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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은 여기에 (시 73:1~1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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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여기에 (시 73:1~17, 28) 

 
우리 주변에 이단들이 많습니다. 이단들의 공통점이 특이합니다. 첫째,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지식층들도 많이 빠져있습니다. 둘째, 돈이 많습니다. 부동산의 규모가 웬만한 대기업보다 더 거부입니다. 셋째, 교주가 장수합니다. 사이비이단의 교주가 당장 벌 받아 죽어야 그 집단들이 무너지는데, 오히려 사고가 나도 교주는 안 다치고 멀쩡합니다. 그래서 이단은 더 번성합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선량한 사람보다는 불량한 사람이 승승장구하고 추종자도 더 많습니다. 정직한 사람보다는 부정직한 사람이 더 잘 풀려 갑니다. 이런 현실적 모순 때문에 구약시대 지도자 아삽이라는 사람이 열 받아 쓴 시가 오늘 본문입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은 고생을 많이 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아무런 고생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화딱지가 나서 따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하나님이 참으로 마음이 정직한 사람과 정결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셔야 하는데…』그런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아서 아삽은 열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2절과 3절을 보십시오.『나는 거의 신앙적 확신을 잃고 넘어질 뻔하고, 믿음을 버리고 미끄러질 뻔 했는데, 그것은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시샘하고, 그들이 누리는 평안을 부러워했기 때문이다.』라고 가치관의 혼란을 솔직하게 토설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되는 것 때문에 열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더구나 그런 사람들이 멀리 있지 않고, 바로 곁에 있으니 더욱 열 받칩니다. 아삽의 혼란스런 질문은 단순합니다. “왜 좋은 사람에게는 나쁜 일이 생기며, 나쁜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생기는가?” 즉 선과 악이 뒤바뀌고 있는 현실적 모순에 대한 의구심입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이기도 하잖아요? 믿음 없이 사는 사람은 별 고민 없이 잘 살아가는데,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어려움이 많아요. 교만하게 사는 사람은 상처 받을 일이 없지만, 겸손하게 살려는 자에게는 아픔이 많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렇게 질문합니다.(예레미야 12:1)『주님, 제가 주님과 변론할 때마다, 언제나 주님이 옳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공정성 문제 한 가지를 여쭙겠습니다. 渚紵臼?악인들이 형통하며 배신자들이 모두 잘 되기만 합니까?』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공정성에 의구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욥은 악인의 번영에 관하여 이렇게 읊조립니다.(욥기 21:7-13)『내게 일어난 일은 기억에 떠올리기만 해도 떨리고 몸에 소름이 끼친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잘 사느냐? 어찌하여 그들이 늙도록 오래 살면서 번영을 누리느냐? 어찌하여 악한 자들이 자식을 낳고, 자손을 보며, 그 자손이 성장하는 것까지 본다는 말이냐? 그들의 가정에는 아무런 재난도 없고, 늘 평화가 깃들며, 하나님마저도 채찍으로 치시지 않는다. 

그들의 수소는 틀림없이 새끼를 배게 하며, 암소는 새끼를 밸 때마다 잘도 낳는다. 어린 자식들은 바깥에다가 풀어 놓으면 양 떼처럼 뛰논다. 소구와 거문고에 맞춰서 목청을 돋우며, 피리 소리에 어울려서 흥겨워하는구나. 그들은 그렇게 일생을 행복하게 살다가 죽을 때에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조용하게 스올로 내려간다.』

시편 73편의 내용은 매우 현실적 모순에 대하여 가치관이 흔들리는 고민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적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하는 현상들은 무엇일까요?

 1)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형통입니다.(3-5절)
비양심적인 사람이 더 잘되고, 겸손한 사람보다 오만불손한 사람들이 훨씬 더 대접받고 승승장구합니다. 일평생 고생도 별로 안하고 건강도 좋습니다. 그야말로 무사태평 만고강산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 근검절약하여 저축해도 집 한 채 사기 어려운데, 그들은 머리 한번 굴리면 따따볼을 치며 수지맞습니다. 이런 부당한 현실에 열이 받치고 뚜껑이 열리는 것입니다.

2)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교만과 횡포입니다.(6-9절)
그 사람들은 약자를 짓누르고 세도를 부리며 삽니다. 자기들이 계획한 것보다 더 많은 수입을 올리기에 갈수록 더 자신만만하며 거만해집니다. 말도 청산유수이기 때문에 사람 하나 바보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래서 안중무신, 안하무인이 됩니다.

3)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인기와 리더십입니다.(10-11절)
그들은 말도 청산유수로 잘하니 설득력이 있어서 믿음이 좋은 사람들마저도 홀려서 감언이설에 넘어갑니다. 그래서 그들을 선망하고 추종합니다. 갈수록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듭니다.

4) 경건치 않은 사람들의 번영과, 경건한 사람들의 고난입니다.(12-14절)
아삽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아서 볼멘소리로 외칩니다. 그들은 모두가 악한데도 신세는 갈수록 편하고, 재산은 늘어만 가니, 그렇다면 깨끗한 믿음으로 살아온 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허탈하다는 회의에 빠집니다. 주일날 놀러 한번 못가고, 교회봉사 하느라 힘을 다 쏟고,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십일조, 선교헌금 꼬박꼬박 했는데, 결과적으로 아무런 축복이 없는 것 아니냐고 회의에 빠진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 자체를 때려치우고 싶은 충동을 일으킵니다. 13절에서는 ‘그 동안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망한 게 아니냐?’는 회의를 느낍니다.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려고 애써온 것에 대한 억울한 감정이 더욱 허탈감을 갖게 합니다. 이렇게 혼란스럽다보니 아삽은 한층 더 깊은 회의와 갈등에 빠집니다.14-16절 이하를 보면, 그 동안의 신앙생활 자체가 괴로웠던 것으로 느껴져서, 하마터면 신앙생활 자체를 접을 뻔 했습니다. 현실적 부당함에 열받다보니 속만 상하고, 신앙적 허무주의에 빠질 상황입니다. 

 그러다가 아삽은 놀라운 해답을 얻습니다. 다 같이 17절을 보십시다.『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해답을 얻습니다.』그렇습니다. 해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관점과 가치관에 초점을 맞출수록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집니다. 헷갈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으로 해석해볼수록 간단하게 풀립니다. 우리는 근시안적으로 현재만 보지 말고, 원시적으로 미래를 보아야 합니다. 외형에 치중하지 말고 내면을 볼 줄 알아야합니다. 사람 대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금세기 문학가요 기업가이기도 한 Kurt Hock는 70년을 살면서 얻은 행복의 법칙을 이런 짤막한 시로 노래합니다. “아마도 나는 너무나도 멀리서 행복을 찾아 헤매고 있나 봅니다. 행복은 마치 안경과 같습니다. 나는 안경을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안경은 나의 코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렇게도 가까이!” 인생을 살면서 가치관이 흔들리고 혼란스러울 때마다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되는 일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서 주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세요. 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전에 들어와 앉아서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의 관점으로 해석하다보면 갑자기 세상은 작아지고, 하나님이 커지기 시작합니다. 관점이 전환되는 만큼 참된 행복을 알게 됩니다. 17절부터 22절까지의 내용은 한 마디입니다. 그 동안 그처럼 부러워했던 세상 사람들의 번영과 흥왕과 세도가 한 순간에 심판을 받습니다. 

 마치 메가 쓰나미가 쓸고 간 것처럼 모든 것들이 한 순간에 초토화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비참한 말로는 한낱 꿈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20절)하나님께서 어쩌면 그렇게 엄중하게 심판하시는지 넋을 잃을 정도로 전율을 느끼고 겸허하게 자신의 어리석었음을 개탄하는 고백을 합니다.(22절) 그러면서 그는 경건한 믿음으로 사는 자의 행복을 아름다운 서사시로 막을 내립니다. (28절)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행복이라】행복은 가까이에 있습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삽이라는 사람이 왜 이처럼 반전될 수 있었을까요? 경건치 않은 사람들이 더 잘 되고, 흥왕하고, 세도부리는 현실적인 부당함 때문에 그처럼 열 받고 신앙적 허무주의에 빠질 만큼 혼란스러웠던 그가 어떻게 이처럼 행복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요?

 네 가지 사실 때문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주십니다.(23절) 오른손으로 붙잡아주십니다.
둘째,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24절) 영광의 정상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해주십니다.(26절) 하나님 자신이 축복이 되어주십니다.
넷째,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케 하십니다.(27절) 하나님이 직접 심판해주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손으로 패망을 당하고, 신자들은 하나님의 손으로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선지자라는 평판을 받았던 A. W. Tozer가 말하듯이 “행복은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의 의지가 조화를 이룰 때 생기는 내면적 기쁨입니다.” 잘 사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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