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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진실한 삶 없이 기도는 없다 (잠 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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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한 삶 없이 기도는 없다 (잠 28:9)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잠 28:9). 


Ⅰ. 본문해설 

성경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생활과 기도생활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보여줍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돌이켜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하나님 앞에 가증하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이 귀는 단수로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들으려는 주의 깊은 태도를 나타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으로부터 비롯된 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경건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이자, 모든 생활 태도에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이므로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여기서 ‘가증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역겹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가 올바르지 않을 때 기도에 열심을 내면 낼수록 오히려 역겨운 것입니다. 


Ⅱ. 무기력한 기도 

신자라면 누구나 기도생활에서 충만하고 열렬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 그런 기도생활을 영위하는 그리스도인은 매우 적은 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거듭남의 복을 주시고, 성령이 함께 하심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왜 무기력한 기도생활을 이어가는 것일까요? 이것은 크게 두 가지 원인으로 나뉩니다. 

A. 내적인 원인: 융성한 죄 

첫째 원인은 죄의 융성입니다. 죄는 본질적으로 사람의 영혼과 마음 안에 있습니다. 신앙의 자리도 죄의 자리도 인간의 마음인 것입니다. 죄는 인간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인데 인간 안에 있는 죄의 경향성은 마음 안에서 작용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죄가 마음 안에서 작용할 때 인간의 생각은 눈멀게 되고, 정서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게 되며, 의지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의 뜻을 행하는 데 굳건해집니다. 

또한 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원수 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죄를 품으면 하나님이 우리가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도록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바로 죄가 기도와 관련해서 그런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내면에 죄가 가득 차면 하나님을 우습게보고 하나님은 물론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 하나님이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 질서, 가정, 원칙, 사람들, 영혼까지도 하찮게 생각하여 반감과 대적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내적이 원인들 때문에 기도는 무기력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죄는 마음을 통해 충분히 작용될 때 행동으로 산출됩니다. 그러나 산출되고 안 되고는 생산의 차이고 인간의 마음 안에 죄가 작용하고 있는 자체가 능력 있고 생명력이 있는 기도 생활을 현저하게 가로막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유려하고 유창한 말솜씨로 논리를 펼칠 수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수 없다면 그의 많은 논변은 헛된 것입니다. 오히려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죄일지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불순종과 악을 깨닫고 그것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고침을 받아갈 때, 우리 안에 죄가 죽는 것만큼 우리 안에 기도의 영이 충만하게 살아나는 것입니다. 

B. 외적 원인: 불법한 삶 

둘째 원인은 불법한 삶입니다. 즉 법이 없는 살입니다. 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키면서 살도록 명령하신 계명들입니다. 성경은 이런 계명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어떤 계명은 축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계명은 거래관계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아버지이기 때문에 그 계명을 준행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이기에 따르고 순종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본문 말씀은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는 역겹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 성찰 없이 자기의 뜻대로 사는지 모릅니다. 실제의 삶에서는 그리스도가 없는 그리스도인, 신앙이 없는 신자, 하나님의 통치가 없는 종교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비록 내적으로 죄가 융성할 지라도 바깥으로 외적인 것들이, 즉 불법한 삶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는 통제될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타날 때 아주 역겹게 노골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질서를 흐트러트리고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이런 행위를 행할 때 각각의 질서가 깨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가 창조목적으로 돌아가는데 지장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양심의 거울은 이미 더러워졌기 때문에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상식과 잣대가 아니라 언제나 들려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삶이 어떤 모습이고 삶을 통해 여러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보여주는 가장 훌륭한 거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의지적으로 귀를 막고 좋은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결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붙들고 계실 때만 성도입니다. 은혜가 떨어져 보십시오. 회개하고 예수 믿기 전에 지은 자신을 넘어지게 했던 죄들 때문에 다시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그것이 성도입니까? 모든 사람에게 깊은 골수 안에 하나님을 싫어하는 유전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고 했던 조상의 유전자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십시오. 그리고 진실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의 생명은 진실에 있습니다. 진실한 삶 없이는 기도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하던 방식대로 교회에 와서 같은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지 말고,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나아와 무릎을 꿇었을 때 폭포수처럼 용솟음치는 기도로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보이십시오. 


Ⅲ. 기도: 절대의존의 축소모형 

그렇다면 모든 것을 아실뿐만 아니라 친히 작정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만약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위를 환기 받으신다면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는 아주 놀라운 우주론적인 구도가 있습니다. 즉 기도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절대적인 의존의 축소모형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비롯해서 온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창조하시고 그냥 내버려 두신 것이 아니라 법칙 안에서 친히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주관하심으로써 그것들의 생성과 소멸을 결정하십니다. 그래서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을 의존하여 태어나며, 흘러나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 죽는 것도 그분 안에서 죽습니다. 더욱이 죽음 후에 소멸되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입니다.

 이처럼 피조세계는 하나님을 의존하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미생물에서부터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의 천체에 이르기까지 이런 놀라운 증거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그래서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은 삼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뜬 만큼의 아름다움이고, 그 아름다움의 질서는 결국 모든 피조물들의 구성요소들이 서로에 의존하고 의존한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의존한 정도에 따라서 그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혼도 없는 인간 이외의 피조물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의존한다면 위로는 하나님을 알고, 아래로는 창조의 세계를 알아 그 세계를 돌보고 가꿈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구현하도록 부름 받은 인간은 얼마나 더 하나님을 의존하도록 창조하셨을지 기억해 보십시오. 모든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창조의 질서를 의지적으로 거스를 수 있는 피조물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가장 위대한 지점이 잘못 사용하면 그를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추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지만 그렇기 에 더 많이 하나님을 의존하여야 하는 존재로 창조된 것입니다. 이런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의존의 관계를 인간 안에서 아주 농축된 형태로 축소시켜서 인간의 마음과 영혼 안에 늘 반복되도록 주신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라고 하는 은혜의 제도는 매우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과 기도는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사람의 가치는 그 사람이 지닌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사람의 영혼이 아름답고 의지에 가치가 있을 때 기도는 그 사람의 사람됨과 가장 잘 어울려 그의 마음에 기도의 불씨가 떨어졌을 때 활활 타오르고 좀처럼 불길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우주적인 커다란 계획 속에서 기도라는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이를 볼 때 기도는 인간의 의무입니다. 

창조 이후로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기도는 틀림없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 더 많이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어 기도의 중요성은 훨씬 더 강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기도의 불길은 아름다운 영혼 과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 속에는 오래도록 머무르고 타올라 충천하는 하늘의 불길이 될 수 있지만, 추한 영혼과 악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 속에는 얼음 그릇 속에 떨어진 불씨와 같아서 누가 일부러 끄지 않아도 자신의 더러운 영혼과 추한 의지가 기도의 불을 꺼버린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A. 율법과 순종 

또한 성경은 율법과 순종의 관계가 기도와 어떻게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지 말합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최대한의 경배의 표현을 구약에서는 그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거역하는 사울 왕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下)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듣는 것은 ‘청종’을 말합니다. 순종할 마음으로 선한 의지를 갖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지시하는지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예전에 온갖 은사를 체험하고 기적적으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할지라고 그것으로 성도들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의 생명은 진실에 있습니다. 비록 남이 보기에 반듯한 삶을 살았어도 하나님 앞에 진실함이 없으면 그는 잘 길들여진 짐승에 불과합니다. 비록 더럽고 추한 죄인일지라도 하나님 말씀 앞에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진실해진다면 그는 성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당시의 시민생활을 규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둘째는 결국 그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의 은혜를 입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가르쳐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북극성을 바라보고 노를 젓는 사공의 목표는 배가 먼 하늘을 날아 북극성에 안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별을 보고 계속 가면 그 방향이 있는 항구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길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율법에 대해 아무리 많이 공부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우리에게 샛별이 되어서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어야 할지 보여주는 표지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한 사람이 이 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면 그에게는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기도의 세계를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은혜는 사람을 이기게 만들지 않고 지게 만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누구인지 깨닫고, 자기의 거짓된 모습과 하나님의 말씀을 현저히 떠난 삶,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생활, 주님의 교회 질서를 깔보는 잘못된 생활의 태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성도를 사랑하지 않는 자기의 이기적인 마음 등을 보지 않는 사람들은 일평생 하나님 앞에 기도 없이 운명에 떠밀려 살기로 작정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정하게 예배를 드리며 설교를 듣는 여러분의 태도가 여러분의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매일매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보여주셔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에게 순종할 바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순종하지 않고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하나님의 율법 앞에서 귀를 기울이고 “주님 말씀하시옵소서. 내가 보지 못한 나를 보게 해 주시고 나도 알지 못하는 나를 보여주시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매일매일 살아야 합니다. 육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은 물 흐르듯 쉽고 편안하지만 영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은 자신에게는 죽기보다 괴로운 일입니다. 게다가 인간은 능력이 있어서 세상의 물질과 권력, 세상의 잔재주로 환경은 쉽게 움직이는데 자신의 마음은 움직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불행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기도생활을 고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결국에 나의 존재를 송두리째 흔들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혜와 기도의 관계를 생각합니다. 

B. 은혜와 기도 

우리도 움직일 수 없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도구가 있는데 이것이 은혜입니다. 왜냐하면 은혜는 곧 성령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을 움직일 때 우리는 그동안 세상에서 사랑하던 것들을 다 버리고 주님 없이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겠다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기가 살아야 할 표준과 실제 사이에 한없는 격차를 느낄 때 신자는 하나님 앞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회개가 없는 성도가 성도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춰서 누가 자기의 잘못을 말하지 않아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을 통해 발견하고, 뉘우치고, 고치고, 참회하고 뼈저리게 눈물 흘리는 세계가 없는 것이 성도냐는 말입니다. 그것이 잠시 없으면 영적인 침체일지 모르지만 살아도 살아도 그런 일이 없으면 구원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삶 없이 기도는 없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은 진리에 끊임없이 자신을 합치시킨 상태입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기준, 그것에 대한 확신, 그것에 대해 언제든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복종, 그리고 진리의 음성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진리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오늘날 진실이라는 것이 도대체 서푼 어치나 가치가 있습니까? 돈을 잘 벌고 재주 있는 것이 진실을 대신해 버렸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서도 그와 같이 진실을 버린다면 세상은 누구를 믿고 살아가야 합니까? 교회 안에서 통용되는 인간의 가치는 세상에서 유행하는 한 인간의 가치와 동일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세상과 교회에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거짓말 하지 않는 정직함이 교회 안에서 정말 가치 있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삶은 진실하지도 않고 진실은 커녕 진리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서 자신이 깎이려고 하는 의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기도하라고 재촉하는데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삶에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기도는 없습니다. 건강 진단은 복잡한 진단이 필요하지만 기도의 건강 진단은 간단합니다. 기도 해 보면 압니다. 아무도 없는 예배당에 조용히 무릎을 꿇고 온 마음으로 부르짖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생활이 하나님 앞에 올바르지 않으면 외치는 소리는 예배당 공간을 휘돌아 흩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 온전하고자 애쓰는 삶이고 부족하지만 여러분들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생명을 버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대단하게 부르짖는 육체의 고함소리는 없어도 소리로는 잠잠하나 여러분의 마음속은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진실한 삶과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삶 전체가 하나님께 돌아가고 진리가 여러분의 마음의 중심에 대못처럼 박혀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목숨을 잃어도 나는 이 말씀을 붙들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하며 모든 것들을 말씀의 중심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주님의 은혜를 열렬히 구하면 우리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조용히 건강을 진단 해 보십시오. 그리고 삶에 정성을 기울이십시오. 매일 성경 읽고 얼굴에 성경을 묻고 기도하며 “나는 약하고 이 세상에 온갖 시험과 환난 걱정이 나의 안팎을 에워싸게 되었지만 밤바다에 떠 있는 쪽배와 같은 나를 주님 손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실해질 때 기도에는 그만큼 담대함과 거룩한 열정이 깃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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