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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조용한 혁명 (마 5: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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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조용한 혁명 (마 5:11~12)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배우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또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가르치지 않는 사람은 목사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가르치기 주저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상대적인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심리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어렵다, 극단적이다, 급진적이다, 이런 장벽입니다. 이런 장병을 쌓게 하는 대표적인 구절들이 있는데 ‘누가 너의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라든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절이라든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이런 말씀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아예 귀를 닫아버립니다. 들으면서도 흘려듣습니다. 저건 예수님이 늘 하시는 말씀이지. 어머니의 잔소리를 흘려듣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의 심리적인 장벽이고 

두 번째는 신학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데 굳이 예수님의 말씀을 다 지키지 않는다고 어떤 일이 있을 것이냐.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냐. 그래서 예수님의 어렵고 엄한 말씀보다는 온화한 말씀을 선호합니다.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든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라는 온화한 말씀, 더 쉬운 말씀을 선호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솔직히 신학적인 모순이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어디서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가 어디서는 듣기만하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위에 집을 지은 것 같다고 했기 때문에 헛갈릴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실천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해보니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이대로 살 수 있겠느냐. 우리가 성자로 추대하는 대표적인 분이 손양원 목사님이지요. 여수 반란사건 때 자기 두 아들을 죽인 남자를 용서하고 자기 양자로 삼아서 목사를 만든 전설적인 성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일을 접할 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건 특별한 분이고 특별한 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만 나는 성자가 아니다.’ 이러면서 우리 마음속에 늘 죄의식이라든가 부족함을 의식하면서 살 때가 많은 것입니다. 

성경은 분량이 참으로 많습니다. 신구약 육십육 권을 통틀어보면 분량이 엄청나게 많은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죄책감을 안겨주는 부분은 의외로 적은 부분입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산상수훈이 우리에게 이와 같이 부족함을 느끼게 만들지 사람들이 창세기를 읽다가 죄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별로 없고 출애굽기 읽다가 죄책감 느끼는 경우도 별로 없고 시편을 읽다가 자기의 부족함을 처절하게 깨닫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부딪히는 면들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경구절이 걸리십니까. 저는 운전하다가 욕이 나오려고 할 때마다 예수님 말씀 중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라가라 말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그 구절이 걸립니다. 라가라는 말은 바보라는 뜻인데 지극히 낮은 등급의 욕입니다. 바보라는 말은 지극히 낮은 등급의 욕인데 예수님은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 라가라 하는 자마다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저는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가 욕을 할 때 재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성경구절이 가장 걸리십니까. 이처럼 우리가 걸리는 구절들이 산상수훈에 대부분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벽은 예수님이 만든 장벽이 아니고 사람이 만든 장벽이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허물어야 됩니다. 레이건 대통령이 베를린 장벽 앞에서 ‘고르바체프 회장이여 이 장벽을 허무시오 - tear down this wall, 이 장벽을 허무시오.’라고 말한 것처럼. 소련이 장벽을 세웠기 때문에 소련이 장벽을 허물어야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장벽을 쌓은 장본인이 우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허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먼저 심리적인 장벽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어려운 것이지 나에게만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만 어렵다면 그건 문제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어려운 것이라면 우리는 같은 입장에 있다는 얘기이고 그렇다면 해봄직도 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 공통적으로 어려운 말씀이고 우리가 다 같은 입장에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해봄직도 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적인 장벽은 우리가 신학을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기 위한 그릇에 불과합니다. 우리가 우유를 마실 때 컵에 따라 마시는 것처럼 컵이 없으면 우유를 마시기가 어렵지만 컵을 마시는 것은 아니고 우유를 마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는 그릇에 불과하지 우리가 먹는 것은 신학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골고루 받아들이고 배우고 진지하게 그것을 읽고 그리고 따르면 되는 것이지 우리가 섣불리 신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이것은 저것과 다르다느니 이것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느니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불필요한 선입관이요 우리가 마음을 열듯이 성경책을 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실천적인 장벽은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올라가보지도 않고 높다고만 하더라는 것처럼 별로 해보지도 않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 정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고 비판하는 분이 있다면 제가 존중하겠는데 예수님도 모르고 성경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고 진짜 그리스도인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이 섣불리 외형적인 것만 보고 자기의 육신적인 인상만을 가지고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은 그건 미련한 것이요 자기 손해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어렵다고 하는 것은 그건 비겁한 것입니다. 차라리 해보다가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안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남의 성공사례에 미혹되면 안됩니다. 남들은 자기가 잘한 얘기만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간증집회 같은 것을 안하는 이유는 간증은 자기 성공한 얘기만 하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받은 것만 얘기하고 전도가 잘된 경우만 얘기합니다. 전도가 실패한 경우는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를 보면 성공사례보다는 실수한 예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들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남의 얘기를 듣다보면 남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힘든 것처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가 그 아들과의 관계가 최악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 아들이 건달이요 술주정뱅이로 살았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간디 같은 사람도 자기 가족관계는 최악이었어요.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특별한 성자는 없습니다. 다 똑같은 것입니다. 

다 똑같은 것이고 의롭게 사는 것은 모두에게 어려운 것이고 정직하게 사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어려운 것이고 시험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고 우리는 다 같은 입장에서 사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누구는 쉽고 누구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또 내 과거와 내 살아온 배경과 또 나의 어렸을 때의 상처든 아픔이든 이런 것이 내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있어서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막달라 마리아 같은 사람은 어떻게 성자가 될 수 있으며 삭개오 같은 사람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인간의 과거가 인간이 믿음으로 사는데 걸림돌이 된다면 그렇다면 회개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인간의 변화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과거에 매여서 그것이 사람의 미래까지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요 그리고 성경말씀에 대한 불신인 것입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를 의로운 삶으로 인도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23편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일로 여기고 당신의 책임으로 여기고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이름을 위하여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행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주 나를 거룩하게 하려고 주 작정하신 일 그 누가 반대하리요 곧 이루어 주시리’ 할렐루야! 그 누가 반대하리요. 주님이 나를 거룩하게 하려고 작정하셨는데 누가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칼빈 신학에 다섯 가지 포인트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불가항력적인 은혜, 또 하나는 성도의 견인입니다. 말만 어렵지 실제로는 쉬운 말입니다. 불가항력적인 은혜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거부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사람의 연약함이든 사람의 저항이든 사람의 허물이든 실패가 그 은혜를 무효화시킬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은 한번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면 아무리 장애물이 있고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 성도는 반드시 승리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견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인데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주님은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하지 않고 안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책망하십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물에 빠졌지요. 그래도 다른 제자들보다는 낫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아예 물 위로 걷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남들이 해보지 못한 물위를 걷다가 설사 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걸어봤잖습니까. 그 자체가 대단한 것이지요. 일초라도 걸어봤으면 그건 대단한 것입니다. 빠진 것을 주목하지 말고 걸어봤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됩니다. 걸어봤다면 빠졌더라도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산상수훈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몇 가지 사전지식을 말씀드리자면 산상수훈은 마태복음 머리에 나옵니다. 5장 초반에 나오지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산상수훈이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 하신 말씀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마태복음의 순서는 시간적인 순서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문을 보면 이미 상당한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고 또 예수님이 나로 인하여 너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당할 때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상당히 있을 때에 가능한 말씀이지 무명인으로는 하실 수가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마태가 이것을 마태복음 서두에 집어넣었느냐. 그건 편집자의 의도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말씀을 먼저 소개하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행적을 말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인이 생각하기에 정말로 중요한 핵심이 되는 예수님의 말씀을 맨 앞에 먼저 소개하고자 한 것입니다. 

시작부터 예수님의 메시지는 분명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가 도중에, 나중에 발전했다거나 바뀐 게 아니고 예수님은 처음부터 당신의 메시지가 분명했습니다. 그게 바로 오늘 성경구절입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이게 소위 아홉 가지 복인데 첫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의 복은 굳이 예수님을 믿지 않더라도 수긍할 수 있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도덕적 덕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아홉 번째 복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면 수긍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라든가 의에 주린 자는 복이 있다는 데에 수긍할 수 있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면 ‘너희가 나로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는 말씀에 수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메시지는 처음부터 분명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을 따르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섬기고 예수님을 경배해야 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훈, 예수님의 정신을 따르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게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야 됩니다. 예수님을 섬겨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너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라는 말씀이 적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익명적 그리스도인이란 예수님을 믿지 않아도 예수님의 정신대로 살면 그리스도인이나 마찬가지라는 이론인데 그러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인하여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요한복음과 마태복음을 비교하면서 ‘요한복음에는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많이 나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는 양의 문이요, 나는 세상의 빛이요, 나는 선한목자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요 이런 식으로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강조하는 말씀들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데 그게 좀 그렇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이 당신에 대해서 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부자청년에게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그 청년의 ‘내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예수님이 가난한 사람에게 소유를 나눠주라고만 하신 게 아니에요. 그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어요. 영생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도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때 너희에게 복이 있다’ 이것보다도 더 예수님이 당신을 중심으로 신앙의 중심이요 핵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더 어디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예수님 좋은 분이라고, 예수님은 사대 성인 중의 하나라고 이런 식으로 말하지만 믿지는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예수께서 ‘나를 인하여 너희가 욕을 먹고 핍박을 받을 때 너희에게 복있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는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사기꾼이든가 미치광이든가 아니면 진짜입니다. 셋 중의 하나입니다. 진짜라면 믿어야 되고 진짜가 아니라고 믿는다면 사기꾼이든가 미치광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서 좋은 분이다, 사대 성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그건 예수님의 분명한 입장에 대하여 우리가 받아들이기를 주저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분명한 입장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유익만을 생각하려 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믿어서 얻게 되는 손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교회를 처음 나오는 분들은 아, 우리 집이 교회를 다니면 월급도 많아지고 진급도 하고 집도 비싼 값에 팔리고 주식도 오르고 또 강아지도 살찌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믿으면 당연히 유익이 많을 것으로 생각하고 그게 없으면 이상한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마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김으로 받게 되는 손해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것이 복이라고 하셨어요.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어디에서 상이 크다고요? ‘하늘에서 상이 큼이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따름으로 받는 상급은 이 세상에서 다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상급을 다 받고 누리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럴 수도 없고 이 세상에서 모든 상급을 누리려고 하는 사람은 천국에 가서 받을 상급이 없고 이 세상에서 상급을 누려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유물론자입니다. 그 사람은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상급을 누릴 수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이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셨어요.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증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아직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눈에 보이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이방인들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보다 나아야 되지 않습니까. 아직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주님은 진짜 믿음을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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