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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역경의 은혜(VIII) (약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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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은혜(VIII) (약 1:1~4)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1:1-4 

역경은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성숙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믿음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하고, 불순물을 제거하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며 살아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해봐야 소용이 없음을 알게 합니다. 욥은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23:10)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했습니다. 역경과 고난은, 우리의 믿음이 성화, 성숙하고 잘 준비되어 어떤 시련이 와도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본문말씀은 야고보가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쓴 편지입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 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절). 사도행전 8장 4절을 보면 기독교가 이스라엘에 만연하자 핍박이 왔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잡아 가두고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니 성도들이 핍박을 피해 전 세계로 흩어졌습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초기에 예수를 믿은 이스라엘 12지파 안의 기독교인들이 모두 피신을 갔습니다. 나라와 고향을 떠나 고생하고 있는 초대교회의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야고보는 이 편지를 쓰면서 “문안하노라”고 했습니다. 영어로는 ‘greetings’인데 희랍어로는 ‘카란’, 즉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문안인사가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2절에 다시 같은 말을 하고 설명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여러 가지 시험이란, 시험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시련, 사람이나 환경, 대인관계의 문제로 인한 시련, 가정과 교회, 직장, 사회, 국가, 세계에 있는 시련 등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시련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런 다양한 시험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1절에서는 “문안하노라”고 하면서 기뻐하라고 했고, 2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영어 번역은 “count it all joy” 즉 완전한 기쁨으로 여기라, 또는 “pure joy” 즉 순수한 기쁨으로 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기쁘게 여기라’는 말씀을 공부하다 보니 ‘고난 때문에 견디기 힘든 가운데 어떻게 기뻐하라고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말도 안 되는 충고가 아닙니까? 그런데 본문을 더 깊이 생각을 하면서 ‘아, 이래서 기쁘게 여기라고 하는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힘들고 짜증나고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반발과 원망도 생깁니다. 어떻게 기쁘게 여깁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온갖 시련을 당할 때마다 “기뻐하라”고 합니다. 이 엉뚱한 반응을 깨닫고 그대로 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더 깊고, 높고, 넓게 성숙 해진 것입니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온전’이란 perfect로 영어성경에 번역했지만 ‘성숙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어느 단계에 성숙하나? ‘이 시련은 내 믿음이 심화되고 깨끗해지고 강해져서 성숙한 신앙인이 될 기회이구나!’를 깨닫게 되면서 기뻐하고 감사할 때입니다. “온전하고 구비하여”는 영어로 “perfect and complete”인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시련을 거치며 승리를 반복하면서 신앙이 완숙되고 부족함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왜 시련을 당합니까? 때로는 지혜의 부족함 때문입니다. “지혜가 부족하면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5절). 믿음의 부족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라”(6절)고 했습니다. 지혜가 부족하고 믿음이 없으면 내가 허(虛)한만큼 고생을 합니다. 온전하고 성숙해져서 신앙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잘 훈련되어 부족함이 없으면 고생을 덜 합니다. 시련과 어려움, 난관, 역경을 겪으면서 우리의 빈 곳이 채워집니다. 믿음의 사람은 역경에 낙심하지 않고 ‘이 때문에 내가 더 잘 되겠구나!’ 생각합니다. 사고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믿음의 시련’이란 ‘믿음에 대한 시험’입니다. 성삼위 하나님을 믿고 영생을 믿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믿는 나의 믿음이 진짜인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시험을 보는 것은 낙제하라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서 진급하고 승진하기 위한 단계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시련에 대한 태도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고 대단히 긍정적이고 적극적입니다.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하고 완전해지며 부족함이 적어지고 시련을 이기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의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은 아들을 내 놓으라 하셨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하나님을 안 믿으면 안 믿었지 그건 못해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죽이려 하신 것이 아니라 “정말 나를 신뢰하느냐?”하고 아브라함의 신앙을 테스트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를 보면, 설령 이삭을 죽였더라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살려내실 것을 믿었습니다. 대단하지요. 합격입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들고 아들을 죽여 제물로 바치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러지 말라. 네가 나를 얼마나 믿고 의지하는지 내가 이제 알았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것 아닙니까? 모세도 합격했습니다. 모세는 법궤를 메고 홍수가 난 요단강에 그냥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 같으면 “아니, 하나님, 물 좀 빠진 다음에 들어가지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을 믿고 강물에 발을 딛자마자 물이 쫙 갈라졌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재미입니다. 

대강 믿으면 손해입니다. 믿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믿음이 왜 손해인 줄 아십니까? 주일에 교회에 오면 죄의식에 빠져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찬송도 마음껏 못 부릅니다. 왜? 지난주 동안에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니까요. 경험자가 하는 말입니다. 제 젊었을 때 이야기에요. 교회에 가면 부끄러워서 고개를 못 들고 예배가 끝나면 빨리 집에 오기 바쁩니다. 교회 생활이 재미가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도 재미가 없습니다. 왜? ‘내가 밖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 때문에 세상을 세상 사람들처럼 즐기지도 못하고 마음만 불안하거든요. 나가도 복 받고 들어와도 복 받는 것이 아니라, 나가도 불편하고 들어와도 불편한 것이 대강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시련을 겪으면서 사람이나 실력, 돈, 명예, 우상을 신뢰하지 않고 “나에게는 능력이 없지만 제가 믿는 하나님 한 분만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행동으로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요단강을 갈라지게 하시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의 재미입니다. 이런 재미를 한 번, 두 번, 세 번 누리면 시련이 두렵지 않습니다. 시련은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신호입니다. 그때 하나님을 신뢰하면 여러분이 성장하고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제가 늦은 밤에 귀가를 하는데 학생들이 학원에서 귀가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아이들을 보니 얼마나 측은한지요. 수고가 많습니다. 그런데 제 아내가 “나는 이제 시험을 안치니까 너무 좋아요”라고 해요.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시험을 다 치루고 통과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쉽게 끝났나요?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12년 동안 시험을 쳤습니다. 또 대학, 대학원까지 가서 시험을 칩니다. 시험만 안친다면 공부는 재미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은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시험을 치고 합격했기 때문에 오늘의 우리가 된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면서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험 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시련의 단계에 와 있으면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합격하여 발전할 것을 기대하며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시험에 합격하면 인내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능력입니다. 인내 없이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전서 1장 6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도다.” 시련이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에 시련을 거칠수록 진급하여 어느 단계에 이르면 다시 시험을 안 쳐도 되는 것입니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벧전1:7). 확실하고 참된 믿음은 불로 연단해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합니다. 

찬송가 376장 ‘내 평생소원 이것뿐’의 4절에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되도다’처럼 정말 그렇습니다. 믿음의 연단이 잘 되어 불순물이 다 빠져나가면 하나님 한 분 믿고 의지하면 그 분 앞에서 순수하고 완전한 믿음을 갖고 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온갖 시련을 계속 통과합니다. 시련은 사람의 차별이 없습니다. 단지 시련에 대해 훈련된 사람과 안 된 사람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시련을 제대로 통과 못하고 믿음의 시험에 합격 못하고 인내심을 기르지 못하여 계속 낙제하고 고생에 고생을 더 하면 인생은 너무 어렵습니다. 인내의 능력을 길러야 합니다. 

시련의 테스트에 어떻게 합격합니까? 믿음으로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앉아서 ‘아, 내 밥이 어디서 올꼬? 오늘 한 끼는 먹었는데 내일 아침에 엄마가 밥을 해 주려나?’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엄마 아빠가 밥을 먹여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신뢰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고 놀기나 열심히 하면 될 것을 방에 앉아 고민을 하고 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제 큰 아이가 미국에서 5학년 때 교회 야유회를 갔습니다. 어른들이 둥그렇게 모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제 딸이 4-5명의 친구들과 와서 “아빠, 5달러만 주세요!” 해요. 뭘 할 거냐고 물었더니 뭔가를 한대요. 제가 주머니에서 5달러를 꺼내 줬어요. 아이가 아빠에게 달라고 하면 정당한 것이라면 아빠가 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다른 아이가 “목사님, 5달러만 주세요!”라고 하면 “네 아버지에게 달라구 해” 라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마6:31,34). 매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어떤 일, 어떤 역경이 있더라도 아버지께서 돌보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낼 힘이 생기고 앞으로 다가올 시련에 대한 훈련이 되는 것입니다. 

역경은 또한 인내력을 기르는 기회입니다. 인내 없이 성공적 산 사람은 없습니다. 제가 가끔 어릴 때 이야기를 하지만, 저는 고교 3년간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극심한 역경을 거쳐 졸업했더니 대학부터는 문제가 없어요. 미국 가서 공부할 때는 훨훨 날겠더라고요. 어떤 학생은 유학 중 너무 힘들고 외로워 조용한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또 한 여학생은 미쳐서 혼자 노래하면서 길거리를 돌아다녔어요. 옛날에는 유학생활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저에게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어요. 왜? 이미 훈련이 됐거든요. 고교 3년간 고난의 훈련을 철저히 받았기 때문에 나머지는 쉬웠습니다. 단돈 100불을 들고 가서 거뜬히 유학을 마쳤습니다. 시련을 미리 당하고 미리 배우면 그 다음의 시련이 쉽습니다. 내가 지금 겪는 시험은 나를 망치고 낙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합격, 진급하여 점점 더 완성된 사람으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기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장 2절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영광을 바라볼 희망이 생겼습니다. 또 “우리가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나니”(3절). 시련을 당해 슬퍼하지 않고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3,4절). 시련을 당하면,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인내심을 기르고 시련을 감당할 능력이 생깁니다. ‘연단’은 훈련입니다. 시련을 통해 훈련 받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하나님은 진짜 하나님이다”라는 소망이 생깁니다. 내 앞에 다가오는 밝은 빛을 볼 수 있습니다. 삶의 중심에 하나님 한 분만을 두고 전심으로 신뢰하면 믿음이 깊고 넓고 순수해지고 실력이 생겨서 역경도 문제없이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퍼하지 말고, 괴로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시련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달라지길 바랍니다. 보는 눈이 중요합니다. 내가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둡게 보면 어두워지고 밝게 보면 밝아집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의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인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습니다. 고3학생이 공부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어떻게 대학에 갑니까? 기도하다 포기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운동선수가 훈련 중에 포기하면 어떻게 메달을 따겠습니까? 등반가가 산에 오르다가 힘들다고 포기하면 어떻게 정상에 오르겠습니까? 

1968년 10월 멕시코 올림픽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에서 한 선수가 늦게까지 결승선에 들어오지 않아서 모두 기다렸습니다. 저녁 7시쯤 되자 경찰의 사이렌 소리와 함께 탄자니아 선수 한 명이 절뚝거리며 거의 기다시피 들어와 운동장을 한 바퀴 돈 후 결승 테이프를 끊었습니다. 기자가 묻습니다. “아니, 그렇게 상처를 입고 절뚝거리면 그냥 자동차를 타고 들어오지 왜 끝까지 뛰었습니까?” “탄자니아가 저를 멕시코 마라톤에 보냈을 때는 출발을 잘 하라고 한 것이 아니라 끝까지 뛰어 끝맺음을 잘하라고 한 것입니다.” 이 선수는 꼴찌를 하고도 이름을 날렸습니다. 50년 전 그의 기록이 오늘도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에서 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는 아무도 모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경주를 마치고 그 많은 청중들에게 마치 1등이나 한 것처럼 기립박수를 받은 꼴찌, 얼마나 멋있습니까! 인내가 역사를 만듭니다. 역경은 우리에게 필요한 인내를 완성시키는 길입니다. 

사랑에도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사랑을 원하지만 사실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자식 사랑은 쉽습니다. 피가 섞였기 때문에 본능적입니다. 그러나 피가 섞이지 않은 부부간의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4절)라고 합니다. 여러분 좀 참으셨습니까? 그러면 사랑한 것입니다. 만약 “사랑은 따뜻함이요”라고 했으면 사랑을 잘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고 합니다. 영어 단어가 재미있습니다. “longsuffering” 오래 오래 서로를 위해 고난당하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7절에서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합니다. 점점 더 험해져 견딜 수 없는 것조차 그냥 꿀꺽 삼키고 다 품어내는 것입니다. 사랑의 마지막 정의는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입니다. 참고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끝까지 참는 것이 사랑입니다. 아, 불가능한 사랑이지요. 그래서 이런 구절을 읽을 때마다 “주여!”라는 기도가 나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도움을 구하게 되지요.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그런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셔서 우리가 천국에 갈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신뢰했더니 하나님께서 저에게 성경적 사랑을 주셨습니다.”라고 간증할 수 있게 됩니다. 미리 미리 배워야지, 아니면 평생 더 큰 고생입니다. 우리가 미리 배우고 일찍이 합격해서 지나간 시험을 다시 치지 않도록 계속 성장하고 성숙해지기를 원합니다. 

성숙하려면 인내를 완성해야 된다고 합니다. 4절에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성숙한 것) 구비하여(잘 준비된 것)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믿음으로 참으면 성장합니다. 불신앙으로, 인간적으로, 그저 육적으로 참으면 내가 파괴되고 산산조각 납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역경의 목적은, 믿음에 합격하고 역경을 이길 능력을 양성하여 점차 성숙하고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귀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원하던 원치 않던 우리에게 역경은 또 올 것입니다. 저절로 오게 되어 있습니다. 남은 생애에 여러분이 또 역경을 당하더라도 믿음으로 넉넉히 이겨서 완숙해가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시련!” “기뻐하라.”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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