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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름다운 선택(3) : 전도 (고전 9: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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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택(3) : 전도 (고전 9:16~17)


우리는 인생을 이 세상에 출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영어로 출생을 Bir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죽음으로 삶을 이 땅에서 마무리하게 됩니다. 죽음을 영어로는 Death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요? 그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서 질문을 이렇게 바꾸어 보겠습니다. 영어 알파벳 B와 D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 대답은 쉽습니다. C입니다. 

그러면 B가 Birth 출생을 의미하고 D가 Death 곧 죽음을 의미했다면 C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시 말하면 출생과 죽음사이에는 무엇이 기다라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 대답을 영어권에서는 선택 곧 Choice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끊임없는 선택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인생은 곧 선택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 곧 삶을 만드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직업의 선택-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결혼보다도 직업보다도 더 중요한 선택이 있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선택입니다. 신앙의 선택은 이 땅에서의 삶의 모습은 물론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우리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거기서 신앙의 선택은 끝나지 않습니다. 믿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아직도 선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의 선택의 하나가 전도입니다. 우리가 믿는 사람들이라 해서 다 전도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전도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전도하지도 못하고 아니 전도하려는 노력도 안하고 인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제가 섬기는 기관의 하나인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서 지난 2005년 <한국 교회 미래 리포트>라는 프로젝트로 한미준과 한국 갤럽이 공동으로 한국 교회 교인들의 신앙생활의 실태를 조사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에 의하면 <나는 지난 1년간 누군가를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게 한 적이 있습니까?>라는 설문에 <그렇다>고 대답한 개신교인이 26,4였고 <그런 일이 없다>고 대답한 교인들이 무려 73,6에 달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가운데 전도하는 이들은 4사람 중 1사람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4분의 3의 교인들은 소위 전도의 열매를 전혀 맺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보고서가 한국 교회의 평균을 잘 반영하고 있다면 금년도 이웃 사랑 축제에서도 우리 교회 출석자중 전도에 능동적 노력을 하리라고 기대되는 교인들은 안타깝지만 4분의 1정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한 예상이 될 것입니다. 

오늘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평생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안하는 교인의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기대를 이루는 전도의 열매를 맺는 삶을 선택하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물어야 할 더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은 따로 있습니다. 복음 전도는 도대체 왜 중요한 것입니까? 바울 사도는 오늘의 본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에게 만일 자신이 전도를 안 한다면 스스로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비장한 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을 통해 본 복음전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1. 복음전도는 의무입니다.

본문 16절의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라” 그는 여기서 복음 전도를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좀 소극적으로 들리지 않나요? 그런데 이 대목을 NIV 영어 번역에서는 "I am compelled to" 또 다른 번역에서는 “I am obligated to"라고 옮기고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거룩한 부담을 느끼고 있다“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전도를 피해갈수 없는 거룩한 의무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나의 구원은 나 한 사람에게서 머물러야 할 사건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은 나를 통해 또 다른 이웃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받아야 하는 것-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 전도를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사건이 되게 하시지 않고 복음 전도를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 전도의 명령을 지상명령 혹은 대 사명이라고 일컬었고 그것은 신약 성경의 4복음서의 결론과 사도행전의 서론의 대 명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동일한 말씀으로 오늘도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이웃과 민족들을 바라보시며 마태복음에 보면<가서 그들을 제자 삼아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마가복음에 보면<만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명하십니다. 누가 복음에 보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족속에게 전파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내가 너희를 전도의 목적으로 세상으로 보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우리의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여 먼 땅 끝까지 증인이 되리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는 것이 적당히 넘어 갈 일이겠습니까? 군대 용어를 빌리면 <명령 불복종>이 아닙니까? 그것이 가벼운 죄이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내가 이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번 추석 절 가까운 가족에게서부터 시작하여 전도의 명령을 수행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2. 복음전도는 특권입니다.

그러나 전도를 부득불 이행할 의무라고 인식하는 것에서 바울은 머물지 않았습니다. 의무감만으로 수행하는 일은 쉽게 지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의무의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복음 전도를 상급이 기다리는 즐거운 특권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7절의 시작 부분을 보십시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전도를 단순히 의무로만 자각함이 아니라, 자의로 기뻐서 행한다면 거기에 상급이 따를 것을 그는 확신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 전도는 거룩한 의무일 뿐 아니라, 즐거운 특권인 것입니다. 가장 고귀한 상급이 약속된 특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급을 우리가 흔히 말하는 미래의 천국에서 누리게 될 소위 면류관만으로 이해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다음 절 18절에서 바울 자신의 입으로 그 상급의 정체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8절을 읽어 보실까요?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 전도의 십자가를 지는 그 자체가 자신의 특권이요 상급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역설적인 고백이 이해가 되십니까?

몇 년 전에 어떤 개인 병원의 원장님(장로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이 병원에 와서 10년 이상 꾸준하게 환자를 돌보는 자신과 같은 교회에 나가시는 자원 봉사자 권사님이 계셨는데(제가 아는 분) 너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어느 해 추석 절에 봉투에 한 2백만 원을 넣어 감사 표시를 했더니 그 분이 원장실로 찾아 오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봉투를 내놓고 정색을 하면서 항의하기를 “원장님, 왜 제 상급을 빼앗아 가려고 하십니까? 제게 이런 것을 주시면 제가 겨우 이런 물질의 보상을 바라고 여기서 봉사한 꼴이 되고 말지 않겠습니까? 제가 이것을 받으면 저는 더 이상 이 곳에서 기쁨으로 일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장님이 오히려 이 권사님의 순수한 믿음 앞에서 자신이 부끄러웠다는 고백이셨습니다. 

저는 오늘의 본문의 바울의 고백이 그런 차원의 고백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에게는 전도 그 자체가 즐거움이고 감사였던 것입니다. 때로 전도하다가 당하는 고통 그것까지도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면 ‘십자가를 지는 감격’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바울에게 전도는 즐거운 특권이었습니다. 이것은 전도를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고백이라고 믿습니다.

3. 복음전도는 사명입니다.

다시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내가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바울은 물론 자의로, 자원하는 즐거움의 심정으로 전도하고 있지만 때로 이런 즐거움의 마음이 동반되지 않는다 해도 전도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는 그의 사명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사명’(oikonomian)이라는 말은 본래 집안일을 위해 맡겨진 청지기적 사명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집 주인이 집안일을 믿을만한 청지기에게 신임하여 맡길 때에 쓰여 지는 말입니다. 바울은 전도를 하나님이 당신을 신임하셔서 하나님의 가족된 자신에게 맡기신 특별한 과업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의 과업은 천사에게도 맡기지 아니하신 사명입니다. 오직 그의 자녀들에게만 맡겨 주신 과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가의 작시자는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찬270장)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 찬송가의 작시자 엘라이져 캐슬(Elijah Cassel)은 본래 의사였습니다. 그는 성공적인 의사요 평신도 지도자로서 자신의 직업의 장에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그가 출석하던 네브라스카의 한 침례교회에서 모범적으로 봉사하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에 특별한 사명을 느끼며 병원에서 많은 환자들을 전도하고 언제 어디서나 자신의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는 복음 전도라고 고백하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돈 버는 것보다도 전도 하시는 것이 그렇게도 좋으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결국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가 아닙니까. 나그네 인생에서 영혼 구원보다 더 가치 있고 고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전도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인데요” 옆에 있던 부인이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란 그 말에 감동을 받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그 말을 시로 쓰면 자신이 작곡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그의 부인은 본래 음악 전공자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의 고백으로 탄생한 찬송이 바로 이 찬송가 270장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그런데 그의 나이 60을 넘기면서 그의 마음에 파트타임이 아닌 훌 타임으로 자신의 전 시간을 드려 복음을 전하고픈 불타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마침내 목회에 헌신하게 됩니다. 더 이상 돈은 못 벌고 인간적인 대접도 못 받게 되었지만 그는 너무 기쁘고 너무 감사해서 그의 첫 부임지인 콜로라도 덴버의 한 작은 침례교회에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 부부는 취임 예배에서 취임사를 대신해서 이 찬송을 불렀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그런데 캐슬이 이 교회 목사로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부인은 불행하게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납니다. 누군가가 장례식에 와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목사되신 것 후회가 안되시느냐고? 목사 안되시고 의사하셨으면 부인이 그렇게 빨리 가지 않으실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캐슬의 대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 아내는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찬송을 작곡하면서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에 행복한 전도자의 곁에 머뭄이 자기의 행복이라고. 혹시 자기가 먼저 이 세상을 앞서 가는 일이 있으면 난 변함없이 당신의 하늘의 응원자가 되어 함께 복음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부인의 장례식에서 다시 회중들이 이 찬송을 불러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이 세상 있을 때 주 예수 위하여 우리가 힘써 일하세.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이것이 바로 사명자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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