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박국의 절규와 노래 (합 3:16~19)

  • 잡초 잡초
  • 430
  • 0

첨부 1


하박국의 절규와 노래 (합 3:16~19)


우리들이 살아가다가 보면 상상하지도 않은 어려움이 엄습할 때가 흔히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도 교회도 회사도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때를 만나게 되면 누구나 다 당황하게 되고 낙심하고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 속히 응답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암담함이 오래가고 고난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 수순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불신앙이 고개를 들게 되고 신앙에 회의감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에 반드시 이 같은 태풍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관하기도 자살하기도 합니다. 본문을 보면 하박국이 우리들이 당하는 똑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하박국은 이름이 특이 합니다. 그래서 “호박국”이라고 읽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박국은 레위지파 자손으로 유다의 선지자였습니다. 본서는 하박국이 활동하던 시기인 BC605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전해집니다. BC 609년에 애굽군대가 유다를 침략하여 위협하고 왕을 죽이고 모든 백성들은 무서워할 때입니다. 본문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그런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박국서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신앙문제들을 제시하고 또 그 질문에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박국이 몇 가지 질문을 합니다. 

“왜 불의한 자가 형통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본문에서 “어떻게 불의가 선보다 득세할 수 있습니까(1:1-4)하고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왜 그들을 심판하지 않습니까?”하고 항의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속이 상할 때도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피해를 보고 그래서 낙심하고 실패하고 일방적으로 당하고, 불의자들은 온갖 불의를 자행하고 그래서 승승장구하고 웃으며 이득을 보고 재미를 보며 사는데도 하나님은 보시기만 합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속이 상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면 항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나도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심판이 가까웠다고 외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요나는 항변합니다. “왜 우리와 상관도 없는 이방 백성들이 사는 니느웨에 가서 전도하라고 그러십니까.” 이해가 안 되면 항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서의 주제가 “왜 불의한 자가 형통하는가”입니다. 공의가 사라지고 악인이 의인들을 등쳐먹는 이 세상에 대한 항변입니다. 

그때 의인들은 낙심하고 하나님의 무심함에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죄를 짓는 사람은 잘 비켜가고 잘도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양심을 지키던 사람이 어쩌다 한번 죄를 지으면 걸립니다. 뇌물을 많이 받아먹던 사람은 잘 안 걸리는데 주저하다가 어쩌다 한번 먹은 사람들이 걸립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심정이고 하박국의 심정입니다.   

어린 영아들이 머리에 주사를 꽂고 누워있는 모습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납니다. 저 아이들이 무서운 병에 걸려 머리가 다 빠진 채 무서운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 집니다. 그 아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말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무서운 암에 걸려 죽어갑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선하게 살아간 사람들인데 그런데 독한 사람들, 악한 사람들은 몸도 건강합니다. 

그래서 약이 오릅니다. 더 약이 오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실패를 줄여주고 건강을 주시고 고통을 덜어주시면 안되는가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좀 세상에서 형통하고 성공하게 해 주시면 안 됩니까. 그런다고 하나님이 손해나는 것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때는 분노가 일어나고 화가 치밀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박국의 부르짖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질문한 내용입니다. “왜 불의한 자가 형통합니까?” 그 질문에 성경은 의미 있는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대답이 2장4절에 나오는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이 로마서 1장17절에서, 갈라디아서 3장11절에서, 히브리서 10장38절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16세기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이 말씀이 모토가 되었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 말은 형통이나 건강한 것이 반드시 복이 아니라 의롭게 사는 것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형통이 없어도, 건강이 없어도, 부를 누리지는 못해도 의롭게 살아가는 그 의로움의 삶 그 자체가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더러운 갈대아인을 시켜 하나님 백성에게 매질을 하십니까” 

하박국 선지자가 3장16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들었으므로 내 창자가 흔들렸고 그 목소리로 인하여 내 입술이 떨렸도다.” 하박국이 갈대아 군대가 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이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시켜 유다인들에게 매질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박국 선지자가 두 가지 분노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는 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하는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그때 심정이 창자가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우리들이 환장했다고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입술이 떨리고 뼈가 썩는 것 같고 온 몸이 떨려 왔다고 했습니다. 또 하나 분노는 “이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고 왜 갈대아인을 시켜 매질을 하십니까?”라는 분노입니다. 그 말은 “손자가 잘못했기로서니 똥 뭍은 막대기로 때릴 수 있느냐” 그 말입니다. 즉 “ 이 백성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해도 하나님의 백성인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항변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불평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하박국의 항변은 다만 자신들의 비참함을 토로하는 항변입니다. 그래서 그 심정을 고백하기를 1장14절에서 “주께서 어찌하여 사람으로 바다의 어족 같게 하시며 주권자 없는 곤충 같게 하시나이까”하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세 가지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불의한 자가 왕성하고 형통하고 잘된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거나 의심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도 형통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면 안 됩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할 사실은 불의한 자는 언젠가 한꺼번에 책임을 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서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돼지는 추석 때가 다가오면 더 잘 얻어먹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돼지는 신날 것 하나 없습니다. 추석날 잡아먹히기 위해서 살찌우려고 더 잘 먹이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 다른 돼지들이 그것을 부러워한다면 넌센스입니다. 불의는 영원히 지속되는 법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의인이 고난이 많은 이유”입니다.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간섭하고 매를 들고 징계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간섭도 없고 매도 없습니다. 

길에 버려진 가출한 아이들에게는 누구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간섭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좋아 보인다면 큰일입니다. 그 아이들이 내 사랑하는 자식이라고 한다면 그냥 보고만 있겠습니까. 세 번째는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에게 이방인들을 시켜 매질할 수 있느냐”는 항변입니다. 유다백성들이 타락하고 죄를 짓고 불의를 자행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지체 없이 갈대아인들을 시켜서 유다 땅에 쳐 들어와 마구잡이로 잡아갔습니다. 

그 갈대아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사납고 성급한 백성”이었고 무력으로 점령하고 남의 소유를 빼앗는 자들(6)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렵고 무서운 잔인한 자들이었으며 그들 스스로가 법이요 권위였습니다(7). 또 그들은 “먹이를 물어 죽이는 짐승 같은 사람들(8)”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유다백성들에게 이 무서운 갈대아인들을 사용해서 유다백성들을 징계하셨습니다. 그 모습에 하박국 선지자는 외치기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라는 항변합니다. 

이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우리들이 아이들을 키우다가 발생하는 때를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럽고 보배와 같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잘못을 저지릅니다. 그러면 그 아이들을 때릴 때 금박을 입힌 막대기를 준비했다가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지금 열이 뻗친 부모가 아이를 때릴 때 빗자루, 파리채, 부지깽이를 잡히는 대로 들어 때립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주로 빗자루와 부지깽이로 맞았습니다. 그렇게 때리고는 그 무기를 잘 놓아둡니다. 다음에 또 사용하려고 말입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이 유다백성을 때리시는데 갈대아인을 보내 때릴 수 있느냐고 항변했는데 하박국은 그런 하나님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박국이 회의감 

하박국은 한편으로 세상에 불의가 가득하고 불의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 왜 하나님께서 그 불의한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항변하면서 의문을 가집니다. 그들은 죄를 밥 먹듯 하는데도 더 잘살고 더 흥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들을 보고만 있는가 하는 의문 때문에 속상이 상해 있습니다. 더 속상한 것은 내 백성이 죄를 지었다고 그 더러운 이방인 갈대아인들을 시켜서 매질하시는 이유입니다. 왜 하필 하나님이 직접 때리시지 그 더러운 이방인들을 시켜서 때리시는가 억울했습니다. 

그리고 하박국이 지금 더 참지 못하는 것은 지금 마음이 상해서 이렇게 항변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한마디 말씀이 없고 계속 침묵하고 계신 것입니다. 당장 벼락을 내리시던 하나님이 지금은 웬일인지 침묵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1장13절에서 탄식합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차마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를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는데도 잠잠하시나이까.” 

지금 하박국은 절망이 절정에 다다른 심정으로 외칩니다. “당신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당신은 지금 이 백성이 당하고 있는 이 참담함을 보고 계십니까?” 이 하박국의 심정이 곧 우리의 심정입니다. 우리들도 얼마나 답답할 때가 많습니까. 지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노조원들이 밖에서 떠들고 확성기로 큰 소리로 노래를 틀어놓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두려워서도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때 벼락은 치지 않더라도 스피커라도 고장이 나도록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할 짓 안할 짓 다하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때 신앙인들이 무력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이 외친 것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고 계십니까? 왜 불의한 자를 심판하지 않으며 당신의 백성이 죄를 지었다고 이방인들을 막대기로 사용하여 치시는 것입니까?” 

이 하박국의 심정을 이해하십니까. 그런다고 하나님이 금방 나타나셔서 “나 여기있다”하실 하나님도 아닙니다. 고로 신앙인들은 문제를 깨달아 알기까지 모두 이런 고민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최대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엔도 슈샤꾸의 침묵이라는 책을 보면 이 문제를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고문 받고 마침내 200도로 끓는 지옥 탕에 던져집니다. 던져질 때 마다 비명을 지르고 끓는 유황온천탕에 떨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페이라 선교사가 외칩니다. “당신은 도대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저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하고 절규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 가는데도 말입니다. 이것이 하박국의 외침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그런다고 하나님은 “나 여기 있다” 하고 나타나지 않으시고 여전히 오늘도 그렇게 침묵하고 계십니다. 그 점에서 우리 인간이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래서 때로 인내를 포기하기도 하고 변절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고 불신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박국이 그렇게 절규하다가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발견 

하박국이 낙심하고 분노하다가 마침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하박국이 깊은 경지에서 침묵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침묵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3:17~18).”고 했습니다. 

하박국의 마지막 신앙고백은 “그러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때로 후회도 불평도 불신도 원망도 하지만 그러나 마지막 고백은 “그럴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침묵 속에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19절에서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하고 노래합니다. 

여기 “사슴같이 뛰게 하사”라는 표현은 사슴은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기 때문에 높은 언덕에서 살다가 맹수가 오면 뒷다리가 길기 때문에 산위로 도망가서 맹수들을 쉽게 따돌립니다. 그래서 “나로 사슴같이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고“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하나님의 깊은 섭리의 경지를 이해하였다”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3장에 들어가서 노래합니다. 하박국의 이 노래를 보면 하나님을 향한 저항과 침묵과 노래가 별개가 아닌 하나 속에서 이루어지는 노래입니다. 깊으신 섭리를 개달은 후에 나온 고백입니다. 

예를 들면 설교자가 처음 풋내기 시절에는 설교할 때 원고에 매여서 앞을 보지 못하고 원고만 읽습니다. 그러니 설교가 얼마나 부자유합니까. 그런데 나중에는 유연해지고 자유해 집니다. 그만큼 성숙해 져서 그렇습니다. 음악도 마찬가지 입니다. 음악에도 단계가 있는데 첫 단계는 가사만 들리고 음악이 들리지 않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성가대원들이 초보 때는 악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둘째단계는 가사와 음악이 다 들리는 단계입니다. 

눈이 뜨이고 귀가 열려서 음악이 들려오는 단계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내 자신이 음악이 되는 단계입니다. 그 때는 나와 음악이 하나 되는 때입니다. 시인 T. S 엘리엇이 “음악을 깊이 들으면 듣는 것이 아니라 그대가 음악이 된다.”고 했습니다. 수 몽크 키드의 시구를 인용한 말인데 “보다 깊은 차원의 묵상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음악이 들리지 않고 내가 음악이 된다. 우리는 객석의 자리에 두고 나와 악단으로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하박국이 고난을 받고 악인들이 활보하는 것을 볼 때 황당해서 탄원하고 절박한 심정으로 절규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침묵해서 낙심하다가 결국 어느 순간 침묵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박국은 하나님에 대한 저항과 침묵과 깨달음이 하나가 되어 노래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내용이 3장17~19절의 노래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정익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