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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큰 무리를 보시고 (마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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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무리를 보시고 (마 5:1~12)


영화 벤허를 보면 벤허와 예수님이 같은 연령대로 나옵니다. 그래서 벤허가 활동을 할 즈음에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덕에 예수님이 앉아서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광경을 벤허가 멀리서 지켜보면서 지나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아마 이천년 전 실제 상황이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실제 예수님과 얼마나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얼마나 가까울 것 같습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기독교인들이 자주 듣는 비판 중의 하나가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님을 순종하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예수님은 믿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연 예수께서 이러한 문제가 장차 존재할 것이라고 아셨을까? 오늘 본문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두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하나는 무리이고 또 하나는 제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시작하실 때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했습니다. 두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를 향하여 이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것인가. 무리를 항하여 말씀하신 것인가 아니면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왜 중요한가. 중요합니다. 

만일 산상수훈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그 어려움과 엄격함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소수정예에게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베드로 ․ 야고보 ․ 요한처럼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충분히 어려운 말씀이라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제자들뿐만이 아니고 무리를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라면 그렇다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도대체 일반인들이 이와 같은 말씀을 얼마만큼 순종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아무리 의도가 좋더라도 한계가 있을 텐데 제자들은 집회가 끝나면 예수님을 좇아가지만 무리는 집회가 끝나면 각자 자기의 집과 직장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과연 일반 대중이 당신의 말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 산상수훈이 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 있는 이유가 있다면 첫째는 제자도에 대한 말씀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제자가 되고 싶은 사람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이고 또 하나는 남다른 헌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인들이 평소에 염려하는 것들에 대해서 예수님은 일반적으로 부정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는 다 이방인들이 다 구하는 것이다’, ‘나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이런 상당한 남다른 헌신을 전제 하고 계십니다.

 그렇지만 일반 대중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일반인들이 다 겪는 상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돈 ․ 가족 ․ 인간관계 ․ 신앙 이런 모든 일반 사람들이 겪는 그런 일을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것은 모든 사람들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그리고 어차피 마태복음 맨 마지막에 가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느냐면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라도 이제는 그것을 모든 사람에게 전할 사명을 주셨고 그 말씀은 이제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는 얘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성격을 볼 때 원래 예수님의 의도는 소수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당신과 같은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집 ․ 가족 또 생업을 버리고 무소유로 사셨던 것처럼 당신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도 그와 같은 강력한 헌신을 요구하셔서 그래서 제자들이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자기 아버지를 버리고 마태 같은 세리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따른 게 아니고 일반 대중도 예수님을 따라왔어요.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이유는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병을 고쳐 달라, 귀신을 내쫓아 달라 이런 문제 때문에 예수님께 왔지만 그러나 그것만이 그들의 이유가 아니고 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고 그들도 천국에 대해서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을 환영하시고 그들을 맞아주시고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그들에게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소수정예 제자들뿐만이 아니고 일반 대중을 위한 공간을 준비하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도 듣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말씀을 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물론 성경 말씀 중에 어느 부분이 헌신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고 어느 부분이 일반 대중에게 하신 말씀인가를 나누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태가 주후 80년경에 마태복음을 기록할 때에는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은 짬뽕이 됐어요. 이미 기독교는 대중적인 신앙이 됐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때 와서 누구를 대상으로 한 말씀이냐를 나누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가 왜 이 시점에 복음서를 기록할 필요를 느꼈느냐. 원래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입니다. 더 지체하다가는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무엇을 가르쳤는지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을 염려해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고 그것을 다시 정립할 목적으로 이 복음서를 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얘기일 수 있습니다마는 신학자들 중에는 마태가 복음서를 쓴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시 널리 퍼져있던 바울의 신학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지만 그에게는 많은 반대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너무 믿음 쪽으로 치우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야고보서에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라고 강조한 것은 바울의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고, 바울을 견제하고자 했던 또 다른 사람이 마태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려고 왔느니라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렇게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은 자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것이 바로 바울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이 말씀을 듣고 ‘아니, 목사님. 그렇다면 누가 옳다는 얘기입니까? 성경 속에도 서로 다툼이 있다면 내가 누구의 말을 신뢰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이렇게 묻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마는 이러한 갈등이 성경 저자 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됩니다. 이러한 갈등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러한 갈등을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셨을 때 무리를 보시고 또 제자들이 다가왔다, 이 두 부류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예수님도 그와 같은 사실을 알고 계셨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저 대중을 제자처럼 가르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제자를 무리처럼 가르칠 수도 없다. 제자들도 천국말씀을 배워야 되지만 저 무리도 천국에 들어가야 된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부자도 천국에 데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이방인을 닮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이방인들도 천국에 데리고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타협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천국의 문을 최대한 활짝 열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들어가게 하시네’라고 한 것처럼, 또 요한복음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너희가 거할 곳이 많도다-many rooms in my father''s house’ 내 아버지 집에 너희가 거할 곳이 많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내 멍에는, 내 짐은 가벼우니라’ 만일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면 예수님은 내 짐은 가볍고 내 멍에는 쉽다고 말씀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수능 시험이 다가오는데 수능시험이든 사법고시든 취업시험이든 입사시험이든 그 모든 시험의 목적은 변별력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떨어뜨리기 위한 것입니다. 자격이 안되는 사람들을 떨어뜨려서 자격이 되는 사람을 골라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모든 시험은 의도적으로 어렵습니다. 의도적으로 트릭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은 그 목적은 떨어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들여보내기 위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비록 예수님께서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좁은 문이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동서에서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리에 앉을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타협하지는 않았어요. 하실 말씀 다 하셨어요. 그리고 이것을 어렵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이와 같은 것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늘 작은 서클과 큰 서클의 사람이 존재할 것이란 사실. 그 당시에도 큰 무리가 있고 소수의 제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소수의 헌신된 사람들도 있지만 그와 같지는 않더라도 그럼에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다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아셨을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그것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앙적은 고민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 예수 믿는 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기 부끄러워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다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 아닙니까. 남들이 이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우리 자신이 여기에 갈등이 내재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이 갖고 있는 고민이 아니에요.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갖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있었던 문제이고 예수님도 이미 그 당시에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내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행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대해서 이미 내다 보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떤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 여기에 대한 쉬운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어요. 내버려 뒀어요. 우리로 하여금 고민하게 하셨어요. 의도적인 것입니다. 

프랑스의 의료제도를 알아보니까 소위 copay 제도라고 합니다. 뭐냐하면 환자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먼저 돈을 내면 나중에 국가가 그 돈을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국가가 그 돈을 돌려준다면 처음부터 국가가 돈을 내 주지 왜 환자가 먼저 돈을 내고 그리고 나서 국가가 돈을 돌려주느냐.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당신이 받은 의료서비스는 돈이 든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게 거저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비록 국가가 돈을 내주지만 먼저 환자가 돈을 냄으로써 이게 거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가 예수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은혜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선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값싼 것은 아니에요. 공짜지만 거저 되는 게 아니에요. 주님은 그 사실을 우리가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 늘 기억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다음에 갖게 되는 고민이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도 자신에 대해서 고민하는 부분이 있었어요. 베드로도 자신의 행실에 대하여 실패할 때가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예외가 없습니다. 여기에 있어서는 제자나 일반인이나 예외가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행위의 모순에 대해서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은 이것을 그냥 내버려두셨어요. 저는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 더 쉽게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이 쉽게 만들지 않은 것을 사람이 쉽게 만들려고 할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자식의 관계에서 이해를 도울 수 있는 한 가지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 그렇게 말 안 듣겠거든 나가!’라고 말할 때 나가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렇죠. 나가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그리고 설사 자식을 집에서 내보내더라도 현관문은 열어둡니다. 여기에는 더블 의도가 있습니다. 입에서 하는 말은 분명히 ‘나가!’이지만 그 말만 가지고 부모의 뜻을 파악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죠. 실제 의도는 나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실제 의도는 정신 차리라는 것이고 돌아오라는 것이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괴롭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은 하나님에게 괴로운 일이 될 수 있어요. 그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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