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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우리의 강함입니까? (행 20:2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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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의 강함입니까?  (행 20:28~35)


사람은 누구나 다 믿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의 강도가 결정되고, 결국은 그 인생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돈을 믿는 사람은 돈이 많을 때 돈이 든든하지요? 그러나 돈이 사라지면 그 인생도 무너집니다. 어느 한 분이 7000만원 부도 때문에 자살을 했습니다. 딸 결혼식을 이틀 앞두고 7천만원 때문에 자살을 해버렸어요. 7천만원, 그것이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그 귀중한 생명을 끊은 것입니다. 

돈이 그 인생을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권력 붙잡고 권력을 믿는 사람은 권력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 솟을 때는 그 인생도 하늘로 올라가지만, 권력이 땅에 떨어지면, 그 인생도 추락합니다. 권력을 믿는 사람은 권력에 따라서 왔다갔다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든 다 그렇습니다. 


이 아침! 그러면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여기 32절에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이 말씀의 뜻은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만이 우리 인생을 가장 힘있게 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이 그 강한 힘을 갖고 살아가기 위해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에베소는 상업이 번성한 세속과 음란이 넘쳐나는 도시였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은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여 세워진 교회였고 여기에서 3년을 목회해왔습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사역을 마치고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장로들을 청했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 된 에베소 교회가 영적으로 강하지 않으면 세속화 될 수밖에 없는 위험에 늘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세속화되지 않고 강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영적 지도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자각하고 강해져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과 함께 했던 동역자들에게 몇가지를 당부하는 말씀이 우리가 함께 보는 본문입니다. Ⅰ.본문에 보면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자신의 신앙 고백이고, 그 다음은 그들의 신앙생활을 잘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당부하는 유언과도 같은 말씀이 담겨 있습니다. 

1. ‘거리낌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먼저, 20절에 보면,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그리고 27절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 여기 ‘거리낌이 없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핍박 앞에서도 당당했다는 말입니다. 조금도 비겁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어디를 가든지 핍박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고, 성령에 붙들려 사는 바울인데 어떻게 가는 곳마다 핍박이 끊이질 않습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복음이 생명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마귀의 끊임없는 방해가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생명까지 위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처음 예수를 믿고 그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정말 기쁨으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옵니다. 자꾸 문제가 옵니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의 적극적이 삶을 살지 못하고 적당히 주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아침! 묻습니다. 이런 핍박이 온다면 여러분, 그래도 예수를 의지하고 따르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예수를 믿으면 잘살 줄 알았고, 복 받을 줄 알았지 예수 믿어서 이렇게 된다면야 누가 믿겠습니까? 바울 역시 그의 이력서를 보면 고난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믿고 나서 그는 그 때부터 순교의 자리에 설 때까지 엄청난 핍박을 맞게 됩니다. 예수 믿어서 복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빼앗겼습니다. 이처럼 위협과 핍박이 저들 앞에 놓여 있는 불안함이 그들을 얼마나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로마 트라이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에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었던 익나티우스가 안디옥에서 로마로 호송을 당하여 원형 경기장에 끌려 왔습니다. 이제 맹수의 밥이 되는 순간입니다. 집행관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말 한 마디만 하면 살려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보고 말하기를 “만약 기독교의 이 모든 것이 허무맹랑한 일이라면 내가 무슨 까닭으로 여기 고통을 당하고 있겠는가? 이 진리가 거짓이라면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겠는가? 또 이것이 거짓이라면 무슨 까닭에 내 몸을 사자밥이 되도록 맡기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사자 앞에 던져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냥 눈 한번 감고 부인하면 살수 있지 않습니까? 말 한 마디로만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풀려나서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이 되는데 이 한 마디 말을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그 한 마디 말을 못해서 세상이 볼 때는 가장 바보 같은 인생의 종말을 고한 사람들이 초대 교회 안에 수십만이 있었습니다. 사자굴에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고, 화형을 당하고, 자식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고아 신세가 되어 어떻게 됐는지 알 수도 없는, 부모로서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당하면서도 예수 모른다는 말 한 마디를 할 수가 없어서 주님이 가신 그 길을 따라간 성도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또 버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 나선 사람이 이런 고통 속에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아픔이 바울을 짓눌렀지만, 세상은 그의 입을 막지 못했고, 심지어 그를 감옥에 집어넣어도, 그의 가슴에 불붙고 있는 성령의 그 열정은 세상의 쇠사슬로도 묶지를 못했습니다. 

2. 그리고 자신은 주는 자로서의 본을 보였습니다. 

35절에 함께 보십시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바울은 될 수 있는 대로 한 가지라도 더 주려고 했습니다. 복음을 주고, 생명을 주고, 은혜를 주고,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여러분, 줄때에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받으면 속박이 됩니다. 줄 때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베푸는 자만이 자유 합니다. 언제든지 될 수 있는 대로 주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오래 전의 일입니다. 한 부모가 몸이 좋지 않은 이들의 진찰을 위해 미국 해군 병원에 찾아왔습니다. 담당 의사는 검사를 한 후 그 아이의 간에서 치명적인 종양을 발견했습니다. 그 아이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오히려 의사가 더 당황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하든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빠져들면서 드디어 공격적인 화학요법을 쓰기로 했습니다. 공격적인 화학요법은 의사들이 사용하는 전문용어로, 좀 독한 항생제 혹은 항암치료제를 투입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 의사는 처방을 내리고 약을 투여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아이가 발작을 일으키더니 그만 죽어 버렸습니다.

의사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에, 그 의사는 자기에게 배우는 의대생들에게 그 아이가 왜 죽었을까 하는 문제를 놓고 강의 시간에 연구를 하게 했습니다. 문제가 어디 있었는지 알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그 아이에게 자기가 어떻게 처방을 하고 치료했는지를 역추적해서 조사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아이에게 투여한 약의 양이 정상치의 열 배나 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실수해서 아이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의사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던 부모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를 살려 보려고 노력한 선생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죽은 아이가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너무 심려하시기 마시기를 바랍니다.?

이 부부는 자기 아들을 살려 내라고 의사의 멱살을 잡고 아우성치거나 소송을 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데리고 가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상한 믿음을 갖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반응이요, 행동입니다. 생사의 모든 권한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믿는 비상한 믿음이 아니고는 절대로 못하는 일입니다. 제가 만약 그런 일을 당했을 때 그 부모처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안 당해 봐서 모르지만, 보통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주심 같이 그 힘든 과정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드림의 모습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의사는 큰 감동을 받고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 후에는 의사 일을 그만 두고 자기 아버지가 경영하던,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자선단체의 재단을 인수 받아서 운영을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재벌이었지만 그 많은 돈을 사회에 환원되기 위해서 재단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 재단은 종교계에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을 시상하며 격려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을 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템플턴 재단? 이었습니다. 이 재단에서 수여하는 템플턴상은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이 상을 처음으로 받았고,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우리나라의 한경직 목사가 이 상을 받았습니다.

그 의사는 이 재단의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이 잭 템플턴입니다. 사람들은 그가 그 재단의 책임자가 된 것을 보고 ?선교사가 템플턴 재단의 책임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믿음이 좋은 사람, 주님을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재단을 책임지니까 하나님이 그 재단을 사용하여 얼마나 큰 일을 하실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평범한 의사를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킨 장본인이 누구입니까? 

비상한 믿음을 가진 무명의 부모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오로지 예수님만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단순하고 우직하고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그 분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 사실을 믿기 바랍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게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과 구원의 복음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 어느 쪽이 복됩니까? 어느 쪽을 기뻐합니까? 여러분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저 받는 것만 복이 있고, 더 가지는 것만 복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에베소 교인들과는 마지막 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피를 토하듯 다음 세대를 책임질 동역자들에게 당부합니다. 28-31절을 함께 읽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Ⅱ. 먼저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섬길 동역자들에게 당부합니다. 

첫째는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여기 '삼가라'는 말은 '무엇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라', '전력하라', '관심을 가져라', '조심하라'는 뜻인데 표준새번역에는 '보살피라'로 번역했습니다. 지도자는 누구를 보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먼저 자기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왜 지금 바울이 양떼를 살피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한 때 훼방자요, 폭행자요, 살인자였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만나주셨고, 그에게 사명까지 맡기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거저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고백했습니다. 은혜 가운데 가장 큰 은혜는 깨닫는 은혜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은혜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은혜 앞에선 자신을 볼때 나 같은 것도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주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서 우리는 내가 소중하듯 이웃도 소중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양떼를 삼가라는 말을 합니다. 여러분, 왜 성도를 양떼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는 양의 특성과 성도는 무척이나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양이 소나 말등 다른 짐승과 차별화 되는 다른 현저한 특성이 무엇이냐 하면 방향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집에서 조금만 떨어지면 집을 찾지 못합니다. 소도 말도 고양이도 반드시 집을 찾아오지만 양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든 생물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어떤 자구책을 갖고 있습니다. 신체의 한 부분을 무기로 사용하는 존재가 있는가하면, 자신의 신체의 색갈과 유사한 자기 주변의 환경에 은거함으로 스스로를 보호하기도 합니다. 보호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양은 별로 이런 자구책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양은 일견 멀리서 겉으로 보면 깨끗해 보이나 가까이 있으면 냄새나고 너무 쉽게 환경에 오염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깨끗케 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는 다 양과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근사한 모습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아왔지만 우리 안에는 죄책의 어두운 갈등이 있습니다. 방황의 상처가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구원하지도 변화시키지도 못하는 무력감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존인 것입니다. 이것이 양과 같은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양의 특성을 가진 성도를 잘 섬기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여기 온 양 떼를 '보살펴야‘ 합니다. 

이처럼 주께서 핏값으로 산 이 양떼와 같은 성도들에게 시선을 떼지 말고 그들을 잘 보살피는 이유는 29절에 나와 있습니다.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떠난 후에 반드시 흉악한 이리(거짓 교사를 말함)가 들어와서 양떼를 마구 해칠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탈선하게 할 수 있는 이단의 위험과 유혹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정신 차리시기 바랍니다. “나는 문제없다.” 아닙니다. 당신의 주변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당신의 신앙을 흔들리게 만들 수 있는 어떤 친구가 없습니까? 성도들이 그들의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그런 사람들과 몰려다니는 모습을 바라볼 때 제 마음이 무척 아픕니다. 

신앙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아름답고 순결한 신앙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영향을 받습니다. 모여 앉기만 하면 무의미한 농담이나 지껄여대고 비판과 중상을 일삼는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들의 영향을 받습니다.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교리적 이단보다도 어떤 의미에서 더 경계해야 할 위험한 요소들입니다. 바울은 3년 동안 잘 가꾸어 놓은 나무가 잘못된 영향을 받아서 흔들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파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그대들에게 권고했던 말씀을 기억하시오”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눈물로 당신들을 섬겼습니다. 당신이 구원받도록 눈물을 흘렸으며,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당신들의 믿음이 자라나도록 눈물을 흘렸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전도한 사람의 신앙이 잘 자라나도록 얼마나 눈물로써 그들을 섬기고 있습니까? 이것은 무서운 도전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정말 강함이 있었다는 것은 시험을 잘 참아내는 모습이었습니다. 본문 19절을 다시 보십시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主)를 섬긴 것과.” 바울이 본격적인 전도의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의 전도를 가로막는 방해자는 뜻밖에도 자기 동족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주님 앞에 참으로 헌신하기 시작할 때 우리 주변에 방해자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역사합니다.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나를 핍박할 때, 우리는 그 핍박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해야 할 사람이고 누구보다도, 나를 격려해야 할 사람이 독기어린 모습으로 내 신앙을 비판하고 조롱할 때, 그때의 고독과 고통을 당신은 아십니까? 바울은 지금 그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것을 참았다. 이 시험을 참았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교회를 나오는 목적이 단순히 우리 자신의 행복과 마음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것으로 머문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에서 벗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C.S. 루이스가 한 다음의 말에 매우 공감합니다. ‘나는 행복해지려고 종교를 찾지 않는다. 그런 행복이면 와인 한 병을 가지고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다. 

만일 당신이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서 종교를 찾는 사람이라면, 나는 굳이 당신에게 기독교를 믿으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수준에서 머물지 않고, 그 이상의 수준을 가진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데도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거룩한 강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펴는 것이 교회의 본질입니다. 

이제 우리 역시 성숙한 신앙의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의 눈을 열어 영혼 구원의 열망을 갖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을 겨냥하면 세상을 덤으로 얻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겨냥하면 둘 다 잃고 말 것이다.”(C. S. 루이스) 마음속 깊이 음미해 볼 만한 메세지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는 성도를 결코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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