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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명의 말씀 (행 5: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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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행 5:12~42) 
 
 
5장 후반부는 성령님께서는 누룩을 단호히 제거하시므로 순결한 교회가 된 결과 교회가 더욱 힘 있게 하나님 나라를 증언해 나가게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먼저 12-16절은 성령님께서 교회를 정화시키신 후 믿는 자가 더욱 많아졌음을 기록합니다. 교회는 은밀히 역사하는 사단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 마음을 같이하여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다시금 “다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으로 모였습니다(12). 사도들의 손에 의해 표적과 기사가 많이 발생했는데, 이는 신약성경이 기록되지 않은 당시로서는 사도들의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가 있음을 증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 때문에 교회는 4장에서 표적과 기사를 위해 기도했었고(4:30), 그 기도는 필요를 따라 적절한 때에 적절한 방법들로 응답되었습니다.

12-13절을 보면 백성들 중에서 ‘믿고 모이는 자’와 ‘상종하지 않는 자’가 확연하게 구별되기 시작합니다. 독특하게 구별되었으나 믿지 않는 자들이 “감히” 교회를 얕잡아 보지 못했습니다. 과거에는 은밀히 활동했던 이단들이 오늘날 교회를 만만히 넘봅니다. 심각한 문제는 이단적 사상들이 스며들어도 말씀이 부족한 교회는 스스로 분별하여 정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참으로 필요한 힘은 권력과 금력보다 세속이 감히 상종치 못할 거룩성입니다. 초대교회는 성령께서 거룩하게 하신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 모두 마음을 같이하여 사도의 가르침에 집중했습니다. 그들은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 사단의 은밀한 공격을 막는 첩경임을 잘 알았습니다.

사도들이 계속 백성들을 가르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 당파는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그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17-18). 사도들이 모두 잡혔으니 복음 역사는 끝난 것 같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는 더 이상 길이 없는 그 때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습니다. 주의 사자가 감옥 문을 열고 사도들을 석방시키며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고 했습니다(19-20). 

사도들은 순종했습니다. 한편 공회는 사도들이 감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것을 알고 당황합니다.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보고받고 사도들을 데려왔으나 백성에게 돌을 맞을까 두려워 폭력을 쓰지는 못했습니다(21-26).

이 대목에서 말씀의 선포를 어찌하든지 막으려는 세력과 어떤 형편에서도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려는 세력의 대조가 보입니다. 이러한 대조 속에서 막는 세력은 겉보기에는 막강한 권세를 가졌으나 실상 무력합니다. 당황하며 두려워합니다. 반면 아무 권세도 없는 사도들은 거침없이 담대합니다. 

감옥에서 기이하게 풀어주신 분은 사도들이 당국자들에게 체포되지 않도록 하실 수도 있었겠지요. 즉, 이 대목은 체포와 핍박당함도 결국 하나님의 허락하심 속에서만 가능함을 똑똑히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 한 교회의 힘찬 전진을 막을 수 있는 세력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교회의 편에 서셔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까지 모인 대산헤드린 공회 앞에 섰습니다. 대제사장은 엄하게 금지한 공회의 지시를 무시하고 사도들의 가르침을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한 것을 지적하며, 이런 행위는 예수님의 피에 대한 책임을 뒤집어씌우려는 행위라 말합니다(28). 

촌뜨기들이 감히 산헤드린 공회의 권위에 저항한 것이 몹시 괘씸했겠지요. 하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대답합니다(29). 여기서 ‘순종’은 ‘철저한 복종’을 뜻합니다. 사도들이 공회에 불복종한 것은 하나님께 철저히 복종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참 신앙은 단지 이론만을 즐기고 있지 않고 철저한 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성경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롬 13:1)고 가르칩니다. 베드로도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고 가르쳤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의무입니다. 권위를 가볍게 여기고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교회의 불복종이 정당한 때가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가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금지하거나 금지하신 것을 명할 때입니다. 이때는 불복종하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순종함이 마땅한 줄 알고 과감하게 불복종을 선언합니다.

그 후 사도들은 공회에 복음을 전합니다. 공회원들은 예수님을 “나무에 달아” 죽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이 인정하는 모세오경에는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신 21:23)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 확정하기 위해 돌로 쳐 죽이지 않고 나무 십자가에 매달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높이셔서 왕과 구주로 삼으셨습니다. 사도들은 이 일에 증인이며, 성령님도 이 일에 증인이십니다. 사도들은 당대의 대석학들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생명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사도들이 다시 공회에 잡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저로서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장본인들조차 복음을 듣고 회개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뿐만 아니라 공회원들도 생명의 말씀을 듣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큰 죄인일지라도 회개하고 죄 사함을 얻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법정에 서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지 않았다면 갈릴리 촌사람에 불과한 증인들이 최고 권력층에게 복음을 전해줄 수 없었겠지요. 생명의 말씀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가난하고 없는 자들만의 위하지 않습니다. 권세 자들에게도 생명의 말씀으로 작용합니다.

공회원들은 회개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선천적 앉은뱅이가 완치된 사건을 성경에 비추어 정직하게 해석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또한 옥문이 잠겨있고 간수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상황에서 사도들이 감쪽같이 사라진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든 일을 정직하게 직면했더라면 그들의 태도는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답하기 곤란하고 해석하기 곤란한 문제들을 모두 회피했습니다. 앉은뱅이를 보고서는 할 말이 없어졌을 뿐이고, 사도들을 취조하면서는 탈옥 문제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기존의 권위로 억압하려고만 했을 뿐입니다.

기존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이가 많아지고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이미 견고하게 굳어진 자신의 견해를 바꾸기가 어렵습니다. 신기한 경험으로 체득한 신념은 더욱 바꾸기 힘듭니다. 해석하기 난해한 문제들을 직면할 때 골치 아프게 따지기보다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처리하면 쉽고 편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자세가 자칫 생명의 말씀까지도 거절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거절하면 남는 것은 저주뿐이지요. 우리네 삶이 늘 시간에 쫓기는 바쁜 생활이지만 돌아보면 말씀을 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기회는 누구에게든지 여러 차례 제공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들을 외면하지 않고 선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엡 5:16).

벌벌 떨면서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공회원들에게도 금지된 가르침을 계속하는 것을 보고 공회원들은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했습니다(33). 그때 바리새인 중에 모든 백성에게 존경받는 가말리엘이 이 일을 신중하게 판단하도록 조언했습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38-39). 가말리엘의 무간섭 방임주의 견해는 당시 흥분한 공회원들을 진정시키는 적절한 조언으로 작용했습니다. 가말리엘은 공회원 중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돕는 자로 등장합니다.

한 가지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가말리엘의 견해가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지혜롭고 적절했다 할지라도 불변의 진리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5장 전반부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통해 침투하는 교묘한 사단의 역사를 무간섭 방임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다. 적극적으로 개입했지요. 말씀 전파를 막는 공회의 결정에 대해서도 사도들은 적극적으로 불복종했습니다. 

6장의 구제 문제도 신속히 처리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가말리엘의 견해를 근거로 삼아 마땅히 해야 할 자기 책임을 외면하고 방관하는 자세로 일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의 원칙들을 지키는 가운데 현 상황에서의 최선책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찾아가야 합니다.

공회는 가말리엘의 견해를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았습니다(40). 말씀 앞에 회개하지 않는 자는 더욱 강한 박해자가 되는 경향이 있지요. 채찍질은 원래 ‘껍질을 벗기다’는 뜻입니다. 소가죽으로 만든 매로 치면 첫 매부터 살이 찢어지는 수가 많았지요. 아마 사도들은 생명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피투성이가 되었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습니다(41). 또한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였습니다(42).

‘은혜의 왕국’이라하면 상당히 고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은혜의 왕국을 증시하는 교회는 목가적인 분위기 속에서 낭만적으로 자라가지 않았습니다. 성령님의 온전한 보호하심은 고난이라고는 전혀 없는 따스한 요람 같은 환경 속에서가 아니라 전쟁터 같은 환경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는 외적인 핍박과 내적인 사단의 역사에 대항하여 피 흘리기까지 치열하게 싸우면서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존재로 성장해 갔습니다. 그 가운데서 가장 우선해야 할 사역이 생명의 말씀을 전파하는 일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말씀이므로 생명을 걸고 전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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