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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 (느 12:2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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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 (느 12:27~47)


미국에서 차를 타고 거리를 다니다 보면 자동차 뒷범퍼에 붙이고 다니는 여러 가지 재미있는 문구의 스티커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읽는 순간 무언가 애틋한 느낌을 주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행복이란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Happiness is being grandparents.)."라는 문구였습니다.
  
그것은 손자나 손녀를 보게 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가슴 뿌듯하고 벅차오르는 기쁨을 단적으로 보여 준 것이었습니다.
즉 그것은 아직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어 보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결코 알 수 없는, 오직 실제로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되어 보아야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처럼 이 세상에서도 본인이 직접 체험해 보아야 알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기독신자들만 알 수 있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즉 불신자들로서는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이해할 수 없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되어야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물론 '죄 용서 받은 기쁨', '천당 소망을 간직하는 즐거움' 등이 있겠지만, 오늘의 본문은 그 외의 몇 가지 기독신자 고유의 즐거움들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유다 백성들이 이제 막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완성한 직후 그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하는 날 온 백성들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넘치는 즐거움'으로 충만했는데, 이 사실은 본문에 "즐거움"이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오는 것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그 유다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을 드리던 날에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역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과 감사의 예배' 중에 공감하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본문 27절부터 30절 및 43절 상반절에 기록하기를 "27예루살렘 성곽이 낙성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28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동네에서 모여 오고 29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 왔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를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동네를 세웠음이라 30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43a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라고 했습니다.

갖은 고생과 수고 끝에 성벽 재건을 완성한 후 이제 느헤미야 총독과 유다 백성들은 "낙성"을 축하하는 행사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대공사를 세상 사람들처럼 순전히 자기네들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재건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무슨 자축연 따위를 계획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모든 일에 대한 감사와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기 위하여 "봉헌식" 즉 오늘날의 헌당예배와 같은 예식을 위하여 준비를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그 봉헌식의 가장 주요 순서가 곧 '감사찬양'이었던 까닭에 그들은 우선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모아서 특별찬양대를 조직했습니다.
그 찬양대에는 우선 "감사하며 노래하는 자" 즉 합창단원들이 있었습니다.
또한 성악뿐 아니라 기악 파트 역시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종의 타악기인 "제금"과 현악기인 "비파와 수금" 그리고 나중에 35절에 보면 "나팔" 등의 관악기 역시 포함된 완벽한 오케스트라였습니다.
  
영국의 스펄전 목사님은 훌륭한 설교자였음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기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라는 이유로 그 어떤 악기도 예배 중에 사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육성만으로써 찬양을 인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처럼 사람의 목소리뿐 아니라 모든 악기들 역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사용되어야 함을 명백히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 역시 모든 분야의 음악들을 다 동원함으로써 더욱 아름다운 찬양으로써 성벽 봉헌식을 축하했으며 그것이 또한 그들의 예배에 더 큰 '즐거움'을 더하게 되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 봉헌식을 위한 준비에는 "정결케 하는 의식"도 결코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바로 레위기에서 명하고 있는 대로, 봉헌식을 집례하게 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은 몸을 씻고 관유를 바르고 속죄제를 드리는 등의 정결의식을 거행했을 것이며, 또한 "백성과 성문과 성"까지도 이 정결예식에 포함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새의 피를 우슬초에 묻혀서 뿌리는 방법'(레 14:49-53)으로 진행되었을 것입니다.

유다 백성들이 그처럼 성벽 봉헌식을 위하여 안팎으로 철저히 준비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바로 27절에 나오는 대로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 그저 엄숙하기만 한 의식이 아니라 지극히 즐거운 행사가 되어야 마땅함을 미리 알고서 그렇게 만전을 기해서 준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43절 상반절에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그 봉헌식은 '심히 즐거운' 예배가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교인이기는 하지만 예배 시간이 지겨워 그저 '시계에만 자꾸 눈이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구 전도사님의 전화 때문에 억지로 주일예배 한 시간 겨우 참석하는 교인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배를 즐거움으로 드린다.'는 말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논산훈련소에 입소한 후에 처음으로 맞이하게 된 주일에 영내 교회에서 다른 훈련병들과 함께 예배드리게 되었을 때의 감동을 결코 잊지 못합입니다.
예배 시간에 그토록 힘차게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저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한 주일 내내 고된 훈련을 받느라고 땀 흘리며 고생한 후에 문자 그대로 '안식일'을 맞이하여 주일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니, 모든 훈련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그야말로 예배당 천장이 날아갈 정도로 힘차게 찬송을 불렀던 것이었습니다.

반면에 오늘날의 현대사회는 '일하고 쉬는' 것이 아니라 '놀기 위해서 일하는' 문화입니다.
'엿새 동안에 힘써 네 모든 일을 하고 이레 되는 날에 쉬면서' 즐거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생활의 패턴인데, 현대 교인들은 오로지 '주말에 놀기 위해서' '주 5일 근무'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처럼 기다려 왔던 '노는 날'에 이 온갖 '노는 문화'로 가득 차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자니 그 예배가 즐겁기는커녕 '아깝고 지겨운 시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정말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배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하며 그것을 만끽할 줄 알아야 합니다.
회중찬송을 힘차게 함께 부르고 감사예물을 큰 기쁨으로 바치면서 진정 즐거운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배야말로 우리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단연 '최고의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착 가라앉은 분위기의 '형식적인 의식'이 결코 아니라 각 예배자의 인격이 '하나님 앞에서 뛰노는 즐거운 자리'인 것입니다.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참된 예배자'만이 공감할 수 있는 '예배의 즐거움'을 이 성전에 모일 때마다 마음껏 누릴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일을 완수해 내는 성취감'을 통하여 느끼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본문 31절 이하 42절에 "31이에 내가 유다의 방백들로 성 위에 오르게 하고 또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를 두 떼로 나누어 성 위로 항렬을 지어 가게 하는데 한 떼는 우편으로 분문을 향하여 가게 하니 32따르는 자는 호세야와 유다 방백의 절반이요 33또 아사랴와 에스라와 므술람과 34유다와 베냐민과 스마야와 예레미야며 

35또 제사장의 자손 몇이 나팔을 잡았으니 요나단의 아들 스마야의 손자 맛다냐의 증손 미가야의 현손 삭굴의 오대손 아삽의 육대손 스가랴와 36그 형제 스마야와 아사렐과 밀랄래와 길랄래와 마애와 느다넬과 유다와 하나니라 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의 악기를 잡았고 학사 에스라가 앞서서 37샘문으로 말미암아 전진하여 성으로 올라가는 곳에 이르러 다윗성의 층계로 올라가서 다윗의 궁 윗 길에서 동향하여 수문에 이르렀고 

38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 내가 백성의 절반으로 더불어 그 뒤를 따라 성 위로 행하여 풀무 망대 윗 길로 성 넓은 곳에 이르고 39에브라임 문 위로 말미암아 옛문과 어문과 하나넬 망대와 함메아 망대를 지나 양문에 이르러 감옥 문에 그치매 40이에 감사 찬송하는 두 떼와 나와 민장의 절반은 하나님의 전에 섰고 41제사장 엘리아김과 마아세야와 미냐민과 미가야와 엘료에내와 스가랴와 하나냐는 다 나팔을 잡았고 42또 마아세야와 스마야와 엘르아살과 웃시와 여호하난과 말기야와 엘람과 에셀이 함께 있으며 노래하는 자는 크게 찬송하였는데 그 감독은 예스라히야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 기록된 말씀은 그 예루살렘 성벽 봉헌식 날에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기 전에 가졌던 '특별 시가행진'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느헤미야 총독은 사전에 그 행렬을 "두 떼"로 나누어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돌면서 축하 퍼레이드를 벌이도록 했습니다.
그 두 행렬에는 31절과 38절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감사 찬송하는 자의 큰 무리 두 떼" 즉 둘로 나누어진 찬양대가 각각 하나씩 들어 있었으며, 32절과 38절을 보면 "호세야"와 "느헤미야"가 각 행렬을 이끌어갔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역시 두 그룹으로 나누어진 "방백"과 "민장" 및 '나팔을 든 제사장'들과 '레위인 기악 연주자들' 그리고 또한 "절반"씩 나누어진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이었습니다.

38절에서 "감사 찬송하는 다른 떼는 저희를 마주 진행하는데"라고 한 것은 이 두 행렬이 처음에는 성벽 위의 같은 장소에서 출발하여 각기 다른 쪽으로 성벽 위를 반 바퀴씩 돌아서 진행했음을 뜻합니다.
그 출발지점은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각 행렬이 제일 처음으로 지나간 경로가 각각 31절의 "분문"과 38절의 "풀무 망대"임을 볼 때에 바로 그 중간 지점 즉 "골짜기 문"이라 불린 곳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며, 그래서 그들이 다시 만난 지점은 바로 그 반대편에 있는 "하나님의 전" 즉 성전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성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그런 특별 퍼레이드를 하게 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지난 이삼 개월 동안 땀 흘려 수고하여 성취한 결과에 대한 보람을 그들 스스로 만끽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백성들이 성벽의 돌 하나하나를 밟을 때마다 그들의 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아, 여기가 바로 내가 내 손으로 돌멩이를 날라서 쌓아올렸던 곳이지.', '저기를 저렇게 보수공사를 할 때에는 무척이나 어려웠었지.', '처음 시작할 때에는 도저히 안 될 일로만 보였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니까 이 대공사가 정말 완성되고야 말았구나.'라는 등의 온갖 추억과 감사가 새롭지 않았겠습니까?

느헤미야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가 행렬들의 출발점으로 택한 '골짜기 문'은 바로 그가 예루살렘 재건을 위한 사명을 안고 막 도착했을 때에 밤에 몰래 성벽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나갔었던 바로 그 "골짜기 문"(느 2:13)이었습니다.
그 비참한 몰골의 성벽 잔해를 혼자 바라보면서 암담했던 그날 밤을 되새겨 볼 때에, 이제 오늘 바로 그 '골짜기 문'으로부터 이처럼 기쁨에 넘친 축하행렬이 줄지어 출발해 가는 것을 보는 느헤미야의 감회란 정말 이루 표현할 길이 없었을 것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들의 성벽 봉헌식은 남이 이루어 놓은 것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네들의 손으로 직접 성취해 낸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이었던 까닭에 그처럼 시종일관 즐거움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즐거움이란 오직 지금 자기 자신의 발로 밟으면서 행진하고 있는 예루살렘 성벽의 돌과 흙에 바로 자신의 땀과 눈물이 젖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이요 전유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기독신자들이 반드시 체험할 수 있어야 하는 즐거움입니다.
'고생 후에 낙이 온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리인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신"(히 12:2) 주님이 아니셨습니까? 

하필이면 'IMF의 위기' 때에 우리가 강서 성전을 짓게 되고, '세계적인 경제불황'에 다들 허덕이고 있을 때에 지금의 경향회관과 교육관을 구입하게 되었을 때에도 경향의 성도들은 바로 그처럼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볼 줄 알았습니다.
  
시작할 때에는 둘 다 도저히 될 수 있는 일로 보이지 않던 '대역사'요 '난공사'였습니다만 그야말로 예루살렘 성벽 재건 공사 때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함께 해 주심으로써 거뜬히 이루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은 어떻습니까?
  
이 성전 건축과 헌당에 '생애 최고의 것'을 바쳤던 성도들은 이 넓고도 아름다운 공간을 자기 발로 밟으면서 출입할 때마다 이 건물의 벽돌 하나하나마다, 이 예배당의 의자 하나하나마다 자신의 수고와 희생의 진액이 젖어 있는 흔적을 보면서 남다른 감회를 느끼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자녀들이 마음껏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는 교육관 건물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 전부의 것'을 바치고 있는 성도들의 눈에는 그 유리벽이 수정유리보다 더 아름답게 비췰 것이며, 경향회관 건물 구입을 오직 믿음으로 작정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앞장서서 이끌어가고 있는 교육관관리위원회원들은 강서구청 사거리의 요충지에 우뚝 서서 밤이 되면 더욱 멋지게 빛나는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새삼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자신도 모르게 눈가에 번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한 것이 없는 교인은 그런 즐거움을 알 길이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신의 고생의 결과로써 성취된 것을 스스로 누리게 된 성도들이 체험할 수 있는 즐거움은 남이 해 놓은 것만을 공짜로 즐기는 교인들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라는 것과는 아예 차원이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안 될 일 같았던 하나님의 일을 끝내 성취해 낸 '그리스도의 일꾼'들만이 누릴 수 있는 이 깊고도 뜨거운 즐거움을 꼭 맛볼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의 종들이 직분에 전념하도록 후원함'으로써 체험하게 되는 즐거움입니다.

44절부터 47절까지의 말씀에 "44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45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46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47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성벽 봉헌식에 있었던 또 한 가지 특별한 일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직분이 회복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날부터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쓰는" 자신의 본분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들과 함께 "노래하는 자들" 즉 레위인 찬양대와 "문지기" 즉 성전 파수꾼들도 옛날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던" 그대로 그들의 직분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로 하여금 자기네들이 맡은 성전의 직분에만 전적으로 종사할 수 있도록 유다 백성들은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바로 그날부터 다시 바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그날부터 이런 일이 시작되었던 것이었겠습니까?
44절 하반절이 그 이유를 밝혀 주기를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고 했습니다. 
즉 성벽 봉헌식을 드리는 날에 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참으로 오랜만에 그들 원래의 직분을 수행하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 그 유다 백성들 모두에게 있어서 또 하나의 큰 즐거움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사실 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그처럼 성전을 섬기는 직분을 수행하는 것은 오랫동안 흐지부지되어 왔었습니다.
그날의 봉헌식을 위하여 레위인들로 구성된 찬양대를 조직한 것도 본문 46절에서 '옛적 다윗 때에 그런 적이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는 것처럼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습니다.
  
앞서 28절과 29절에 보면 그 레위인들은 "예루살렘 사방"에 자기네들의 동네를 세우고 살고 있다가 이번 행사를 계기로 예루살렘에 모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네들의 본업인 성전 섬기는 일을 맡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계유지를 위해서 예루살렘의 성전을 떠나서 여기저기 흩어져 살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성벽 봉헌식을 하게 되면서 실로 오랜만에 제사장들은 제사를 드리고 레위인들은 찬양을 하고 문지기는 성전을 지키고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되자 유다 백성들은 너무나도 즐거웠습니다.
'아, 이것은 진작 이렇게 되었어야 할 일이었구나. 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당연히 성전을 섬기는 그 본분에만 전념하는 것이 제대로 되어 있는 모습이구나.'라는 생각이 모든 백성들의 마음에 순식간에 공감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다 백성들은 원래는 그날의 성벽 봉헌식을 위해서 급히 다시 모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바로 그날부터 오직 성전만을 풀타임으로 섬기는 본래의 직분에 다시 종사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그들 자신 역시 그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서 물질로 후원하는 의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했던 것이었습니다.

교회에 교역자들을 세우고 이들로 하여금 오직 자신의 사역에만 전무할 수 있도록 후원함으로써 느끼게 되는 즐거움 역시 불신자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성도 고유의 즐거움입니다.
목사가 교회의 재정 때문에 마음이 눌리지 않도록 경상비를 비롯한 각종 헌금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동시에 부족한 것들을 앞장서서 메워 가는 것은 오직 그 목사가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바라볼 줄 아는 장로들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담당 교구의 교역자들의 사역에 '시원함'을 더해 주기 위하여 평소에도 자기가 맡은 직분에 충성하는 동시에 교회의 절기가 되면 작은 선물이라도 정성껏 갖다드릴 줄 아는 것은 오직 그 교역자들이 '전도와 심방'을 위하여 늘 '서서 섬기는 것'을 진정 기쁜 마음으로 도우려 하는 성도들만 할 수 있는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교인들 가운데 이런 특별한 즐거움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겠습니까?
전도사가 자기 집에 심방 오는 것을 오히려 귀찮게 여기고 교회에서 선교사들을 위한 특별헌금을 한다고 하면 일단 부담감부터 먼저 생기는 교인들이 실제로 적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있을 때에 어느 한인교회에서 주중에는 다른 직업을 가지고 일하면서 교회로부터는 아무 사례를 받지 않는 목사를 두고 소위 '바울처럼 자비량하는 목사'라고 추켜세우는 교인들도 본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목사가 그래 가지고서야 언제 설교를 준비하고 언제 기도하고 언제 교인들을 심방하겠으며 어떻게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에 전력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가 주일마다 강단을 지켜 서 있고 전도사가 날마다 교구를 부지런히 돌아다니면서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신학교수가 늘 책상 앞에서 연구를 하고 있고 선교사들이 복음의 최전선에서 이탈하지 않고 순교의 각오로 그 위치를 사수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에, 이 교회를 통하여 별님들이 서원을 하고 그 '영적 엘리트'들이 신학교에 줄을 이어 입학하는 것을 볼 때에 진정 '전투하는 지상교회의 전우'된 성도는 진짜로 기뻐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직분자들이 자기가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서서 섬기는 것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자기 직분에 전무할 수 있도록 영적 물질적으로 최선의 후원을 다할 줄 아는 복음의 동역자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누릴 줄 알았던 특별한 영적 즐거움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로써 드리는 예배의 감격, 하나님께서 명하신 어려운 사업을 완수해 낸 성취감의 보람,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의 종들을 모시고 섬기는 기쁨 - 이것은 불신자들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오직 진짜 신자만이 뜨겁게 느끼고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아주 '색다른 즐거움'인 것입니다. 

어떻게 기독신자들만 이런 특별한 즐거움을 누릴 줄 아는 것이겠습니까?
본문 43절은 그 이유를 두고 "43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고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그 유다 백성들이 그토록 즐거워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즐거움이 자기 속에서 나온 것이나 다른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께 예배드리고 당신의 일을 해내고 당신의 종들을 모시고 따르는 성도들을 보실 때 하나님께서도 어찌 즐겁지 않으실 수 있었겠습니까?
'기쁨은 나누면 두 배가 된다.'는 말도 있지만, 성도의 즐거움은 이처럼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것이니 그 즐거움의 정도가 어디 '두 배'만으로 끝나겠습니까? 

특히 우리 기독신자들이 교회에 모였을 때에 바로 이처럼 '하나님으로 인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행복과 웃음과 기쁨 때문에 즐거워하는 소리가 온 세상 앞에 '멀리 들려야만' 합니다.
그 즐거운 소리가 이 장망성에서 괴로워하던 자들의 발걸음을 교회로 나아오게 만들고 그 행복감에 충만한 감사의 소리가 이 인생길에서 낙심하던 영혼에 새 힘을 주게 되며 그 감격의 찬양 소리가 우리 모두를 서로 사기충천 용기백배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그저 텔레비전 앞에서나 실없이 웃고 유흥가의 향락에나 빠져 있는 이 세대 앞에서, 하나님께서 예배의 은혜와 사명의 완수와 직분의 동역 가운데 크게 즐거워하게 해 주시는 이 '여호와의 집에서 즐거워하는 소리'를 더욱 이 조국과 전세계를 향하여 널리 들리게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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