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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실패 (행 7:5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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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실패 (행 7:51~60)


어느 교회의 교인 한 분이 앵무새 한 마리를 기르는데 손님이 올마다 부끄러워서 견디지 못했다고 합니다. 기르는 앵무새가 단 한 가지 말밖에 하지 못하는데 그 한다는 말 한마디가 ‘키스해주세요’이었습니다. 손님이 올 때마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오신 손님들이 이 앵무새가 누구에게 그 말을 배웠는지 생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궁리 끝에 자기 집 앵무새를 마침 앵무새를 기르고 계신 자기 교회 목사님 댁의 앵무새와 함께 합류하여 훈련시키기로 했습니다. 

여러 날 동안 맡겼다가 돌아온 이 앵무새는 지난번보다 몇 마디의 말이 더 늘었습니다. 늘 하던 말인 ‘키스해주세요.’는 그대로였고, 이전에는 하지 않던 말인 ‘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는 말이 늘었습니다. 아마 목사님 댁에서 배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앵무새가 하는 말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 하나님께서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구나’ 라는 말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누구나 자기 기도가 응답될 때면 참으로 기쁩니다. 그러나 여러분께서 경험해보신 것처럼 실제에 있어서는 우리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가 참 많습니다. 이럴 때는 머리가 복잡해집니다. 특히 우리가 한 기도가 선한 기도임에도 불구하고 응답되지 않을 때는 더 더욱 마음이 복잡해지고 힘들어집니다. 예를 들어 신실한 믿음을 가진 교우가 병이 들어 하나님께 치료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는데 그 기도가 응답되지 않을 때입니다. 

저도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좀 치료해주십시오.’ 또 ‘이 사람 사업이 좀 잘 되게 해주십시오.’ 라는 기도에 시간이 지난 후 허락해주시는 경우는 많았지만 한참 동안 응답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선한 일을 참 많이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어려울 때 사업이 잘 되면 하나님께도 틀림없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의 사업이 잘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시간이 길어질 때가 있는데 이때는 참 힘이 듭니다. 그런 기도는 나를 위해서 기도한 것도 아니고, 나와 직접 관계가 있어서 또 내 이익을 위해서 한 기도도 아닌데 들어주시지 않은 경우입니다. 

이처럼 그야말로 전적으로 이웃을 위해서 한 기도인데 들어주시지 않을 때는 우리는 당황하게 됩니다. 그럴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내가 잘못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외면하시는가? 심지어는 시험이 들법한 일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신가?’ 그러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정말로 계신가?’ 라는 불신앙적인 문제까지 가게 됩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 선함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다하여 하나님께 충성하였는데 그 결과가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드러날 때입니다. 이제부터 정말로 내가 예수를 잘 믿겠다고, 바르게 믿겠다고 했는데 오히려 지난번보다 더 일이 풀리지 않고 엉기고 성키는 일들이 일어나고, 그렇게 결심하기 전보다 일이 더 풀려지지 아니하고 쉽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 이런 생각이 들게 됩니다. 

초대교회의 스데반이 그러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몇 사람을 선출했습니다. 첫 번째가 성령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하늘을 향해서 즉 하나님을 향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사람을 향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횡적으로 종적으로 다 해당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지혜가 많은 사람을 뽑자는 자격 요건을 설정한 후 일곱 사람을 뽑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정말로 대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하나씩 짚어보겠습니다. 

첫째,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했었고 지혜와 권세와 능력이 대단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는 그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스데반이 공회에 붙들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았던 곳입니다. 성경은 이 스데반이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해서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능이란 권세와 능력의 두 낱말인데 권세와 능력이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놀라운 일을 많이 보였다는 것인데 성경은 큰 기사와 표적을 인간에게 행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기적을 많이 만들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능력 있고 지혜로운 사람인가에 대해서 성경은 이른 바 자유민들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여러 사람들이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행6:9-10)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을 하는데 능히 당하지 못하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또 이 스데반이 얼마나 당당했던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당당함을 가져야합니다. 좀 어려워도 당당한 모습을 보이고, 세상적으로 내로라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하나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당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진짜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일이 좀 잘 안 풀려도, 어려움이 좀 있어도 당당한 모습을 보여야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데 스데반은 이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데반이 지금 그 무시무시한 산헤드린 공회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재판 받아보신 분들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재판받을 때는 정말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피고석이 아니라 증인석에서만 있어도 그러합니다. 경험해보신분들은 알 것입니다. 스데반이 있던 곳은 무시무시한 산헤드린입니다. 하급심도 아닌 3심 마지막 재판소가 산헤드린 공회이므로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곳입니다. 그런 재판을 받을 때 이 스데반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때 스데반의 모습을 성경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법정에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배드릴 때처럼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그 모습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도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당당함이 얼마나 멋집니까? 바라기는 여러분들이 이런 당당함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경제위기가 아무리 불어와도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기도하기만 하면 괜찮아, 우리 하나님께서 챙겨주실 것이야’ 라고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 이 얼마나 멋집니까! 회사 일을 하느라 힘든 일, 또는 회사 직원으로 일하다 윗사람에게 싫은 소리 좀 들었다고 아내에게 무거운 표정을 짓는 사람이 아니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고, 아내들이 오히려 남편에게 대단히 좋은 일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되는 당당한 모습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자식들의 일이 좀 덜 풀려도, 몸에 좀 시원찮은 일이 있어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당당하게 우리 하나님께서 나를 챙겨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날아가는 참새, 들의 백합화도 챙겨주시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걱정 하는가, 라고 말씀하시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당당한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좀 힘들게 하고, 좀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런 것을 당한 사람 같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 당당함이 여러분에게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죽는 표정 하지 마십시오. 속된 말로 징징거리지 마십시오. 멋진 모습을 보이는 이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산헤드린 공회의 법정의 재판관들은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대단한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 장로들 이런 사람이 모여서 하는 일이었으므로 그들로부터 결정이 나면 끝이었습니다. 구제방법이 없습니다. 그런 자리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아니하고 정말로 당당한 사람이 스데반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서 가슴 아프고 속상한 일들이 많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 옆에 있으면 한 마디 해주고 싶지만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정치인들, 국회의원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진짜 기독교인다운 기독교인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 가슴을 답답하게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음에 공천을 받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정말로 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말이 아니라 꼭 할 말은 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아무도 하지 못할 말을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절)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종교인들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정말로 살지 못합니다. 아무도 하지 못했던 말, 꼭 하고 싶었던 말, 많은 시민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말을 스데반이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52절).. 여러분은 종교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잘못이 있을 때 누가 이런 말을 하겠습니까? 혹 천벌 받을까 하여, 혹 무엇이 잘못될까 하여 하지 못합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함부로 말할 것은 아니지만 할 말은 정말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기독교인입니다. 스데반은 이런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어야합니다. 쓸데없이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좋게 보시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교회에 정말로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목사가 어떻게 생각할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하나님께서 내가 무슨 말을 하면 좋아할까를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앞으로 큰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 스데반은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순교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비참하게 돌에 맞아 몸이 깨어져서 죽는 순교를 당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스데반의 최후를 보면 우리로 하여금 혹시 ‘하나님께서 실패하셨는가?’ 라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실패하셨을까요?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바른 신앙을 할 수 있고, 바른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바른 이해를 위해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스데반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스데반은 실패한 인생인가요? 하나님은 스데반을 챙기시는 데 실패하셨을까요? 그렇게 충성했던 스데반이 그렇게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한 것에 대해서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스데반은 신자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을 누렸습니다. 

여러분, 신자의 최고의 영광 중 하나가 하나님 영광을 뵙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하나님 은사를 하나 받아도 너무 너무 좋습니다. 그야말로 여러 가지 은사 중에서 새끼손가락 하나도 되지 않는 방언 하나만 받아도 날아갈 것 같습니다. 실제 받아보면 세상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을 볼 수 있었으니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이것이 얼마나 큰 영광인 줄 아십니까?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소원이 없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못한 까닭은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리스도인들이 완악하고 함부로 행동하는 까닭도 하나님 영광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본문에는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영광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더는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어떻게 각별한 사랑으로 사랑해주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55-56절) 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조금 전에 우리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예수님께서 스데반이 순교당한 후, 천국에 들어오는 것을 보시고 벌떡 일어서서 스데반을 맞아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 더는 신자들의 마지막 목표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신자들의 마지막 목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화입니다. 신자들의 생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칭의 즉 예수 믿자마자 의롭다고 칭해주는 것입니다. 실제는 의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정해주시고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 우리가 변해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설사 노력을 덜해도 자꾸 변화되는데, 이것을 성화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입니다. 스데반은 영화를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수많은 돌에 몸이 깨어져서 죽는 고통 속에서도 스데반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순간에 보이셨던 그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죽으실 때 자기를 그렇게 모욕하고 수치를 주었던 사람, 자기의 옷을 찢던 사람들에게 저들이 알지 못하니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말씀했습니다. 스데반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60절) 라고 말했습니다. 최고의 영화입니다. 

여러분, 가끔 주변의 예수 믿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 사람이 천국에 가면 어떻게 될 것인가 라고 생각하면서 걱정하는 경우가 있는데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이 영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깨끗하게 만들어 주시는데 이 땅에서의 영화를 우리 주님께서 스데반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 최고의 소원인 평화를 주셨습니다. 인간 최후의 원수가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 앞에서 큰소리 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벌벌 떨고 두려워하는데 그 죽음 앞에서 그것도 온몸이 깨어지는 고통의 순간이었지만 스데반에게는 고통이 없었습니다. 안식이고 최고의 평화였습니다.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믿음의 선배인 처녀 코리 텐 붐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네덜란드 사람인데 이 분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 안에 빈대가 그야말로 득시글댔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서 여자 죄수들은 머리채를 붙들고 싸움질을 하였는데, 그 분은 그 속에서 성경을 가르치고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욕만 할 뿐 아무도 참여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씩 참여하여 나중에는 온 감옥 속의 여자들이 다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간수들이 한 번도 오지 않는 것입니다. 간수들이 감옥 속의 빈대를 집으로 가지고 갈까하여 근처에 오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빈대가 득시글거리던 감옥이 피난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이처럼 스데반에게도 죽는 고통의 순간이 평화였습니다. 스데반은 이 모든 것을 누렸습니다. 그럼에도 스데반의 인생은 실패였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봅니다. 스데반은 참으로 귀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을 써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정말로 쓸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정말로 멋지게 선택했고 훈련된 스데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그렇게 끝내고 말았으니 하나님께서 실패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모든 일들을 다하셨습니다. 

먼저, 스데반을 통해서 참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엉터리로 하면서 스스로를 선하다고 생각했고, 의롭다고 생각했고 바르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말해주어야 했지만 겁이 나서 아무도 말하지 못했는데 그 사람들이 꼭 들어야할 말을 스데반이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이것은 2,000년 전의 유대종교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를 비롯하여 교회지도자들에게 바르게 하는가? 라고 말씀하십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라는 말씀을 2,000년 동안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더는 참신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잘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른 교과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확하게 보여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사람들을 교과서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과서는 성경 하나밖에 없습니다. 비슷한 예는 될 수 있겠지만 어떤 인간도 교과서가 될 수 없습니다. 참신자의 모습이란 어떤 것인가 용서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이 시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존심을 건드린 사람, 여러분을 억울하게 한 사람, 배신한 사람, 가슴에 못 박은 사람들을 정말로 용서해 줄 수 있습니까? 참 그리스도인은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예수가 내 속에 오면 그렇게 됩니다. 이것을 스데반을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죽을 때 평화의 모습을 보십시오. 내가 평화해서가 아닙니다. 예수가 내 속에 들어오면 나도 알지 못하게 그렇게 됩니다. 똑같은 환경 속에서 옛날에는 죽는다고 징징되었지만 이제는 달라져서 평안합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나를 배신하고 힘들게 해도 평화한 모습이 됩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가 있으면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을 통해서 못하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하나 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전혀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스데반은 그렇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사업에, 인생에, 자녀를 기르는데 실패한 것이 있어도 그것이 전부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주 받을 일이 있어도, 벌을 받을 일이 있어도, 그것은 저주받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잘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용기를 가지십시오. 길게 보십시오. 조금 더 기다려보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 편에 서있기만 하면 언젠가는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마치 인간적으로 보면 스데반의 인생이 그것으로 끝나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실패하신 것 같은 것을 통해서, 눈에 보이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최고의 종 한 사람을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여기에 대해서 성 밖으로 내치고 도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58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스데반과 비슷하게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둘은 완전히 길이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의 길로 갔고, 다른 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유대교의 길로 갔습니다. 늘 경쟁적인 사람이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을 통해서 사울이라는 청년을 감동시키고 충격을 받게 하셨습니다. 예수를 믿고 저렇게 고통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평화의 얼굴을 가질 수 있는가? 나는 많은 것을 누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 갈망만 있을 뿐, 평화가 없고 인생이 허망하게 생각되는데, 저 친구는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를 생각하면서 무엇인가를 깊이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사울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예수를 만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변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종 사도 바울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스데반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실패하셨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도 실패한 것, 실수한 것이 없으셨습니다. 하시고자 하는 일을 덜 하신 것도, 못하신 것도 없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편에 서있기만 하면 언제든지 그러합니다. 하나님에게 실패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어떤 일에 있어서도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실패하지 않습니다.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들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이고, 이 하나님께 인생을 맡긴 사람은 정말로 똑똑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참 좋을 것입니다. 아직 어리든지, 청소년이든지, 출가하였든지 간에 우리 자녀들은 너무 귀하고 좋습니다. 때로는 눈물도 납니다. 이런 자녀들에 대한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 또 그들의 아들딸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소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단 하나 있습니다. 그 자녀들을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대로 실패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성공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이미 출가한 자녀들, 청소년들, 아직 어린 아이들, 손자 손녀들을 내 소유,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딸들로 철저하게 맡기십시오. 하나님의 아들딸,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가르치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십시오.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말씀을 가르치면 절대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자녀들을 최고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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