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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 (막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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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 (막 14:3~9)

 
감사의 계절입니다.  다음 주일은 우리교회가 지키는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추수 감사주일은 1년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서 감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은혜로운 주일입니다.  이 계절에 여러분의 가정 위에, 여러분의 기도 위에, 여러분의 일터 위에, 여러분이 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하나님의 풍성하신 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여러분들에게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 땅에서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를 바라보는 내 방식이 문제입니다.  그 문제에 반응하는 내 반응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 하나만 제대로 붙들어도 예수를 바로 믿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일이 터졌을 때, "예수님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반응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내 경험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갈까?  내 이성과 내 재주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뚫고 나갈까?  그렇게 자기 방식과 자기 경험으로 문제를 뚫고 나가다가 그것이 막히면 그제서야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장난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방식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 경험과 자기 이성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자기 경험과 자기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지도 마십시오.  올바르고 건강한 관계는 자기 방식과 경험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다툼이 일어납니다.  분쟁이 일어납니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다 깨어지고 맙니다.  자기 방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결코 건강한 인격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다르다는 것과 틀리다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방식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방식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를 뿐입니다.  가령, 치약을 짜는 것을 놓고도 저는 치약을 끝에서 짭니다.  그런데 집사람은 가운데를 짭니다.  아이들은 자기 기분에 따라서 짭니다.  처음에는 저도 치약을 끝에서 짜지 않고 왜 이렇게 보기 싫게 가운데서 짜느냐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가운데서 짜든, 끝에서 짜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어디를 짜든 결국에는 그 치약을 다 쓸 것은 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흐트러진 치약을 끝에서 밀어 올려서 보기 좋게 하는 것은 저만이 누릴 수 있는 헌신의 기쁨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치약을 끝에서 짠다고 해서 그것이 맞고, 가운데서 짠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를 뿐입니다.  이 다름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건강한 인격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그 단체가 평안합니다.  다양성을 수용할 줄 아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그 단체가 부흥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은 문제를 소망으로 보려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이 주시는 소망으로 보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바라보시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랑으로 볼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눈을 열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사람이든, 어떤 기업이든 하나님 앞에 열심히 충성되게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틀림없이 그 노고에 대한 보상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식언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보상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보상의 내용은 그 눈이 바라보는 것을 통하여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먼저 소망의 시각을 갖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시각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시각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마음의 그림이 미래의 현실을 창조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거기에 앉아서 말씀을 듣지만 그러나 그 마음에는 어마어마한 그림을 그리시기를 바랍니다.  저 유대 언덕의 주님과 함께 믿음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저 하늘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저 땅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의 그림을 그리십시오.  고마워하는 인간의 마음을 그리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에게 제일 강력하게 권면하는 것은 감사하는 인간이 되라는 겁니다.  고마워하는 인격이 되라는 겁니다.  이것이 주님의 권면입니다.  이것이 명령입니다.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향한 주님의 부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할 줄 모르는 심령은 인간의 최대의 악입니다.  사람이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 앞에 섰을 때에 제일 기분이 나쁩니다.  전혀 감사의 마음이 없는 사람 앞에 섰을 때에 그것처럼 기분 나쁜 것은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질병은 감사를 모르는 인격입니다.  인간이 감사를 모르면 동물과 똑 같아집니다.  인간이 감사를 잃어버리면 짐승과 같아집니다.  고맙다는 말, 감사하다는 말을 하면 하나님의 질서가 회복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는 말을 자주 하면 가정도 질서가 회복됩니다.  나라의 질서도 회복됩니다.  개인의 건강도 회복됩니다.  성경은 감사의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제사를 드리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당연한 때에 당연한 일로 감사를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감사하기 어려운 때에, 생각해 보았을 때 별로 감사할 조건도 아닌 것을 가지고 감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우리 주변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머리카락이 하나 둘 씩 빠져나가는, 그래서 소갈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변머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광 씨가 지은 '평생 감사'라는 책에 보면, 대머리가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머리도 깊이 묵상하면 감사할 조건이 무려 여섯 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첫째, 여성에게는 거의 없는 현상이다.  따라서 모든 여성들은 대머리가 아닌 것을 인해서 감사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가 대머리가 된다.  그분이 날마다 앞 이마를 쓰다듬어 주시기 때문이다.  옆에 그런 분이 계시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세요"라고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는, 대머리인 사람 치고 얻어먹고 사는 사람이 없다.  대머리는 구걸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네 번째, 비교적 목회자들이 대머리가 된 사람이 많다.  엘리사도 대머리였다.
다섯 번째, 비누와 샴푸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대머리는 상당히 절감하는 인생을 살 수가 있다.
여섯 번째, 하나님을 편하게 해 드린다.  주님은 날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세시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인의 우연한 감사가 그것이 영원한 나라에 이르기까지 오래도록 기억된 감사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여인은 자신의 감사가 그렇게 까지 오래도록 기억될 감사라는 것을 모르고 감사했을 것입니다.  그저 이 여인은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이 너무 감사해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날의 감사는 주님께서 오래도록 기억하실만한 감사의 사건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마가복음의 기자는 이 여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본문 3절은 그냥 "한 여자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왔다.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2장 3절에 의하면 이 여자가 바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베다니의 나사로의 누이인 마리아가 오늘 본문의 바로 그 한 여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자기가 살고 있는 동네의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시몬은 본래 나병환자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에 의해서 치유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 고마워서 잔치를 열었을 것입니다.  이 잔치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달려온 것이 아마도 마리아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옥합을 갖고 달려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것보다 더 황당한 사건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보시며 본문 9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본문 9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 하시니라"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이 여인의 행위가 오래도록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여인의 한 순간의 우연한 행동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었던 비밀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요?

한 여인의 우연한 헌신이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가 될 수 있었던 비밀, 그 첫째는 악한 인생 틈에서 드려진 선한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시대적 상황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의 배경이라고 할 수 있는 14장 1절과 2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때는 바야흐로 예수를 잡아죽이려는 당시의 정치 종교 지도자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것이 본문의 배경입니다.  또 본문의 사건이 끝나는 10절에는 이 음모의 도구로써 쓰임을 받는 또 한 사람의 악한 제자가 등장합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주려고 대제사장들에게 가매."

1절과 2절에 악한 지도자들의 모습이 등장하고, 10절에 악한 제자 유다가 등장을 합니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서 소개되고 있는 사건이 오늘 본문이라는 사실을 주목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악한 시대에 악한 사람들의 틈새에서 주 앞에 바쳐진 전혀 다른 한 여인의 행동을 우리는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사시던 그때에만 그렇게 악했을까요?  그렇게 악한 인생들이 예수님이 사시던 그 때에만 많았을까요?  오늘은 다를까요?  오늘 우리는 인터넷 시대를 살아가면서 특별히 악플러들의 등장을 봅니다.  이 악플러들의 등장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고 있습니까?  끊임없이 우리를 좌절과 절망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 악한 모습들.  어디 그뿐입니까?  차마 입에 담기조차 부끄럽고 흉악한 이 시대의 죄악들을 우리는 매일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악한 모습임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악한 인생들의 틈새 사이에서 전혀 다른 한 여인의 얼굴을 등장시키시는 주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여인의 선한 행동을 오히려 악한 행동으로 비난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은 6절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좋은 일이라는 단어는 선한 일, 아름다운 일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행했던 그 일은 이 여인을 비난하고 있는 악한 사람들의 악한 행위와 비교되고 있는 선한 행위, 그리고 아름다운 행위라고 주님께서 변호하시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행위가 돋보이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여인은 악한 시대, 그리고 악한 인생들의 틈새에서 세상을 본받지 않고 세상과 다른 모습의 삶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의 헌신은 더욱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헌신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여러분과 저도 덩달아 악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이 이기적이라고 해서 우리도 똑같이 이기적인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세상이 악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인 나만이라도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계십니까?  이 시간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세상을 의미 없이 따라가는 그런 삶의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세상을 거스려 하나님의 선을 붙잡고 그 선한 일 가운데 자신의 모습을 드리는 삶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이어야 합니다.  세상의 악함을 탓하기 보다 하나님의 선을 붙잡고 살았던 한 여인의 헌신을 우리 주님은 오래도록 기억될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이 드리는 감사도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가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들의 헌신이 주 앞에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헌신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상은 악하지만, 악한 사람들의 틈새 속에서 살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선하심을 붙잡고 우리가 그 선을 위한 도구로 살고자 한다면 여러분과 저의 헌신은 주님께서 오래도록 기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부족한 중에도 이 여인은 자신의 전체를 드려진 헌신을 드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따금씩 느끼는 감동이 있다면 그 감동 중에 하나는 사람이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깨뜨리고 나의 존재를 개방하는 모습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큰 목적과 더 큰 선을 위해서 기쁘게 자신의 것을 깨뜨리는 사람들.  우리는 그런 모습들 속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습니다.  우리 주변에 감동을 일으키는 사건을 보면 그런 공통적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이 한 여인의 행동에 대해서 그렇게 감동을 받으신 이유는 이 여인이 자신의 존재를 깨뜨리는 모습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그냥 단순히 옥합을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그녀 자신을 깨뜨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본문의 주인공인 마리아가 주 앞에 드릴 수 있었던 헌신의 방법에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옥합을 열어서 주님의 머리에 향유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에는 중요한 손님이 자기 집에 오면 언제나 향유를 준비했다가 몇 방울씩 머리에 떨어뜨리는 그런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 정도로도 마리아의 헌신은 칭찬 받을만한 헌신이었습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헌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 헌신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옥합을 열어서 향유 전체를 주님께 붓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것은 당시에 최고의 뉴스가 되고, 최고의 헌신으로 기억될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이런 최고의 헌신으로 만족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리아가 취했던 헌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옥합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향유를 다 부어버리는 것입니다.  그 옥합은 다시 다른 용도로 사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향유만 붓고 옥합은 보관했다가 다시 향유를 채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용될 수도 있었는데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분에게만 그의 전부를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최소한의 헌신도 아니고, 최고의 헌신도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의 전체를 부어드리는 헌신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이 여인을 향한 주님의 평가를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 8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여기에서 힘을 다했다는 말은 본래 힘을 다 소진했다는 뜻입니다.  남겨둘 힘이 없었다, 모든 것을 부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그녀의 전체 모든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런 헌신을 주님은 오래도록 기억될 헌신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이 여인이 주님께 드린 향유의 가치에 대해서 말하기를 그것은 삼백 데나리온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평범한 노동자가 하루 열심히 일하면 받을 수 있었던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면 삼백 데나리온은 몇 날치의 노동에 해당되는 품삯입니까?  제가 너무 심오한 질문을 했습니까?  노동자 하루의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라고 한다면 삼백 데나리온은 삼백일을 일해야 모을 수 있는 돈입니다.  거의 일년 동안을 먹지 않고 쓰지도 않고 일해서 모아야 되는 돈입니다.  이 여인은 일년의 월급을 주님께 드렸다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떤 특별하고도 귀한 목적을 위해서, 혹은 주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서 일년의 월급을 주님께 드려본 일이 있습니까?  아마도 망설여질 것입니다.  주저할 일입니다.  "그러면 나는 무엇을 먹고 삽니까?"라고 항의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이 여인에게는 이런 주저함이나 망설임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주저 없이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향유를 다 부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옥합의 문제가 아닙니다.  향유의 문제도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옥합을 깨뜨렸다는 것은 그녀의 존재를 깨뜨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녀는 그녀의 마음을 부었습니다.  그녀의 사랑의 모든 것을 부어 바쳤습니다.  바로 이런 헌신이 우리 주님을 감동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천하 어디에서든지, 그 누구에 의해서든지 이 여인의 헌신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던지는 중요한 도전이 있습니다.  그 도전은 이것은 향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옥합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의 문제입니다.  내 신앙생활의 한 과정 속에서 복음이라는 높은 목적을 위해서 내 자아를 깨뜨려 주 앞에 바쳐본 적이 있습니까?  바로 이것이 부족한 중에서도 이 여인이 자신의 전체를 드린 헌신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주께 드려지는 모든 헌금의 기회, 그리고 모든 감사의 기회는 바로 이런 자신의 전체를 드리는 것을 시험하는 기회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물질 앞에서 자유할 수 있느냐 하는 테스트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두 주일 전에 재정부에서 두 안수집사님이 제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목사님께서 설교를 좀 잘 하셔서 추수감사헌금이 많이 나오도록 해 주세요.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설교를 좀 더 잘해서 헌금이 많이 나오고, 설교를 못해서 헌금이 적게 나온다면 이것이 우리들의 온전한 신앙이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과거에 포항의 어느 큰 교회에서는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당회원은 50만원을, 안수집사와 권사는 30만원을, 그리고 서리집사는 20만원을 헌금하기로 당회에서 결의를 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설교를 한다고 해서 헌금이 더 많이 나올까요?  알아서 믿음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제가 분명하게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추수감사절의 헌금은 일반 감사헌금이 아니라 특별한 절기의 특별한 헌금이라는 것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주님 앞에 오래도록 기억되는 세 번째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을 넘어서서 구세주께 드려진 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헌신은 귀합니다.  모든 헌신은 아름답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온 세상을 구원하신 나의 구세주께 드려지는 헌신이라고 한다면 그 헌신은 그만큼 귀하고, 그만큼 높고, 그만큼 아름다운 헌신이 될 것입니다.  이 여인의 헌신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랄프 마틴이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사건은 중요한 상징적이고, 극적이고, 신학적인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성경에 보면 아무에게나 그 머리에 기름을 붓지 않습니다.  세 종류의 사람에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이 그들의 자리에 취임할 때 그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이 여인이 예수님을 왕으로, 선지자로, 그리고 제사장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의 직분을 한꺼번에 감당하실 분이 장차 오실 것인데, 그분이 메시아라고 믿었습니다.  메시아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이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 그리스도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랄프 마틴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히실 메시아로 믿었던 첫 번째 제자는 바로 이 여인이었다 라고 지적합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이 그들의 자리에 취임을 할 때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 번 더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사명이 끝나고 죽었을 때 그의 시체에 기름을 붓습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어쩌면 이 여인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로서 죽으셔야 할 때가 가까이 온 것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돌아가시면 자기와 같은 여인은 예수님과 같은 분의 시체에 감히 가까이 접근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이 살아 계실 때에 이 여인은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을 예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나는 그분이 살아 있을 때에 예수님이 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자신의 인생을 드리는 모습이 나에게는 너무나 고귀한 사실이라고 감사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녀는 주 앞에 나와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다는 것입니다.
랄프 마틴 신학자의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 심정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8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례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고 싶었던 이 여인의 행위를 알아주셨습니다.  그래서 메시아로 믿었고, 메시아로서 죽어갈 그분을 위해서 그분에게 기름을 부었던 이 여인.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이 여인은 이 고귀한 믿음의 고백을 그분께 드리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나에게 너무나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신 그분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고백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할 수 있을 때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이 여인의 헌신은 예수님께 인정되셨습니다.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될 헌신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번 감사의 계절은 정말로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그런 믿음과 사랑과 감사가 있는 고백을 주님 앞에 올려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말로 그분을 사랑하면 사랑하는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그리고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는 감사가 되게 하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크고 놀라운 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은 세상적인 일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 감사하십시오.  고마워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길을 믿는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고마워하시기 바랍니다.

한 때 베스트셀러와 영화로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었던 작가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이야기는 시간의 짤막한 제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사랑의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두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을 합니다.  한 사람은 잘 나가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수가 되고, 가수가 되고, 돈도 인기도 누렸지만 결코 행복하지 않아서 세 번씩이나 자살을 감행했던 미대 교수 유정이라는 여인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은 세 사람이나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고 사형언도를 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는 사형수 윤수입니다.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이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이야기는 유정이가 면회를 오면서 시작이 됩니다.  면회를 오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그들의 마음을 조금씩 조금씩 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놀랍게도 두 사람은 서로 기대하지 않았던 치료를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여는 과정에 있어서 서로가 서로의 거울이 되어 그 동안 상처받고 상처를 주었던 인생을 돌이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았던 하나님의 사랑의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문제는 사형수인 윤수에게 시간이 많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정확하게 다가오는 죽음을 내다보면서 마지막 안타까운 편지의 몇 줄을 남깁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살아서 마지막이라도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내 입으로는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그 말을 꼭 하고 싶습니다.  그 말은 '사랑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듣지도 못했고, 사랑하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살아왔던 사형수가 마지막에 그의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하면서 이제라도 그 누군가를 만난다면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 평론을 했던 한 평론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라고 죽음이 아깝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우리 인생들이 쓰레기통에 버리는 별 필요 없는 30분 같은 인생이지만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게 또 간절하게 기다려지는 시간, 시간"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도전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의 시간에 저와 여러분들, 그리고 우리 주변의 사람들에게 정말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어떤 말을 하시겠습니까?
나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버려주신 그분 앞에 우리도 인생이 남아 있는 시간에 이런 고백을 드릴 수가 있을까요?
그냥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정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어주신 그 분 앞에 이런 고백을 드릴 수가 있을까요?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사랑합니다.  나를 자녀 삼으신 주
내 부르짖음 들으시고 감싸주시는
영원히 주 찬양합니다. 내 삶을 다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는 이 동일한 마음으로 나로 하여금 이 사랑을 알게 해 주고, 일깨워준 형제와 이웃들에게 감사의 계절에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요?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감사의 계절에 우리가 참으로 이 두 마디의 고백을 할 수가 있다면 오늘 우리의 삶의 빛깔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이것이 정말 가능하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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