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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불기둥, 구름기둥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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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둥, 구름기둥 (출 13:17~22)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권위는 여러 가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하나님은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모세가 호렙산에서 양무리를 칠 때 하나님이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나타나셨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계시록에는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도구는 꺼지지 않는 불이다, 불 심판이다.”라고 하나님의 권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제일 많이 쓰는 말 “성령은 불과 같이 임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사마리아 땅을 지나가는 것을 사마리아 사람들이 막았습니다. 그랬더니 요한, 야고보가 화가 나서 예수님에게 요청을 하잖아요? 하늘에서 불을 내려서 이놈들을 멸망시키자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권위는 불로 인식되어 있음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 소돔과 고모라 성은 심판의 유황불이 내려 다 심판을 받았다고 나와 있고,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설교할 때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구름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구름이 나타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름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따라갔다고 오늘 성경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그리고 회막 위에는 항상 구름이 떠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성이 나타나고 있음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5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 예수님 네 사람이 높은 산에 올라갔다고 나와 있습니다. 거기서 신비한 광경을 제자들이 목격하였을 때 5절 말씀이 어떻게 기록되어 있느냐 하면 “말할 때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드러냈습니다. 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시편 121편에 “여호와께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못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못하리로다.”라는 말씀은 광야에서 구름 기둥으로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신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시편 104편에 보면 “하나님은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신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모세가 광야 회막에 들어갈 때는 구름이 회막을 덮고 하나님은 구름 속에서 모세와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구름으로 하나님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하여 모세 인도를 따라서 민족 이동을 하는 약 3500년 전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을 하여서 가나안 땅으로 가는 노정에는 우리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오늘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길은 가까울 지라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을 가깝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 중에는 좋은 길이 있습니다. 해변가를 따라 상업도로가 잘 마련되어 있어서 항상 그 길로 사람들이 오고 갑니다. 바로 옛날 요셉이 팔려가던 길입니다. 그 길로 가면 한 달도 안가서 가나안 땅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들이 일주일 만에 왔다 갔다 하는 그 길입니다. 도로도 아주 좋습니다. 경치도 좋습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사막에서 40년 동안 살 것이라고는 누구도 생각을 못했습니다. 만약 애굽에서 그 해안 도로를 따라 가나안까지 가면 홍해를 건널 필요도 없었습니다. 요단강을 구태여 건너가지 않아도 괜찮았습니다. 쉽게 갈 수가 있었습니다. 아마 40년 동안 모래벌판에서 고생할 줄 알았다면 절대로 애굽을 떠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 좋은 길로, 한 달 만에 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정 반대 방향의 시나이 반도 사막의 모래벌판을 가게 하셨는가? 불필요한 수많은 길을 헤매게 하시고 불필요한 적을 수없이 만나서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쉽게 우리가 풀이를 하면 분당에서 부산을 가는데 고속도로로 쫙 내려가면 5시간이면 갑니다. 그런데 여기서 부산을 가는 사람이 춘천으로 올라가서 파주로 가서 불필요한 인천을 가서 수원에 왔다가 저 목포로 내려갑니다. 그랬다가 다시 대전으로 올라와서 광주로 갔다가 여수, 대구, 마산을 거쳐서 부산에 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그렇게 간 겁니다. 왜 그렇게 갔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가라고 하신 겁니다. 이상하잖아요? 그러는 도중에 홍해를 만나기도 하고 요단강을 건너고 4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고 온갖 고생 다했습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질러가는 길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 왔다! 여기만 지나가면 된다.” 하나님이 “그리로 가지 말라.” “아니, 조그만 가면 됩니다.” 갔다가 큰 실패와 하나님의 심판을 받잖아요? “내가 그리로 가지 말라고 했잖느냐?” “하나님, 왜 그리로 가지 말아야 됩니까? 결국 그 땅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실 거 아닙니까?” 이런 이상하고도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어떤 때는 우리 신앙의 갈등이 ‘도대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가 없다. 하나님이 나만도 생각을 못하시나?’ 또 어떤 때는 하나님은 지나치게 인색하십니다. 

인색한 것은 고사하고 공연히 못살게 구는 취미를 가지신 것 같이 느껴지는 때도 있습니다. ‘성격 나쁜 아버지가 집안 식구들 달달 볶듯이 한 달만 고생하면 되는 길을 40년이나 시나이 반도를 다 헤매게 하시고 끝없는 피를 흘리게 하시고…. 이거, 도대체 왜 이렇게 하시는 거야? 이런 고생 안시키기고도 얼마든지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데…. 만약 하나님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인도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었다면 한 달 만에 다 들어갈 수 있는 길을….’ 그런데 하나님이 그 길로 못 가게 하셨습니다. 

저는 첫 번 목회지가 시각장애인 교회였습니다. 인생 중간에 실명되신 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분들과 좋은 추억이 많아서 44년 전 일인데도 지금도 관계를 끊지 않고 계속해서 내일과 모레도 삼척에서 시각장애인협회 여름수련회 주강사로 가게 됩니다. 시각장애인이 아닌 분들이 생각할 때는 ‘저 시각장애인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살맛이 날까?’ 이렇게 생각되시죠? 아닙니다. 얼마나 명랑하고 삶이 기쁘고 농담도 얼마나 잘하시는지 모릅니다. 전 그분들의 삶을 조금이라도 함께 경험했습니다. 돌아가면서 식사기도를 시키면 공동체 생활을 하니까 “오늘 누구 기도 차례야! 식사기도!” “전도사님, 아무것도 안보입니다. 앞에 뭐가 있는지 보여야 이거 주셔서 감사하다고 할 텐데 뭐가 보여야 기도를 하지요? 다른 사람 시키세요. 난 안할래요.” 

밥 먹다가 “야! 얼굴에 밥풀 좀 떼고 먹어!” 얼마나 농담을 잘하는지 모릅니다. 항상 불을 끄면서 “불 좀 켜고 먹어라.” 재미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날마다 저한테 와서 “전도사님, 하나님이 왜 나를 눈멀게 하신 겁니까?” 이 두 가지 반응이 항상 나타납니다. “나는 다 좋습니다. 건강도 괜찮고 아이큐도 괜찮은데 이 앞 못 보는 거 이거 하나만 해결해 주시면 내가 평생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이 있는데 앞 못 보는 하나 때문에 이렇게 고생을 하니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이 질문이 끊임없습니다. 

그러다가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앞만 못 보나? 뒤도 못 보지? 옆도 안보이고…. 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드셨을까?” 사실 이 문제는 모세의 기도에도 나옵니다. 모세가 어느 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를 즉시 죽여서 나로 나의 곤고함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왜 나를 이렇게 곤고하게 만드시나이까? 죽여주십시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은 무슨 취미로 그 민족을 그렇게 고난스럽게 하셨는가? 이것을 우리가 알 때 우리 삶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사람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 세상의 하나님의 사역을 위해서 초대를 받는 사람들이 택한 백성입니다. 개인이나 민족이 초대를 받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초대를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을 통해서 무엇이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인류 구원은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그냥 지나가게 하옵소서.” 기도했잖아요?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이 다 그렇고 택한 백성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500년이나 한결같이 지켜오는 민족 절기가 있습니다. 유월절과 장막절입니다. 뭐하는 절기입니까? 출애굽 사건 때 광야에서 받았던 고통을 잊어버리지 말자고 해서 기념하는 날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가도 가도 모래 먼지만 날리는 열풍과 사막 생활을 한 살 때 나온 사람이 40살이 되었습니다. 시나이 반도의 모래 먼지 속에서 잔뼈가 굵었고 햇볕만 가리는 천막에서 40세가 되도록 밥을 먹고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 택한 그 후손들이 이 지상에서 가장 억세고 강인한 종족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도 살아남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민족들은 디아스포라 되었는데 지금 세계 어디를 가든지 유태인이 들어가 사는 나라는 유태인들이 앞서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저는 유태인들을 많이 만나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유태인이 세계를 지배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그들을 없애버리지 않는 한 편안치 않다고 생각해서 6백만을 죽여 버린 겁니다. 그래도 안 죽어요. 다시 살아남아서 튼튼한 민족을 형성합니다. 지금 서구 사회에 가보면 뭐든지 우세한 것은 유태인들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이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620만의 유태인이 살면서 미국에서 좋은 것들은 그 사람들 손에 다 들어가 있습니다. 세계 모든 나라들이 남자들에게 군인의 의무를 줍니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인을 나가야 합니다. 군인의 숫자가 모자라서 하는 게 아닙니다. 의무입니다. 여러분, 1967년 6·1전쟁 때 임신 8개월 된 여자가 낙하산을 타고서 기관총을 가지고 낙하하는 모습이 전 세계 신문에 보도되고 방송된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 사람들을 누가 당합니까? 

로스앤젤레스에 포레스토론이라는 숲속이 있는데 유태인들이 사용하는 사격장입니다. 12살만 되면 유태인들은 누구나 거기에 끌려가야 합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씨에도 12살짜리에게 작은 소총을 주고 사격 연습을 혹독하게 시킵니다. “우리 유태인은 이렇게 안하면 살아남지 못해. 알았지?” 개인 1인당 회비를 걷어서 이스라엘 나라로 보내고 고국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 때는 누구든지 자원해서 갈 수 있는 훈련을 해서 만반의 임전 태세를 완벽하게 갖춥니다. 전쟁이 나면 학교 다니다 말고 직장 다니다 말고 갑니다. 못 당합니다. “이렇게 강인한 민족성을 만들어야 이 민족들이 디아스포라 되어서 세계 어디에 가서도 살아남아서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획하셔서 훈련시키신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은 땅이 귀하다는 훈련을 받았죠? 차지한 땅은 절대로 안 빼앗깁니다. 먹는 식량이 귀하다는 교육을 받았죠? 식량 생산은 기브스 농장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농업 기술로 발전했습니다. 배가 고픈 훈련을 해서 인내를 배웠죠? 참고 견디는 것으로 유태인들을 당할 길이 없습니다. 유태인들은 얼마나 잘 뭉칩니까? 절대 안 깨지지 않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가나안 31족과 전쟁을 하면서 익혀온 그들은 지금 이 세상 어느 군대도 당해낼 수 없는 강한 군대 조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주변의 10개 나라가 덤벼들어도 절대로 깨지지 않았잖아요? 만약 그들이 해변가의 경치 좋은 무역 도로를 통해서 일주일 만에 쉽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 민족은 멸종당했을 것입니다. 

이 민족을 멸종시키고자 기다리던 가나안 땅의 종족이 있었습니다.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기르가스 족속이 있었습니다. “이 놈들, 오기만 해봐라! 다 없애버리겠다.” 그런데 그 반대가 되었잖아요?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살아남았습니다. 지구상의 모든 종족이 다 멸종한다 하여도 그들은 살아남는 강인성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히틀러가 6백만을 죽일 때 “멸종시켜 버려야지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내가 너희를 이렇게 훈련해야만 너희를 통한 인류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너희들은 가나안 땅에서 살아야 된다. 그 땅은 가나안 31족이 있는데 너희가 그렇게 강인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것이다.” 결국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고 그 복음이 온 세계를 지배하는 역사가 이루어졌잖아요? 

저는 지금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자녀들의 문제가 뭐냐? “고난을 이겨내지 못하는 유약한 문화에서 자라고 있다.” 자녀가 하나둘이니까 다 왕자같이, 공주같이 길러냅니다. 고난을 못 이깁니다. 아무것도 못합니다. 뭐든지 필요를 다 들어줘버립니다. 자기 힘으로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여러분, 군대 들어갈 때가 얼마나 강인한 나이입니까? 인생 중에서 가장 강인한 힘과 에너지를 소유하고 있을 때 군대 나가잖아요? 우리나라 군대 자살률이 얼마나 높은지 아십니까? 왜 그래요? 유약한 문화에서 왕자같이 살아왔기 때문에 군대 훈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겁니다.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집니다.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자살률 1위입니다. 부모들은 자식이 돈이 필요하다고만 하면 “그래, 그래!” 주고, 말만 떨어졌다하면 “네, 네! 왕자님, 뭐가 필요하십니까?” 자기가 사회 나가서 피땀 흘려 노동을 하고 시간당 돈 몇 천원을 받아 들었을 때 “와! 돈이 이렇게 귀중한 거였나?” 그때 비로소 알게 되잖아요? 

외국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쯤 되면 나가서 그렇게 경험을 다 하게 합니다. ‘부모가 주었던 돈의 귀중함이 이런 거였구나!’ 히브리 민족은 광야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자라고 민족의 강인한 유산이 물려지게 되었습니다. 물이 없어 갈증을 겪었을 때 그들은 물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것을 배웠기 때문에 소중함을 깨달았고 애굽에서는 나일 강 삼각주에 살았기 때문에 나일 강 유역의 풍부한 물이 귀중한지 몰랐습니다. 그들이 들어가고자 하는 땅은 역시 물이 귀한 땅입니다. “메마른 사막에 훈련 없이 거기 가서 살지 못한다.” 노예로 살다가 해방은 받았으나 자유를 누리는 값이 얼마나 크다는 사실도 그들은 체험했습니다. 절반의 사람들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 생활을 계속 하자고 소리쳤습니다. 금송아지 만들어놓고 춤추다가 3천명이 “왜 하나님의 뜻을 거슬러?” 무참하게 죽지요? 이런 역사를 통해서 이들은 신앙 훈련이 되었습니다. 

지금 제가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교가 교인들 신앙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길잡이 역할입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방향 제시를 합니다. 신앙이 자라는 것은 체험이라야 됩니다. 체험을 통한 신앙만이 굳셉니다. 저는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를 잘하셨어도 내가 꿈쩍도 안했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 사건을 만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체험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예수님께 직접 설교를 들었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가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니까요. 모세의 그 좋은 설교를, 하나님 말씀을 직접 들으면서 모세가 설교했잖아요? 그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다 바알 숭배자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듣는 거 신앙에 도움은 줍니다. 그러나 아주 강인한 신앙이 마련되는 것은 체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지금 광야에서 체험시키시는 겁니다. 온갖 고난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교육을 시키시는 겁니다. 구름 기둥이 움직이면 그들은 아무리 정착해서 좋은 조건의 장소라도 떠나야 했습니다. “여기 이렇게 좋은 장소가 있는데 여기서 좀 오래 살면 안 되겠습니까?” “구름이 움직이잖아!” 또 구름 기둥이 머물면 아무리 살기가 열악한 사막 한 복판일지라도 그곳에 진을 쳐야 합니다. “여기서 어떻게 삽니까?” “하나님이 멈추라고 하지 않느냐?” 때로 우리의 이성의 명령과는 반대 방향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군중들에게 “너희들 마음대로 갈 길을 정해서 가라.” 그랬다면 100퍼센트가 무역 도로로 닦여진 해안 도로를 따라서 한 달 만에 가나안에 갔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오늘 말씀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만약 우리가 영혼에 눈을 떠서 하나님의 인도를 불 기둥, 구름 기둥과 같이 볼 수만 있다면 우리 주변이 아무리 몰아치는 사막의 열풍 속에서도 절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갈 길이 분명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들 중에 단 한 사람이라도 식량이 없어서 광야에서 굶어죽은 자가 있느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함으로 심판을 받아 죽었지 생활여건이 열악해서 고난을 당했지만 죽은 사람이 있느냐? 없지 않느냐?” 

오늘 말씀에 모세가 애굽을 떠날 때 요셉의 무덤을 헤치고 해골을 꺼내들고 가지고 나갔다고 했습니다. 뭐하는 겁니까? 창세기 50장에 요셉이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110세에 죽으면서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권고는 어느 때가 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저 언약의 땅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거기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함으로 말미암아 갈보리 산에 십자가를 통해서 온 세계 만민이 구원받을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땅이었잖아요? “그곳으로 가야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할 땅은 그곳,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이지 애굽 문명 속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그래서 너희를 권고해서 너희를 떠나게 하실 것이다. 그때 내 무덤을 헤치고 내 두개골을 꺼내서 함께 가지고 가다오.” 

요셉의 장래 예언의 말을 따라서 그대로 하는 겁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적을 하고 발밑에는 홍해가 있고 사막과 기근이 열풍으로 모래 바람을 일으켰지만 그들은 구름 기둥, 불 기둥을 바라보는 믿음 하나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켰습니다. 지금은 그 작은 민족이 지구상에서 절대 무시 못 할 억센 민족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큰 문제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보호인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었다는 성경 말씀 하나를 보면서도 내 앞에 있는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은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앞에는 이 기둥이 항상 서있으며 우리 민족 앞에 그 기둥이 서있는데도 보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데도 보지 못하고 믿지도 않으면서 뭐라고 그럽니까? “돌아가자. 무엇 때문에 우리를 끌고 나와서 이 모래 벌판에서 이 고생을 시키는가? 돌아가자. 모세를 죽이고 돌아가자.” 아니면 “하나님이 꼭 가라는 대로 가야 되느냐? 왜 하나님이 이상한 데로 가게 하느냐? 지름길로 가자.” 모두 다 심판 받았습니다. “무슨 소리야?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움직여!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 생각은 달라.” 예언자 조상의 해골을 꺼내들고 그 예언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시나이 반도 모래벌판을 40년 헤매던 민족을 우리가 기억할 때 ‘아! 내 앞에는 하나님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이 있구나. 

우리 교회가 가는 길에는 불 기둥과 구름 기둥이 있으며 이 민족이 가는 길에도 있구나.’ 영적으로 볼 수 있을 때 사막은 통과하는 겁니다. 내 앞에 세워지는 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발견하셔야 합니다. 아무리 어둡고 비참한 역사가 우리 현실 앞에 있다 하여도 이 하나만을 볼 수 있으면 가나안 땅의 성취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언제 남북통일이 될 것인가?’ ‘언제 이 민족은 그러한 세상을 만날 것인가?’ 우리 민족의 과제도 있고 교회 과제도 있고 나 개인의 과제도 있습니다. “우리 민족 앞에 불 기둥이 있어! 민족의 구름 기둥이 있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이 민족의 손을 잡고 가시는 거야. 하나님은 내 손을 잡고 내 앞에 불 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나를 지금까지 인도하셨으며 앞으로도 영원해! 이 믿음 하나로 이기는 거야.” 

오늘 성경 말씀의 마지막은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구름 기둥은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의 보호의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은 내 앞에서 떠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에 가장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만 그렀습니다. 여러분, 모두 믿음의 승리자가 되십시오.

「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불 기둥은 서있습니다. 지금도 구름 기둥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 믿음의 문을 열어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는 불 기둥을 보게 하시고 구름 기둥을 우리 교회가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은 그 믿음을 가진 자의 손을 잡고 이 땅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어오셨습니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그렇게 쓰임 받게 하시고, 갈보리 교회가 그렇게 쓰임 받게 하옵소서. 갈보리 앞에 비춰지는 구름 기둥을 바라보면서 순례자의 노래를 부르면서 이 사막을 통과하는 지혜로운 백성들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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