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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생의 쓴 물 앞에서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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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쓴 물 앞에서 (출 15:22~27)


사람은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봅니다.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것이라도 서 있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다르게 봅니다. 서 있는 자리에서도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보고 싶은 것만 봅니다. 똑같이 집안일을 하는 것일지라도 사위가 집안일 하는 건 기특하고 아들이 집안일 하는 건 못난이입니다. 딸이 딸 낳으면 살림밑천이고 며느리가 딸 낳으면 그래도 듬직한 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들이 살찌면 부은 것이고 사위가 살찌면 딸이 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며느리는 남편에게 쥐어 살아야 하고, 딸은 남편을 휘어잡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똑 같은 사건이라도 어느 편에 서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든지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뭐든지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희망지수가 낮고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희망지수가 높습니다. 어떤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행복하게 살 가능성이 높겠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학생 150명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 보았답니다. 

설문지를 통해 생각을 알아보았는데 “나는 가치 있고 능력 있다. 좋은 일이 있어나고 미래는 밝을 것이다.”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희망지수가 높았다고 합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 나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거야, 내 미래는 흐릴 거야”라고 자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아이들은 희망지수가 낮았답니다. 일주일 뒤 희망지수가 높은 아이들 5명과 보통인 아이들 5명을 선발하여 과제를 주었습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발을 묶게 한 후 상자를 주고 20분 안에 10층탑을 쌓게 만들었습니다. 평균 아이들은 서로 불평하고 잘 쌓지 못했습니다. 어느 정도 쌓자 실험자가 쌓은 탑을 일부러 무너뜨리고 어떻게 하는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원망하며 포기하며 다시 쌓지 않았습니다. 결국 2층만 쌓았습니다. 

그런데 희망지수가 높은 아이들은 신속하게 힘을 모아 쌓아 올렸습니다. 실험을 진행하는 사람이 실수인체 하며 역시 같은 방법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이들은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최선 다했습니다. 결과에 만족해하며 타인을 배려하였습니다. 다시 쌓아 올렸습니다. 왜 똑같은 아이들인데 어떤 아이는 희망지수가 높고 어떤 아이들은 희망지수가 낮을까를 실험해 보았습니다. 일곱 아이와 일곱 엄마를 선발하였습니다. 공을 바구니에 넣는 게임을 시켰습니다. 아이는 눈을 가리고 공을 던지면 엄마가 위치 알리며 공을 바구니에 받게 하였습니다. 결과는 다섯 팀은 12개 이상 넣었고 두 팀은 7개 밖에 넣지 못했습니다. 

왜 그런 차이가 생겼는가를 녹화된 비디오를 통해 보니 7개 밖에 넣지 못한 팀은 어머니가 게임하는 동안 내내 계속 “안 돼, 아니”라는 부정적인 말을 계속 반복하였습니다. 공을 많이 넣은 아이들의 어머니는 “잘하네, 괜찮아” 등이라고 반복하여 말했습니다. 엄마의 긍정적인 말이 아이들에게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안 된다. 틀렸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해 줄 때 아이들은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매사 부정적인 것이 강한 것 같습니까? 긍정적인 것이 강한 것 같습니까? 만약 우리가 오늘 성경에 나오는 마라에 있다면 어떤 반응을 하였겠습니까? 모세의 지시에 따라 광야 길을 3일이나 갔는데 물이 없는 것입니다. 목마름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3일 째 되던 날 마라에 도착하였습니다. 물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은 쓴 물이라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가 만나면 어떤 반응을 하겠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면 어떻게 했을까요?

1. 부정적인 해결방법-원망

24절 보십시오. 모세에 대하여 원망하였습니다.

1) 원망(怨望)합니다(24). ‘불평하다’, ‘수군거리다’라는 뜻입니다. 불신과 배은과 배역을 포함하는 악한 반역의 심리를 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모세를 향하여 수군거렸다는 말입니다. 3일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을 찬양했던 입술입니다. 그 입으로 모세를 수군거리며 불평하였습니다.

2) 원망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이렇게 잘 못된 것이 상대방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24) “백성이 모세에 대하여”라고 원망합니다. 모세가 광야로 인도하였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공부를 못한 것은 어머니 책임이라고 생각하면 어머니를 원망합니다. 매출이 안되는 것은 영업부장의 책임이라고 하면 영업부장을 원망합니다. 교회가 부흥안되는 것은 목사님의 책이라고 생각하면 목사님을 원망합니다.

② 욕구를 충족할 수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24)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라고 말합니다. 마실 물이 없다는 것입니다. 목표를 이룰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면 원망합니다. 

③ 미래에 준비된 더 좋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27) 그들은 10km 앞에 오아시스 엘림이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준비해 놓고 있으신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거기 물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었습니다. 장막을 치고 안식할 수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마라'에서 `엘림'간의 거리는 낙타로 2시간 거리라고 합니다. 그들은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였습니다.

3)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① 우리가 원망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민 14:27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②원망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빌 2: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스라엘 사람들 3일 전에 홍해를 건너는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얼마나 그 때 춤을 추며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까? 그런데 같은 입술로 조금 어려우니까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물이 피가 되는 재앙,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짐승들이 죽는 재앙, 피부병의 전염, 우박 재앙, 메뚜기 재앙, 흑암의 재앙, 장자가 죽는 재앙을 몸소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원망합니다. 우리 연약한 인간들의 모습니다. 

컴퓨터를 통하여 원망이라는 말이 얼마나 성경에 기록되었는가를 우리말 개역성경을 통하여 검색해 보았습니다. 신구약 합하여 40회가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가장 먼저 원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오늘 본문입니다. 그리고 원망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나오는 성경이 바로 이 출애굽 과정이 기록된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에서 무려 20회나 나옵니다. 출애굽기는 천국까지 가는 우리 인생의 여정을 보여 줍니다. 홍해를 건넌 것을 세례 받는 것으로(고전 10:2)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인생의 과정 속에 다양한 쓴 물을 만납니다. 개인 마다 마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때로는 가장 가까운 사람이 마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질명이 마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 안됩니다. 자녀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가정이 화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교회가 부흥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오히려 손해만 볼 수도 있습니다. 이 때 누구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를 원망하고 남편을 원망하고 아내를 원망하고, 자녀를, 동료를, 동업자를, 교회를, 교역자를, 지도자를, 심지어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군대며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으로 해결될 문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지난 주 월요일 동아신학교 세미나가 있어 갔는데 어떤 목사님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찜질방에 가면 자기 목사님 험담하고 자기 교회 욕하는 사람들은 교인들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절 다니는 사람도 스님들 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당 다니는 사람들도 자기 신부님 원망하지 않고 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예수 믿는 교인들은 자기 교회 목사 원망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말하시는 목사님을 보았습니다. 이유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잘 알 것입니다. 인간이 연약하기 때문에 쉽게 원망합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어떤 자리에 설 것인가에 대하여 원칙을 세워놓고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어떤 문제를 만나든지 첫째, 하나님 편에. 둘째, 말씀 편에. 셋째, 교회 편에 서자는 것입니다. 부정적이지 말고 긍정적으로 접근하자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비난하면 그것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누가 말씀에 위배되는 것에 동의를 구하면 동의하지 않습니다. 누가 교회를 파괴하는 비난을 하면 그의 편에 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인생의 쓴 물 앞에서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2. 긍정적으로 해결하는 방법(25)

모세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합니까?

1) 기도합니다.(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똑같은 문제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똑같은 입술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납니다. 이것이 지도자와 백성들의 차이입니다. 매사 원망하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부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것이 실패하는 사람과 성공하는 사람의 사소한 차이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사람과 사람 편에 서 있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쓴 물이 다가오고 장애물이 다가오면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을 보며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 책임이냐고 이유를 뭇는 것이 아닙니다. ‘왜’라는 질문보다는 ‘어떻게’ 문제를 풀 것인가에 관심을 가집니다. 누가 잘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접근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힘이 연약하니 기도하라는 하나님의 싸인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망할 힘과 원망할 입술이 있다면 그 입술로, 그 힘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어릴 때부터 귀신들려 벙어리가 되고 발작을 하면 거품을 품고 경련을 하는 아이를 만났습니다. 심지어는 불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속에 뛰어 들기도 하는 아이입니다. 이 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마침 예수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그를 낫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귀신을 쫒아 내지 못하였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어떻게’에 집중합니다. 

“막 9: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자녀의 질병으로 자신의 질병으로 가족의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원인이 누구에 있느냐고 집착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원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야고보서 5장 1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 5: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어떤 사람 때문에 손해 보고 어떤 사람 때문에 고통당한 사람이 있습니까? 도저히 용서해 주고 십지 않은 원수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원망하지 마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 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환란을 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에 낙심하며 원망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마 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롬 12: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빌 4:6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러면 기도하고 나면 다 끝나는 것입니까? 

2)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시행합니다.(25) 

기도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25절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원망하고 있는데 나무를 집어넣는다고 쓴 물이 단물로 변하겠습니까? 이성적 판단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순종하여 그것을 물에 던졌습니다. 기도하였으면 확실히 믿고 시행하여야 합니다. 안 이루어질 것 같고 이해되지 않을 것 같지만 믿고 행하면 됩니다. 

이미 모세는 수많은 경험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따를 때 10가지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3일 전 홍해를 가를 때도 지팡이를 들라고 할 때 들어 믿음의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참여한 사람보다 직접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잘 압니다. 참여한 사람은 실제적으로 잘 모릅니다. 혜택만 볼 따름입니다. 믿음의 기적, 모험적 신앙의 환희를 잘 모릅니다. 말씀을 믿고 나아가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한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리고성을 돌라고 하면 무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약속 믿고 도는 것입니다. 어머니 너 슈퍼에 가서 라면 사오면 용돈 5천원 준다고 하면 그 말 믿고 해 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약속을 100% 믿고 실행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쓴물이 단물로 변하여 역사가 나타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라고 약속하면 그대로 살아 보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1-3)” 그렇게 살아 보는 것입니다. 전하라고 하고 전해보는 것입니다. 시기하거나 비난하지 말라고 하면 그대로 살아보는 것입니다. 용서하라고 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면 사랑해 보는 것입니다. 614개의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믿고 행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갖가지 인생의 쓴 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3) 기도하고 믿고 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경하는 하나님은 돌아가신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 속에 갇혀 오늘 우리 현실 생활에 나올 수 없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① 말씀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6).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 질병을 하나도 내리지 아니하리니” 말씀만 하고 약속을 시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람은 약속하고 안 지키는 사람들이 있지만 하나님은 말씀하면 그 말씀을 꼭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약속을 다 성취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초림의 약속 부활의 약속, 재림의 약속을 반드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성취하십니다. 인간의 약속은 믿기 힘들지만 우리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하나님이 지시한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그대로 믿고 행하면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능력을 체험받을 수 있습니다. “눅 1: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② 치료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6).

26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쓴물에 나무를 넣어 단물로 변화시킨 하나님은 치료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물을 고쳤듯이 우리의 영혼의 병과 마음의 병, 육신의 병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교만하고 자각증상도 없이 끊임없이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나무가 무엇을 모형적으로 보여주겠습니까? 홍해를 가르게 한 모세의 나무 지팡이, 법궤에 들어 있는 지팡이, 구리뱀을 달아 올린 나무, 그래서 그 나무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다 죽지 않고 치료되게 하는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십자가입니다. 

쓴물을 단물로 변화되게 하는 나무가 무엇을 상징하겠습니까? 이 ‘마라’가 상징적으로 사용된 곳은 룻기에 나옵니다. 나오미가 흉년이 들어 좀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다 잃었습니다. 결국 고향으로 돌아올 때 사람들이 나오미가 돌아오자 나오미가 왔다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행복’이라는 뜻입니다. 

이 때 나오미는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로 불러 달라”고 하였습니다. ‘쓴 자, 불행자’라고 불러달라는 것입니다. 나오미의 이 마라, 인생의 쓴 물을 단물로 치료해 준 자가 누구입니까? 유력한 자 보아스입니다. ‘기업무를 자’ 보아스입니다. 바로 보아스는 예수님의 모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병든 영혼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상한 감정을 치유해 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질병을 치유해 주십니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입었나니(벧전2:24).”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치료가 임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영혼이 치유 받아 영생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병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쓴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달게 하지 못할 쓴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오셔서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을 친히 담당하였습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도 치료하였습니다. 열 두 해 혈루증을 앓았던 여인도 고쳐주었습니다. 중풍병자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려 주었습니다. 

“사 58:8 그리하면 네 빛이 아침같이 비췰 것이며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말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③ 우리를 훈련시키기 위하여 테스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5). “그들을 시험하실 새” 모세는 40년간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일을 잘 알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종된 애굽에서 기적으로 구출하였습니다. 그리고 홍해를 기적으로 갈라 저들을 애굽에서 완전히 결별시켰습니다. 그리고 저들을 마라의 쓴물로 시험(연단; test)하였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멸망으로 이끌기 위해 시험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우는 사자처럼 위협하기도 하고 광명의 천사로 나타나 가장하여 유혹합니다. 미혹의 시험(temptation)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성화시키기 위해 마침내 복을 주기 위해 훈련시킵니다. 시험(test) 곧 연단하십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거절당하는 쓴 물을 맛보았습니다. 존중받지 못하는 쓴 물을 맛보았습니다. 죄인이 되도 비판적, 부정적 평가를 받는 쓴 물을 맛보았습니다. 인신매매를 당하는 쓴 물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하여 마침내 총리가 되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을 보십시오. 야곱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개인마다 용광로를 통과하게 했습니다. 

금을 품고 있는 돌이라고 그대로 버려지면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련소 용광로에 들어가면 금으로 빛나는 것입니다. 버려진 돌도 조각가의 손에 붙들려 조아지고 부서지면 위대한 작품이 되는 것입니다. 비 오는 날도 구름 위를 오르면 파란 하늘이 있습니다. 감은 서리를 맞으면 맛은 더 깊어집니다. 바람 불어야 연은 높이 올라갑니다. 비온 후 새순은 더욱 잘 자랍니다. 햇빛이 내리면 짙은 안개도 걷힙니다. 구름은 해를 오래도록 가리지 못합니다. 바람 불면 구름은 바람 따라 흘러갑니다. 어두운 밤일수록 눈을 들면 별이 더 잘 보입니다. 어두울수록 등대는 더욱 뚜렷이 보입니다. 골이 깊으면 메아리는 더 크게 울립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위대하게 쓰시려면 훈련을 시켜 쓰십니다.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훈련을 시킵니다. 쓴물을 만날 때 절망하지 마십시오. 쓴물은 기회일 뿐입니다. 시편기자는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7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롬 5: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④ 우리 앞길에 엘림을 준비해 놓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27). 
우리는 앞길을 모르기 때문에 조금만 어려움이 와도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아이들이 어머니가 공부를 시킬 때 놀지 못하게 하고 공부시킨다고 원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락을 하고 싶은데 오락만 하면 결과가 결국 어떻게 나온다는 사실을 안 부모는 그것을 막습니다. 아이들은 당장 즐기는 것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망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다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전능하신 분입니다. 좋은 것을 예비하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엘림이 준비되어 잇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엘림을 우리에게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 우리는 고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신앙 생활하다 보면 가끔 인생의 마라를 만날 때가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는 영광과 기쁨도 있지만 마라의 쓴 물도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애매하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의 늪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될 수도 있습니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눈물 흘릴 수도 있습니다. 자녀의 교육문제로 고민의 늪 속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유혹의 올무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오해와 비난을 받을 때도 있습니다. 그 때 백성의 자리에 서겠습니까? 모세의 자리에 서겠습니까? 인생의 쓴 물 앞에서 원망하며 불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멈추지 말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반드시 성취해 주실 것입니다. 

여호와 라파, 치료하시는 하나님이 쓴 물을 단물로 치료시켜 주실 것입니다. 쓴 물을 통해 훈련시켜 우리를 더욱 하나님의 용사로 성숙시켜 주실 것입니다. 결국 엘림의 오아시스를 우리 앞에 펼쳐 주실 것입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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