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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시 40:1~2, 눅 23:5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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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 (시 40:1~2, 눅 23:50~51)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난 세시부터 행복해지겠지”. 기다림은 행복이고, 기다림은 사랑입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상실이 아닙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에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다리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갑절의 축복이 준비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기다림은 그 자체가 인생입니다. 사람을 기다리고, 전화를 기다리고, 좋은 날을 기다리고,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는데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사람은 커집니다. 
  
성경에서 기다림은 신앙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것을 알고 120년을 기다렸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이삭이 태어나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기다리지 못해 에서를 낳았습니다. 기다리지 못한 결과가 그 가정의 불화의 씨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대한 약속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꼬박 백년이 걸렸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언제나 총알 같은 속도로 다가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더디고 느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앞에서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시편 40:1에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합니다. 시편의 기자가 하나님을 기다리는 간절함이 우러납니다.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말은 ‘카오 키위티’라는 말로서 연속적 행위를 의미합니다. 간절하면 만나주십니다. 부르짖으면 들어주십니다. 시편기자는 그를 통하여 경험하고 터득한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영적 성숙이란 하나님을 참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때를 인내심 있게 기다리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게리 토마스는 초대교회에서는 인내와 기다림이 그리스도의 제자라는 증명서였다고 합니다. 부름 받았다는 것은 기다리라고 부탁 받았다는 뜻일 때가 많습니다. 기다림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우리의 자세입니다. 
  
베드로후서 3:9에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잘 기다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 있는 숨은 제자였습니다. 마태는 단순히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지만 마가는 누가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그는 메시아 왕국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변치 않고 믿었습니다. 그는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가 어떤 자인지 살펴보고 우리도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50절에는 “공회 회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51절에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흔히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에는 여러 명의 요셉에 나오는데 다른 요셉과 비교하기 위하여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아리마대는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요즘의 지명 ‘렌티스’(Rentis)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를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선과 의는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닮으면 하나님처럼 선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성품은 인간적 능력이나 의지로 얻어질 것이 아닙니다. 선과 의를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하여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선과 의가 분명히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위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므온이라는 할아버지입니다. 2:25에는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이 사람은 간절히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어린 예수님을 안고 찬송하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안나라는 여인입니다. 

2:36-37에는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가 매우 많았더라. 그가 결혼할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과부가 되고 팔심 사세가 되었더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라고 합니다. 안나도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는 자는 한 결 같이 선하고 의로운 자입니다. 경건한 자입니다. 사람에게 선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분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사람들이나 다른 모든 것들의 선함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충실성의 보증입니다. 
  
우리 인간은 선과 악의 중간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습니다. 흔히 인간성을 말할 때에 성선(性善)과 성악(性惡)을 말합니다. 이 둘 다 이유가 있고 당위성이 있습니다. 사람은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은 절대적입니다. 반면에 인간의 선은 상대적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악을 피하는데 그치지 말고 선을 추구해야 선해질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선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선이 없는 의는 없습니다. 동시에 의가 없는 선은 없습니다. 착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 착한 사람입니다. 착하지 않은 좋은 사람을 봤습니까? 좋지 않은 착한 사람을 봤습니까? 요셉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었던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벨을 보세요. 그는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성경는 그를 “의로운 사람이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라고 합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합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의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극찬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라고 합니다. 옳은 것이 무엇입니까? 옳고 그른 것의 분별력을 가진 자가 옳은 사람입니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는 주5일 동안 하루 24시간 비디오테이프를 복사하는 회사가 있습니다. 포르노의 거물 존 스타글리아노가 창립한 성공기업 중의 하나인데 이 회사의 이름이 ‘악한 천사 비디오’(Evil Angel video)입니다. 포르노 산업은 연간 100억 달러 이상 매출을 올리고 있는 기업입니다. 만약에 인간의 정욕을 없애버릴 수 있다면 역사상 최대의 경제 공황에 빠질 것이라는 추측을 합니다. 인간의 악이 정당화되고 악이 인간적 번영의 도구가 되고 있습니다.  
  
선한 도구를 악하게 쓰는 것이 죄입니다. 의로운 도구를 불의하게 만드는 것이 악입니다. 악과 불의는 항상 친구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비뚤어진 형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실한 인간의 자화상입니다. 
  
시편 130:6에는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고 합니다. 이 간절한 기다림을 누가 합니까? 선하고 의로운 자가 합니다. 우리가 이런 간절함으로 기다리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는 불의에 찬성하지 않습니다. 

51절을 보세요. “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고 합니다. 요셉이 공회원이라는 신분을 가졌지만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음을 해명하고 있습니다.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고 행사했지만 요셉은 반대했습니다. 공회원이었지만 음모와 실행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죽이려는 음모와 사형집행 등 공회의 행사는 ‘불의한 일’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반대한 것입니다. 마태는 단순히 요셉을 부자이며 예수님의 제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공회원의 신분을 가지고 있었고 공회원으로서 반대한다는 이 둘이 다 어렵습니다. 부자이기 때문에 공회를 반대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에 공회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을 때인데 사회적 힘에 반대하는 것은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나 국가의 공권력에 대해 누가 반대합니까? 부자입니까? 지위가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무산자입니까? 노숙자입니까? 사회적 지위나 재산이 없는 사람은 사회적 힘에 반대하는 것이 쉽지만 있는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요셉은 모든 사람이 다 찬성할 때 반대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니까 가능하였습니다. 
  
마가복음 15:43에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다 도망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신의 신분을 노출하면서 시체를 달라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성경은 “당돌히”라고 합니다. 세상의 불의와 짝하지 않으면 당돌해집니다. 의로운 마음은 당돌해집니다. 의로운 사람에게는 하나님 외에는 무서운 게 없습니다. 
  
흔히 우리가 ‘화가 났다’고 합니다. 때로는 ‘의분(義憤)이 치솟다’라고 합니다. 화와 의분의 차이를 아십니까? 정의나 국가나 신앙 때문에 내는 화를 의분이라고 합니다. 아무 때나 화를 내는 사람은 의롭지 못합니다. 의로운 사람은 불의한 데 대해 화를 냅니다. 그래서 의로운 화를 의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37에는 예수님께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합니다. 옳은 것을 아니라고 한다거나 아닌 것을 옳다고 하는 것은 다 악에서 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선한 것이 아닙니다. 
  
신문에 보면 ‘강압에 의한 허위자백’이니 ‘여론재판’이니 하는 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진실이 아닌데 진실처럼 꾸며 죄인을 만드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한 사람을 몰아 죄인 취급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진실이 아닌 불의한 결정이며 불의한 판단입니다. 이런 불의한 결정과 판단이 수없이 많은 세상입니다. 이런 때도 의를 고수하고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이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작가 허먼 멜빌의 ‘화이트 재킷’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선원이 심각한 위장병에 걸렸습니다. 그 배에 타고 있던 의사 커티클 박사는 자신의 의술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뻐했습니다. 알고 보니 위장병 환자의 병은 맹장염이었습니다. 맹장염에 걸린 선원을 수술대에 눕혀 놓고 의술을 통해 수술을 진행합니다. 의사는 정확하게 수술 부위를 절개하고 맹장을 잘라냈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선원들에게 해부학적 설명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의 복부의 속을 본 적이 없는 선원들은 신기하게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의사는 자신의 일에 몰두하였고 수술을 마치고 봉합할 때쯤에는 오랜 수술 시간 때문에 환자는 죽은 상태로 누워있었습니다. 의사는 너무 열심히 설명하였고, 또 의사의 권위 때문에 선원들은 환자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죽은 사실을 말해주지 못했습니다. 누가 환자를 죽였습니까? 의사입니까? 아닙니다. 모두 함께 죽인 것입니다. 선원들이 함께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해 주어야 했습니다. 의로운 말을 못했기 때문에 환자가 죽은 것입니다. 

현대과학이나 발달한 현대사회 심지어 신학까지 예수님을 죽이고 있습니다. 복음을 왜곡하고, 신앙을 폄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입을 다물고 한마디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도 죽이는데 가담한 자입니다. 공모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았지만 사형을 집행하게 방조한 죄로 지금까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불의에 대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요셉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용기, 입을 벌려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는 당돌함,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예수님을 옹호하는 담대함, 이런 아리마대 요셉의 지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브루스 바튼은 그의 책에서 “불의를 지나치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3:6에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절대 불의를 기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상대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데이트할 때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별로 가치가 없는 상대는 기다리지 않고 가버립니다. 가치 있는 상대는 몇 시간이라도 기다립니다. 맛있다고 소문난 식당에 가보세요. 점심시간에 설렁탕 한 그릇을 먹으려고 30분도 기다립니다. 그리고 10분 만에 먹고 가야합니다. 그래도 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기다리는 일입니다. 세상의 어떤 일보다 가치 있는 일이 가다리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생, 온 정성으로 기다릴 가치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아버지’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성은 기다림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조급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느긋하게 얼마든지 모든 사람이 다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다 들어올 때까지 절대로 문을 닫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은 선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 불의에 찬성하지 않는 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선하고 의로운 마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예수님을 보호하고, 목숨으로 복음을 수호하는 자가 다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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