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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안에 박힌 쓴 뿌리 (엡 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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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박힌 쓴 뿌리 (엡 6:10~17)

 
가을입니다. 가을은 열매 맺는 계절이고 결실의 계절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때가 되면 결실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식물이나 동물 인간 등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명이고 존재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신앙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입니다. 지난주일 영적성숙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성숙은 그냥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고와 연단과 훈련과 자기단련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 분은 열심히 한번 해 보겠다고 각오를 피력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영적생활을 유지해 보려고 마음을 먹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도 하려고 마음먹고 주일도 잘 지키려고 다짐도 하고 헌신도 하고 봉사도 하고 수고도 하려고 마음으로 작정하고 다짐하고 계획도 세우고 이제 출발하려고 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부터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순간부터 내가 마음먹고 다짐한대로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짐하고 각오를 했더니 그때부터 내게 시작되는 것은 시험입니다. 그 시험은 신앙인에게 찾아오는 필수 과정입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생활이기 때문에 숫한 영적인 문제들이 도전해 오기 시작합니다. 생각도 하지 못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불화가 시작되고 더 바빠지고 연락도 없던 친구들로부터 연락이 와 산에 가자, 낚시를 가자, 골프를 치러 가자하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지고 흔들려 모처럼 다짐했던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경우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 여무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시험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알 것이 있습니다. 

건강한 나무나 뿌리 깊은 나무는 가물어도 강한 바람에도 잘 견디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 나무가 그렇게 뿌리가 깊어지고 단단한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모진 비바람들을 견디어 낸 결과입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뿌리 깊은 나무가 탄생된 것입니다. 나무가 한번 뿌리가 깊숙이 내리면 든든해집니다. 좀처럼 흔들림이 없습니다. 못도 깊이 잘 박힌 못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못이 얕게 박히면 흔들립니다. 이도 잇몸이 튼튼한 사람은 이가 건강하고 잇몸이 부실한 사람은 이 때문에 고생합니다. 

샘도 깊은 샘은 가물어도 좀처럼 마르지 않습니다. 지식도 깊은 지식은 흔들리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얕은 지식이 문제입니다. 누가 교만하냐 하면 조금 아는 사람입니다. 진정 깊은 지식자는 호들갑을 떨지 않습니다. 운동도 어느 경지에 이르면 까불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까불고 다니냐 하면 초단자들입니다. 웃기지도 않습니다. 진정 부자는 부자 티를 내지 않습니다. 검소하고 고급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 부자티를 내고 다니냐 하면 졸부들입니다. 그들은 온 몸에 걸치고 두르고 다닙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깊고 무게가 있고 깊이가 있으면 좀처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까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이 깊고 든든해 질 때 그 신앙에는 힘이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죄의 결박도 풀 수 있게 됩니다. 못된 습관도 풀고 악습도 과감히 끊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것은 내 노력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힘으로 하게 됩니다. 내 노력이나 내 결심은 별로 힘이 없습니다. 

깊은 신앙의 힘과 주님이 주시는 영적 능력이 나를 제어하게 하고 끊게 하고 극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전신갑주란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 입는 갑옷과 투구로 무장된 모습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연상하면서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말씀과 영적으로 무장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가슴에 의의 흉배를 붙이고 발에는 복음의 신을 신고 손에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성령의 검과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엡 6:13-17). 여기서 진리, 의, 복음, 믿음, 성령,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서신을 끝내면서 일반적인 복을 기원하고 평안을 기원합니다. 그리고 본서 말미에서는 영적으로 무장하라고 끝을 맺습니다. 영적 무장에서 몇 가지를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 

이 세상에는 전쟁이 많습니다. 국가 대 국가 간의 전쟁이 있습니다. 민족과 민족끼리 일어나는 내란과 분쟁도 있습니다. 이런 전쟁은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세계에도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은 영적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나를 사로잡는 생활 그것이 성령의 생활입니다. 고로 하나님의 영과 반대되는 악의 영들이 나를 그냥 놔두질 않습니다. 그래서 영적 싸움이 발생하여 내안에서 영적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삶에는 영적 전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전쟁의 대상 

싸움에는 언제나 대상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전쟁의 대상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은 싸움에서 가장 힘든 대상입니다. 나는 참 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그만큼 나는 묘한 존재입니다. 내 안에는 두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성적인 나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나입니다. 나는 그중 하나를 택하여야 합니다. 둘로부터 다 조종 받으며 살아가면 갈등이 심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본성인 나를 좆을 것이냐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는 나를 따를 것이냐 그중 하나를 선택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다음은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이 세상은 나로 하여금 끝없이 허황되게 하고 마음에 바람을 불어놓고 쾌락을 좆게 만들고 들뜨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모처럼 각오를 하고 다짐을 해도 세상은 나를 풀어지게 만듭니다. 유행에 물들게 하고 풍조에 휘말리게 하고 절제하고 인내하고 경건하려고 애쓰다가 결국 포기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생활 철저하게 하고 하나님 말씀을 계속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배에 와서 졸더라도 부지런히 예배에 참석하며 들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삶 자체가 믿음이 자라는 생활이기 때문입니다. 와서 열심히 들으면 내 안에서 동화작용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안에서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천국에 갈 것인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걱정하는 것은 내가 더 잘 믿어야 할텐데 라는 걱정에서 기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틀림없이 간다” 이런 사람은 위험합니다. 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과 싸우는 일이 가장 어려운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악한 영”입니다. 본문을 보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은 혈과 육이 아니고 악한 영들에 대항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악한 영들은 참 교활하고 간사한 영입니다(고후2:11). 이 악한 영들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위장하고 나타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물 냄새도 맞지 않는 금식을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 그 악령이 찾아와 시험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야 사탄의 시험에 걸리면 100%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기며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영적 전쟁의 장비필요 

영적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장비가 필요합니다. 그 장비는 무기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6장52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께서 체포당하실 때 순간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칼은 전쟁 때에 사용하는 장비입니다. 그러면 신앙인의 무기는 어떤 것입니까.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는 전신갑주의 무기입니다. 즉 진리, 의, 화평, 믿음, 구원, 말씀 등입니다. 그것이 전신갑주의 무기들입니다. 

살상하는 무기를 사용하는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옵니다. 북한이 핵을 만들면 누구든 앉아서 두려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여러 나라들이 또 더 강력한 핵무기를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낳습니다. 원수 갚음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고 그 자손이 또 원수를 갚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간단히 죽일 수 있는데도 죽이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렸는가 하면 하나님이 그를 처리하실 때까지입니다. 

그것이 완벽하게 승리하는 처리방법입니다. 기다리지 않고 인위적으로 사울을 해치웠을 경우 다윗도 또 다시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점을 다윗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진리와 의와 화평과 믿음과 구원과 말씀에 의존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이 사울을 아주 깨끗이 이기지 않습니까.       

영적 전쟁을 이기는 법 

그것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내 마음의 죄의 뿌리를 관리” 하는 일입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죄의 뿌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뿌리가 참 질기고 깊게 박혀있습니다. 그러다가 때만 되면 이 뿌리가 고개를 들고 나옵니다. 이 뿌리가 너무 깊어서 어느 순간 다 뽑혔나 싶은데 어느 순간 또 나타납니다. 내가 예수 안에 살면서 악습관을 고치고 손을 씻고 살아갑니다. 이제는 내 안에서 그 지긋지긋한 악의 뿌리가 뽑혔겠다고 생각하고 다 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내 안에 뿌리가 여전히 그냥 박혀 있습니다. 내가 믿음의 힘으로 억누르고 있으니까 조용히 고개 숙이고 있을 뿐입니다. 내가 그 뿌리를 억누르는 힘이 전보다 클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힘이 약화되어 내 마음에 성령의 의존도가 떨어지면 예외 없이 고개를 들고 일어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옛날 지독한 술꾼이었습니다. 그 후 예수를 믿고 술을 끊고 살아갑니다. 그 상태는 악습의 뿌리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 아니고 내 안에 여전히 그 뿌리는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러다가 양조장 근처를 지나갈 때는 바람에 풍겨오는 술 냄새를 맡게 되는데 그때 그 술 냄새가 아주 구수하게 그리고 회가 동하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왜냐하면 내 안의 그 악습관의 뿌리가 박혀 있다가 순간 고개를 들고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를 억누르는 힘이 강할 때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힘이 약해지면 슬그머니 술을 다시 입에 대게 되는 것입니다. 노름도 방랑벽도 도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먼저 주변정리부터 잘 해야 합니다. 

내 주변에 그런 악습이 가까이 있으면 금방 영향을 받고 헤어 나오기 어렵습니다. 노름의 악습을 끊은 사람도 노름 현장을 배회하고 친구들과 어울리면 자연히 꿈틀거리는 뿌리를 제어할 수 없게 됩니다. 아직도 뿌리가 남아서 그렇습니다. 마치 나무를 자르면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싹이 나오듯이 그 뿌리는 완전히 뽑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무서운 책임감을 통감하고 성령께 강하게 의존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 마음에 뿌리박힌 악습을 잘 관리하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예수 이름으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예수의 이름은 만병을 이기는 무기이고 장비이고 힘입니다. 제자들에게 귀신들린 사람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은 나라가고 소리칩니다. 그러니까 귀신들이 나갔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권위가 있고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강한 무기입니다. 그래서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 이름은 모든 것의 열쇠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자가 악습인 도벽을 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가게 앞에만 가면 저절로 물건에 손이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예수를 믿게 되었고 도벽을 끊으려 노력하였습니다.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고 몇 번씩 맹세하고 다짐도 했지만 물건이 있는 곳에만 가면 손이 저절로 갔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어린 딸을 데리고 상점에 가면 안 그럴 줄 알고 갔는데 속에서 미칠 지경으로 훔치고자 하는 열망이 올라오더라고 합니다. 그때 딸 때문에 훔치지 못하게 되자 딸을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 합니다. 

그러니 그때 얼마나 어처구니없었겠습니까. 어처구니라는 말을 아십니까. 맷돌의 손잡이를 어처구니라고 합니다. 맷돌은 손잡이 때문에 돌릴 수 있는데 그런데 그 손잡이가 없어졌습니다. 그때 상상해 보십시오. 그래서 어처구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분이 자신이 지금 아주 지독한 도벽의 쇠사슬에 매여 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 습관을 버리려고 하면 할수록 더 조여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밤에 집으로 가는데 슈퍼 앞을 지나가는데 그때 그 마음에서 자꾸만 도벽의 기운이 솟아오르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순간 무섭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도벽의 마음, 도둑질 하라는 생각은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물러가라”고 소리를 쳤다고 합니다. 너무 다급하니까 누가 있건 말건 소리쳤는데 그리고 정신을 차리고 몇 분 후부터 그 마음이 힘을 잃는 것 같이 느껴져 오더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는 도둑질 안했다고 합니다. 그 사람은 그 순간 그 안에 깊이 뿌리박힌 이 도벽의 굴레에서, 악의 쇠사슬에서, 저주의 굴레에서 비로소 벗겨진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은 우리 신앙인에게는 최대의 무기입니다. 

또 “십자가 고난의 축복”을 입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나약함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악습의 쇠사슬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그를 믿기만 하면 이 영적인 은혜와 소망과 행복과 즐거움과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믿지 않으니까 여전히 내가 그 쇠사슬에 매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쇠사슬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를 억압하고 있는 쇠사슬 중에는 욕망의 쇠사슬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욕망의 쇠사슬이 나로 하여금 분노하게 하고 신경질 부리게 하고 탐욕을 부리게 하고 시기하게 하고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하고 자꾸만 불화를 일으키게 합니다. 이것은 모두 욕망의 쇠사슬 때문입니다. 또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쇠사슬이 있습니다. 벗어나려고 몇 번씩이나 다짐해도 번번이 실패합니다. 그 쇠사슬에 매여서 그렇습니다. 

수십 년 된 쇠사슬이 보통 쇠사슬이겠습니까. 죽기 살기 식으로 나를 구속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 쇠사슬로부터 해방 받는 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내 안에서 몰아내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끊어지고 자유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유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자유에 부응하여 살려고 하면 내가 이 쇠사슬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때 내가 비로소 자유해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기독교의 핵심 복음입니다. 구원의 기본적인 의미는 구출입니다. 누군가 깊은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는 고통의 바다에서 스스로 자신이 헤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때 구원의 실마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밖에서 누군가가 밧줄을 던져 주어야 내가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그렇게 구원하시는 분이 내가 아니고 우리 주님이십니다. 고로 내안에 깊이 뿌리박힌 쓴 뿌리에서 나를 건지는 것도 내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건지시고 쓴 뿌리로부터 해방시키시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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