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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료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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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 료 (출 15:22~27)


I. 시련은 기회다

노래부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노래를 찾아냅니다. 그러나 불평하는 것이 습관화된 사람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에서도 불평을 찾아냅니다. 위기 때문에 몰락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위기 속에서 전에 없는 커다란 기회를 창출해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위기는 위험도 되지만 기회도 된다." 

「살아계신 하나님 경험하기」 - 지난 시간엔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위기를 치료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얘기 "치료"입니다. 

신앙인에게 위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위기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능동적으로 환영할 만한 것입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을때에 힘이듭니다.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기회를 하나님께 맡겨 드리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부딪히는 인생의 위기 때마다 그것을 긍정적인 기회로 보십니까? 아니면 절망의 때로 보십니까? 문제는 시각의 문제입니다. 문제만 보는 사람은 언제나 문제만 보입니다. 

축복은 검은 보자기에 싸여서 나타납니다. 검은 보자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면 축복 또한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고 함석헌 선생님의 명저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은 "우리 5천년 역사는 고난과 시련의 역사였다. 그러나 그 고난과 시련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맥락입니다.

시련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를 지금보다 더 나은 자리로 더 영적이고 더 신령한 자리로 더 멋진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종종 하나님이 시련을 우리에게 용납하고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승리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과의 차이는 우리가 날마다 부딪히는 사건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고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방법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위기를 만난다고 하는 것은 신앙인이나 불신앙인이나 차이가 없습니다. 똑 같이 사건을 만납니다. 그런데 승리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은 문제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건의 차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해석하고 직면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사람은 어떤 기회가 와도 그것을 부정적으로 해석합니다. 잘 활용하면 오히려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역전의 기회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승리하는 사람은 아무리 어려운 시련이 닥쳐와도 난관을 끝까지 헤쳐나가서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겪고 나서 나중에 보면 정 반대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30년대 미국의 경제 대 공항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공장과 은행이 문을 닫고 모든 산업은 마비되었습니다. 기업주들은 잇달아 자살을 했습니다. 더 이상 경제는 소생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때 라스크라고 하는 한 젊은이가 증권에 투자했던 모든 돈을 거둬들여서 뉴욕 맨하탄에 넓디넓은 땅을 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높은 빌딩을 설계해서 빌딩을 세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난했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이 빌딩은 마침내 세워져서 세계 최대의 빌딩,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빌딩에 근무하는 사람만 3만명의 직원과 2천만명이 드나드는 거대빌딩이 되었습니다. 

이 건물이 맨하탄에 세워지면서부터 미국의 경제공항이 극복되기 시작했습니다. 절망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버렸던 많은 기업인들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지는 상황속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이 넘어진 상황속에서도 다시 세울 수 있다."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II. 건망증, 조급증(치료받아야 할 질병①)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무서운 질병 두 가지가 나옵니다. 건망증과 조급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① 건망증이 무엇일까요? 지난날 받은 은혜와 사랑, 어제까지 느끼고 체험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리고 살기 때문에 신앙에 가지가지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나는 하나님 앞에 물질로 쓰임받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돈을 주면 이 돈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 참 아름답게 쓰임받기를 원한다. 하나님 앞에 서원도 합니다. 또 목사님 앞에 기도도 받고 가요. 그런데 이제는 가계도 하나가 늘었고 두개가 늘어가기 시작하고, 아파트도 한평 두평 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지하실에서 올라왔어요. 전세살이도 끝났고 집 한채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인간은 끊임없는 욕망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가계 하나 더 아파트 한평 더.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사람이 꼭 물질로 하나님 앞에 봉사해야 되나? 하나님 앞에 했던 서원을 잃어버립니다. 약속을 잃어버립니다. 영적인 실패를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병들었어요. 하나님 앞에 내게 건강을 주시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봉사할 거예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찬양대도 성가대도 차량안내도 내게 주시는 은사를 하나님 앞에 마음껏 바치면서 살거예요. 건강을 얻었습니다. 건강을 얻다보면 요것부터 해 놓고 저것 좀하고 이것 좀 해야지. 그러다보면 하나님 앞에 병실에서 약속했던 약속들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도 커다란 은혜를 체험했고 도무지 싸울 힘이 없는 백성들을 하나님이 친히 싸워 저들을 건져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 주셨던 모든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건망증은 무서운 영적인 실패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후에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습니까? 
구름기둥이 200만 대군을 태양으로부터 광야의 더위로부터 보호해 주었습니다. 밤에는 불기둥이 가는 길 밝게 비춰주는가 하면 추위로부터 난로 역할을 감당해 주었습니다. 추격해 오는 애굽 군대를 막아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공격을 당하면서도 추격을 당하면서도 대낮같이 밝은 길을 걸어가는데 애굽 사람들은 추격하면서도 공격하면서도 어둠과 혼란속에 빠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앞에 넘실대는 홍해가 갈라졌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는 이 사건을 보고 200만 이스라엘 백성이 세례를 받았다고 얘기했습니다. 뒤를 돌아다보니 지금까지 자신들의 주인, 자기에게 명령하던 명령권자가 시체가 되어 물 위에 떠 오른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들은 애굽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구나. 우리를 다스리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구나. 주인이 바뀌어 지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고 따라가면 끝까지 책임져 주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일들을 경험하고 사흘만에 다시 불평하고 원망하는데 빠지게 된 것입니다. 

② 조급증은 무엇일까요? 잠시 잠깐만 참고 기다리면 되는 일도 서두르고 덤비기 때문에 일을 그르칠 때가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의 이 조급증 때문에 되지 못하고도 된 척 해야 됩니다. 크지 못하고도 큰 척 해야 됩니다. 가지지 못하고도 가진 척 해야 됩니다. 믿음 있는 척 해야 됩니다. 한 두가지 은혜를 체험하고 나서 온통 세상을 다 알고 예수를 다 안 것처럼 서두르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조급증입니다.

외국에 한 두번 여행을 해보면 우리나라사람들이 얼마나 조급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외국에 가서 사람들에게 "한국말 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할 줄 안다고 그럽니다. 무슨 말 할 줄 아냐고 물어보면 "안녕하세요" "빨리빨리" 한국사람들이 제일 많이 쓰는 용어가 빨리빨리 라고 합니다. 빨리빨리 병이 조급증입니다. 

신앙생활도 그렇게 하려고 해요. 어제 믿고 오늘 큰 나무되려고 합니다. 기다리지 못해요. 하나를 배우고 둘을 쌓아가고 셋을 나누는 이런 여유로움을 우리가 배우지 못해요.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어요.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작은 땅에 살다보니까 아마 이런 국민적인 잘못된 영성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나 하는 안타까움이 있긴 합니다만 믿음생활 만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스케줄을 따라 좀 여유있게 사는 법을 배워야 될텐데 그것을 배우지 못했어요. 

어느 시골에 이름을 잊어버리고 팔푼이라 부르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팔푼이 집은 논마지기나 가지고 꽤 잘먹고 잘 살았던 모양이예요. 나이 서른도 넘어 장가갈 때가 되어 동리에서 튼튼하게 생기고 일 잘하게 생긴 가난한 집 규수를 맞이해서 결혼을 했어요. 
그리고 색시가 애기를 낳게 되었어요. 색시가 산통으로 소리를 지르니까 팔푼이가 우리 색시 죽는다고 난리를 피우더니 애기를 낳자 "내 얘기 보러 가야 되지 않겠냐"고 그럽니다. 그런데 팔푼이가 애기 보러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땅을 치고 웁니다. 

왜 우냐고 물어도 말도 안하고 우는 겁니다. 팔푼이 엄마가 달래다 달래다 손을 붙들고 방에 들어가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엄마 큰일났어. 색시가 애기를 낳았는데 중학교 3학년은 못 낳더라도 초등학교 2학년쯤은 낳아야 될텐데. 주먹만한걸 낳아서 큰일났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팔푼이 엄마가 설명을 합니다. "애기는 다 처음에 그만하게 태어나는 거다. 그러다 보면 엄마 젖도 먹고 그리고 걸음마도 배우고 밥도 먹고 초등학교도 가고 중학교도 가고 너보다 큰 어른도 되고 그러는 거라고"했더니 "진짜 우리 애기도 클까?" 그러더랍니다.

여러분 얘기가 태어나야 자라지요. 또 태어났으면 어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여기 앉아 계신 분 가운데 초등학교 2학년으로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중학생으로 태어나신 분 계십니까? 아기는 자랍니다. 기다리고 인내하면 자랍니다. 문제는 해결되어집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치료받아야 될 부분이 바로 이 마음, 심령입니다. 너무 쉽게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 건망증, 하루아침에 모든 것 다 되는 줄 아는 조급증 때문에 이스라엘이 실패하고 오늘 신앙인들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비전채플을 건축하는 가운데 있는데 저는 마지막 건축이 끝났을 때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누릴 축복을 기대해 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과정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그림을 완성해 가듯이, 한 사람의 예술가가 조각을 완성해 가듯이 건축보다 더 멋진 예술은 없는 것 같습니다. 종합 예술인 것 같습니다. 기도하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예술작품이 완성되어 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그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행복했듯이 비전채플이 완공되는 과정을 보면서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달에도 먹지 못하고 입지 못하고 조금 조금 모아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드리는 이 기쁨을 우리가 함께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챨스 코우만이란 사람이 일년동안 애벌레가 나방이 되어 나오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벌레가 동그란 꼬치 안에서 조그만한 구멍을 뚫어 놓고 거기를 빠져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을 하는 겁니다. 나오려고 얼마나 몸부림하는지 관찰하다가 너무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와서 내가 조금 도와줘야 되겠다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가위를 가지고 와서 그 구멍을 크게 짤라 주었어요. 그랬더니 이 애벌레란 놈이 얼마나 쉽게 빠져 나오는지. 계속해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제 조금있으면 오색찬란한 날개를 날고 하늘을 나르겠구나. 내가 너를 도와줬으니 누구보다도 너를 소중히 여긴다. 날개를 달고 빨리 이꽃으로 저꽃으로 날아다니면 안되겠니. 관찰하는데 아뿔사. 어렵게 어렵게 자기 몸을 찢으면서 거길 빠져나오려고 몸부림하고 머리가 부셔지면서 기어나왔던 모든 나방들은 날개를 달기 시작했습니다. 색깔이 예쁘게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훨훨 하늘을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챨스 코우만 여사가 구멍을 내어서 나왔던 이 애벌레는 달싹둥이가 되고 말았어요. 날개를 조금 다는가 싶더니 날지를 못하고 뛰뚱뛰뚱 이리딩굴 저리딩굴 애벌레가 한 마리의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고통의 시간들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III. 원망죄(치료받아야 할 질병②)

또 다른 하나의 이스라엘의 질병이 있었습니다. 원망죄와 불평죄입니다. 
홍해기적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찬송하며 길을 갔습니다. 그것이 15장 앞부분입니다. 오늘 본문 15장 뒷부분을 보면 또 다른 시험에 빠져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수르 광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광야는 시내 산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지역입니다. 이곳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물이 없는 사흘 길은 무척 힘든 길이었습니다. 마치 죽음의 길과도 같았습니다. 그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길로 인도하시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는 믿음으로 걸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웬만큼만 참으면 하나님께서 또 어떤 일을 하시겠지'라는 기대를 갖고 걸었습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틀이 지나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흘이 지났을 때 그들 마음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물이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물만 있으면 되었지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은 더 이상 필요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같은 것은 마실 것도 있고 그늘도 있는 곳에서 필요한 것이지, 이처럼 물 없이 사흘을 갈증 가운데 걸어가고 있는데 무슨 말씀이 필요하겠습니까?

드디어 그들은 중간에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먹어서는 안되는 물이었습니다. 그 물은 무서운 복통을 일으키는 쓴 물이었습니다. 그것은 써서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물에 모든 것을 걸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이 물만 마시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물은 마실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그것을 마시는 자마다 무서운 복통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중간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마라가 아니었습니다. 엘림이라는 곳이 그들이 가야 할 중간 목적지였습니다. 엘림은 마라에서 얼마되지 않는 10km쯤되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까지 거의 다 간 지점에서 무시무시한 원망과 불평을 하나님께 쏟아 놓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시험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홍해의 무서운 능력을 보고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의 병은 너무나도 깊었습니다. 

참으로 치료받아야 할 병은 우리의 거역하는 본성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서도, 성령의 체험을 하고서도 치료되지 않는 무서운 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수르 광야로 이끄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열 가지 재앙을 보고서도,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고서도 그들의 본성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보니까 교회 안에 원불교 교인이 많이 있더랍니다. 원불교 신자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원망, 불평하기를 일삼는 사람들 - 교회안에 원불교신자들이 의외로 많더라는 것입니다. 

행복한 신앙생활 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아야 됩니다. 구원받은 백성들이 원망하며 사는 것을 하나님은 제일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죄가 원망죄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죄가 원망죄입니다. 원망죄 때문에 하루에 수 만명이 광야에서 죽어갔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풍요로운 은혜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교회를 원망합니다. 공동체 다른 사람들을 원망합니다. 가족들을 원망합니다. 사회와 시대와 역사를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얘들아 지금 여기에 쓴물이 있지. 이것 마시지 말고 저 언덕 넘어 조금만 참고 걸어가면 엘림이라는 곳이 있어. 그곳에 가면 물샘 열 둘이 펑펑 쏟아질 거야. 오아시스에 종려나무 숲이 우거져 있단다. 거기까지 가자. 이렇게 말씀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엘림이 보이지 않아도 종려나무가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보여도 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주의 약속 붙들고 걸어가는 것. 이게 믿음 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찬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지금은 쓰러져 있지만 지금은 앞이 안보이지만 하나님은 나를 반드시 일으켜 세워주신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이 문제 해결하여 주신다. 다시 시작하도록 기회를 주신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원망은 내가 아직 죽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립니다. 왜요? 덜 죽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완전히 죽고 나면 원망죄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금 원망하는 이유는 단지 목이 말라서 만은 아닙니다. 
출애굽기 17장 3절 이하에 계속해서 목말라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때마다 진정 목이 마르면 목말라 "죽겠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의외로 다른 본문에 나오는 "죽겠다"라는 말이 없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는 이유는 물이 모자라 가지고 나왔던 소와 양떼들 그리고 은금보화를 잃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마라의 쓴 물을 먹었을 때 양이 쓰러져 죽었습니다. 소가 죽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배를 움켜쥐고 땅바닥에 구릅니다. 언제 물이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가지고 나왔던 은금보화를 버리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지고 나왔던 소유물들을 잃어버렸을 때 나타나는 질병이 원망죄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원망죄에 빠지는 이유가 있습니다. 
소유욕에 상처를 입었을 때 지을 수 있는 죄가 원망죄입니다. 
물질을 잃었을 때 - 주식에 투자했는데 주가가 폭락합니다. 어렵게 시작한 장사가 계획이 무너지고 꿈이 깨졌습니다. 지위를 잃어버리고 체면이 손상당하고 명예가 실추당하고 가지고 싶은 것 가지지 못할 때 찾아오는 죄가 원망죄입니다. 

불평의 또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기대감이 무너졌습니다. 
엘림으로 가는 도중에 마라의 물을 보자 기대에 들떠있었습니다. 이제는 살았구나. 그러나 그 물을 먹었을 때 가축이 쓰러지고 아이들이 뒹굴었습니다. 남편이 원망스럽고 아내가 원망스러울 때가 언제인가요. 부모가 원망스럽고 자식이 원망스러울 때가 언제인가요. 기대가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그때 자신을 돌아보아야 신앙인입니다. 타인을 공격하는 죄가 원망죄입니다. 
가족의 남편과 아내가 만난 이유는, 공동체는, 우리가 함께 만나는 이유는, 목사와 함께 한 공동체 안에 만난 것은 - 돕는 배필로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셨는데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하는 배필이 되었기 때문에, 그 기대감이 무너질 때 상대를 공격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70이 넘은 노모에게 40이 갓 넘은 아들이 찾아와서 교회 가기 싫다고 합니다. 왜냐고 물었더니 세 가지 이유 때문이랍니다. 
첫번째 조그마한 교회에 교인이 여기 한명 저기 한명, 교인이 너무 적어서 썰렁해서 그 교회에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안내를 비롯해 교인들이 너무 불친절해서 그 교회에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로님의 기도가 너무 길고 성가대의 찬양이 준비가 안되어서 예배에 은혜가 되지 않아서 그 교회 가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70이 넘은 노모께서 그래도 교회갈 이유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여기 저기 한 명씩 썰렁하게 앉아 있는데 너 마저 안 간다고 하면 교회가 얼마나 썰렁하겠느냐. 두 번째 신앙생활은 사람보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고 하는 것인 만큼 교회에 가야 한다. 세 번째 이유가 중요하다. 그래도 네가 그 교회 담임 목사인데 네가 그 교회 안가면 어쩌겠느냐.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할 수 있지요. 낙심할 수 있지요. 그러나 불평하고 원망하면 망하는 것입니다. 

IV. 성도의 영성 = 감사

모든 일들이 만사형통하고, 교회는 평안하고, 온 가족이 건강하고 - 누가 감사할 수 없을까요. 성도의 감사는 because of의 감사가 아니라 in spit of 감사의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당신을 광야의 목마른 땅으로 인도하셨다면 분명 이유가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 시험 잘 통과하면 곧 엘림의 열 둘 물샘이 터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인터넷에서 <저는 광야대학 고생과에 다니고 있어요>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성적이 별로 좋지 못해서 입학한지 오래 되었지만 아직 졸업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내가 다니는 학교는 광야대학교 고생과입니다. 총장은 하나님이신데 어물쩡 넘어 가는 일이 절대로 없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컨닝 한다는 것도 불가능하고 시험을 볼 때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학비가 비싸냐고요? 예, 좀 비싼 편입니다. 인생을 모두 걸어야 할 정도니까요. 때로는 목숨까지도 저당 잡혀야 하니, 결코 싸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배우고 있는 과목은 버리기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하고 내 고집을 버려야 하고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인간적인 모든 수단 방법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을 배우고 있습니다. 시체와 같이 사는 방법을 배웁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지요. 감정도 없고 흥분할 일도 없고 실망하고 슬퍼할 일도 없습니다. 담담히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을 하고 있답니다. 

또 있습니다. 하나님 찬송하는 일을 배운답니다. 즐거울 때라면 누가 못하겠어요. 밤중에 찬송하는 일을 지금 아프게 배우고 있습니다. 병들었어도 가난해져도 주님을 찬양하는 일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의 밤중이 찾아왔을 때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 잊어버리면 안 된답니다. 

또 한 가지는 감사를 배우고 있습니다. 엎드러지고 쓰러져서 너무나 절망스러울 때도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부유한 것도 하나님 은혜, 가난한 것도 주님의 주권 아래 있으니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건강한 것도 병든 것도 모두 감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매일 매일 낙제를 해서 이렇게 졸업을 못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반드시 합격하리라 결심을 하고 도전해 보고 있습니다. 

합격하는 자에게는 졸업 선물이 주어지겠지요. 소망, 기쁨, 문제해결이라는 은혜의 선물이 주어질 것입니다. 나는 그 선물을 받고 싶어요. 어서 고생과를 졸업하고 헌신과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 하나님, 한 눈만 살짝 감아주세요.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번 시험에는 꼭 합격하도록 제발 제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헌신과, 충성과. 어서 어서 들어가고 싶습니다. 하나님 부탁해요. 은혜를 감사드리며..."

V. 치유

인생광야학교에서 언제나 우리는 마라의 쓴물을 말할 수 있습니다. 
"마라" - 쓰다, 슬픔, 고통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라의 쓴물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낙심하고 원망하는 길이 있고, 마라의 쓴물 앞에서 모세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정말 원망스러운 사람은 모세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지요. 200만 대군은 모세만 바라보고 있지요. 백성들은 모세를 향해 원망합니다. 하나님 내가 가겠다고 했나요?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으니 제게라도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극단의 상황에서 최고의 기도하는 사람이 지도자 모세였습니다. 신앙인이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교회 이 시대의 지도자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이 절망하고 낙심하고 있을 때에 모든 사람이 도무지 안된다고 모든 길이 막혔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에 아니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희망을 선포하고 최고의 기도를 드린 사람, 그가 오늘 우리 시대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에 직면할수록 마라가 휘몰아올수록 더욱 주께로 가까이 가야 합니다. 모세는 마라의 고통에 대하여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자기를 죽일 듯 달려드는 백성을 향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25절)
언제나 인생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노고가 있습니다. 허무가 있습니다. 슬픔이 있을 수 있지요. 그때 우리는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부르짖어야 합니다. 기도가 시작될 때 이미 문제도 풀려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마라"에서 "엘림"에 이르는 길목입니다. 엘림으로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계속되는 25절을 보십시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할렐루야. 

이 나무가 무엇입니까? 시내반도에 있는 나무로서 물을 치료하는 물을 맑게 하는 어떤 나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 하나가 무슨 힘이 있길래 200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있는 물을 치료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이 나무는 능력의 나무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나무는 크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에덴동산의 나무요, 다른 하나는 골고다 언덕의 나무입니다. 에덴동산의 나무는 선악과입니다. 하나님은 그 실과를 금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먹었습니다. 그 결과 인간 전체가 쓴물을 뒤집어쓰게 된 것입니다. 죄악이 오게 되고, 사망이 오게 되고, 고통이 오게 되고, 미움, 시기다움, 질투 분쟁이 인류의 삶에 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골고다 언덕의 그 나무는 이 쓴물의 치료책이 된 것입니다. 인류의 쓴물을 단물로 바꿔 준 것이 무엇입니까?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 나무인 것입니다.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는 그 자체로는 쓰디쓴 나무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형벌을 받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것은 그 자체로 고통의 나무요, 쓴 나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쓴 나무가 인생의 쓴물에 들어오게 되면 쓴물이 단물로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정오쯤이나 되었을까요. 태양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더운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향하여 물을 길러 나오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 대낮에 나왔다고 하는 얘기는 늦잠 잤다. 왜? 밤일하고 늦잠 자는 여자입니다. 그리고 남의 눈에 띄기를 싫어하는 여자입니다. 늦은 밤까지 오늘은 이 남자 내일은 저 남자에게 시달리고. 

거기에 무슨 행복이 있겠습니까? 그 시달린 몸으로 아침에 일어나는 그 여인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헝클어진 머리, 진하게 했던 화장조차 지우지 못하고 잤던 꽤죄죄한 그 얼굴, 그 눈빛에 무슨 희망이 있겠습니까? 누가 그 여인에게 말을 걸 수 있겠습니까? 눈빛조차 마주치기가 어색한 분위기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지나가는 말로 "물 한 모금 주시오" 그랬어요. 그런데 이 여인이 "당신은 유대인 나는 사마리아 여인. 그런데 당신이 왜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 주님이 핀잔을 받은 겁니다. 

영적인 침체에 있는 사람들이었다고 하면 아마 그랬을 겁니다. 말하기 싫으니까 물 한바가지 퍼주고는 가 버렸을 겁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아마 물을 주는 사이에 주님께서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해서 물그릇을 받으려고 하다가 물이 땅에 쏟아졌는지 모르겠어요. 그게 현대인들의 모습일 거예요. 그보다 더 침체된 사람이 있었다 하면 예수님께서 "물 한 그릇 주시오" 그랬을 때에 아주 싸늘한 얼굴로 돌아서면서 그냥 말대꾸도 않고 가려다 뒤로 힐끔 쳐다보며 "떠 먹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요? 

그뿐 아닙니다. 마음이 악한 사람은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네가 떠 먹어." 이런 분위기 속에서 주님이 이 여인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집에 물이 떨어진 것 같은데 네가 이 시간에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니까 마음속에 무서운 갈증이 이글거리며 타오르고 있는 것 같은데 그보다 더 필요한 게 있어. 진정한 영적인 해갈은 내가 해결해 준다. 진정한 해결은 하나님에게 있다. 할렐루야. 이 나무는 갈증을 치료하는 나무입니다. 십자가의 보혈은 인생의 갈증을 해결합니다. 

아무 나무나 아무렇게 던진다고 해서 쓴 물이 고쳐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를 던져야 합니다. 대부분의 주경가들이 이 나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한다는 데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 지리산의 박달나무, 울릉도의 향나무를 던져도 소용이 없고 돈다발 보석함을 던진다고 쓰디쓴 인생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감미로운 세상의 향락과 안일을 설탕치듯 한다고 해서 괴롭고 슬프고 한심스러운 삶이 치료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고침받고, 단물처럼 맛있고 가치있는 삶을 소유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던져야 합니다. 십자가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외에 다른 묘약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마라의 쓴잔을 마셔본 사람일수록 십자가 밑으로 가까이 나아가게 됩니다. 그 생명의 샘가에서 달콤한 생명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유대 랍비들은 이 나무가 말씀나무, 토라나무였다고 얘기합니다. 
말씀 붙들고 약속 붙들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능력을 말합니다. 

이 세상은 마라의 연속입니다. 날 때도 울음을 터뜨리면 "마라"하고 나오고, 죽을 때도 인생은 "마라"하고 죽습니다.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직장이라고 찾아가 보면 거기에도 마라가 있을 뿐입니다. 생활이 조금 나아지면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마라가 숨어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마라입니다. 인생이란 뚜껑을 열면 쓴 물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라는 쓴물, 고통의 인생, 쓴가정, 쓰디쓴 세상사를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시하신 십자가는 모든 것을 고치고 치료하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본문 26절 끝에서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했습니다. 이제 마라를 치료하는 한 나무를 보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든 고난의 짐을 십자가에서 담당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인간적인 노력으로 예수를 회피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노래하고 이 나무를 든든히 붙잡으십시오. 이 나무를 든든히 붙잡고 있다가 어느 때고 마라가 올 때는 던지십시오. 

이 시간 십자가 밑에 나오셔서 여러분의 온갖 쓰디쓴 물을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쓴물을 내려놓으십시오. 가슴에 상처를 끌어안고 있지 말고 쓴물을 내려놓으십시오. 관계의 쓴물을 내려놓으십시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으십시오. 신앙생활에 고쳐지지 않는 변화되어지지 않는 습관의 문제, 끊어지지 않는 죄악의 문제, 십자가 밑으로 가져오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꽂혀지면 해결함 받습니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속에 던져 나의 삶을 달게 만들고 내 직장에 던져서 그 나무로 환경을 바꾸십시오. 저 십자가는 치료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습니다. 지난 수천년 동안 갈보리 언덕에 서 있는 저 십자가는 인류역사의 구석구석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자들에게 삶의 질병을 고치고 삶의 맛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십자가 나무가 던져진 곳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무의미하게 보람없이 살던 사람들이 보람을 찾았고, 슬픔 속에 살던 사람들이 기쁨을 찾았고, 다툼 속에 파괴되었던 가정들이 평화와 사랑을 찾았고 질병에 시달리던 자들이 건강을 찾았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는 지옥에서 천국으로 건너는 다리입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나아가는 다리입니다. 쓴물을 단물로 고치신 하나님의 기적을 목격한 그들이 계속 행진하여 "엘림"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그 곳엔 실로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시원하게 솟아나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가 우겨져 있는 오아시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물샘 열 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위한 것이요 종려 70주도 이스라엘 70인 장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즉 오늘 교회를 위해 그토록 준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합니다. 이 치료하는 나무를 발견하려면 교회로 와야 합니다. 

엘림! 그곳은 마라를 극복하고 걸어온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신 축복의 오아시스입니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며 행진을 계속하노라면 반드시 엘림의 축복은 열려집니다. 마라에서 엘림으로 행진하십시오. 마라의 고통을 허락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엘림의 축복도 주십니다. 마라에서 넘어져 울고 불평과 원망의 한숨을 짓지 말고 엘림으로 가십시오. 마라처럼 쓴 삶이 있거들랑 그때마다 십자가를 던지고 치료를 받으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해 엘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이제 일어나십시오. 고개를 드십시다. 쓴 물이 변하여 생명수 샘물 열둘이 되었고 고통이 변하여 70가지 축복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의 쓴 물을 치료하시는 분이십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치료하는 능력의 나무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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