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엔게디 굴로 갑시다 (삼상 24:1~7)

  • 잡초 잡초
  • 815
  • 0

첨부 1


엔게디 굴로 갑시다 (삼상 24:1~7)

 
오늘 민족 명절인 중추절을 맞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성도 여러분과 가정 위에, 그리고 하시는 모든 일들 위에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래 전, 미국의 유명한 잡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라는 잡지에 '아름다운 참 사랑의 모습'이라는 기사와 더불어 한 페이지 가득 늙은 노 부부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 기사의 내용을 전하면서 추석 명절에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제가 전하는 이야기를 한 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잡지사의 사진 기자가 영국을 방문하던 중 어느 날 지하철 대합실 식당에 앉아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자리에 노인 부부가 서로 부축하면서 마치 소꿉동무 어린아이처럼 정답게 앉아서 남편은 비스켓을 주문하고 아내는 차 한 잔을 주문했습니다.  이들 노 부부의 옷차림으로 보아 꽤 가난한 부부임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노 부부는 누구에게도 개의치 않고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조용히 앉아서 서로의 손을 잡고 주문한 것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주문한 비스켓과 차가 나왔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고, 아내는 뜨거운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나서 남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잡지사 기자의 눈에 신기한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남편은 비스켓을 반쯤 먹고 나서 틀니를 뽑아 깨끗이 닦은 후에 아내에게 건네주었고, 아내는 그 틀니를 자연스럽게 입에 넣고는 비스켓을 천천히 먹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가 마시던 차를 마시며 아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던 잡지사의 기자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코가 찡하는 느낌을 가졌다고 합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의 사랑이 또 있겠는가 싶을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 서로를 아껴주고, 기다려주고, 서로가 가진 것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 이런 사랑을 지닌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 노 부부에게는 시대와 나이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들 노 부부에게는 주위의 사물과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체면 따위는 더더욱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참된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외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는 서로가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마음에 따뜻한 사랑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이 사랑을 몸소 실천에 옮긴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내 앞에 있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론은 쉽습니다.  말로 하기는 너무나 쉽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 지간에 삶의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경험하여 보면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지식으로 알고, 말로 하는 것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선물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좋은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과 믿음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많이 가질수록 좋습니다.  많이 실천하고 행동할수록 좋습니다.  사랑하고 잘 믿어서 후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반대로 사랑하지 않고 믿음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언제나 후회합니다.  내게 참된 사랑이 부족했던 것을 아쉬워합니다.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후회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사랑과 믿음을 행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믿고 싶어도 그것이 그렇게 쉽게 믿어지던가요?
나에게 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고 해서 쉽게 정이 가고 사랑해 지던가요?
아닙니다.  믿고 싶어도 그것이 잘 안됩니다.  사랑하고 싶어도 그것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고백이요, 고민입니다.

사랑과 믿음, 이것을 실천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말로만 하는 가식적인 입 발림의 사랑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부족한 것도 따지고 보면 바로 사랑과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나라가, 우리의 사회가, 우리의 가정이 사는 것이 어렵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과거에 IMF를 당했고, 또 제2의 IMF라고 할 수 있는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솔직히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더 풍요롭고 좋은 환경에 살고 있습니다.  아무리 경제가 어려워도 그 옛날 우리의 부모님들이 했던 것처럼 우리는 등개 죽을 먹지는 않습니다.  풀뿌리를 싶거나 소나무 껍데기를 벗겨다가 그것을 삶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군 이래 우리 민족은 가장 잘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사랑과 믿음의 문제입니다.  가정이 깨어지고 무너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믿음과 사랑의 결핍 때문입니다.  남편을 믿지 못합니다.  아내를 믿지 못합니다.  "이 여편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남자가 나 몰래 바람을 피우고 다니는 것이 아닌가?"  생명보험에 들려고 해도 겁이 납니다.  "이 여자가 나보고 생명보험에 들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나보고 빨리 죽으라고 하는 심보가 있는 것인가?"  한 이불 속에서 살을 맞대고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믿지를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나를 이해해 주지 않아서 가슴이 아픕니다.  나만을 사랑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자기 뜻대로 행동해 주지 않아서 화가 납니다.  가만히 보면,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사랑만을 요구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습니다.  함께 살고 있다지만 그를 위해 죽어 줄 수 없고, 그를 위해 울어 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나 자신의 문제, 우리 가정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사회가 도덕적으로 문란하고 어지러운 것도 따지고 보면 진실한 믿음과 뜨거운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사랑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사랑의 생활을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남들보다 좀 더 아름다운 옷을 입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보다 좋은 집에서 사는 것, 이것만이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에게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 관계 속에서 진실된 믿음을 가지고 서로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사랑의 수고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우리들 주위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한 평생을 살아오면서 지나온 날들을 후회하는 것도 알고 보면 그들을 그만큼 더 사랑하지 못하였음을 후회하는 것입니다.  좀 더 뜨겁게 사랑하지 못하였다는 사실 앞에서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본래 가슴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두 다리를 쭉 뻗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습니다.  어디에서든지 아무런 두려움 없이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두려움 없이 평안하고 여유 있게 살아가는 사람은 바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봉독한 본문에서 이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도망 다니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빠진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바로 다윗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양치기인 다윗을 기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워 주셨지만 지금 이스라엘에는 또 다른 한 왕이 있습니다.  사울입니다.  이 두 사람을 놓고 백성들은 이렇게 노래로 평가를 합니다.
"사울이 죽인 사람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처음에는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고 무척 아꼈습니다만 그러나 나중에는 다윗을 시기하게 됩니다.  다윗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합니다.  다윗을 죽이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심지어 다윗을 도와준 사람이 있다면 그를 찾아내어 일가족을 몰살시키면서 어느 누구도 다윗을 도와주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이 사울이 놉이라는 지역에서 제사장들을 몰살시킨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어느 날 몹시 지친 모습으로 놉의 아히멜렉 제사장의 집을 찾게 됩니다.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음식과 물을 줍니다.  이것을 에돔 사람인 도엑이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도엑이 사울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그래서 사울이 놉의 아히멜렉과 그의 온 집안과 놉의 양과 가축들까지 죽이게 됩니다.  만약에 다윗을 도와주었다가는 이 꼴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누구도 다윗을 도와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이 이런 고통을 1, 2년 동안 주다가 그만 둔 것이 아닙니다.  무려 12년 동안 그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고통을 주었습니다.  고난을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12년이라는 것은 사울이 죽었을 때까지의 기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까지 다윗을 괴롭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때가 얼마였는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어떤 때는 이 구차한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서 입에 침을 질질 흘리면서 미친 행동을 해야만 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특별히 뽑은 삼천명의 정예 군대를 거느리고 직접 나서서 다윗을 쫓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 사건 가운데 하나가 오늘 본문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사울은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삼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곳 엔게디 황무지를 포위합니다.  지금 사울은 포위를 해서 점점 좁혀 들어가고 있습니다.  다윗에게는 절대 절명의 순간입니다.  그때 다윗은 양들이 숨는 한 굴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기의 부하들과 함께 이곳 굴에 들어가 숨게 됩니다.

그런데 본문 3절에 보면, 다윗이 숨어 있던 그 굴에 사울이 혼자서 "뒤를 보러 들어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뒤를 보러 들어갔다"는 표현은 용변을 보기 위하여 굴에 들어갔다는 것의 완곡한 표현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말은 사울이 무장을 해제한 차림으로 혼자서 굴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굴 안쪽 깊은 곳에는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노라면 기회라는 것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쉽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그 기회가 왔습니다.  이 절호의 기회 앞에서 다윗의 부하들이 말합니다.

"드디어 주께서 대장님에게 약속하신 그 날이 왔습니다.  '내가 너의 원수를 손에 넘겨 줄 것이니 네가 마음대로 그를 처치하라'고 하신 바로 그날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지금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니 사울을 쳐서 죽이자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가만히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몰래 잘랐습니다.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면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은 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쉽게 화해가 됩니다.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쉽게 묻어지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한 10년 동안 얽히고 설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그 정도가 되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가 원한이 맺혀 풀래야 풀 수 없는 지경이 되고 맙니다.  사람이 끊임없이 십년 동안을 싸워보십시오.  십년이 아니라 일년동안만 계속해서 싸워보십시오.  그러면 계속해서 문제가 쌓이고 또 쌓이는 것입니다.  섭섭함이 분노가 되고, 미움이 원한으로 쌓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도 십여년 동안 아무런 이유 없이 애매하게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로 참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보기도 싫을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처음에는 피하였지만 나중에는 악에 받쳐서라도 싸울 것입니다.  싸움이라는 것은 일단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 처한다면 정말로 어렵습니다.  여기에 기도가 무슨 소용이 있고, 양심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다윗이 바로 이와 같은 상황에 빠져 있습니다.  다윗은 10년 동안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유 없는 도망자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다윗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보여주는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사랑으로 미움과 분노를 이겨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들어 쓰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사랑의 실천을 어느 정도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느 정도에까지 서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는 다 합니다.  말로는 사랑한다고 수 백번, 수 천번도 더 고백합니다.  말로는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로써 끝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켐피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로 하는 사람이 실질적으로는 생활이 없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 모두가 엔게디 굴로 한 번 가 보십시다.  그리고 그 굴 속에 숨어 있는 다윗을 보십시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자기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10년 동안 한 사람, 사울 때문에 가족도 잃어야 했습니다.  삶의 터전도 잃었습니다.  오직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로 고통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서라면 그래도 고통이 덜할 것입니다.  지금 그는 장인에게서 그와 같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에게는 더 이상 이러한 기회가 올 수도 없는 그러한 절호의 기회가 왔습니다.  지금까지 당했던 고난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냥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나는 순간입니다.  이제 더는 도망자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굴러 들어온 것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는 사람이 부지기수인데, 이것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저 굴러 들어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맞아 들어가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내게 유익이 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라는 저울로 달아보니 그것이 맞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니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참되고 진실한 사랑은 이래야 합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사랑은 내가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단 한 가지의 이유이어야 합니다.  나에게 있는 사랑이어야지 남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모두가 다 미워해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을 받고, 또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회가 미움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지라도 내가 사랑해야 할 사람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이 사회에 사랑이 가득하다고 해도 내 마음에 미움이 있는 사람은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사랑은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남의 말은 하지 말고 바로 나에게 진실한 사랑이 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자주 말하고 남을 자꾸 나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도 그에게 사랑이 있었기에 용서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남이 나를 아무리 미워한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를 용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가 나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느냐?"를 생각하지 마십시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얼마나 그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에게 얼마나, 어느 정도의 사랑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사랑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사랑을 탓하고 있습니다.  내게 어느 정도의 사랑이 있느냐가 아니라 그에게 얼마나 사랑이 있느냐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짜증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작 있어야 할 내게도 사랑은 떠나가고 미움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의 사랑을 이야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불평하게 됩니다.  원망하게 됩니다.  미움만 남습니다.  그러므로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내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제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자매여, 주의 이름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안에 있는 이 사랑을 당신에게도 전하고 싶습니다"

사랑에 가득 찬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서도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엔게디 굴의 사랑, 다윗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대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서 대적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안디스테미'라는 말인데, 이 말은 '저항하다', '적대시하다', '반감을 품게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상대방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처럼 적대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권면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를 대적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지, 사람을 대적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은 마귀이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남편에게 대적하지 마십시오.  아내에게 대적하지 마십시오.  형제 자매를 대적하지 마십시오.  대적하면 서로를 피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의 관계는 끝나는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대적해야 할 대상은 마귀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5절을 함께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사울의 옷자락을 베었던 다윗이 지금 그 옷자락을 벤 것도 마음이 아프다고 합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사울의 겉옷자락만을 자른 것뿐인데도 양심에 가책을 받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사울이 다윗에게 한 행동을 생각해 보십시오.  십여년 동안 다윗을 죽이기 위해 저질렀던 고통과 고난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생각하면 지금 다윗의 행동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당신 장인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치를 떨 터인데,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도 시원찮을 터인데 그까짓 옷자락을 벤 것 가지고 무에 그리 마음 아파하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까지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그만큼이라도 증거를 삼기 위해 옷자락을 벤 것은 아직도 내게 사랑이 부족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아픈 겁니다.  그래서 괴롭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부분적으로 주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전부를 주는 것이어야 참된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은 올바른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몸으로 뜨겁게 실천하는 사랑이어야 올바른 사랑인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온 몸으로 실천하는 뜨거운 사랑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윗에게는 이러한 숭고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의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사랑의 샘을 파고 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넉넉했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지만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도망 다니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그는 여유를 누릴 줄 아는 참 행복자였습니다.

보십시오.  사울과 다윗, 다윗과 사울, 이 두 사람의 대결에서 결국에는 누가 이겼습니까?  다윗입니다.  본문 16절에 보면, 사울은 목놓아 울었다고 했으며, 17절에서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해 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사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승리하는 사람은 다윗이었습니다.  반성하고 뉘우치며 잘못을 빌었던 사람은 사울이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언제나 사랑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사랑이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에게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남이 안 되는 것, 남을 괴롭히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도 어려움으로 닥쳐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이 잘 되면 나도 잘 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나도 사랑을 받게 됩니다.  행복하게 됩니다.  사람은 남을 사랑하기도 하고 사랑을 받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받기만 하는 사랑만으로는 절대로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내가 먼저 남을 사랑해야 나도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함께 엔게디 굴로 갑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윗이 사울을 사랑했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해 보십시다.

교회 안에서는 사랑해야지, 사랑이 귀하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막상 미운 사람을 만나면 또 혈압이 올라갑니다.  열 라면을 먹어야 합니다.  어디 특별히 미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이 다윗처럼 사울을 미워할 정도였습니까?
그 사람이 사울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분을 못살게 괴롭혔습니까?

우리는 그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것이 미운 것입니다.  내 의견과 맞지 않았다는 사실이 섭섭한 겁니다.  내가 하려고 하는 그 일에 따라와 주지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상한 겁니다.  나에게 조금만 안 맞아도 미워하는 것입니다.  별 것 아닌 것을 별 것으로 여기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자주 드리는 이야기이지만 자기 방식을 주장하지 마십시오.  자기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기의 생활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려고 하지 마십시오.  특히 자신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부러집니다.  그러면 무너집니다.  그러면 깨어집니다.  이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십니다.  독선적인 사람을 하나님은 외면하실 겁니다.  자기 감정이 앞선 사람은 결코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방식과 자기 감정대로 사는 사람은 결국에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윗은 원수를 원수로 갚지 않았습니다.  사랑으로 사울의 모든 허물과 잘못을 덮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 안에 있는 이 사랑을 보셨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들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솔직히 오늘 저와 여러분은 다윗처럼 속의 간까지 다 내어놓는 이런 사랑은 못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래서 좀 괴롭고 힘들지라도 그런 순간 순간을 주님이 주신 사랑으로 잘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참으시기를 바랍니다.  덮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용서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를 이해하고, 그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기를 바랍니다.

지난 2001년에 미국 세계무역센터와 국방부 건물 테러 사건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 참으로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는 테러를 당한 비행기 안에서, 무너지는 건물 안에서 절체 절명의 순간임을 직감한 사람들이 어디엔가 휴대폰으로 소식을 전하며 단말마처럼 지상에 마지막 남긴 몇 마디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 사랑한다는 고백이었습니다.  행복하게 살아달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소망은 한결같이 "살아서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다면…"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 메시지들은 복수에 대한 다짐이나 어떤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이루지 못한 삶의 목표에 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다만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 그들과 함께 했던 일상(日常)의 어느 사소한 순간들을 애타게 그리워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세계무역센터의 채권 거래회사 캔터 피츠제럴드의 케네스 밴 오켄이라는 사람이 부인에게 전화했던 내용입니다.  "빌딩이 지금 뭔가에 맞은 것 같아.  내가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  여보, 정말 당신을 사랑해.  살아서 당신을 다시 봤으면 좋겠어.  안녕."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충돌한 여객기에 타고 있었던 승객 브라이언 스위니가 전화자동응답기를 통해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입니다.  "여보, 내가 탄 비행기가 납치됐어.  그런데 상황이 아주 안 좋은 것 같아.  여보, 나 당신 사랑하는 거 알지.  당신 다시 볼 수 있게 되면 좋겠어.  만약 그렇게 안 되면….  여보, 인생 즐겁게 살아."

인생의 마지막 절규치고는 너무나 담담하고, 소박하기까지 한 그들의 이야기가 이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찡하게 합니다.  늘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나 남편의 얼굴, 다람쥐 쳇바퀴 같아서 답답하던 직장생활, 자신의 삶이 지겹게 느껴져서 때로는 탈출마저 꿈꾸게 하던 하루하루와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소중한 것인지는 그것을 잃어보아야 알게 되는 모양 같습니다.

남편 되신 여러분, 우리 엔게디 굴로 갑시다.  그래서 늘 잔소리를 해대는 아내이지만 그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내 아내를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아내 되신 여러분, 사랑의 엔게디 굴로 갑시다.  그래서 어느 누구처럼 돈을 많이 벌어주지 못하는 남편이지만, 누구처럼 잘 생기지 못한 남편이지만 그래도 그 남편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내 남편을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엔게디 굴로 갑시다.  그래서 키 작고 어느 교회 목사처럼 훤칠하게 잘 생기지 못한 나약한 목사이지만 그러나 여러분, 이 부족한 오 목사를 뜨겁게 사랑해 주십시오.  부족한 목사를 보필하고 작은교회를 섬기는 사모이지만, 여러분의 사모를 뜨겁게 사랑해 주십시오.  목사가 성도를 사랑하고, 성도가 목사를 사랑하고,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는 교회는 분명 축복 받은 교회입니다.  저는 엔게디 굴에서 베풀었던 다윗의 사랑이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그가 내 옆에 있을 때 더 사랑하십시오.  더 많이 사랑하십시오.  더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