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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 주는 교훈 (행 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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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제목 :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이 주는 교훈
+ 설교본문 : 행 5:1-11
+ 설교자 : 마경훈목사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기 위하여 기도하면서 약간의 절망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12절에 보니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민간에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났고 그 결과 믿는 사람들이 마음을 같이해서 모이기에 힘을 썼습니다. 사도들에게 능력이 있어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교회가 부흥하지 못하는 것은 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제가 능력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여러분들은 감사해야 합니다. 제가 베드로와 같은 능력이 있어서 말만하면 사람들이 죽어나가 떨어진다면 여기 계신 분들 중에 상당수가 이미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충격적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있었던 성도의 급사사건입니다. 갑자기 두 성도가 죽은 사건입니다. 

이유는 이랬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가 헌금을 하니까 그것이 교회 안에서 크게 주목을 받았던가봅니다. 4:36,37을 보십시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이것이 예루살렘교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에게 칭찬과 격려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나바가 이런 일을 하니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극을 받아서 나도 하자는 마음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이런 마음이 일종의 시기심, 질투심, 경쟁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한 일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자신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재산을 정리해서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하니 그 부부에게 갈등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액수가 많지 않을 때는 헌금하는 것이 어렵지 않지만 액수가 많아지면 쉽지 않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문제를 놓고 의논을 한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의논의 결과는 바람직한 내용이 아닙니다. 재산을 정리한 값에서 얼마는 감추고 얼마는 드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측하건데 큰 금액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소유를 정리했다는 것은 교인들이 다 알았을 것인데 얼마를 숨겼다고 해도 큰 금액의 헌금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헌금을 드린 아나니아에게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말하자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그리고 한 세 시간 쯤 후에 삽비라가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교회에 모임에 들어왔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징계에 들어가지 않고 삽비라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삽비라는 베드로에게 “예, 이것뿐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베드로는 회개의 기회를 거절한 삽비라에게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즉시 삽비라가 베드로의 발 앞에 넘어져 죽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봅니다. 만약에 지금도 교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하면 죽을 사람 굉장히 많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 줄줄이 치러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양심을 속일 때가 종종 있잖습니까? 성령의 감동으로 시작했다가 육신으로 끝내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못할 때도 많지 않습니까? 때로는 부부가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도 하고, 성도들끼리도 육신적인 일을 도모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죽는다고 하면 저도 몇 번 죽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몇 번 죽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초창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마도 하나님께서 교회 안의 순결을 위한 특별한 시도를 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과적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느냐 하면 11절을 보십시오.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전병욱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300년 동안 깨끗한 교회로 유지하기 위해서 두 가지를 허용하셨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철저한 심판, 또 하나는 핍박입니다. 이 두 가지가 교회를 싱싱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신종플루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습니다. 신종플루는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이 되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걸린 사람만 아프거나 죽으면 문제가 덜 심각할 텐데 호흡기를 통해서 감염이 되기 때문에 문제가 심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격리를 시키는 것입니다. 사람들과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병실 까지 따로 사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확진환자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감염이 되기 때문에 아주 위험합니다. 하나님은 신종플루 환자를 격리 입원시키듯이 교회를 거룩하고 싱싱하게 보존하기 위해서 심판과 핍박이라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일이 그들 개인적으로 볼 때에는 문제가 되겠지만 교회적으로 볼 때는 축복의 사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 때문에 교회가 순결해졌고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지옥에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었다면 구원은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사과상자 안에 썩은 사과 하나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썩은 사과를 좋은 사과들과 함께 놓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사과들의 보존을 위하여 썩은 사과를 그 상자에서 빼낼 것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거룩함과 싱싱함의 보존을 위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골라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은밀하게 끝내지 않고 온 교회가 알게 하신 것은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사건으로 다루기 위함이었습니다. 일벌백계라는 말은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죄과를 엄하게 벌줌으로써 여러 사람을 경계함’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다루신다면 그 앞에 살아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진실의 기준마저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널리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지만 진실의 기준만큼은 여전히 엄격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것이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악한 사람만의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의 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1.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여라.

하나님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은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의 시각만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본다면 그들은 대단히 헌신적인 사람들이라고 판단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소유를 판값에서 얼마를 숨겼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재산을 정리했고 그 재산을 교회 앞에 드렸다는 사실만을 알 것입니다. 그들이 드린 헌금은 값의 얼마를 숨겼어도 큰  돈이었을 것입니다. 5억 짜리 아파트를 팔아서 절반을 드렸다면 2억 5천만 원입니다. 그 정도의 헌금을 했다면 굉장한 헌신이 분명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드린 금액을 보고 놀랐을 것입니다. 그들의 헌신을 보며 그들을 칭찬하고 존경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니 그들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거짓말하여 성령을 속이고 교회를 기만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정확합니다. 계 5:6에 보면 어린양 되시는 주님은 일곱 눈을 가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얼굴에는 눈이 일곱 개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시각을 가지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누구도 그분의 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주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들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도 필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행 3,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하나님을 버리거나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잘 보이는데 방해가 된다면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마저 포기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다가 앉은뱅이 한 사람을 고치게 됩니다. 그 앉은뱅이는 40살이 넘었지만 한 번도 걸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를 향하여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명령합니다. 베드로의 명령에 앉은뱅이는 발과 발목에 힘을 얻고 일어나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합니다. 이 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한 종교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가두고 하룻밤이 지난 후에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 그 때 베드로와 요한은 담대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 4:19,20) 

하나님 앞에 아름답게 사용되는 인생을 살고 싶으면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한 노력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하십시오. 어떤 분야에서든 천재가 있습니다. 미술의 천재 중에 천재는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는 30대 초반일 때, 로마 교황인 쥴리우스 2세로부터 12사도들의 그림을 그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단 일을 받아들이자,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12사도를 넘어, 창세기에 나오는 아홉 장면을 뽑아 모두 400명이 넘는 인물을 그려나갔습니다. 그림을 그린 4년 동안 항상 누워서 시스틴 성당의 천장을 그려야 했습니다. 그는 꼬박 4년을 보내고 나서, 예레미야 선지자처럼 늙고 지쳤다고 합니다. 또한 그의 나이 아직 37세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친구들은 이미 늙어버린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가 4년이란 긴 시간 동안 심혈을 기울여 그린 시스틴 성당의 성화는 너무나 정교하여 실물처럼 보였습니다. 

그 그림은 그림을 주문한 교황을 기쁘게 하였고, 바티칸으로부터 그는 다른 작품을 의뢰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라파엘을 포함한 동료작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풍을 바꾸게 하여 유럽화풍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을 뿐 아니라, 조각과 건축양식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런데 그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의 예술적인 재능 때문이었지만,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자세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가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그릴 때 어떤 사람으로부터 “왜 그렇게 어두운 시스틴 성당 구석에서,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을 그렇게 열심히 그리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미켈란젤로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십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노력하기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2.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주의 종을 속이고 교회를 속인 것은 그 마음에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고 사탄이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 마귀가 낀다는 뜻인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그랬습니다. 추측하건데 성령은 그들 부부를 감동하셨고 그들은 성령의 감동을 따라 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에 사탄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할 성도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사탄이 가득했습니다. 사탄이 가득하게 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마치 컵에 물이 담겨있을 때는 맛도, 냄새도 없지만 술이 가득하면 쏘는 맛에 알콜 냄새가 나는 것처럼 사탄이 가득하면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두 가지를 말합니다. 

먼저 성령을 소멸하고 사탄이 그 마음에 가득하니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신앙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 첫 번째가 욕심입니다. 자신의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면 사탄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욕심은 우리를 파멸로 이끌어갑니다. 욕심을 비우지 않으면 결국 멸망의 바다에 빠져 죽게 됩니다. 

약 70여 년 전에 터키에 유명한 여시푸라는 레슬링 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몸무게가 무려 200kg나 되는 거대한 체구를 가진 가람입니다. 레슬링을 잘해서 유럽 지역에서 그를 상대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한번은 여시푸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최고의 레슬링 선수였던 루이스와 시합을 하여 그를 장난감 집어 던지듯 해치웠습니다.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된 그는 상금으로 많은 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돈을 가지고 가봐야 환전하는데도 복잡하니까 그 돈을 전부 금으로 달라고 한 후 허리에 둘둘 감은 큰 전대 속에 채워 넣고 다시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바다 한 가운데 왔을 때 그가 탄 배가 그만 가라앉기 시작하였습니다. 여시푸는 그 큰 체구에 불거지도록 금이 가득 찬 전대를 둘둘 감은 채로 배에서 뛰어 내렸는데 아무리 운동선수지만 몸에 감은 금의 무게 때문에 미처 구명보트가 도착하기 전에 곧장 대서양 밑바닥에 가라앉아서 지금까지 떠오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 금만 포기했더라면, 그 금만 벗어놓고 뛰어내렸더라면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욕심 때문에 죽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죽이는 것이 욕심입니다. 영적 죽음은 욕심 때문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령을 소멸하고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면 나타나는 증상 중에 하나가 거짓말입니다. 성령은 진리의 영이시고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득한가 마귀로 가득한가를 보려면 자신의 마음이 진실한가 거짓으로 가득한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영적인 차원에서 보면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순간 성령님의 역사는 약해지고 마귀의 역사는 강해지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게 되면 결국 그 마음에 마귀가 가득해서 영원한 심판으로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몇 명이 일요일에 놀러 갔습니다. 신나게 하루 종일 놀았습니다. 이들이 월요일 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그러는데 가기 싫은 겁니다. 그러니까 한 학생이 꾀를 냈습니다. 

“야, 우리 하루 더 놀자. 그리고 완전히 결석이 되면 안 되니까 이따 오후에 학교 끝나기 직전에 들어가서 선생님에게 ‘사실 일요일에 우리가 놀러 갔었는데 시골 깊은 곳에 놀러 갔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공구를 가져 오지 않아서 바퀴를 고칠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서 겨우 왔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보고하자.” 

넷이서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 날 하루 더 신나게 놀아 제끼고 오후에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자기들 끼리 짠 그대로 시골에 갔다가 타이어가 펑크가 나서 못 왔다고 말 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아, 그러냐, 뭐, 그럴 수도 있지”라고 하시더니 빙그레 웃으면 메모지를 한 장씩 다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사람 에게 “떨어져” 그러더니 그 메모지에 다가 자동차 타이어 어느 쪽 바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바퀸지 뒷바퀸지 어느 쪽인지 네 사람 각자 쓰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결국 그 아이들의 거짓말이 발각 되서 선생님에게  많이 혼났다고 합니다. 거짓말은 다 들어납니다. 사람에게도 이런데 일곱 눈을 가지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에 욕심과 거짓을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탄이 떠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악한 일에 맞장구치지 말고 선한 일에 맞장구치라.

신앙을 가지면 나타나는 현상 중에 하나는 만나는 대상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 1편에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참 불행합니다. 이들은 팀웍이 너무 좋아서 문제였습니다. 악의 팀웍이었습니다. 좋은 일에 팀웍이 잘 맞으면 얼마나 좋겠습니다. 한 사람만 그러지 말자고 해도 살았을 것인데 서로 맞장구를 쳤습니다. 요즘 많이 쓰는 말로 하면 이 부부는 코드가 너무 잘 맞아서 문제가 된 커플입니다. 이가 나쁘면 잇몸이라도 좋아야 하는데 이 커플은 이도 나쁘고 잇몸도 나쁜 아주 이상한 커플이었습니다. 

좋은 교제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좋은 얘기, 헌신하자 기도하자 봉사하자 이럴 때는 힘의 집중이 일어나야 합니다. 공감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나쁜 짓 하자고 하면 의견이 갈라져야 합니다. 서로 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아나니아가 사도들을 속이고 돈의 얼마를 감추자고 제안했을 때 삽비라가 찬성했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반대했을 것 같습니까? 제가 볼 때는 삽비라가 반대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그러면 안돼요”라고 반대를 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남편인 아나니아가 삽비라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강하게 밀어붙였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우리가 이 재산을 다 드리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 할 수 없어, 이미 말은 꺼냈으니 헌금을 해야 하지만, 다 드릴 수는 없어”라고 했을 것입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 보면 아내들의 믿음이 남편들의 믿음보다 좋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예외가 아니라면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들은 믿음 있는 아내 말을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이 문제로 부부 싸움도 했을 것 같습니다. 결국 남편이 이겼고 아내는 할 수 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결과가 사도들을 속이고 성령을 속였다가 즉사하게 되어 비극의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들이 7명 정도 모였을 때 남 욕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남 욕을 할 수 있습니다. 비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6명이 어떤 사람을 욕하더라도 한 사람만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거 말도 안 되는 소리다”라고 방어해주면 절대 그 모임이 어떤 한 사람을 매도하는 쪽으로 갈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모임이 있을 때 전체 사람들이 남을 비난하고 욕하는 모임이 된다 할지라도 자기 하나가 들어가서 “우리가 더 이상 이런 욕하는 이야기를 하면 안됩니다”라고 하면 절대 그 모임이 나쁜 쪽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소금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악에 대해서 맞장구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사람이 들어가면 그룹 전체가 나쁜 곳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그 그룹에서 그렇게 갔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는 것이 책임입니다. 묵인으로써 맞장구를 쳐주었기 때문에 나쁜 방향으로 나간 것이지 한 사람이 적극적으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라고 말해주면 절대로 나쁜 곳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아담은 그런 의미에서 큰 책임이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버릴지언정 아내를 따라가면 안 되는 것인데 하와에게 맞장구를 쳤습니다. 결국 자기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고 인류가 죄에 빠지게 하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습니다. 

목사님들이 모이는 목사님그룹이 있는데 그 그룹이 좋은 점이 이런 것입니다. 좋은 일하자고 하면 분위기상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어도 말을 못할 분위기입니다. 그래서 결국 좋은 것은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 약간 무리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아주 불한당 같은 나쁜 일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냄새가 날 만한 일말입니다. 그러면 그 중에 꼭 한 사람 미친 듯이 나와서 반대하는 분이 있답니다. 누가 되든 간에 한 사람이 필사적으로 반대하기 때문에 그 일이 안 됩니다. 

그런 모습이 교회의 모델이 되면 좋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성도들의 분위기로 유지가 되면 교회가 삽니다. 전체가 다 깨끗해야 되고 온전히 서 있어도 좋지만 어느 시기에는 그렇게 안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중에 한사람만 깨어있어도 교회는 썩지 않습니다. 한사람만 바른말을 해도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동역이 무엇입니까? 좋은 일에 대해서는 열심히 맞장구쳐 주고 나쁜 일에 대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반대를 표명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역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물어보십시오. 나는 선한 일을 할 때에 조화가 잘되는 사람입니까, 악한 일을 할 때에 조화가 잘되는 사람입니까? 선한 일을 할 때 조화가 잘되고 악한 일을 할 때는 저항할 줄 아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잠 27:17에 보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또 영향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는 좋지 않은 것의 영향을 쉽게 받습니다. 좋지 않은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되고 좋은 것은 열심히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한 집사님 집에 심방을 갔더니 집사님께서 “목사님, 참 희한한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시며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집사님의 앞집에 정신이 조금 이상한 남자분이 이사를 왔는데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같은 노래만 부른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들려오는 “타향살이 몇 해던고”라는 노랫소리 때문에 집사님이 스트레스가 쌓여 얼마나 힘든지 몰랐답니다. 그래서 ‘어쩌다 우리 앞집에 저런 이상한 남자가 이사 와서 이렇게 어렵게 하나?’하며 불평했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자 집사님이 자기도 모르게 “타향살이 몇 해던고” 하면서 같이 그 노래를 부르고 있더랍니다. 빨래하면서도 밥을 하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타향살이…” 하고 있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예배 생활과 기도생활을 해서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바꿀 힘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렘 13:23에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고 말씀합니다. 흑인이 피부를 하얗게 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표범이 자신의 반점을 없앨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악에 익숙한 사람들도 악을 선으로 바꿀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 안에서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지만 오직 성령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죽음을 통해서 1. 사람에게만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 잘 보여라. 2.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게 하지 말고 성령으로 충만하라. 3. 악한 일에 맞장구치지 말고 선한 일에 맞장구치라는 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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