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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릴 것 (전 3:6~8, 막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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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릴 것 (전 3:6~8, 막 9:47)


오래 전 어느 텔레비전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습니다. 캐나다의 어느 가정에서 석 달 동안 생활 쓰레기를 버리지 않아서 생기는 해프닝을 모은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집이라고 하지만 석 달 동안이나 쓰레기를 버리지 않은 집은 지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인생이란 쌓아두는 데가 아니라 버리는데 행복이 있습니다. 인간은 가져서 만족하기보다 버려서 행복한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반생은 모으면서 살고 반생은 버리면서 산다고 합니다. 버릴 줄 알아야 반생이 편안합니다. 신앙인은 전생을 모으면서 살고, 동시에 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죽을 때까지 모아야 하고 버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신앙인은 배우고 모아야 하며, 버리고 없애야 합니다. 
  
어떤 할머니가 짐을 잔뜩 가지고 걷고 있었습니다. 오른 손에는 잘 다듬어진 돌을 쥐고 있었고, 왼손에는 예쁘게 깎은 판자를 쥐고 있었고, 머리에는 큼지막한 호박을 이고 있었고, 어깨에는 줄에 꿰어진 보자기가 덜렁거리고 있었습니다. 길을 지나던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할머니, 돌을 내려놓으시지요.” “내려놓아도 돼?” 할머니는 먼저 돌을 내려놓았습니다. “왼손의 판자도 내려놓으시지요.” “호박도 내려놓으시지요.” “보자기도 내려놓으시지요.” 할머니는 그것들을 내려놓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것을 다 내려놓아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버려도 아무 문제없는 것을 버리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숫자 0을 보세요. 다른 숫자에 아무리 0을 더해도 더해지질 않습니다. 0을 다른 숫자에 곱하면 다른 숫자까지 영으로 만듭니다. 버리고 내려놓으면 편한데 더하려고 하니 힘이 들고, 더하려고 하니 싸움이 생깁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편한데 말입니다. 
  
마태복음 16:25에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잃으면 찾고, 우리의 것을 버리면 얻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적 논리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 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면 인정받습니다. 자신을 버리면 얻습니다. 이것이 제자의 도입니다. 
  
믿음이란 자기를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을 버리는 것입니다. 왜 버리지 못합니까? 세상에 눈이 어두워져 버리지 못합니다. 이사야 44:18에는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적 교만으로, 불신앙으로,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에 버리지 못하고 움켜쥐기만 하고 빼앗기만 하다가 결국 다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롯의 아내가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 성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아쉬움, 자신의 재물에 대한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합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보세요. 세상 즐거움에 취해 노아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우리는 찬송합니다. “세상 즐거움 다 버리고, 세상 자랑 다 버렸네.”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신앙 때문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님이셨던 생스터목사님이 한 번은 어린 소녀의 병상을 심방했습니다. 이 소녀는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병원에 가자 소녀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하나님이 내 눈을 빼앗아 가려고 해요”라고 했습니다. 이 때 목사님은 “얘야, 빼앗기지 말고 버려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빼앗기기 전에 드리세요. 빼앗기기 전에 버리세요.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를 가질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버릴 것이 있습니다.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방해가 된다면 무엇이든 버려야 합니다. 43절에는 “만일 손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이라고 합니다. 45절에는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이라고 합니다. 47절에는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이라고 합니다. “찍어버리라”, “찍어버리라”, “빼어버리라”. 성경은 과감하게 다 버리라고 합니다. 잘 버리라는 말입니다. 버리기를 잘 해야 하나님의 나라 사람입니다. 영생의 길, 하나님의 나라의 길은 버려야 얻는 길입니다. 잃으면 얻는 길입니다. 잘 버려야 잘 얻습니다. 
  
우리 몸의 일부를 버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일전에 TV에 보니 77세 된 할머니가 한국전쟁 때인 22살 때에 포탄 파편에 맞아 코가 완전히 없어져 코로 숨을 쉬지 못하고 평생을 마스크를 하고 살았다고 합디다. 꽃다운 나이에 얼굴을 잃어 평생을 얼마나 고통이 컸겠습니까? 내 신체의 일부를 잃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으리라 봅니다. 하물며 내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려면 가장 귀한 것을 버리는 고통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12:18에는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것을 주를 위하여 버렸다고 합니다. 그는 배와 그물과 가적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다는 것은 버림으로 시작되는 고통의 길입니다. 
  
이미 다 버리고 따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29에서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이라고 합니다. 계속해서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가족도 버리라고 합니다. 당시로서는 비난 받을 일을 재촉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위기대처능력이 전혀 없었습니다. 

마가복음 14:50을 보세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 자들이지만 급하게 되니 예수님을 버리도 도망갔습니다. 이미 자신의 것을 다 버렸다고 하지만 절대로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8-9 상반절에는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때문에 내 지식을 버립니다. 그리스도를 얻는다면 모든 것을 다 버려도 괜찮습니다. 
  
‘야고보의 순례길이라고 알려져 있는 ‘까미노 데 산티아고’, 산티아고로 가는 길이 있습니다. 프랑스의 생장 피드포르에서 스페인 북부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가는 순례의 길입니다.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길을 갔다는 전승이 남아 있는 800킬로미터의 긴 여정입니다. 지금도 이 길은 수많은 사람들이 순례의 길로 걷고 있습니다. 이 길을 걸은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버려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버리면 가벼워집니다. 버려야 걸을 수 있습니다. 버리는 것이 없이는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성경에는 버리라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음란을 버리라고 합니다.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라고 합니다. 거짓을 버리라고 합니다. 죄악을 버리라고 합니다. 정욕을 버리라고 합니다. 가증한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얽매기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라고 합니다. 더러운 것을 버리라고 합니다. 헛된 일을 버리라고 합니다. 버리라고 하는 것은 모두 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은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그리스도를 본받아’에서 이렇게 씁니다. “주님, 제가 얼마나 자주, 어느 부분에서 자신을 버려야 합니까?” 주님께서는 “항상 매 순간마다 큰일뿐만 아니라 작은 일에서도 너 자신을 버려라. 내가 바라는 것은 어떤 예외도 없이 모든 것에서 너 자신을 버리는 것이다”. 주님을 따는 우리는 다 버려야 하지만 온전히 버릴 것은 내 자신입니다.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 외에 모든 것은 버려도 괜찮고 버려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가 아니라 영혼으로 들어갑니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합니다. 영원하며 종말론적 생명에 들어가는 일은 너무 중요합니다. 영생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인 죄를 제거하기 위하여는 육체적 버림이 가능합니다. 요한복음 6:63에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고 합니다. 무익한 육 때문에 유익한 영을 죽이지 말라는 말입니다. 
  
저는 늘 마음속에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부부도 없다는데 그러면 제 아내와는 어떤 관계일까, 장애를 가진 사람은 어떤 상태가 될까, 내 작은 키는 그대로일까,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젊은 모습일까 늙은 모습일까, 이런 궁금증들이 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다 육체적 관심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육체적 관심을 초월할 것입니다. 영적으로만 보일 것입니다. 장애가 장애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키가 작은 것이 작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늙은 것도 늙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육체는 영혼의 용기나 영혼의 집 이상의 것입니다. 몸이 없으면 우리도 없습니다. 육체를 헬라어로 부정적 의미로는 ‘사륵스’(sarx)라고 합니다. 선하거나 중립적 의미로는 ‘소마’(soma)라고 합니다. 선한 의미의 ‘소마’라도 영혼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육체가 아무리 선해도 육체는 죄를 짓고 한계를 가진 육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소마’도 무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중요하지만 육체로만 산다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육체로만 산다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6:3에는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고 합니다. 영이 육체가 되면 죄가 됩니다. 영으로 살지 않고 육체로만 사는 것이 죄입니다. 
  
우리 사회는 온통 몸짱, 얼짱 사회입니다. 우리 몸을 식민화합니다. 한국의 외모지상주의는 2000년대로 진입하면서 새로운 산업을 탄생시켰습니다. ‘뷰티 산업’이라고 합니다. 외모를 위한 운동이나 건강이나 식이요법의 발달입니다. 육적으로, 외모로는 아주 발달했지만 영적으로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영혼은 우리가 소유한 것이 어떤 것이 아니라 그것은 우리 자신 그 이상의 어떤 것입니다. 영혼을 잘 보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 눈을 주셨습니다. 만일 한쪽 눈을 잃는다 해도 우리에겐 다른 눈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데 아무 지장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단 하나뿐이므로 만일 영혼을 잃으면 우리는 영원히 파멸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세요. 사울은 당대에 얼짱, 몸짱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사울같이 잘 생기고 건장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육적으로 보면 사울은 준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잘생긴 외모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나사로와 부자는 육적으로는 상대가 안 되는 신분이었습니다. 나사로는 거지였습니다. 누가복음 16:22에는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라고 합니다. 죽었는데 어떻게 들어갑니까? 육체로는 못 들어가지만 영혼이 들어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육체로는 절대로 못 들어갑니다. 육체로 가는 나라 아니므로 육체를 버려야 합니다. 육체를 잘라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육체와 영혼을 함께 가지고 계셨습니다. 육체를 가지고 계셨으므로 육체적 제한에 사셨습니다. 때로는 주리셨습니다. 매를 맞고 아파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의 영체는 이 모든 것을 초월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육체는 훌훌 벗고 영혼으로 영적 몸인 영체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혼으로, 영적 몸으로 부활하여 살 것이므로 육체적인 것을 과감히 벗고, 자르고, 버리고 살아야 합니다. 
  
전도서 3:6에는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라고 합니다. 버릴 때를 잘 알아야 이것이 지혜입니다. 항해할 때 배의 침몰을 막기 위해 짐을 바다에 버리는 것같이 버리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성경에는 요나서에서 바다가 풍랑이 일어나자 바다에 화물을 모두 버립니다. 사도행전 마지막에는 바울이 로마로 갈 때에 ‘유라굴로’라는 태풍이 불었습니다. 선장은 그 아까운 화물을 바다에 다 버립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버리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생명이나 더 큰 목적을 위해 버리는 것은 지혜입니다. 영혼을 위해 육체를 버리고, 없애는 일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결론 

올해도 풍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올해는 정말 큰 자연재해가 없고 태풍이나 큰 홍수도 없었습니다. 물난리라고는 북한이 황감댐의 물을 방류하지만 않았더라면 큰 탈 없이 지날 뻔 했습니다. 벼도 과일도 다 잘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잘 되다보니 수매가가 내려 농부들이 화가 났나 봅니다. 그런데 과일을 보면 조금이라고 상한 것은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상한 것은 상품 가치가 없어서 버리기도 하지만 아깝다고 버리지 않으면 모두를 상하게 하기 때문에 버려야 합니다. 버리면 다른 것을 살릴 수 있습니다. 잘 버릴 줄 알아야 잘 살립니다. 
  
어느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가벼워져야 한다. 날고 싶다면 깃털처럼 가벼워져야 한다. 바람에 맞서지 말고 거부 하지도 말고 내 몸을 자연스레 맡겨야 한다. 무겁다고 생각하면 버려야 한다. 버렸다고 생각한 것보다 한참 더 버려야 한다. 내 안은 항상 많이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버린 게 아닌 잠시 놓아둔 것. 정말로 날고 싶다면 버리는 연습을 하자. 이내 늙어 하늘로 날 때 맘 편히 갈 수 있도록 일상 속에서 하나씩 둘씩 내 것을 버리는 연습을 하자. 원래 그것은 내 것이 아니었으므로.” 
  
반생은 버리며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버려야 할 때가 되신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 그래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버려야 할 사람들입니다. 잘 버리는 길만이 잘 사는 길입니다. 버려야 들어가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버릴 것을 잘 버리므로 얻어야 할 하나님 나라를 얻고 가볍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날아올라가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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