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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가지 싸움 (마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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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세 가지 싸움’ .com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1) 

 예수님께서는 태어나신 후 약 30년 동안을 나사렛이라는 시골 동네에서만 사셨습니다. 30세쯤에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먼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그리고 바로 광야에서 40일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 이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①우리 생각에 40일을 금식하면 매우 거룩해 질 것 같고 천사처럼 될 것 같습니다. 육신의 罪성이 다 사라질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금식을 마치신 예수님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마귀의 시험이 온 것을 보여 줍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면 마귀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싸움을 걸어와 넘어지게 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금식하며 기도한 그 힘이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도와줍니다.

 ②예수님은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십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난 안 되,  마귀가 작정하고 달려드는데 내가 어떻게 이길 수 있겠어’라고 하신다면 이것은 옳은 말인가요? 틀린 말인가요? 틀린 말이지요. 성경을 보면 예수님은 어떻게 마귀와 싸우시나요? 예, 성경말씀으로 싸우십니다. 예수님은 마귀와 힘겨루기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말씀을 의지하며 말씀의 능력으로만 싸우십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됩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말씀을 의지하면 이기는 것입니다.  

시험(試驗)은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니 이기고 넘어서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시험입니다.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3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막1;12,13)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했습니다. 이 시험은 성령하나님이 모르는 시험이 아니리는 것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손안에, 계획하심아래 허락된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경을 의지하여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힘으로 마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으로 싸워 이기는 것입니다.   

③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단의 유혹과 도전을 물리치는 모습인데 이 싸움은 온 인류를 죄악으로 빠지게 한 사단과 그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첫 번째 공식적인 대결 기록입니다.  성경은 이 역사적인 대결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왠지 이 장면이 너무 밋밋하다고 느껴지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싸움은 극적이며 음향 효과도 있어 관심이 가게 마련인데 예수님과 사단의 이 싸움은 흥미는 커녕 좀 싱거운 것이 아닌가? 온 인류의 영원한 삶과 죽음이 걸려있는 한 판 대결인데... 하늘에서 불도 떨어지고, 벼락도 치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본문의 시험이 얼마나 인간의 본질을 끄집어내는 것이며, 얼마나 무서운 싸움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싸움은 결코 시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단과의 싸움은 하늘을 가르거나 불을 내리는 싸움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밑바닥을 드러내고 본능을 자극하는 싸움이고 시험입니다.  

④이 시험은 다른 성경에 보면 단지 3가지의 시험이 아니라 ‘모든 시험’입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한1서 2:16)   창세기에서 뱀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것도 바로 이 3가지 시험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잘 묵상하면 유혹과 시험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승리로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1. 육신의 정욕. (육체적인 시험 -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⑤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의 당면한 문제들로부터 시작됩니다. 마귀는 금식을 막 끝내신 배고픈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만들라고 유혹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꼭 필요한 것, 그리고 별것 아닌 작은 것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 시험합니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한 후 오로지 생각나는 것은 먹을 것 뿐입니다.  예수님이면 40일정도 금식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이 배고픔과 피곤함 그리고 궁핍함을 느끼십니다.  한끼만 굶어도 온 몸이 허전한 우리와 같은 예수님을 마귀는 떡을 미끼삼아 시험합니다. ‘먹는 것이 죄냐? 아니지 않느냐. 그러면 먹어라. 돌밖에 없으니 돌을 떡으로 바꾸어 먹어라. 먹는 것이 우선이다. 합니다.  게다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하는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도 곁들입니다. 이 정도는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 자기를 중명해봐라’ 하는 것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우리에게 가장 급한 그 일이 시험이 됩니다.  

당장 급한 경제적인 문제 혹은 나의 신분문제가 우리의 갈등(葛藤)이 됩니다. 우리는 현실적으로 바로 눈앞에 닥친 여러 가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나의 정체성 문제, 내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도 증명을 해야 합니다. 이 문제들은 나중으로 미루기 어려운 것들이며,  너무 급한, 지금 당장 해결해야하고 지금 당장 무시할 수 없는 그런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면 지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들면 배가 불러서 행복하게 되고,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되지 않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수치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처럼,  구원사역이 실패하게 됩니다.  

심방을 하면서 저도 이런 시험에 종종 당면합니다.  나이 90에 빈병을 주워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할머니,  몸이 아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는데, 자식에게서도 외면을 받은 상태로 20년 이상을 홀로 지내는 성도님, 그 분들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고 기도만 하고 나오기가 참 힘듭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비슷할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생활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쉽지 않지요. 아무리 애쓰고 힘을 써도 생활은 어렵지요.  급하지 않고 어렵지 않은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급한 일을 좇다보면 끝이 없습니다. 우리의 문제가 쉽다는 얘기가 아니라, 문제를 깨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좇아다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야 산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고백이 있을 때 문제를 이기고 해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라”(시119;105)는 말씀은 이러한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도여러분, 문제만을 좇다보면 영원히 문제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당면한 문제들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시는 예수님이 굶어 죽으셨나요? 문제의 해결은 돌이 떡이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가치관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빈말이 아닙니다. 내가 급박한 현실에서도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하셔’ 하고 하나님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급박한 현실에서 자기를 인정하고 드러내십니다. 


2. 안목의 정욕. ( 정신적인 시험 - 떨어져봐라. 인기를 얻어 봐라.) 

  이제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유혹에 예수님께서는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고 대응하십니다. ⑥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이 있습니다. 또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선순위’의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가 하는 ‘우선순위’를 잘 정해야 됩니다. 해야 할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도 아닌데 자꾸 하려고 든다면 허영이고 자만이며, 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하지 않고 대박을 바라는 것은 태만이고 직무유기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는 꼭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에 관심을 둡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신 예수님에게 마귀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이 일이 예수님의 구원사역에 꼭 필요한 일인가요?  마귀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말 합니다.  이 일을 해야 할 타당한 이유와 논리와 합리성을 가지고 유혹을 합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궤변(詭속일 궤 辯말잘할 변)이라고 부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야. 그런데 그런 초라한 모습으로 가면 사람들이 너를 따르겠어? 일단은 사람들이 너에게 주목해야 할 것 아니냐? 그러기 위해서는 메스컴의 도움, 세상의 영광이 필요한거야.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감당하기 위해서 영웅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 예수님의 동생들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이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4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요7;3,4)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시험에 반응하지 않으십니다.  마귀에게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는 한 마디로 거절하신 것은 그 것이 꼭 해야 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며, 그 일이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예수님이 유명해 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친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이 일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꼭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방법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방법도 하나님의 방법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전도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1절을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말씀하십니다.  전도를 미련한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미련한 방법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방법대로 ‘전도’하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  오늘이라도 하나님께서는 온 하늘을 깜깜한 먹구름을 깔고 번개를 치시면서, 천둥같은 음성으로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온 세계 사람들이 다 보도록 하늘에 수천 수만의 천사들을 쫙 등장시키고 지구를 좌우로 흔들면서 ‘예수 안 믿으면 다 죽어’ 라고 하실 수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전도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하면서 자존심을 자극하는 말과 엉뚱한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영웅이 되는 방법을 택하라고 말하는 마귀의 유혹을 이기십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봉사를 하면서 이런 시험에 종종 빠집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에게서 원하시는 일을 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면서도,  종종 사람들이 알아주는 일에 더 집중하고 싶은 유혹과 자만에 빠집니다. 어떤 일을 통해서 우리의 자존심을 증명하고 싶은 유혹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런 유혹을 참아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에 묵묵히 순종하는 모습이야말로 영적으로 승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길은 영웅이 되고 스타가 되는 길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봉사의 현장에서 우리도 이런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사람들이 ‘와, 너는 정말 대단해’하는 그런 사역이 아니라 사람들은 몰라도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하나님께서 “야 너는 정말 착하고 충성된 종이구나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거라”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낮아지면 되는 것입니다. 인기주의를 물리치면 되는 것입니다. 


3. 이생의 자랑.  (영적인 시험,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꿈과 비전을 준다.)   

마귀가 우리에게 꿈과 비전을 줍니다. 사단은 이 세상 모든 만물이 자기 손안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모든 것을 얻고 싶으면 자기를 따르라고, 자기에게 경배하라고 합니다.  세상은 이상하게도 하나님의 법칙대로 운영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지요. 분명히 이 세상을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신데.. 우리의 주변상황은 하나님의 법대로 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오히려 공중의 권세자 마귀가 제 맘껏 호령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정말 하나님이 계시는가? 낙담하기도 하고,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 의심도 해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주 너의 하나님께만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우리 예수님께서는 구구한 설명을 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하나님을 만을 섬기고 경배하라 하시며 마귀와의 싸움을 이기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의 예배는 두 가지 인데, 한 자리에서 공동체가 되어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이 첫 번째 예배이고,  우리 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주인이며 나의 주인이 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또 다른 예배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이 세상의 주권자 되심을 인정하는 ‘삶의 예배’입니다. 분명히 우리 눈에 마귀가 권세를 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께서는 허용하신 일입니다.  세 번 째 시험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우리는 영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볼 것이 아니라, 일 차적인 현상만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 세상의 배후에서 여전히 역사하시며 섭리(攝理)하시는 하나님을 날마다 순간마다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삶을 드리는 삶의 예배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말씀의 결론을 내립니다.

마귀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마귀는 지치지도 않습니다. 방법을, 장소를 바꾸면서 시험합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뭔가 맡기면 안심이 되는 사람이 있고,  뭔가 맡겼는데 항상 이루지 못하고 항상 핑계를 대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상시엔 잘하는데 고난이 있을 때는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에게 내가 안심할 정도의 종인가? 이 핑계 저 핑계 대지 않고 이루어내는 종인가? 평상시엔 잘하는데 고난이 있을 때는 못하는 사람은 아닌가? 자기를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평상시이든지 고난이 있든지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욥입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기 1:8)  우리가 다 욥처럼 하나님이 안심하는 인물, 환경과 상관없이 흔들리지 않는 승리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⑦마귀는 이성적으로, 현실적으로, 논리적으로 나오지만 결국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경배하도록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마귀에게 더 잘 속습니다. 이혼하는 사람들은 이혼할 수 밖에 없는 확연한 논리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 논리대로만 하면 이혼하지 말아야 할 가정이 대한민국에 하나도 없습니다.  살인을 한 사람도 왜 죽여야 했는지 논리를 들고 나옵니다. 그 말을 들으면 정말 잘 죽인 것 같고, 오히려 살인한 사람이 의로운 일을 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죽이는 논리입니다. 맞는 것 같지만 결국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온 것은 무식해 보이지만 결국 살리는 것입니다.  ‘이단(異端)은 끝이 다른 것이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처음은 같아 보이고 처음은 좋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처음이 좋습니까? 끝이 좋습니까?  끝이 좋은 것이 교회를 살리고 영혼을 살립니다. 끝이 좋은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욥은 처음도 끝도 다 좋았습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욥기 1:8)  우리가 다 욥처럼 승리하시는 분들이 될 수 있고, 다 예수님처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자주 묵상하시면서 승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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