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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명하신 말씀 (욥 39:1~4, 딤후 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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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명하신 말씀 (욥 39:1~4, 딤후 4:1~2)


영국 소설가 마이클 모퍼고의 ‘조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조이’는 말의 이름입니다. 말의 눈에 비친 세상 이야기를 소설로 쓴 작품입니다. 1914년부터 1918까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세상의 참상을 적은 것입니다. 역사적인 아픔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용서 그리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온통 조이가 사는 세상은 전쟁에 폐허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쟁으로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마을에 포탄이 떨어집니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죽는 병사도 있습니다. 마을에는 온통 시체들이 너부러져 있습니다. 죽어가는 사람과 동물들이 온 마을에 가득합니다. 괴물 같은 탱크는 굉음을 내며 마을을 질주합니다. 잔혹과 학살이 난무합니다. 

그런 가운데에도 가족을 그리워하는 병사들의 훈훈한 마음이 있습니다. 시민들 가운데는 전쟁을 반대하는 소리도 냅니다. 군인 가운데는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니컬스대위도 있습니다. 앞으로 대장장이를 꿈꾸는 워런 기병도 있습니다. 자신이 하던 정육점 주인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리는 늙은 포병 프리드리히도 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에 청과물 시장에서 수레를 끌던 데이비드는 수레를 다시 끌기를 원합니다. 이들은 모두 잃어버린 자신감과 용기와 희망을 찾아 갑니다. ‘조이’라는 소설은 이런 참혹한 전쟁 가운데서도 인간이 끝까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구적 현실을 보세요. 끝나지 않는 전쟁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G20 회의에서 내년도 G20회의를 유치하고 돌아온 이명박대통령은 기자들과의 회견에서 ‘총성 없는 전쟁에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지구는 폭력과 상처와 절망이 가득합니다. 이런 전쟁 중에 희망이 무엇입니까? 자신의 고향으로, 일로, 취미로, 기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들에게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은 절대로 잃지 말라는 말을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도박을 하는 사람이 큰 배팅을 하듯이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배팅하면서 엄하게 명령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존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양심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얼 혹은 정체성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잃어버리면 안 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입니다. 불난 집에 보석을 가지러 들어갔다가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죽고 나면 보석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온 천하를 주고도 바꾸지 못할 것이 생명입니다. 이 소중한 생명의 근원이, 생명의 보금자리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 잃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1:20에는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한 대가를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라고 시편을 인용하여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데 그 소중한 자리를 타인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절재로 잃지 말았어야 할 자리를 인간적인 욕심 때문에 잃고 말았습니다. 유다는 은 30량에 스승을 팔고, 생명을 잃었습니다. 예수님을 팔고 자살했다는 것은 결국 절대로 잃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를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걸어놓고 명한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오래 전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우리 교회에 라스 베가스에서 이사 오신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구분에게 들은 얘기입니다. 도박하러 와서 배팅하는 습관이 미국인과 한국인이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미국인들에게 라스베가스는 쉼의 장소이고, 마음을 새롭게 하고 힘을 얻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형편에 맞추어 얼마까지 배팅하겠다는 계산을 하고 와서 재미있게 놀다가 그 돈을 잃으면 그냥 웃으면서 일어나 간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쉬러 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따러 옵니다. 그래서 돈을 잃으면 그 때부터는 혈안이 되어 돈을 빌려가면서 배팅을 합니다. 그래서 집과 가산을 모두 날린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서 돈을 빌리면 마피아와 연결이 되어 있어 돈을 못 갚으면 목숨을 잃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다 걸어도 걸지 말아야 할 것 있습니다. 그런데 목숨까지 담보로 돈을 빌리면 되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담보란 채무를 일정기간 안에 확실히 갚도록 보장하는 법적 수단입니다. 담보에는 인적 담보와 물적 담보가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하나님의 나라를 담보도 잡혀놓고 말합니다. ‘이건 절대로 잃지 말자’, ‘틀림없는 담보물이다’라고 바울이 말합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걸고 하신 명령의 말씀을 잘 들어봅시다. 그리고 절대로 그것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됩시다. 

첫째,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나라를 두고 하신 명령입니다. 

  1절에는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라는 표현은 명령의 중대성과 엄숙함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담보로 바울은 지금 간곡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얘기합니다. 엄한 명령임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명하노니’라는 말은 헬라어의 ‘디아마르튀로마이’라는 말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증언하다는 뜻이고, 둘째는 명령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분명히 디모데에 대한 명령일 것입니다. 
  
그가 나타나실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뜻합니다. 그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바울은 지금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하신 명령을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함을 전제로 한 명령을 의미합니다. 이 명령을 지키면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에는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모습을 말합니다. 17절에는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입성하는 모습을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는 확실합니다.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에는 참여해야 하고 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명령이 많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이 적혀 있습니다. 유대인은 하나님께로부터 10계명을 받았습니다. 이 10계명을 613개의 작은 계명으로 만들었습니다. 10계명을 최초로 분류한 사람은 중세시대에 유대의 저명한 랍비 사상가 마이모니데스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긍정적인 명령 248개와 부정적인 명령 365개로 나누었습니다. 248개는 사람의 몸을 이루고 있는 모든 부분의 총합이며, 365개는 1년을 뜻한다고 합니다. 유대인이 만든 613개의 명령을 예수님은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명령의 경중을 따집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거짓말하지 말라는 명령과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이 같습니까? 사람들은 살인하면 큰 죄를 지은 것으로 알고, 거짓말하면 별로 가책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두가 중한 명령이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사랑하라’는 명령까지도 중한 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대 제안(the Great Suggestion)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선택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수입니다. 모든 명령은 대 명령입니다. 모든 명령은 지상명령입니다. 모두가 엄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명령 가운데 어겨도 되는 작은 명령이 없습니다. 
  
작가 토마스 카힐은 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대 명령을 실천하는 가장 적절한 단어를 찾다가 “낙천적으로”(buoyantly)라는 단어에 와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짐이 아니라 축복이며, 은혜이며, 기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명령은 보장이나, 축복이나, 은혜가 없는 명령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자녀에게 복주시기 위한 방편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명령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펠라기우스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시고 주님의 뜻대로 명령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힘으로 순종하려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의지나 힘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명령에 대한 순종은 은혜에 의하여 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하신 명령이 무엇입니까? 


둘째, 말씀을 전파해야 하고 양육해야 합니다. 

2절에 말합니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명령하는 내용이 말씀 전파와 가르침과 경책과 경계와 권함입니다. 말씀 전파와 양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할 만큼 중요한 명령입니다. 누구나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복음 전파와 양육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전파하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케뤽손’인데 대중 앞에서 선포하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할 것을 명령하는 말씀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신 말씀은 ‘네가 말씀을 전하고 싶든지 그렇지 않든지’라는 뜻입니다. ‘새 번역’ 성경에 보면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군인은 언제든지 어떠한 상황이든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준비된 모습을 반영합니다. 항상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주 오래전 제가 교회의 전임전도사가 되어 심방을 주로 할 때입니다. 1월이었었는데 어느 권사님과 심방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독립문 옆 언덕이 심한 동네에 심방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 권사님은 연세가 좀 드신 분인데 약속한 날 새벽에 눈이 왔습니다. 권사님이 아침에 교회로 전화하셔서 “전도사님, 오늘 심방하십니까?” 그러시는 것입니다. 제가 “군인이 눈 온다고 전쟁 안합니까?”했더니 뒤에 알고 보니 다른 분들에게 “무서운 전도사가 왔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무섭긴요? 안 무서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바울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을 보세요. 사도행전 20:23-24에 그의 심정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는 최악의 상황이지만 복음을 전하려 합니다. 기회가 좋든 나쁘던 바울의 복음전파의 열정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항상 조건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항상 힘쓰라’라는 말은 끈기 있게 하라는 뜻입니다. 반대에 부딪쳐도 멈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느 권사님은 동네 아주머니를 전도대상자를 정해 놓고 기도하고 전도하러 갔습니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교회에 나올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끈기 있게 찾아가서 전도합니다. 이 아주머니가 얼만 귀찮았든지 이사를 갔습니다. 그런데 주민 센터에 가서 새 주소를 알아서 찾아갔습니다. 견디다 못해 또 이사를 갔습니다. 이번에는 권사님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언덕 위의 높은 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루는 어디에 가려고 나오다보니 권사님이 언덕을 기어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든지 얼른 집안으로 도망하여 캐비넷 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권사님은 아예 마루에 걸터앉아 갈 생각을 안 합니다. 캐비넷 속에 2 시간을 숨어 있다가 아주머니가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항복했습니다. “아이고, 아주머니 다음 주일 갈께요.” 그리고 다음 주일에 교회에 오셨더랍니다. 그리고 후에 그 분이 그 교회에 권사가 되셨습니다. 이런 열정이 생명을 구합니다. 
  
가르치고,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는 것은 말씀을 전파한 후의 양육 과정을 의미합니다. 복음을 전파하기만 하면 안 됩니다. 복음을 전파한 후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게 끝까지 잘 양육해야 합니다. 골로새서 2:7에는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라고 합니다. 복음을 받은 자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게 해야 합니다. 양육을 해야 전파의 효과가 나타나고 결실할 수 있습니다. 
  
양육은 전파에 버금가게 중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하신 일을 보세요. 복음을 선포하시고, 고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고치심은 선포의 도구입니다. 가르침은 선포의 마무리 작업입니다. 성경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부분을 빨갛게 인쇄한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부분을 크게 나누면 ‘케리그마’ 즉 선포와 ‘디다케’ 즉 가르침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도 가르침 부분이 선포 부분보다 월등하게 많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도 선포와 양육을 동시에 했습니다. 바울에게도 가르침이 훨씬 많습니다. 사도행전 20에는 바울이 드로아에서 밤중까지 말씀을 강론하고 있을 때에 유두고라고 하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 있다가 3층에서 떨어져죽었습니다. 바울은 내려가 죽은 청년을 다시 살렸습니다. 바울도 가르치는 일에 열중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가르치고, 경책하고, 경계하고, 권하는 것은 지금도 전도 후에 양육하는 내용입니다. 우리교회는 전도한 후에 새가족반에서 가르치고 양육합니다. 성경은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랄 수 있도록 양육하는 것이 전파한 사람의 책임입니다.  
  존 맥스웰은 “남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싶다면 양육하라”고 하였습니다. 영향을 미치는 일을 지도력이라고 합니다. 지도력은 양육하는 일입니다. 양육하면서 세워지는 것이 지도력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전도와 양육은 지도력입니다. 
  
문경의 신망애육원은 오래 전부터 고아들에게 주는 훈련을 하였다고 합니다. 크리스마스이브는 고아들에게도 주는 날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는 훈련을 많이 했더니 그들이 자라서도 고아원을 잊지 않고 찾아온다고 합니다. 설립하신 황용석장로님이 살아 계실 때는 명절 때는 200-300명씩 원 출신들이 찾아왔다고 합니다. 다른 보육원은 떠난 다음에는 다시 보지도 않는 데가 많다고 합니다. 복음을 심고, 양육하면 그들의 생각이 자랍니다. 그리스도에게 까지 자라서 성숙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낚시는 월요일에 제일 잘 된다고 하네요. 금요일, 토요일 주일에 낚시하는 사람들이 낚시 밥을 많이 줘서 고기들 몰려 있는데 월요일에는 다 집에 가고 사람들이 없어서 월요일에 가면 가장 잘 잡힌다고 합니다. 그래서 낚시 취미를 가진 목사님들이 월요일에 낚시를 하기 때문에 별로 재주가 없어도 많이 잡는다고 합니다. 
  
본질적으로 전도는 단순한 실천입니다. 특별한 재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열정으로 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삶으로 실천되기만 한다면 정말 강력한 현실이 될 수 있는 포괄적인 목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절대 잃지 마세요. 꼭 소유하세요. 복음전파와 양육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세로 받고, 단순한 실천을 하고, 순종하는 마음만 있으면 전도는 됩니다. 가르침과 경책과 권함도 절로 됩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떡밥을 던져놨습니다. 이제 가서 건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걸고 복음 전파와 양육을 실천합시다. 이 가을에 많은 복음의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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