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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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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8) 
 
 
❚청결이 중요한 이유

전에 제가 잘 가던 식당이 하나 있었습니다. 음식 맛이 좋아서 자주 찾아가곤 했는데 어느 날 가보니 휴일도 아닌데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 유심히 살펴보니 내려진 셔터 위로 이런 종이가 붙어있습니다. “공고 : 이 식당은 위생상태 불량으로 3개월 간 영업정지 처분을 받았음. 식품의약품안전청장 도장 쾅쾅!!” 기가 막혔습니다. 

그동안 이 집에 와서 먹은 게 몇 그릇인데 위생상태 불량이라니 뱃속이 다 불편해 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식당을 가면 유심히 살펴봅니다. 이 집은 위생상태가 어떤가? 아무리 음식이 맛있어도 집이 지저분하고 위생상태가 엉망이다 싶으면 다시는 가지 않습니다. 맛이 문제가 아니라 그 음식을 먹고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만났던 어떤 남성이 생각났습니다. 참 잘 생긴 미남입니다. 매너도 좋고 옷차림도 깨끗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머리에서 비듬이 떨어집니다. 호감이 한 순간에 싹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예쁘게 생긴 아가씨인데 손톱 사이에 때가 낀 것이 보인다, 말을 하는데 입 냄새가 심하게 난다면 정나미가 뚝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지만 우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외모를 전혀 안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외모도 중요하고 옷차림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청결하지 않으면 절대 좋게 보일 리 없습니다. 음식 맛도 중요하지만 청결상태가 좋지 않으면 손님들이 찾아오지 않습니다. 청결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청결이 중요한데 가장 중요한 청결은 무엇일까요? 위생상태 청결일까요? 아니면 외모로 보이는 청결일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청결은 뭐니 뭐니 해도 마음의 청결입니다. 겉으로 깨끗해 보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리 겉만 깨끗하면 뭐합니까? 겉은 깨끗한데 속이 더럽고 썩어있다면 어느 순간 그 썩은 냄새가 새나오게 마련입니다. 기왕 식당 얘기가 나왔으니 하나 더 합시다. 

어떤 식당은 음식은 제법 정갈해 보이고 맛도 있습니다. 손님들이 앉는 홀도 제법 깨끗합니다. 하지만 창문 넘어 주방을 보는 순간 주방으로 쥐가 돌아다니고, 바퀴벌레가 다니고, 담배꽁초가 사방에 흩어져 있고, 때가 꼬질꼬질 낀 더러운 그릇이 엎어져 있는 모습을 본다면 음식 맛이 싹 가실 것입니다. 잘 먹은 음식이 속에서 느글느글 거리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모르고 먹을 때는 정말 맛있었지만 주방의 더러운 모습을 보는 순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집이 될 것입니다. 속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본질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겉을 깨끗하게 꾸며도 속이 더러우면, 속이 썩어 있으면 사람들이 찾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마 23:27)

유대인들은 무덤에다가 종종 회칠을 했습니다. 하얗게 회칠을 하면 남의 눈에도 잘 띄고 또 깨끗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 속에는 썩어가는 시체가 들어있습니다. 아무리 겉을 깨끗하게 잘 칠하고 잘 숨겨도 그 속에는 악취 나는 시체가 썩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늘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서 외식(外飾)은 밖에 나가 밥을 먹는 외식(外食)이 아닙니다. 겉으로 꾸미는 외식입니다.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제법 거룩한 척 꾸미고 살았습니다. 목소리도, 옷차림도, 행동도 제법 거룩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외식이었습니다. 회칠한 무덤처럼 바깥 모양만 그럴듯하게 꾸민 것입니다. 속으로는 시체가 썩어가는 것처럼 더러운 생각, 교만한 생각, 죄악이 가득한데 겉으로만 거룩한 척 꾸미고 사니 주님은 이런 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맹비난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청결이 중요합니다. 깨끗하고 순수한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만 청결하고 깨끗해서는 절대 진정한 청결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속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겉을 꾸미는 데만 신경 쓰지 말기 바랍니다.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군요. 여성분들 하루에 화장에 투자하는 시간이 얼마냐고요. 하루에 TV 드라마 보는 시간이 얼마냐고요. 하루에 화장에 투자하는 시간만큼만 기도하면 정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예쁜 여인이 될 수 있다고요. 하루에 TV 드라마 보는 시간만큼만 성경 보면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 될 수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여성뿐 아니라 남성들도, 우리 모두도 우리의 겉모습만 깨끗하고 청결하게 유지하려 하지 말고 우리의 마음을, 속사람을 정결하고 순수하게 만들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여러분이 되기 바랍니다.

❚청결의 의미

오늘 주님은 팔복 설교의 여섯 번째 말씀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하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이 ‘청결’이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카타로스’입니다. ‘깨끗함, 순결함’이라는 뜻인데 ‘카타르시스’(catharsis)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카타르시스’란 본디 문학적인 용어로 비극을 감상하면서 평상시 마음속에 억압되어 있던 감정을 해소하고 마음을 깨끗이 정화하는 것을 뜻합니다. 

심리학적으로는 자기가 겪는 고민이나 문제를 외부로 표출함으로써 정신의 안정을 찾는 일을 뜻합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사람들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소리를 마음껏 지르거나 폐차장에 가서 해머를 가지고 폐차를 마구 때려 부수면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한 마디로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해주는 것이 카타르시스인데 이 말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이 ‘청결’(카타로스)이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청결한 자, 깨끗한 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세상 모든 종교에는 이 ‘청결’에 대한 조항이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해야 신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뒤뜰에 정한수(바른 말은 정화수) 한 그릇 떠놓고 신령님께 빌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빈 것이 아니라 목욕재계하고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빌었습니다. 

정한수 물도 그냥 아무 물이나 떠오지 않고 저 심산유곡 맑은 물을 떠왔습니다. 이것을 정결(淨潔)이라고 합니다. 불교에도 이슬람교에도 도교에도 세상 모든 종교에는 이 정결 조항이 다 있습니다. 유대교에도 아주 까다로운 정결조항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장 어렵게 느끼는 것이 바로 레위기를 읽을 때입니다. 레위기에는 각종 제사규정이 자세히 나옵니다. 

제사를 드릴 때 어떤 제물을 어떻게 잡아서 드려라 등등 너무 복잡하고 재미없습니다. 게다가 11장부터 보면 소위 ‘정결법’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어떤 짐승은 정결하니 먹어도 되고 어떤 짐승(이를테면 돼지)은 부정하니 먹지 말아라, 또 어떤 병에 걸리면 며칠 간 부정하고 어떻게 해야 정결해진다 등등 너무 복잡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레위기를 읽기 싫어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실 때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유대인들은 이 레위기에 나온 정결법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 안 그래도 우리가 부정한 자가 아니라 정결한 자가 되려고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어? 돼지도 안 먹고, 모든 음식도 골라 먹고, 병에 걸리면 율법에 규정한 기간 동안 다른 사람 만나지도 않고 하면서 살았잖아?” 그런데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정결법은 이뿐만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중심으로 레위기에 나온 정결법을 해석해서 그 규정을 점점 더 복잡하고 엄격하게 만들어 갔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장로들의 유전’ 혹은 ‘장로들의 전통’이라고 부르는 규정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15장에 나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 제자들은 왜 장로들의 전통을 범합니까? 왜 거기 규정된 대로 떡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습니까?” 저는 학생 때 이 말씀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야,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위생관념이 되게 철저했나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온 촌뜨기들이라서 손도 안 씻고 막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으니까 왜 더럽게 손도 안 씻고 먹느냐고 지적했구나!” 하지만 위생 때문에 손 씻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레위기에 나온 정결법을 해석해서 점점 더 복잡하고 엄격한 정결규정을 만들었다고 했지요? 그래서 만든 규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손 씻는 규정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식사 전에, 그리고 식사 중에도 요리가 바뀔 때마다 손을 씻었습니다. 위생 때문이 아니라 아예 종교적으로 그렇게 못 박은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부지런히 씻되 손을 씻지 않으면 음식을 먹지 말고, 밖에 나갔다 오면 반드시 손을 씻고,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깨끗이 씻으라고 규정합니다. 

그것도 그냥 아무렇게나 씻으면 안 되고 반드시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물에 손을 넣은 후 손을 들고, 또 씻고, 아주 순서가 복잡합니다. 어느 화장실에 가니까 ‘신종 플루를 막는 손 씻는 법’이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습니다. 반드시 흐르는 물에 손을 씻되 비누칠을 하고 먼저 손바닥을 씻고, 그 다음에 손가락 사이사이를 씻고 등등 아주 여러 단계에 걸쳐 복잡하게 설명한 것을 보고 가 이렇게 씻나 싶어 픽 웃고 돌아선 적이 있습니다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만들어낸 정결법은 이보다 더 복잡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왜 당신 제자들은 손도 안 씻고, 그 중요한 장로들의 전통도 안 따르고 함부로 떡을 먹느냐?”는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시나요?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무슨 뜻이겠습니까? 손 안 씻고 먹는다고 그 떡이 더러워져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다 배로 들어갔다 뒤로 나온다는 것이지요. 정작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이런 음식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이라는 것입니다. 

즉 너희들처럼 겉으로 깨끗하게 씻는다고 깨끗한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마음속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하고 겉으로는 정결한 것처럼 보여도 정작 마음속은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너희 바리새인, 서기관 같은 자들이야말로 진짜 더러운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예수님이 ‘회칠한 무덤’이라고 비난하신 것입니다.

❚마음이 청결해 지는 방법

여러분, 우리가 정말 청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겉이 아니라 속이 깨끗해져야 합니다. 외모가 아닌 우리 중심이, 마음이 청결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불교도, 유교도, 이슬람교도, 산신령을 찾는 무당종교도 이것은 다 압니다. 다만 그 마음이 청결해지고 깨끗해지는 방법을 겉으로 부지런히 손을 씻고, 목욕을 하고, 맑은 정한수를 떠놓고 하는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교회 온다고 향수 뿌리고 온 분들 계실 텐데 향수가 왜 생겼는지 아십니까? 여성들이 아름답게 보이려고 뿌린 것이 아닙니다. 중세시대 유럽 사람들은 평생 목욕을 제대로 안 하고 살았습니다. 믿기 힘든 얘기지만 왕조차도 평생 세 번, 즉 태어날 때 한 번, 장가갈 때 한 번, 죽을 때쯤 한 번만 목욕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연 몸에서 지독한 악취가 났겠지요? 그 악취를 감추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 바로 향수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향기가 나는 샤넬 No.5 향수를 몸에다 잔뜩 뿌리고 다니면 뭐합니까? 몸은 평생 목욕을 안 해서 악취가 풍기는데요. 마치 이와 같이 유대인들과 다른 모든 종교는 마음을 청결하게 한답시고 부지런히 몸을 씻고, 손을 씻고, 별 짓을 다했지만 결국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오히려 겉은 깨끗하고 거룩해 보이는데 속은 다 썩고 더러운 생각으로 가득 찬 회칠한 무덤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다. 그런데 너희가 정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고 싶으냐? 그렇다면 정결법으로도 그 어떤 방법으로도 안 된다. 오직 우리 마음에 가득 찬 더러운 것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깨끗하게 할 수 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어떤 인간의 노력으로도 우리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죄는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 중국에서는 범죄자를 잡으면 이마에 범인이라는 뜻으로 범(犯) 자를 낙인찍었습니다. 벌겋게 달군 쇠로 낙인을 찍으니 아무리 애써도 안 지워지고 이마에 평생 달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 죄도 이와 같아서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안 지워집니다.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의 더러운 죄를 씻고 진정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마음의 청결이란 마음뿐 아니라 모든 생각이나 말과 행동에 있어서 깨끗하고 순수하고 정직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말과 행동 모두가, 그의 삶 전체가 깨끗하고 순수합니다. 정직한 삶을 삽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의 복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주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어떤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다시 본문을 봅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그렇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마음은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이 깨끗하면 바깥에 있는 모든 것이 밝게 분명하게 보이지만 더러운 창문을 통해서는 바깥세상이 잘 안 보일뿐더러 보이더라도 온통 더럽게 보일 뿐입니다.  바깥세상이 더러운 것이 아닙니다. 내 창문이 더러운 것입니다. 아주 오래전에 ‘고교 얄개’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마 40대 중후반은 되어야 이 영화를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 나옵니다. 아주 눈이 나빠서 두터운 안경을 쓴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졸 때 이런 장난을 합니다. 

안경을 온통 빨간색으로 칠해놓고 갑자기 깨워서 “불이야!” 하니까 그 친구가 정말 불이 난 줄 알고 호들갑을 떠는 장면입니다. 정말 불이 난 게 아닙니다. 내 안경이 빨간색이니까 불이 난 줄 아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창이 깨끗하면 세상도 깨끗하게 잘 보이지만 내 마음의 창이 더러우면 다 더러워 보이고 잘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마음의 창이 더러운 줄은 모르고 세상이 더럽다고, 잘 안 보인다고 불평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하고 깨끗해져서 마음의 창이 깨끗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분명히 계십니다. 다만 내 마음이 더러워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내 마음이 청결해지고 깨끗해지면 우리는 그 마음의 창을 통해, 그 깨끗한 마음의 렌즈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잘 안 보이십니까? 내가 급해서 힘들어서 하나님을 찾는데 하나님이 잘 안 나타나십니까?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왜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할 때 하나님은 안 계십니까? 왜 하나님을 불러도 불러도 대답을 안 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하나님은 분명히 거기 계십니다. 

아주 분명히 똑똑히 영원 전부터 거기 계셨습니다. 다만 내가 못 보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럴 때는 오히려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불평하지 말고 내 마음의 더러운 것들, 복잡한 것들, 혼란스러운 것들을 제거하고 마음의 창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 더 기도하고 회개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하는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세상의 똑똑한 자, 잘 난 자, 가진 자가 아니라 마음이 깨끗한 자를 찾아 사용하십니다. 왜냐? 그들만이 하나님을 볼 수 있고 하나님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왜 이리도 다윗이 자신을 깨끗하게 씻어달라고, 정결하게 해달라고 간구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사람인 다윗도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했습니다. 죄 때문에 마음이 더러워지고 오염되었습니다. 그 때 그는 깨닫습니다. 내 마음이 더러워져서는 결코 하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음을 말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이 깨끗해져야 하나님을 보고 만날 수 있고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이렇게 간절히 간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속을 더럽히는 것들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의 속사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흐리게 해서 하나님께 집중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저도 가끔 근심 때문에, 어떤 인간적인 열망이나 욕심 때문에 어느새 그것들이 내 마음을 사로잡고 지배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마음이 혼란하고 지저분해져서 하나님을 볼 수도 만날 수도 없게 될 때가 있습니다. 목회 열심히 한답시고 분주한데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을 못 본다니 참 아이러니 한 일입니다. 근심이 깊어지거나 욕심과 열망이 커지면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빨리 여러분의 그 방해요소들을 제거하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한 주도 빠짐없이 교회에 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고 깨끗하지 못하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교회를 한 번도 안 빠지고 왔는데 하나님을 못 보고 간다니요. 정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설교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about) 배우면 뭐합니까?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 미국에 대해 잘 안다, 정말 많이 배웠다” 자랑해도 “나는 미국 가봤어” 하는 사람 만나면 게임 끝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about) 많이 배우고 알더라도 하나님을 본 사람, 만난 사람과는 상대가 안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꼭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바랍니다. 꼭 하나님을 만나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모든 죄와 더러운 것과 복잡한 것, 혼란한 것을 카타르시스! 깨끗이 청소하고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 받은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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