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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시적 신앙(Temporal Faith) (마 13:20~21, 마 16:2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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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 신앙(Temporal Faith) (마 13:20~21, 마 16:24~26)


우리는 지금 성경 말씀을 통해서 구원의 신앙이 아닌 헛된 신앙의 유형들을 살피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역사 신앙에 대해서 생각하였습니다. 기독교의 신앙의 역사적인 사실로 지식적으로만 수납하는 것이지 전인격적으로 받지를 않거나 전통으로만 받아버리고 자기와 관련해서 받지 않는 신앙을 역사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 신앙이 발생하게 되는 요인들을 생각하면서 역사 신앙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지 몇가지 지침들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러한 역사적 신앙을 취하고 있지는 않는지 자신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오늘은 헛된 신앙의 또 하나의 유형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일시적 신앙』(Temporal Faith)입니다.

Ⅰ.일시적 신앙

마13:20-21에는 일시적 신앙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씨를 뿌렸는데 돌 짝 밭이 어서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합니다. 흙이 조금 있어서 속히 싹이나서 잎이 납니다. 그러한 뿌리가 깊지 못하고 햇볕이 나서 말라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의 씨를 뿌리면 처음에는 잘 받아들이고 기뻐하며 감격해 합니다. 얼마 동안은 싹이나고 잎이 나는 것 같습니다. 참 신앙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환난과 핍박이 오면 신앙을 버리게 되고 신앙이 시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종류의 신앙을 가진 분들을 일시적 신앙이라 합니다.
 
1.일시적 신앙이란?

과연 어떤 사람의 신앙이 구원의 신앙인지 일시적 신앙인지 하는 것을 분별하기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시적 신앙에는 몇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특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면 과연 자신의 신앙이 아닌지 살펴야 할 것입니다. 

(1)일시적으로 뜨거운 감정을 수반합니다.

역사적 신앙이 성경의 진리들을 지적으로만 수용할 뿐 자신에게 적용이 없는 것과는 달리 일시적 신앙은 성경 진리들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여서 기쁨을 맛보며 감격해 합니다. 구원의 신앙인 것으로 착각할 만큼 열심도 있고 즐거워 합니다. 개인적인 적용도 있습니다. 많은 봉사를 하기도 하며 하늘의 은사를 맛보기도 하며(히6:4), 예수님에게만 자기의 문제해결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주님으로 영접했다고 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능력도 행합니다. 


(2)그러나 환난이 오면 신앙을 버립니다. 

그렇게 감격하며 열심히 봉사하고 활동하던 사람이 자기 신상에 어려움을 겪고 신앙생활 때문에 환난과 핍박이 있게 되면 신앙을 버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일시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올 바른 신앙인데도 도중에 탈락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온전한 구원의 신앙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단지 일시적으로 신앙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었던 것입니다. 외형적으로는 많은 기쁨도 열심도 감격도 봉사도 있지만 실상은 그 안에 참생명이 없습니다. 

2.일시적 신앙이 발생하게 되는 요인은?- ‘그릇된 동기’

 왜 일시적 신앙이 발생하게 될까요? 그렇게도 기뻐하던 신자가 왜 핍박과 어려움이 오자 신앙을 버리게 될까요? 애초에 신앙을 취하게 된 동기가 자기의 번영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처음에는 여러 동기에 의해서 복음을 접했을지라도 마침내는 가져야 할 바른 동기가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릇된 동기에서 유익 자기번영, 자기 성취라는 동기에서 신앙을 취하고 잇다는 점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신앙을 취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위해 자기 희생을 하라니 더 이상 신앙을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지요! 신앙 때문에 자기에게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밀어닥치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신앙을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자기번영과 자기행복, 자기발휘, 자기성취를 위해 신앙을 취한 자에게 자기를 내놓으라 하며 자기를 희생하라 하니 차라리 신앙을 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일시적 신앙을 취하게 되는 요인들(그릇된 동기들)

이제 우리의 분석을 좀더 구체적으로 발전시켜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릇된 동기에는 어떠한 경우들이 있겠는지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동안 그렇게도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에 가서는 신앙생활을 포기하고 중단하게 하는 요인이 되는 그릇된 동기들을 각 연령층에 따라서 분석하여 보겠습니다. 

○주일학생들의 경우-흥미위주로 다니기 때문!(수동적 입장)

우선 주일학생들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주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일 학교에서 흥미위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흥미를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출입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주일 학생들은 흥미위주로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아니면 저조 할지라도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을 하겠는가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키는 주로 담당 교역자를 포함해서 선생들께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신앙생활을 할 것인가 하는 주도권은 주로 선생님께 있습니다. 주일 학생들은 수동적인 입장입니다. 따라가는 입장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일학생들에게 흥미위주의 신앙생활을 조장하여 일시적 신앙에 빠지게 하는 주범은 담당 교역자를 포함해서 주일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우리 선생님들입니다. 주일학교 교육을 흥미위주로 운영해 나가기 때문에 주일학생들로 하여금 자기의 ‘흥미’를 채우기 위해서 교회를 출입하는 사람들로 만들기도 하고 유도하기도 합니다. 동화나 율동 게임이나 기타의 활동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ㅅ걸교나 공과공부까지도 다 어린이들의 흥미를 어떻게 충족시켜 줄까하는데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흥미위주의 주일학교 생활에 익숙해져 버리는 어린이들은 나중에 중학교에 올라가서 중고등부 예배에 참석하거나 장년들과 합류하게 될 때에 전혀 적응을 봇하고 맙니다. 흥미위주의 신앙생활이 아니라,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신앙생활로 갑짜기 바뀌어 버리니까 적응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지금까지 5년 동안 수십명의 주일학생들이 주일학교를 출입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장년들과 합류하여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들은 열손가락에 꼽을 정도이지 않습니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많이 생각하고 분석해 본 결론은 ‘흥미’를 위해서 교회를 출입하며 신앙생활을 하는데 익숙해져서 ‘본질’을 추루하는 신앙생활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 주일학생들의 경우에는 주로 “자기의 흥미”라는 그릇된 동기로 신앙생활을 취하므로 일시적 신앙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주일학교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선생들은 이점을 각별히 유념하셔야 합니다. 우선 주일학교 교육의 일차적인 책임자인 목회자부터서 주일학생들이 ‘자기의 흥미’라는 그릇된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 하지 않도록 배려를 해야 하겠고 선생님들도 거기에 보조를 맞추어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저의 짧은 목회경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소중한 교훈은 주일 학생들도 장년들과 함께 예배에 참여하도록 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흥미위주의 분위기에 젖어 버리지 않고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무리들속에서 신앙생활을 터득하게 해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별도의 시간을 가질 필요성은 있지만 하나님의 백성들 모드라는 회중으로부터 떨어져서 독자적인 분위기와 길을 걸어가도록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주일학교 교육을 위한 별도의 시간에도 흥미위주로 나아가서는 안되겠고 신앙의 본질을 자꾸 깨우쳐 주고 터득할 수 있는 장으로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중고등학생들의 경우-써클 활동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때문!

이제 중고등학교 때 그렇게도 열심히 봉사하고 활동하던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거나 사회에 나가게 되면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주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1)서클활동이나 사귐의 장으로 생각하기에 그러한 장이 활짝 열리면 떠납니다. 

신앙생활을 ‘써클활동’정도로 취하기 때문입니다. 중고등학교 때에는 학교라는 울타리에서는 써 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성간의 교제도 자유롭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교회라는 무대에 들어오면 써클활동이나 이성간의 교제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중고등학생들이 써클활동이나 사귐의 장(場)으로 생각하고서 교회를 출입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대학이나 사회라는 개방된 사회에 나서게 되면 얼마든지 자유롭게 써클활동도 할 수 있고 이성간의 교제도 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 구태여 교회라는 울타리에 머물러 있어야 할 필요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에는 학생회장으로 열심이 활동도 하면서 동료들이나 어른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던 이들이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신앙생활을 중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이성간의 교제로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연애당”이라는 불명예스런 이름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이 교회를 써클활동이나 사교의 장(場) 정도로 생각하면서 출입하는데에는 유년주일 학생들과는 달리 학생들 자신에게 책임의 소지가 훨씬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역시 담당 교역자와 선생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쪽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가치와 의의(意義)를 두고서 활동을 하게 하거나 방치해 두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상상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고 나아가지 않고 비본질적인 것에 의의를 두고 가치를 부여해서 자꾸 무엇을 하게 하고 그런 것을 잘하면 인정해 주고 추켜세울 때에 그릇된 동기로 신앙생활을 취하게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나아가는 전체적인 진행의 성격이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비본질적인 것에 의의를 두고 나아갈 때에 그러한 교회에서 자라난 중고등학생들은 써클활동이나 이성교제라는 비본질적인 것들을 위해서 교회를 출입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다른 곳에서 그러한 것들을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때가 되면 교회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

(2) 대학입시라는 또 다른 유익을 위해서 떠나기도 합니다.

이렇게 써클활동이나 이성교제라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출입하던 학생들은 결국 대학입시라는 더 크고 급한 자기유익을 위해서 교회를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고등학교를 졸업하여 써클활동이나 이성교제의 장이 활짝 열리기도 전에 상당수는 대학입시라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중단하게 됩니다. 어차피 신앙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런 자기 유익을 위한 것이었기에 대학입시라는 또 다른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미련없이 신앙생활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좋게 보아준다면 대학입시라는 환난 앞에서 신앙을 버리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시적인 신앙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들을 주의하지 않았기에 한국교회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엄청난 투자를 하고서도 결실은 별로 얻지 못하였고 교회만 불명예스런 이름을 얻었던 것입니다. 이제라도 이런 점들을 잘 살펴서 우리의 자녀들 주에서 중고등학생들이 헛된 일시적 신앙에 빠지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여야 하겠습니다. 

○장년 성도들의 경우- 자기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

청년 대학생들의 경우는 취미생활 정도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남자들은 두로 군대라고 하는 새로운 사회에 들어가면서 신앙을 버리기도하고 여자들은 주로 결혼이라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신앙을 중단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을 취미생활 정도로가 아니라 자기의 영원한 생명으로 취고 있다면 군대나 결혼이라는 관문을 통과하면서도 쉽게 신앙을 포기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년 사업가들의 경우는 자기 사업의 유익을 위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울타리에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을 사귐으로 인하여 장사를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도 무시 못할 정도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중년 부인들과 노년층의 경우는 주로 복받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기복신앙”이라는 형태로 일시적 신앙이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예수 믿으면 병도 낫고 남편 사업도 잘되고 자식들 학교도 좋은 곳에 가고 만사형통하게 된다는 생각에서 기독교 신앙의 울타리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신앙도 역시 일시적 신앙입니다. 

○ 목회자들의 경우

심지어 목회자들의 경우도 일시적 신앙을 가진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씀을 전하는 이들도 사실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목회를 한다면 그 역시 일시적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경우도 신앙 때문에 자기에게 해가 온다면 신앙을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고 있는 저도 자신을 늘 살피게 됩니다. 그러한 역사적 선례는 뒤에 소개하겠습니다(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참여한 목회자들의 경우).


3.일시적 신앙에 빠지지 않을려면?

그렇다면 어떤 환난과 핍박이 밀어 닥쳐도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는 구원신앙 영속적인 신앙을 취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마16:24-26)!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마16:24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만이 예수님께 합당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자만이 생명을 얻고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1)처음부터 바른 동기로 신앙을 취해야 합니다.

우리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자기 유익이라는 그릇된 동기에서 신앙을 취해선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선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복음의 내용을 소개할 때 믿어야 할 정당한 이유를 전해야 합니다. 즉 공리적 심사에서 믿으면 복받고, 병고치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는 식으로 전해선 안됩니다. 본래 인간의 위치와 처지를 설명하고 왜 주님을 섬겨야 하는가를 잘 설명해 줘야 합니다(롬10:1-3, 요6:15,26).

(2)혹시 그릇된 동기에서 출발했더라도 바른 동기로 들어가야 합니다!

바른 동기로 들어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유익을 위하여 신앙을 취했다 할지라도 바른 동기로 나아가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여러 가지 그룻된 동기나 계기를 통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섭니다. 그런 경우에  계속하여 자기 유익을 위하여 신앙을 취하고 있으며 결국은 자기에게 해가 올 때 서슴없이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릇된 동기에서 바른 동기로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경우

이들은 처음에는 자기 유익을 위해 신앙을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 어려울 때 주님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서 죽어야 하겠다는 얘기를 듣자 “주여 그리마옵소서 !”라고 인간적인 생각에서 만류합니다. 아마 베드로는 예수님이 로마로부터 유대 나라를 해방시킬 것이라는 것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마16:22-24). 

막10:37-45에서는 세베데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구하길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제자들은 그들의 말을 듣고 분히 여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이 로마나라를 몰아내고 유대 나라를 정치적으로 해방시킬 것을 기대하였고 그때에 예수님이 왕이 되면 우의정, 좌의정이 되겠다는 기대와 욕망에서 예수님을 따랐던 것입니다. 다른 열 제자도 두 제자에 대해 분을 낸 걸 보면 다를바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때에 모두 주님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죽으심과 다시 사심이 하나님 나라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를 40일 동안 더 가르침을 받고 오순절 성령강림이후 성령충만을 받으므로 자기 유익과 자기 번영을 위하여가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는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자기를 위한 신앙”에서 “신앙을 위한 자기”로 바뀐 후에는  신앙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고 요한은 100세가 되기까지 온갖 시련을 견디다가 죽어갔고 야고보는 목베임을 당했고 바울은 로마에서 칼에 목이 떨어지면서도 “예수!”를 부르며 죽었고 바돌로매(나다나엘)는 몸의 가죽을 벗기는 죽음을 마태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도마는 인도에서 “나는 예배한다! 예배한다!”소리치며 죽어갔고 안드레는 아데네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누가는 헬라에서 감람나무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이렇게 열한 제자는 모두 처음에는 그릇된 동기로 주님을 따랐지만 나중에는 바른 동기로 나아갔습니다. 

○ 가룟 유다의 경우는 예외였습니다 - 일시적 신앙의 성격적 전형

그러나 가룟 유다는 바른 동기쪽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 유익이라는 그릇된 동기로 예수님을 팔아버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 유익을 위해서 주님을 버렸던 일시적 신앙의 전형적인 인물입니다. 일시적 신앙을 가졌던 사람의 전형을 가룟 유다의 경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였으며 그 중에서도 돈을 맡은 회개였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한 교회의 회개집사쯤 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가 예수님을 은 삼십냥에 팔아버린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어떠한 입장을 취하든지 그가 예수님을 따랐던 동기가 그릇되었기 때문으로 분석이 됩니다. 단순히 돈에 대한 탐심으로 눈이 어두어서 였든지 아니면 자기 나라의 정치적인 해방을 기대하고서 였든지 간에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기에 그는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특히 그라 자기 민족의 정치적인 해방을 기대하면서 따랐으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알은 하시려고 하지 않자 자기가 팔아서 죽음의 위기에 까지 몰아넣는다면 혹시 능력을 행사하셔서 주시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였는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가룟유다와 같이 한동안 열심히 주님을 따르며 직분을 맡아서 봉사도 하고 하지만 주님을 따르는 동기가 자기의 유익이라면 결국 주님을 떠나는 날이 있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자기에게 해악을 가져올 때입니다. 자기의 번영을 꾀하는데 신앙이 거침돌이 되기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3)한평생 동안 신앙을 취한다고 해도 일시적 신앙일 수 있습니다.

1-2년 동안만 신앙생활 하다가 신앙을 버린 자만이 아니라 10-20년,30-40년, 아니 평생동안을 신앙생활 했을지라도 “자기 유익”이 동기라면 일시적 신앙일 뿐입니다. 이런 경우는 “현세적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땅에서는 자기유익, 현세적인 축복을 위해 신앙생활 하는데 다행히 핍박과 환난이 없기에 자기도 속아서 끝까지 다 가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면 기막힐 일이겠지요. 이렇게 한평생 동안 신앙생활을 취하고도 일시적 신앙이었던 선례를 교회사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교회사적 선례: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가결한 목회자들 

한국 교회사에 오점을 남긴 총회중 하나는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교회에서 열린 장로회 제 27차 총회입니다. 박응률 목사의 제의에 의해 의장 홍택기 목사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그 총대에 참석한 목사, 장로, 선교사들은 30년이 넘도록 주님의 말씀을 따른다 했고 말씀을 전해 온 자들이었습니다. 평생동안 주님을 믿고 다른 이에게도 주님을 전한다는 그들이 신사참배를 하게 된 이유가 뭘까?

지금까지 자기 유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목회를 해도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한 것이지 주님을 위해서 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해가 되고 자기 목숨을 내놓아야 겠기에 신앙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193명의 총대를 총대 1인에 일본 순사 2명씩 호위하여 겁을 주니까 자기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신사참배를 하겠다며 신앙을 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평생 신앙생활을 해왔다 해도 자기 유익을 위한 신앙에 해당된다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 주님과 신앙을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적 선례-마7:22-23

예수님께서는 더욱 가가 막히는 경우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끝까지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열심히 주님의 이름으로 이것 저것을 했지만 정작 주님 앞에서는 날에 가서야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고 판서는 날에 가서야 구원의 신앙이 아니라고 판명되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결정적인 환난이나 핍박이 없이 무난히 지나갔기에 자기를 위해서 주님을 부인하게 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그러한 환난이 있었더라면 틀림없이 주님을 버렸을 일시적인 신앙을 가진 자들인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끝까지 신앙을 취하고 있다가 갔다고 해도 “자기유익”을 위해서 취한 신앙이었다면 그 또한 일시적 신앙인 것입니다. 참으로 경성하여 살펴야 할 문제입니다. 


Ⅱ.구원의 신앙 (영원한 신앙)

따라서 현재 어떤 성도의 신앙생활이 얼마나 열심히 있고 얼마나 기쁨이 있는가? 하는 것이 구원신앙의 근간(根幹)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열심 기쁨 감격은 일시적인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위해서는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놓겠다는 신앙이 ‘구원의 신앙’입니다. 비록 신앙을 취하게 된 계기가 여러 가지 자기 유익과 관련된 것이었다 해도 마침내 자기 유익을 위한 신앙에서 ‘신앙을 위한 자기“로 바뀌어야 참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구원의 신앙의 성경적 선례

우리는 그러한 구원의 신앙의 성경적 선례를 ‘다니엘’ 선지자나 ‘스데반’집사님 같은 분들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위해서 신앙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앙을 위해서 자기를 버렸습니다. 다니엘은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실 것이기 때문에’ 믿는 신앙이라면 일시적 신앙일 수 있습니다. 

●구원의 신앙의 교회사적 선례

또 교회사에서 구원의 신앙의 선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선 ‘세계 교회사’에서 구원의 신앙의 선례가 될 만한 분을 한분 소개한다면 ‘폴리캅’ 감독을 들 수 있겠습니다. 폴리캅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 가운데 가장 극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습니다(계2:10). 폴리캅이 화형에 처하게 직전에 “네가 만약 로마의 시이저를 숭배하고 그리스도를 부인하면 지금까지의 이 박해를 그만두고 특별히 대우하겠다!”는 제안 앞에서 폴리캅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86년간 나를 해침이 없이 나에게 성실하셨던 나의 왕 나의 주님 그분을 부인할 이유가 어디 있겠소? 나는 그를 사랑하오!” 결국 폴리캅은 많은 매를 맞고 마침내 불에 타서 죽었습니다. 신체의 극히 내부에 있는 내장까지 환하게 드러났고 처형자들은 미쳐 타지 못했던 시체를 창 끝에 걸어놓고 야수의 밥에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위해선 목숨까지 내놓았던 폴리캅의 신앙이야말로 구원의 신앙의 전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도 그러한 구원의 신앙의 선례가 될 만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분을 소개하면 주기철 목사님입니다. 그분의 일대기를 보면 온갖 고문과 회의책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신사 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며 죄가 아니다!” 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어떤 때는 살살 달래가면서 환심을 사서 마음을 돌이키려 해보기도 하고 가족에게 면회의 특권을 베풀기도 하였고 사식도 드릴 수 있게 하였고 그래도 굽히지 않을 때는 면회도 일절 금지하고 사식도 받지 않고 폭언과 매로 신문하였습니다. 대나무 끝으로 손톱 밑을 찌르면서 항복하라고 하였고 가죽 끈으로 몸을 마구치고 전신을 꽁꽁 묶고 머리카락을 묶어 달아매고 늘어뜨리기도 하였으니 까무라치면 찬물을 끼얹어서 깨어나게 하고 또 고문을 하고 하니 견딜수가 있었겠습니까?

 심지어 이런 방법까지 생각해 냈습니다. 형무소 벽에다 선반을 매고 선반 맨 위에 신사를 붙여놓고 그 선반에는 밥을 놓고 두 손을 꽁꽁 뒤로 묶어 결박했습니다. 주목사님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을 것이고 밥을 먹으려 하면 머리를 숙여야 입으로 먹을 것이고 입으로 먹으려는 순간 머리가 숙여지면 신사참배를 했다고 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목사님은 이상망측한 방법으로도 꾀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 밥을 잡수지 아니했습니다. 너무도 오래동안 식사를 안하니까 경찰에서 그 방법도 효과가 없는 것을 알고 “주목사는 거룩한 참 목사!”라고 자기들끼리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참으로 구원의 신앙이 있음을 실증해주는 것입니다. 

맺는말 

우리보다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이렇게 험한 길도 믿음으로 걸어갔다면 우리는 삶 속의 작은 고난을 왜 이겨내지 못할까요? 세상은 타협할 성도들을 환영할 차비를 하고 있으며 하늘 나라는 의를 위해 박해받고 있는 성도들을 환영할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마5:10)

신앙의 틀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틀속에 담겨있는 내용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형식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의 ‘동기’ 를 보십니다. 얼마나 열심히 있느냐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 기독교의 전통과 종교의식에 익숙해 있는가를 보시지 않으시고 그 사람이 신앙을 취하고 있는 동기가 무엇인가를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할 때 끊임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신앙의 동기가 어떠한가를 잘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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