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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도리어 사람의 일을? (막 8: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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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사람의 일을? (막 8:27~38)


아무리 먼 길이라고 해도 결국은 한 걸음씩 내딛는 가운데 마침내 목적지까지 도달하게 됩니다. 그런데 믿음 안에서만은 여전히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길 역시 한 걸음씩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한 번에 한 걸음씩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산을 움직이는 믿음 역시도 하루아침에 생겨지는 것이 아닌 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더 큰 것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윗이 하루아침에 골리앗을 물리치고 유명해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골리앗을 물리칠 수 있는 믿음이 어떻게 저에게 생겨졌을까요? 다윗은 사무엘이 그의 집을 찾을 때까지도 부모나 형들에게서조차 재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랬기에 너는 양이나 치고 있으라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전쟁터의 형들에게 심부름을 갔을 때도 여전히 형들이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양들은 어떻게 하고 여기까지 놀러왔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바로 그 양들을 치던 광야에서 하나님의 의지하는 법과 그 하나님 안에서 승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양을 움키려고 달려드는 사자를 물리쳤고 곰을 찢어 죽였습니다. 그렇게 훈련된 다윗이기에 골리앗조차도 사자나 곰보다 나을 것이 없어 보였던 것이요 그랬기에 그는 담대하게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물매에 돌 다섯 개만 가지고 골리앗을 향해 달려 나갔던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을 믿어 한 가족이 된 성도들 치고 좋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분도 안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항상 복을 누리며 살기를 모두가 다 원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복을 누리는 것도 아니기에 때때로 더 답답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로마서 10장 9절로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또한 갈라디아서 3장 8절로 9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답은 곧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요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또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자녀로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는 당연히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누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믿음의 출발은 신앙고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이나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불러주신 우리들이 당연히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이렇듯 풍성한 열매 맺는 나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자라나면서 이윽고는 많은 열매가 맺으며 거기에 많은 새와 짐승이 깃들이는 나무로까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형통한 복을 누리게 되기 위해서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까지 가십니다. 이미 제자들은 뱃세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고 또 얼마 후에는 칠병이어의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거기다가 거라사 군대 귀신들린 자가 귀신이 쫓겨남에 따라 고침을 받고 온전해지는 것을 보았으며 가버나움의 백부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멀리 두로 지방으로 나가서 그곳에서 수로보니게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이 고침을 받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와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통해서는 결국 믿음이란 두려워하지 않고 믿기만 하는 것이요 믿음으로 주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모든 문제의 해결을 주님께 맡기는 것임을 그들은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주님께 이루어주시기를 끝까지 간구하는 열심도 필요하다는 것을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한다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시금 뱃세다 광야로 오셔서 사람들이 데리고 온 맹인을 고쳐주실 때 고백을 통한 믿음이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또한 깨닫게 됩니다. 이후 예수님은 다시 갈릴리를 떠나 가이사랴 빌립보까지 가셔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대답합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합니다.”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믿음의 고백으로부터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역사를 경험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씨앗이라도 그것이 땅에 심겨지지 않으면 그냥 한 알의 씨앗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씨는 땅에 떨어져 썩어져야 비로소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출발은 바로 땅에 뿌려지는 것입니다. 

그 씨를 뿌리는 것이 우리 믿음으로서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이요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고 듣고 배워서 아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을 통해 좋은 믿음의 사람 복된 사람으로 자라게 돕는 밑거름이 되는 것이지 아무리 밑거름이 있어도 씨앗이 뿌려지지 않는다면 어디서 무슨 싹이 나서 자라겠습니까?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이십니다. 

그가 마땅히 우리가 맞아야 할 채찍을 대신해서 맞으시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기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것입니다. 그 영원한 속죄의 효력이 바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자에게 미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에게는 결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아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좋으신 하나님이요 그분이 눈동자와 같이 우리를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데 거기에 누가 감히 대적할 수가 있겠고 우리를 해롭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기껏해야 우리가 가는 길에 방해물을 놓을 정도지만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힘든 장애물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고 해도 거기에 매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제 저희와 함께 예배도 드리시곤 하는 권 권사님께서 좋은 글과 그림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래 우리교회 홈페이지에 옮겨 놓았습니다. 소개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고질병과 고칠 병> 
가끔씩 웃음&유머치료 교실에 오시는 80대 할머니가 계시는데 언제나 환한 얼굴로 싱글벙글이다.
부럽기도 하고 또 그 비결이 궁금해서 말을 붙였다.. 
“할머니 요즘 건강하시죠?”
그러자 할머니 씩씩하게 대답하신다. 
“응.. 아주 아주 건강해... 말기위암 빼고는 다 좋아..”
그 대답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백만 볼트 전기로 감전되는 듯한 전율을 느꼈다. 
할머니는 너무 너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서 집도 있고, 남편도 있고 자식들도 5명이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암이 몸에 들어와서 예정된 시간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니 얼마나 즐겁고 행복하느냐는 것이다. 
언제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알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 할머니를 만나면서 삶이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마음의 평안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행복은 끝없이 몰아치는 상황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능력에 달려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암에 걸렸을지라도 고질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암치유율은 38%에 그치지만, 점하나 붙여서 고칠 병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암의 치유율은 70%까지 올라간다는 통계가 있다. 
똑같은 암이지만 죽을병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암을 통해서 삶과 죽음에 대한 통찰을 얻었다는 분들도 많다 

암을 죽음으로 연결하느냐, 암을 삶으로 해석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의 긍정적인 태도에 달려 있다.
미국의 17대 대통령인 앤드류 존슨은 이러한 긍정의 힘을 발휘했던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는 세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몹시 가난하여 학교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열 살에 양복점을 들어가 성실하게 일했고 돈을 벌고 결혼한 후에야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이후에 존슨은 정치에 뛰어들어 주지사, 상원의원이 된 후에 16대 미 대통령인 링컨을 보좌하는 부통령이 된다.   
그리고 링컨 대통령이 암살된 후 미국 17대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지만 상대편으로 부터 맹렬한 비판을 당한다.
"한 나라를 이끌어가는 대통령이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하다니 말이 됩니까?" 
그러자 존슨은 언제나 침착하게 대답한다. 그리고 이 한마디에 상황을 역전시켜버린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가 초등학교를 다녔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행복은 세상을 바라보는 긍정적인 틀이다. 긍정적인 생각 없이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행복해질 수 없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을 원한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 행복한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고서는, 밝음을 선택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해지거나 웃을 수 없다는 것이다. 

“힘들다”라는 말이 있다. 힘이 들어 죽겠다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힘이 들어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힘이 몸 안에 들어오니 당연히 몸이 잠시 피곤하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짜증난다”라는 말도 짜증이 나간다라고 해석할 수 있는 행복프로가 된다.
“세상 어디에도 행복은 없지만, 누구의 가슴에도 행복은 있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마음의 행복을 끄집어 내는 데는 긍정적인 해석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좋게 생각하자. 
그것이 사실은 자신을 즐겁게 바라보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하는 유머의 힘이다. 
그리고 웃자. 하하하...
웃으면 행복이 저절로 샘솟는다는 속설을 믿고 실천하는 착한사람....

이렇게 믿음으로 매고 푸는 귀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이는 곧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먼저냐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가치관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제자들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합니다. 이는 말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메시야이신 주님께서 그렇게 죽을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베드로가 해야 될 생각은 사람의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이어야 하는데도 사람의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나름대로는 주님을 생각한다고 해서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데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라는 것은 그의 핑계일 뿐이고 사실은 자기 속마음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어야 자기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지금까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했던 고생의 보람도 있는 것이지 예수가 버려져서 죽임을 당한다고 하면 우리는 뭐냐 하는 마음이 언뜻 든 겁니다. 그러니 펄쩍 뛸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또는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많은 일들 가운데 과연 우리가 가장 앞에 내세워야 할 최우선 순위가 무엇인지,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성도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것이요 땅 끝까지 이르도록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대로 주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언제 어디서건 성도로서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일 가운데서 무엇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까? 그 삶에 있어서 가정과 직장과 친구와 교회를 놓고 말한다면 그 순서가 어떻게 되어야 되겠습니까? 이것을 예수님은 단순하게 구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살기도 하고 일하기도 해야 하는데 실제는 하나님의 뜻은 저 멀리 가 버리고 그저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것 내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세상에서 수고하는 그 어떤 일이라 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해나가게 된다면 그 일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와 세상을 구분지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하든지 항상 하나님이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하던 그 일은 더 이상 내 일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봐야 하고 따라서 무엇을 하든 결코 하나님의 눈밖에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럴 때 주께서도 잘했다 칭찬하시면서 너희가 수고한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시지 않겠습니까? 아무쪼록 우리들의 모든 삶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귀한 역사가 이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기뻐하시도록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내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이유는 다름이 아닙니다. 그건 내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나와 하나님을 분리해서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한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예수 따로, 나 따로 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과 내가 하나되어 살아가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내 안에 계신 주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러니까 첫째로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내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는 하나님과 다른 생각은 하려고 하지도 말고 내 마음에 두려고 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운전할 때 많은 분들이 네비게이션을 사용을 합니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가장 빠른 길을 자동으로 계산해서 보여줍니다. 그런데도 종종 다른 생각을 하다가 또는 네비게이션을 잘못봐서 네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길을 놓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영 목적지로 못 가는 것이 아닙니다. 네비게이션 시스템은 현재의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신속하게 길을 다시 찾아줍니다. 

하나님도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방향을 말씀하시고 길을 잃으면 즉시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지난 날에 매이지 마십시오. 오직 우리의 생각을 현재와 미래로 돌려서 우리 길에 놓인 새로운 기회를 계속 찾아야 됩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놓친 것 같은 기회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한데 그렇게 따라가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부인입니다. 이렇게 하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그 길이 그 방법이 가장 쉽고 가장 빠른 길임을 기억하십시오. 한데 어떤 길은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불안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실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불안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 자기 십자가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는 여기저기서 비난의 목소리도 들리기도 하고 아주 이상한 길로 가고 있는 것 같아서 더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뢰입니다. 그렇게 신뢰하기까지 그것이 바로 자기 십자가입니다. 

아울러 그 길은 때로 죽기를 각오해야 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고 하십니다. 주님과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라는 것입니다. 

죽을 각오로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예수를 믿으라고 함께 교회에 나가자고 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목숨을 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죽을 각오까지 한다면 그거 못할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온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내게는 너무도 소중한 사람이라면 목숨을 걸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쉬지도 못하고 힘들게 수고하며 돈을 버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런 저런 새나가는 구멍이 많다면 그 모든 수고가 얼마나 허망합니까? 하지만 먼저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면 하나님께서 모든 구멍을 막아주시고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는 것도 막아주시고 메뚜기를 막아 열매가 해를 당하지 않도록 해 주신다고 했는데 어느 것이 더 남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주일 성수도 마찬가지고요.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하셨으니 주일을 복된 날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어디서건 당당해야 합니다. 나 예수 믿는다. 나 교회 다닌다. 나는 말씀대로 따르겠다. 그럼 당장은 핍박이 따르지만 백배로 거두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지금까지 내 힘으로 잘 살아보자고 고생고생하며 수고했는데 그래 얻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온 몸이 아프고 이런 저런 속상한 일들로 가득하지 않나요? 하지만 주님이 우리로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당당하십시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지금 세상은 마치 예수 믿는 것이 큰 잘못이라도 되는 듯 그렇게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안티 기독교라 해서 기독교가 이 땅에서 말살되는 그 날까지 기독교와 기독교인에 대한 비판을 퍼부어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 자신이 말씀 안에 바로 서 있는지 돌아볼 수 있어서 더 감사합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주님께 우리 목숨을 걸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죠. 

그렇다면 왜 목숨을 걸지 못하는가? 그게 바로 믿음의 문제 즉 신뢰의 부족입니다. 주님께 그냥 맡기세요. 그냥 믿고 따라가세요. 그럼 안 가고 안 하면 달라집니까? 몸이 피곤하다고 새벽 기도회 빠지면 몸이 더 건강해집디까?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 몸을 건강으로 지켜주셔야 하고 잠시 눈을 붙여도 더 개운하게 만들어주셔야 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더 이상 내 생각 우리 생각에 매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우십시오. 때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럼 우리는 다 이해가 되어야 무엇을 합니까? 해 보니까 되더라는 말을 하잖아요. 그거 그럼 알고 한 겁니까? 때로는 나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면 좋다니까 해 보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의 일이 아닌 세상의 일을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이제 이후로 온전한 말씀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인생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져야 할 때입니다. 부정적인 기억을 정리하고 새롭게 시작할 때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특별한 보물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존재로 여기십시오. 우리가 실패할 때나 사람들이 우리를 따돌릴 때도 하나님은 그 상황 뒤에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환경을 극복할 방법이 안 보여도 하나님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있으시며 그것을 위한 방법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 거하면 어떤 장애도 극복할 수 있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계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음을 기억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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