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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적인 부패와 교회 (행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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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인 부패와 교회 (행 4:1~11) 
 
 
5장 전반부에서 사단의 세력은 성도의 위선을 통해 교회를 부패시키고자 은밀히 침투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누룩을 단호히 제거하시므로 순결한 교회가 유지되도록 친히 통치하셨습니다.

헬라어 성경은 1절을 ‘그러나’(de,)로 시작합니다. 좁게는 바로 앞 구절(4:37)에 있는 바나바 성도의 헌신과 상반되는 현상이 생겼고, 넓게는 4장에서 보여준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성도들의 모습과 반대되는 모습이 교회에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나니아”와 “그 아내 삽비라”는 겉보기에 마치 제2의 바나바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2-3절에서 그들의 소유를 판 뒤에 그 값의 일부를 ‘감추었다’(nosfivzw, 노스피조)는 사실이 두 번 강조됩니다. 이 단어는 남의 것을 부당하게 ‘착복했다’ ‘횡령했다’는 뜻입니다. 칠십인역 구약 성경에서는 여리고성 공격 때에 아간이 하나님께 바쳐진 전리품 중의 일부를 착복한 기사에 사용되었습니다(수 7장).

횡령했다는 단어의 사용은 땅값이 그의 소유가 아니었음을 알려줍니다. 아마도 땅을 판 값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었거나 교회 앞에서 말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땅을 판 후에 그의 마음에 사단이 역사했습니다. 아나니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성령에 충만했던 베드로는 단박에 그 사실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 ‘가득하여’는 충만하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성령님으로 충만한 교회에 사단으로 충만한 사람이 등장했지요. 사단은 마치 광명한 천사처럼 아름다운 헌신의 모습을 가장한 채 거룩한 교회에 잠입했습니다.

사단은 아나니아의 ‘마음’에 역사했습니다. 3-4절에서 베드로는 아나니아의 변질된 “마음”을 주목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위보다 마음의 문제를 다룹니다. 당시 그리스도의 몸이었던 교회는 마치 한 사람처럼 “한 마음과 한뜻”으로 존재했었습니다(4:32). 대단히 성숙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단이 역사하자 딴 마음을 품은 성도들이 생겼습니다. 

겉모습은 다른 성도들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헌신적인 측면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마음이 달라졌다는 데 있습니다. 속사람은 전혀 성숙하지 못한데 겉으로 성숙한 채하려 했습니다. 수준 높은 신앙을 원했으나 마음은 따라가지 못하다보니 마음을 거짓되게 조작하고 위선을 행했습니다.

우리 시대는 ‘외모’와 ‘외양’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성공을 외적인 성취와 비례하는 것처럼 평가하는 경향이 다분하지요. 이러한 시대 분위기 속에 살다보면 신앙에 있어서도 외적인 부분을 주목하기 쉬워집니다. 외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모방했으나 내적으로는 전혀 참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기보다 사람 앞에 행하기 쉽지요. 예수님은 외식하는 신앙을 사정없이 질타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눅 12:1)고 강조하셨지요.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고 했습니다. 사단은 먼저 마음을 공략합니다. 마음을 내어주지 않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을 성도 개인의 정직하지 못한 성품 차원의 문제로 마무리하지 않습니다. 단지 조직체 내에 발생한 행정적인 문제로도 보지 않습니다. “성령을 속이고”(3)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4)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치열한 영적 싸움의 차원에서 다루었지요. 아나니아의 육체는 교회 안에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세상에 있었습니다. 

온 교회의 칭찬을 받는 바나바를 보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허영심이 작용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는 모두가 성령님의 충만을 받는 공동체에 있으면서도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대신 사단의 미혹을 받았습니다. 사단이 그의 마음에 마음껏 역사하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거짓과 위선은 마음에 조용히 쓰며드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아니고서는 좀처럼 감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즉각 사단이 역사하고 있음을 통찰했습니다. 공동체 내에 어떤 영적인 위험이 발생했는지 신속하게 알아차렸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로서 늘 깨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예리하고 정확합니다. 거룩한 교회를 보존하시려는 성령님의 보호하심이 특별히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겠지요. 사도들의 이적과 기사는 이처럼 죄를 통찰하는 모습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오순절 사건이 교회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태동하였음을 보여준다면, 이 사건은 교회가 성령님에 의해 보존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설교로 수천 명을 회개케 하셨던 성령님의 권능이 아나니아에게 독특하게 역사했습니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5). ‘혼이 떠났다’는 말은 신약에서 사도행전에만 사용된 단어인데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으로 인해 죽은 문맥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5:10; 12:23). 

6-7절을 보면 아나니아의 죽음은 아내에게 알려지지도 않은 채 곧바로 장사됩니다. 유대인의 관습상 하나님께 심판을 받은 경우는 빨리 처리하여 조용히 장사지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죽음은 누구도 장례 절차와 긴 애통 없이 신속하게 처리되었습니다. 누가는 이러한 기록을 통해 아나니아의 죽음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합니다.

세 시간쯤 후에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가 발생한 일을 알지 못하고 교회로 왔습니다. 베드로가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했을 때, 그녀는 시치미 뚝 떼고 그렇다고 했습니다(8). 두 사람은 서로 마음이 잘 맞는 부부였습니다. 온전히 한마음 한뜻이었지요. 그들은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했습니다(9). 삽비라는 헌금을 놓았던 베드로의 발 앞, 바로 그 자리에서 즉시 혼이 떠났고 남편 곁에 장사되었습니다(10). 이 사건은 신약 교회에서 발생한 첫 ‘권징’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잘못을 지적했을 뿐이고 권징의 시행은 성령님께서 친히 하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로부터 위선의 누룩에 감염된 몸의 일부를 곧바로 도려내셨습니다.

그 사건 이후에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11) 했습니다. 마음에 찔리는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지요. 즉사했다고 해서 그들의 위선이 누구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라 보기는 어렵습니다. 종교적 위선으로 말하자면 당시에 사두개인들이나 바리새인들을 따라잡을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훨씬 더 거짓되고 위선된 사람들도 교회 안에 버젓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정도를 따지자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오히려 양호한 편인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들의 위선이 막 태어난 교회의 ‘한마음 한뜻’을 깨뜨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성령님께서는 비상수단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교회의 순결성을 보존하셨습니다.

권징의 결과는 온 교회와 이를 듣는 모든 사람들로 ‘큰 두려움’을 갖게 했습니다. 교회는 만만히 보고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곳임을 알게 되었겠지요. 교회는 각박한 세상에서는 채울 수 없는 허영심을 대신 충족시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경쟁적인 사회에서 도무지 얻을 수 없었던 인정과 칭찬을 적당히 조작한 신앙생활로 얻는 곳도 아닙니다. 헌금의 양이나 맡은 직분들이 권세를 부리기 위해서나 개인의 명예를 높이는 수단들로 이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교회는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며 직접 통치하시는 대단히 독특한 영역입니다. 이러한 점에서는 세속이 감히 교회와 상종하기 두려워할 만큼 교회의 문턱이 높아야 할 것 같습니다(13).

오늘날 세상이 교회를 업신여기는 까닭은 교회 자체의 순결성이 많이 오염된 이유가 클 것입니다. 거짓과 위선으로 무장된 인물들이 성도의 공동체 내에서 너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외인들이 볼 때, 교회란 마음에 참된 신앙이 없어도 적당히 헌신하는 척하면 직분도 얻을 수 있고 명예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생각되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신앙양심을 세탁하고 죄책감을 무마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인맥을 통해 사회에서 얻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유익들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한 인식을 주고 있다면 업신여기는 외인들을 탓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전도서에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전 8:11)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마음의 악은 살피지 않고 종교인의 모양만 갖추려는 이상한 담대함의 현상이 오늘날 많습니다. 어느 시대보다 성령님을 많이 말하고 있으나 정작 그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이러한 현상들 이면에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사단의 역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런 시대에 중요한 일은 헌금을 많이 해서 웅장한 교회 건물을 짓는 일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헌상의 정신을 바르게 알고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도 하나님 앞에서 행하도록 돕는 일이 더 중요하겠지요.

성령님의 권징이 항상 즉각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조차 이러한 기록은 한 번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상한 징계는 발생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라고 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목적대로 충분히 살지 못하는 수가 많지만, 거듭 거듭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손상시키면서 하나님 나라를 훼방 때에는 목숨을 거두실 수도 있습니다. 

성도는 성령님께서 지금도 교회를 통치하고 계심을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숨기려 할지라도 그분께서는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심을 충분히 인식하고 두려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거짓과 위선의 죄를 죽음에 이를 만큼 심각한 죄로 여기신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에서 관심의 초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가 죽음에 이르게 했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성령님께서 교회를 친히 통치하신다는 사실과 그분께서는 당신님의 교회를 세속으로부터 순결하게 보존하기 강력하게 원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일상생활에도 그러해야 하겠지만 특히 교회 공동체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는 지극히 작은 일 하나에도 그분 앞에서 행하고자 하는 경외심과, 마음으로부터도 죄를 범하지 않고자하는 자기 정화의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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