 싸여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하나님의 가능성은 무한합니다.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문제 앞에 도와주시기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의심의 장벽 때문에 하나님의 가능성을 막아버리지 말기를 소원합니다. 불신앙가운데 설득하시고 약속을 확인 시키시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지난 그 하나님의 경험을 소원하세요.  

웃게 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영화나 TV를 보면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어지다가 화면이 바뀌면서 1년 후 혹은 10년 후라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오늘 말씀의 장면도 이처럼 1년 후입니다. 하나님은 '아들을 주겠다' 아브라함은 '못 믿겠다'는 공방이 계속되는 가운데 약속한 1년이 지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브라함의 가정에 아기의 울음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옵니다. 

100세, 91세 노부부의 웃음소리가 문밖으로 흘러나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아들이 태어난 것이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가르쳐준 대로 아들의 이름을 '이삭(창21:3)'이라 짓습니다. 아브라함의 가정에 웃음 잔치가 벌어진 것이죠. 오늘 읽은 창세기 21장 1절은 아브라함 가정의 웃음잔치가 있게 된 이유를 이야기 해줍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아브라함 가정에 웃음이 있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아브라함의 가정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아브라함의 가정과 늘 함께 동행 하고 계신 것이죠. 이 하나님을 의심쟁이 사라는 오늘 읽은 본문 21:6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나요?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누가 자기를 웃게 했다 합니까? 하나님이죠. 참으로 아름다운 간증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비웃음'을 감사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다는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죠.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여러분들에게도 사라와 같은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풀어주어야 할 문제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가 아들 없으므로 웃음을 잃고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 가운데 있는 삶의 여러 문제로 인하여 얼굴에 웃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나요? 

웃음을 잃은 채 우리의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지 않나요? 하나님께 많은 기도의 제목을 소원으로 올려 드렸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셔서 얼굴에 웃음을 잃어버렸나요? 이러한 이유로 하나님을 향한 불신의 장벽은 계속 높아지고 있나요? 여러분, 하나님의 가능성을 믿으세요. 오늘 아브라함과 사라를 웃게 하신 그 하나님을 기억하세요. 지금 여러분의 모든 상황이 웃지못할 상황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웃게 하실 겁니다. 

마지막으로 사라의 간증 하나를 더 볼까요? 사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웃게 하셨는데, 또 나의 이 감사와 환희의 웃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함께 웃을 것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감격과 기쁨의 웃음이 여러분만의 웃음이 아니라 그 웃음을 듣는 모든 사람의 웃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통하여 가는 곳곳마다 슬픔이 웃음으로 변하고, 질병이 치유로 변하고, 분쟁과 다툼이 있는 곳에 화평이 있게 되고, 불신앙이 있는 곳에 믿음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사라를 웃게 하신 하나님이 여러분도 웃게 하실 거라는 믿음으로 한 주간 살아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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