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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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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보이느냐? (막 8:22~26)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가 3층 다락방에서 꼼짝도 못하고 사흘 동안을 누워 있을 정도로 아플 때의 일입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열과 통증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의사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빨리 오지 않았습니다. 쇼는 신경질이 나면서 더욱 몸이 아파왔습니다. 그러던 순간 누군가가 밑에서부터 계단을 황급히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친구는 왕진 가방을 움켜진 채 단숨에 3층을 뛰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쇼의 다락방 문을 왈칵 밀고 들어서는 순간, 이 의사는 숨을 훅 몰아쉬더니만 그 자리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비명도 못 지른 채 쓰러져 버린 의사 친구를 보고 화들짝 놀란 버나드 쇼는 후다닥 침대에서 튀어 일어나 달려 왔습니다. 심장에 귀를 대어보고, 눈을 뒤집어 보고, 허리띠를 풀고, 인공호흡을 하고... 정신없이 땀을 흘리며 주무른 끝에 드디어 친구가 눈을 떴습니다. 친구가 살아났다고 환호를 하는 쇼에게 친구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습니다. 

“이제 나는 가보겠네. 왕진비 내놓게.”
“이 사람아, 쓰러진 건 자넬세, 자네. 정신 차려! 내가 자네를 인공호흡까지 시켜서...”
“그런가? 나를 부른 이유가 뭔가? 병을 고쳐 달라고 했지? 그러나 내가 쓰러지니까 자네는 놀랐지? 내가 더 위험해 보이니까 자네는 자네 병을 잊고 나에게 매달렸지? 이게 바로 나의 치료법일세. 친구야! 인간은 자신보다 남을 더 염려하게 될 때 자기의 질병은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법일세. 이제 자네 병은 다 나았네. 왕진비나 두둑이 내놓게.” 

예수님께서 벳새다에 이르셨을 때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합니다. 왜 하필이면 사람들이 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님을 찾아온 곳이 벳새다였을까요? 더군다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구할 때 예수님께서는 이를 거절하셨습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그리고는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는데 바로그러한 때에 그 건너편 벳새다로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오늘의 세대는 볼 수 없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 때문에도 우리는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당장 먹을 것도 없는 입장이라면 염려가 될 법도 하겠지만 먹지 못해서 몸이 상하기보다는 염려하는 그것 때문에 오히려 몸이 더 상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염려하는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에 관해서는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여야 할 것이요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 것은 염려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결국 무엇이 없어서의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염려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른 것이 없어서가 아닌 믿음이 없어서입니다. 즉 주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믿음의 눈 볼 수 있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신의 눈은 뜨고 있는지 몰라도 믿음의 눈이 감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보지를 못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나의 좋으신 아버지이심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믿음의 고백이 필요한 것이고 또한 의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오히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기도하고 구하고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의심합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염려합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선 내일에 관한 한 그것은 내게 감추어져 있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한치 앞도 우리는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점쟁이든 누구를 통해서건 내 앞길을 미리 보고자 그리도 애를 쓰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나의 앞길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생각 내 마음이 앞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유는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도 없고 채울 방법조차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족한 부분을 채우실 수 있는 분임을 믿는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 구하고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한 것을 주시기도 하지만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하셨는데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그 믿음대로 받지 못할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구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원하고 있기 때문에 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도 꼭 필요한 것이 있는 반면 있으면 좋고 없어도 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는 그런 것도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냥 원하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있는 반면 꼭 있어야만 되는 그런 것도 있을 것입니다. 한데 반드시 필요한 것인데도 나는 그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을 때도 있어요. 어쨌든 예수님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고 했는데 왜 그게 믿어지지 않는 걸까요? 결국 사람들은 내가 보고 알고 경험한 것만을 믿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떤 것은 내가 보고서도 믿을 수가 없다고까지 하는 데야 보지 못한 것을 어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내가 배우고 경험해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거 쉽게 믿어지지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따라서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이기에 믿을 수가 없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결국은 내가 아는 범위밖에는 믿지 못하는 것이 우리들의 한계입니다. 따라서 내가 믿지 못하는 부분들을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믿어지도록 만들어주시지 않는다면 믿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보는데도 알지 못합니까? 우선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가지고 보았다 해도 여전히 모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내 시선이 움직이는 것보다 빨리 움직이는 것은 그게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알게 해 주시고 믿도록 만들어주셔서 마음의 눈이 열리고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가 바로 믿을 수 있고 기도하고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 함께 우리 마음의 눈을 열어 볼 수 있게 하옵소서 믿음의 눈을 열어 보게 하여 주옵소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의심하지 않고 믿고 신뢰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예수님입니다.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십니다.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의 크고 작은 문제를 예수님이 다 해결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벳새다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여자와 아이 외에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그리고는 서둘러서 제자들을 배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들이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니 그 곳 사람들이 예수이신 줄을 알고 그 근방에 두루 통지하여 모든 병든 자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다만 예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손을 대도록 허락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들이 연약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구원은 단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는 것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단지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되도록 이끄시는 것까지도 포함합니다. 에덴동산 처음 하나님이 지으신 아담과 하와의 모습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며 죄 없다 하시고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바로 세우시고 고쳐주시는 분이요 우리들에게 마땅히 있어야할 것이 없거나 부족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풍족하게 누리도록 허락하시기도 하고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심으로 육신에 매이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기까지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는 연약함 때문에 우리가 염려할 것도 두려워하고만 있을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연약하고 쉽게 넘어지기에 더욱 주님을 향해 우리의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주님의 옷자락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였더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그 옷자락에 손을 대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이 우리들을 향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손을 내밀라는 것입니다. 열 두 해 혈루병으로 앓던 여인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나음을 얻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렇습니다. 이 구원의 은총을 우리 모두가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에게 크고 작은 문제가 있다고 한들 왜 그 문제만 붙들고 있습니까? 왜 큰 일 났다고 합니까? 아니 큰일 나다니요? 그럼 하나님이 돌아가시기라도 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으신 분인데 큰일은 뭐가 큰일입니까? 그러니까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지 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드십시오. 아니 이왕 붙드시려면 예수님의 손을 붙드십시오. 그러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손을 붙드는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것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크고 작고 간에 수없이 이어져 있는 약속대로 살아갑니다. 예를 들어서 차는 우측통행을 합니다. 그럼 왜 우측통행을 합니까? 그게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일본을 가면 거기는 차가 왼쪽으로 갑니다. 대개 왕이 있는 나라는 차가 좌측통행을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일본 사람이라도 한국에 오면 우측통행을 해야 합니다. 

즉 한국의 도로교통법이 그렇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법은 일종의 약속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물론 이 땅에서 살아가기에 이 땅의 법도 지켜야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그래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약속 가운데 첫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너희는 나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이 모든 것 우리가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약속을 우리들에게 주셨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있기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처음 하나님이 만드신 에덴동산에는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우선 죽음이 현실이 되었습니다. 질병이 들어왔고 가뭄과 홍수로 인해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문제는 두고두고 사람들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였습니다. 

그래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인생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를 붙들고 몸부림치는 인생을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은혜와 진리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은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희가 믿는다면 그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구했다면 받은 줄로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건 약속입니다. 약속은 그대로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셔서 도우시는 주님이야말로 사랑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사랑의 중심은 그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 긍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약속을 따라 그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구해야 하며 구한 것은 또한 받은 줄로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고 마을 밖으로 나가셔서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십니다. 마을 밖까지 그 손을 붙잡고 가셨습니다. 그 손을 꼭 잡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이윽고 그을 안수하십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네게 무엇이 보이느냐? 이는 곧 믿음의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곧 고백합니다.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처음에는 보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더니 내가 본다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는 것이 사람들임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걸어가는 것이 나무 같은 것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어쨌든 이 사람은 처음에는 보입니다 하더니 내가 봅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이런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바로 받은 줄로 믿는 믿음입니다. 이제 주님 앞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하며 받은 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문제를 바로 세우시고 풍족하게 채우시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안수하시는 예수님입니다.
맹인이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고백할 때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그 눈에 안수하셨습니다. 그랬더니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처음에는 보였고 그 다음에는 보았으며 그리고 난 다음에는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결국 그가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게까지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마지막 열매 맺기까지의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이윽고 완전에까지 이르는 과정을 보십시오. 그리고 그 과정을 도우시는 주님의 안수가 반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우리를 온전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번 두 번 그냥 생각해주는 듯 하다가 조금 설만 하니까 이젠 모르겠다 너 혼자 잘 해 봐라 그런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보였고 보이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는 주목하여 봄으로 말미암아 이윽고 모든 것을 밝히 보게까지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큰 믿음이 아니라 이렇게 믿음의 역사도 한 걸음 한 걸음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고 그렇다면 이런 믿음의 진보가 우리의 삶에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주님 앞에 서 있어야 하고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다시 안수하시는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사람이 모든 것을 밝히 보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어설픈 성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그냥 두고 보는 분이 아니라 성도다운 성도로서 살아가도록 돕기를 주님이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는 것은 가을에 알곡을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알곡이 맺히도록 끊임없이 돌봅니다. 주님 역시 우리로 하여금 알곡이 되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결코 쭉정이로 남아있는 것을 두고 보시지 못하는 분입니다. 그래서 다시 안수하십니다. 우리가 밝히 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그렇다면 나는 주님을 주목하여 분명히 보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이 밝히 보이십니까? 주님의 뜻이 분명히 분별이 됩니까? 아직 희미하다면 주목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주목하여 볼 수 있습니까? 바로 말씀을 통해서입니다. 그러기에 그냥 지나치는 사람을 건성건성 보듯이 그렇게 말씀을 보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여 보아야 합니다. 그 한 말씀 한 말씀이 바로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앞에서 보았던 요한복음 16장 24절의 말씀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를 읽을 때도 지금까지는 홍인덕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홍인덕의 기쁨이 충만하리라“로 바꾸어서 읽어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약속의 말씀이 나의 말씀이요 나에게 주신 말씀으로 확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약속의 말씀을 의지해서 기도하는 것이요 그 약속의 말씀을 가지고 심한 말로 하면 하나님께 떼를 쓰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런 약속을 주셨지 않습니까? 나는 약속대로 기도합니다. 그러니 하나님도 약속을 지키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냐 알았다 정녕 네 믿음이 그러하더냐? 그래 그렇다면 나도 약속을 지키마. 네가 구하는 것을 내가 주겠다. 자 받아라.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보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눈으로는 볼 수 없어도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면 아니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다면 그 사랑보다 아름다운 것을 아마 없을 것입니다.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는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지만 그건 금방 사그라지고 맙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라도 변함이 없는 감동의 연속입니다. 문득 그 사랑이 마음에 와 닿을 때 마음 가득히 채워지는 그 감동의 물결을 무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의 기쁨과 감격이야 어찌 말로 다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더 큰 감격을 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맹인을 주님께로 데려온 사람일 것입니다. 

그 맹인과 어떤 관계인지는 몰라도 누구보다도 이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랑의 수고를 통해 맹인이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보답을 이미 받았습니다. 아마 여기에 더 이상의 설명은 없어도 이 맹인은 물론 그를 데려온 사람까지도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으리라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전혀 새로운 세상이 그들 앞에 펼쳐졌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새로운 세상이 그들 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이 정말 멋진 삶을 살아갔을 것으로 기대해봅니다. 은혜를 받는 것 이상으로 은혜를 받고 난 다음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간 주님이 우리들에게 물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의 손길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를 도우시는 우리와 함께 계신 주님이 보입니다 하는 고백이 우리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에게 아쉬운 부분이 있다면 그는 사람들이 보였고 사람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았고 주목하여 보았으며 이윽고 밝히 보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그는 그의 눈을 뜨게 하신 주님에 대한 감격의 표현이 나타나있지 않습니다. 

나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신 주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이 고백이 더해졌다면 얼마나 멋있었을까요?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런 감사와 이런 고백을 종종 잊고 있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제 이후로는 달라집시다. 먼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함께 하심을 감사하고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주님의 은혜 아래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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