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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명(使命)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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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使命) (행 20:17~24) 


1. 사명

요즘 극장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소명>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부족민의 숫자가 겨우 100여 명 밖에 안 되는 南美 아마존의 ‘바나와’ 부족을 섬기는 선교사 부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90년대 초 서울의 한 외국어고등학교 교사였던 강명관 선교사 부부인데요. 그들은 문자가 없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없는 아마존 밀림 속의 原始部族인 ‘바나와’ 족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선교사로 헌신했습니다. 

영화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바나와’ 부족의 신선하면서도 충격적인 생활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강 선교사 부부가 어떻게 사역하고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5도에서 50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속에, 각종 毒蟲과 毒蛇 등에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바나와’ 부족의 유일한 의사의 역할을 하는 등, 그들을 좀 더 나은 생활로 이끌기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나와’ 부족이 사는 지역은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에 식량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냥인데요. 그런 ‘바나와’ 사람들이 주로 사냥하는 것은 들쥐나 거북이 등입니다. 그러다 보니 바나와 사람들의 최대의 꿈과 소망은 멧돼지를 잡아 마음껏 먹어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나와’ 사람들에게는 시간 개념이 없기 때문에 몇 시 몇 시 하는 것을 모르고, 그러다 보니 자신이 태어난 날을 몰라 생일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그들에게 약을 처방해주어도 언제 먹어야 할지를 몰라 ‘해 뜰 때 한 알, 해질 때 한 알’과 같은 식으로 시간 교육까지 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강 선교사의 가장 중요한 사역은 ‘바나와’ 부족의 문자를 만들어 교육시키고, 그 문자로 성경을 번역하는 작업입니다. 

성도 여러분, 서울의 잘 나가던 외국어고등학교 교사가 세계적으로 단 한 번도 알려진 적이 없는 아마존 밀림에 들어가 그 고생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영화의 제목이 그 답을 주고 있습니다. “召命”, 즉 使命感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소명, 혹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뜻입니다. 강 선교사는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부르심에 따라 아마존으로 가서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여러분! 강 선교사 부부 만 하나님이 부르신 소명에 따라 사명을 감당하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 즉 모든 성도가 다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성도들에게, 여러분 각자에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단 한 사람도 이 세상에 그냥 보내시지 않았습니다. 뜻 없는 삶이 없고, 목적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 목적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이 맡기신 그 일을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사명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은 사명감에 불타는 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고자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달려가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는 자신의 사명을 위하여 어떻게 살았을까요?

2. 노 브레이크 맨 ?

1) 최선을 다하여 여기까지 …

드로아에 있던 바울은 소아시아 남서부의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를 거쳐서 밀레도에 도착했습니다.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는 약 300km 정도 될 텐데요. 여기까지 바울은 굉장히 서둘러서 왔습니다. 왜냐하면 16절이 밝히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오순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원래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유월절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땅치 않자 육로로 해서 드로아에 도착한 이후에는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오순절을 예루살렘에서 지내고자 하는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 선교보고도 하고, 아시아와 마게도냐와 고린도 교회가 보낸 헌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명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발걸음을 재촉하던 바울은 이 밀레도에 도착해서는 거기서 북쪽으로 약 45km 정도 떨어져 있는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렀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전한 일종의 고별 설교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장로들에게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의 첫 번째 내용은 자신의 지난 사역을 회고하는 것이었지요. 

❶ 먼저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어떻게 섬겼느냐 하는 것을 말합니다. 18절, 19절, “아시아에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너희 가운데서 어떻게 행한 것을 너희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지난 3년 동안 자신이 그들에게 보여준 사역과 삶의 모습을 회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입으로 가르치는 것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가장 확실한 교육이지 않겠습니까? 에베소 장로들은 지난 3년간 바울이 삶으로 보여준 메시지를 잘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회상시키면서 자신이 그들에게 보여준 그대로 본받아 좋은 장로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9절 끝에서 “주를 섬겼다”고 말하는데요. 여기서 그가 ‘주님을 섬겼다’고 하는 것은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것을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첫째로 바울은 겸손하게 주님과 교회를 섬겼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겸손’이라는 말은 ‘심장을 떼어 놓는다’, ‘굴욕적인 것을 참는다’는 뜻입니다. 마치 심장이 없는 사람처럼, 가슴이 없고 생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굴욕을 참아가면서 전도하고 가르치고 일군을 세우면서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두 번째로 바울은 눈물로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작년, 노회의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베트남으로 선교 여행을 갔었습니다. 여행 도중 친하게 지내던 목사님의 사모님이 자꾸 우시더라고요. ‘선교 여행을 와서 부부싸움이라도 하셨나?’ 하는 생각으로 위로하려고 ‘왜 우냐?’고 물어도 답을 하지 않고, 나중에 뭐라고 말씀했는데 그냥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눈물에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사회주의 국가이고, 전쟁의 상처가 남아있고, 못살고 가난한 나라인 베트남이 주님의 복음을 제대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이 너무나 가슴 아팠던 사모님은 호텔 방에서 베트남을 위하여 기도를 하던 중 자신도 모르게 기도 소리가 커지고 또 방언으로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본 목사님이 ‘사회주의 국가의 호텔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기도하면 되냐’고 야단을 쳤는데, 그것이 서러워서 그렇게 눈물이 났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거역하는 유대인들 때문에, 아직 어린 신자들 때문에, 교회 때문에, 성도들 때문에, 주님을 알지 못하고 죽어가는 세상 때문에 늘 울면서 사역을 했습니다. 세 번째로 바울은 유대인의 간계로 인한 시험을 참으면서 섬겼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이 사도가 아니라고 공격했고, 모든 사역에 대해 사사건건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진 반대를 무릅쓰고, 아니 반대자들을 가슴에 품으면서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겸손하여 참고, 위하여 눈물 흘리고, 반대자까지 품어가면서 주님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대단합니까? 많은 사역자들이 사람에 대해 더 참지 못한 것 때문에, 제대로 섬기지 못한 것 때문에 얼마나 후회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후회 없이 겸손하게, 눈물로, 반대자를 품으며 사역했고, 그것을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자신처럼 그런 지도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❷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한 설교 중 ‘두 번째 과거 회고’는 에베소 성도들에게 전하여 가르친 것과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전도한 것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20절, 21절,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꺼림이 없이 가르쳤습니다.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수고와 희생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또한 믿지 않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향해서, 즉 교회 밖을 향해서는 회개의 메시지와 함께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욱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반대와 박해에 움츠러들지 않고, 도리어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죠. 이렇게 바울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라면 거리낌 없이 다 행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번 보십시오. 이상의 것만으로도 바울이 얼마나 사명에 충실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보든지, 어느 모로 보든지, 그의 지난 사역은 충분했습니다. 누가 그와 그의 사역에서 허물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정작 바울의 지난 사역에 대해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바울 자신입니다.

2) 지금부터는 더 … !

바울이 오늘 본문 22절 이하에서 뭐라고 말합니까? “달려간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자신이 마치 지금까지 달리지 않고 걸어온 것처럼, 이곳저곳 이 사람 저 사람 구경하면서 천천히 온 것처럼 평가하는 말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더욱 속도를 내어서 달려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그가 속도를 내어서 달려갈 때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2절,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앞에 있는 상황이 불안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바울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해서 300km가 넘는 거리를 걷거나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시간이 부족해서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에베소 교회를 들르지 못하고 대신에 에베소 장로들을 밀레도로 부른 그 모든 것이, 사실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를 길을 재촉한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사실 그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반대했습니다. 이것을 23절은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안다. 지금 내가 가는 이 길이 얼마나 위험하고 또 수고와 고생이 엄청나게 따를 길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나 …!’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하고 환란을 겪게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4절에서 그는 말합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는 말을 NIV 영어 성경은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I consider my life worth nothing to me.”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신의 생명이나 자신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nothing)으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죽은 사람에게 욕을 하고, 걷어차고, 심지어 침을 뱉어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이것이 사명을 향하여 달려가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모두들 ‘지금까지 한 것만으로도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훌륭하고 충분한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위험할 때는 잠시 쉬시죠. 그리고 위험한 곳과 위험한 환경은 잠시 피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바로 그곳이 내 使命地야! 거기에서 나의 사명을 감당해야 해! 그런데 어떻게 피해? 사명지가 보이는데 여기서 어떻게 멈추니?’라고 도리어 더 호통을 치고 있습니다. 

이와 똑 같은 표현이 빌립보서 2장에 나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17).” 전제(a drink offering)는 민수기 15장에 나오는 구약의 제사법으로서 하나님께 드린 제물 위에 포도주나 감람유를 마지막으로 붓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지금까지 모든 눈물과 땀을 주님께 다 부어드렸고, 이제 그 생애의 마지막 한 방울의 땀과 피까지 다 부어드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순절,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고, 또 평소 예루살렘을 넘어 로마도 보리라고 했으며, 땅 끝인 스페인도 보아야 한다고 했으니 환갑의 나이인 바울에게 남은 사명은 아직도 너무나 많았습니다. 그가 세운 목표지점은 아직도 까마득히 멀리 있었습니다. 그래서 달려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한 고별 설교에서 과거를 회고할 뿐 아니라, 자신의 앞으로의 계획도 말했습니다. 그 계획이 무엇입니까?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즉 호랑이 굴로, 사자의 입으로, 죽음의 집으로 망설임 없이, 아니 달리듯이 적극적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예루살렘 지도자들에게 가난한 소아시아 지역 교인들의 헌금을 전해야 하고, 이방인 가운데 일어난 영적인 부흥을 보고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명절을 맞아 모여든 유대인들에게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에게는 자신의 목숨보다 더 우선이었고 더 중요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도 바울처럼 사명자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그 은혜 가운데 사는 사람은 누구나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이 사명자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지금까지 사명자로 살아오셨습니까? 그리고 앞으로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바울처럼 사시겠습니까?

3. 사명자로 살아가라!

말씀을 맺겠습니다. 

최고의 기독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코펜하겐 대학의 神學生 시절, 자신이 만 22세가 되던 때, 다음과 같은 일기를 썼습니다. “온 천하가 다 무너지더라도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것, 그것을 위하여 내가 살고 또 그것을 위하여 내가 죽을 수 있는 나의 사명을 발견해야 한다.” 여러분은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그 “사명”을 발견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1950년대, 세계 선교의 영웅이라 불리던 짐 엘리어트는 “나의 사명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발자국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가 정글에서 순교한 후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 기록된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도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일을 위하여 끝까지 붙들 수 없는 것들을 버리는 사람, 그는 결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기 위해서, 청춘과 부와 명예와 권력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은 결코 어리석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울 역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에베소 장로들에게 밝힌 자신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소아시아 교회들의 헌금을 饑饉으로 어려운 가운데 있는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것, 이방 지역 교회들의 놀라운 영적 부흥을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하는 일, 그리고 오순절을 맞아 예루살렘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명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노라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또한 바울처럼 사명자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여러분이 정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그 일이 여러분의 사명이지요. 하나님은 여러분 각자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이루라고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분명 살아계신다는 것을 증거하고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묻은 복음 외에는 사람과 가정과 이 땅을 살리는 것이 없다는 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 세상과 이웃을 여러분 자신처럼 사랑하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의 가정을 교회로 만들고, 직장을 선교지로 만들고, 자녀들을 주님의 나라의 일군으로 만드는 일이 여러분의 사명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요?

고대 중국의 漢나라 高祖인 劉邦이 楚 霸王 項羽와 싸울 때의 일화입니다. 유방의 부하 將帥 중에 ‘번쾌(樊噲)’라는 사람이 있었는데요. 한 번은 이 樊噲가 이끄는 부대가 항우의 부대에게 포위되어 一觸卽發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樊噲는 전령에게 本隊에게 가서 자신들이 위급하니 어서 빨리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하라고 보냈습니다. 그런데요, 이 일을 맡은 전령이 얼마나 사명에 충실한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적에게 발각 될까봐, 우선 미친 사람으로 가장을 했고, 그렇게 하고서도 체포되었을 때를 대비하여 스스로 불덩어리가 된 숯을 집어삼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고문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부대가 위태하다는 것을 말하면 적들은 망설임 없이 공격해서 자기 부대를 전멸시킬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고 출발을 했지만, 부대를 포위하고 있던 항우의 군사들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 게다가 말을 못하는 벙어리인 것을 본 항우의 군사들은 그를 그대로 풀어주고 말았지요. 그러자 그는 즉시 本隊로 가서 글로서 ‘樊噲 부대’의 위급한 상황을 알렸고, 樊噲는 급히 달려온 援軍과 함께 그 전투에서 승리하여 유방에게 천하 통일의 결정적인 승리를 안겨주었다고 합니다. 바로 이 전투의 승리로 유방은 혼란한 중국을 통일시켜 漢나라를 세웠던 것이죠. 

사랑하는 여러분, 사명자는 누구나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나라와 그 군주를 위해서도 이렇게 충성하는데, 영원한 주님의 나라와 복음과 거룩한 교회를 섬기는 여러분은 더하면 더했지 이보다 못하면 되겠습니까? 여러분은 주님의 사명자입니다. 십자가와 복음의 사명자입니다. 교회의 사명자입니다. 이제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하시겠습니까? 오늘 자신이 사명자임을 다시 한 번 깨닫고 그 사명에 충성하기를 결단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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