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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온유한 자는 행복하다 (마 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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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유한 자는 행복하다 (마 5:5) 


예수님은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행복한 사람은,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둘째는 “애통하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하고 애통하는 모습이다. 

따라서 행복한 사람이 되는, 가장 분명한 방법은, 예수님을 닮으면 된다. 예수님은 “온유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셨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11:29)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을 닮으면 행복하게 된다. 농담이지만, 온유한 자의 복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복이다. 

부동산 투기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땅을 주신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땅을 가지고 싶다면, 온유한 자가 되기 바란다. 온유(溫柔)하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따뜻할 온, 부드러울 유이니, 마음씨가 따뜻하고 부드러움을 말한다. 부드러움은 약하다는 말이 아니다. 

현대는 힘을 숭상하는 시대다. 약하면 억울한 일을 당해서, 눈물이 나는 경우가 많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 더욱 힘을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무언가 없어 보이면, 돈도 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노래도 나왔다. “아아 억울하면 출세를 해라, 출세를 해라”고 하였다. 

당시 유대민족은, 불쌍한 민족이었다. 좋은 것들을 로마인에게, 빼앗기며 살았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속에는 한이 맺혀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힘을 길러서, 로마와 싸워 이겨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마음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은, 자연히 유약한 성격을 생각하게 된다. 성격이 부드러워, 남에게 싫은 말을 한 마디도 못하고,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비굴하게 굽실굽실 거리는 사람으로 보여, 온유함이 그렇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특별히 착한 사람보다, 악한 사람이 잘될 때, ‘착하면 거지되기 쉽다.’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온유하다는 말은, 연약하다는 말로 인식되기에, 현대인을 온유하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겸손하고 온유하신 예수님은, 현대인에게는 매력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온유하다는 말은, 연약하다는 말이 아니다. (잠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온유한 자)는 용사보다 낫다”고 했다. 이빨은 강하고, 혀는 강하다. 이빨에 혀가 물리면, 정말 아프다. 그런데 이는 쉽게 달아 없어지지만, 혀는 죽을 때까지 달아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온유는 약한 것이 아니다. 

1. 온유는 프라우스(πραυς)인데, 3가지 경우에 사용했다. 

(1) 어떤 환자가 고열이 있어서, 의사가 준 약을 먹고,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왔을 때 “온유하다”고 하였다. 즉, “그 뜨거운 열이 다스려졌다. 진정되었다.”는 말이다. 

(2)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을 뻘뻘 흘리는데,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면, ‘온유하다’고 하였다. 기분 좋게 만드는 바람이다. 

(3) 가장 많이 사용된 용도는, 사나운 짐승을 훈련시킬 때이다. 야생마는 힘이 좋지만, 길들여지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탈 수 없다. 그러나 훈련시켜 말을 잘 들으면, 프라우스!(온유해졌다)고 하였다. 충동, 격동, 감정을 잘 조절할 수 있는 힘이, 유익한 목적을 위해 사용될 때, 온유하다고 말한다. 

자신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참음을 ‘온유’라 한다. 
우리 모두는 잘못하면 폭발하기 쉬운, ‘분노’라는 강력한 폭탄을 갖고 있다. 분노를 잘 다스리는 능력이, 우리에게 없으면 언제든지 폭발해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이것이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 온유한 자가 될 수 있고, 온유하지 못한 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수양을 통해, 자기감정을 통제할 수 있고, 화를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온유는, 자기 힘으로 적당히 조절하면서 얻을 수 있거나, 수양하면서 얻을 수 있는 온유가 아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이, 철저하게 나를 다스림으로써 나타나는 온유다. 성령의 열매로 온유가 나타난다. 성령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온유함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의 사람들은, 온유한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살다보니 갈등이 생겨서, 갈라서야 할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강자이기에, 온유한 마음으로 롯에게 먼저 선택하라고 한다. 요셉은 형들에게 배신을 당해, 노예로 팔렸다. 그래서 애굽의 보디발 장군의 종으로 팔려들어 갔다. 

그런데 보디발 장군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물리쳤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갔지만, 끝내는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이제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보디발 장군과 그의 아내에게, 원수를 갚았다는 구절이 없다. 

자기를 팔아버린 형제들이 애굽에 왔을 때, 형들을 원망하지 않는다.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이 어려웠을 때, 민족을 위하여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다. 사울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사울은 너무 고마워서, 자기 딸을 아내로 주었다. 

그런데 다윗의 인기가 높아지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자, 다윗은 사울을 피해 숨어 다닌다. 사울은 다윗을 계속 죽이려고 다윗을 추적한다. 다윗이 동굴에 피신하여 숨어있었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추적하다가, 피곤해지자 동굴에서 잠을 잤다. 

다윗은 사울의 목을 벨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다윗은 칼을 빼서, 사울의 옷자락만 밴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에게,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린,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붓고, 저주하였다. 만일 예수님께서 혼내주시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겼다’ 온유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온유의 반대다.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온유함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온유하심이 있기를 바란다. 

2. 그렇다면 우리에게, 온유함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 

우리가 언제 화를 내고, 화를 내지 말아야 하나? 화를 내도 온유할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이런 질문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이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를 얼마든지 꺾을 힘이 있는 분이시다. 그러나 꺾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셨다. 훅하고 불어서, 끌 수 있는 힘이 있지만, 끄지 않고 기다리셨다. 온유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자기 자신과 유익을 위해, 화내신 일이 한 번도 없다. 

나사렛 촌놈이라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모욕하고 경멸했을 때에도, 이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 번도 없었다. 바리새인 집에 초대를 받아서, 식사를 할 때도 거지를 초대한 것처럼, 전혀 예우를 해주지 않고, 박대를 당했지만, 그것 때문에 화를 내신 일이 한 번도 없다. 

예수님이 화를 내신 일은 언제였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 화를 내셨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며,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실 때, 화가 나셨다. 그래서 그들을 쫓아내셨다. 나를 위해 화를 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화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온유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들을 멸망으로 끌고 가는 불의와 죄악을 보실 때 화를 내셨다.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자리로 끌고 감을 볼 때, 그 불의를 참지 못하시고 ‘독사의 자식들아, 뱀의 새끼들아’하면서 화를 내셨다. 이것이 온유이다. 

(1) 억울한 환경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은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시37:11)를 인용한 말이다. 이는 다윗의 시인데, 그가 고통스런 환경 중에서 읊은 것이다. 

(시37:1)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했다. 억울하나요? 믿음의 사람은, 억울할 때 온유함을 나타낸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그 상황에서 온유한 인격과 태도는, 나타나야 한다. 

중국에서 농사를 짓는 어떤 농부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밭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의 밭은 맨 꼭대기에 있었다. 그는 밑에 있는 저수지에서 물을 길어, 열심히 물을 길어 농사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밑에서 농사짓던 다른 농부가, 이 농부의 밭의 물꼬를 터서, 자기 밭에 물을 대었다. 

이런 얌체가 어디 있는가?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농부는 참고 또 참았다. 자신이 참고 견디면, 밑에 있는 밭주인이 반성하리라 생각했는데, 전혀 변화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농부가, 교회지도자를 만나서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교회지도자는, 내일부터는 그 사람의 밭에 물을 먼저 채워주고, 그 다음 자기 밭에 물을 채우라고 조언해 주었다. 농부는 그렇게 했다. 그 사람의 밭에 물을 대고, 자기 밭에 물을 채우자, 그 모습을 목격한 아래쪽 밭주인이, 즉시 달려와서는 용서를 구했다고 한다. 

(2) 말씀을 받는 태도가 온유해야 한다. 
(약1:19-20)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성냄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 적이 없다. 성냄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약1: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하였다. 

사울 왕과 다윗 왕은,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둘 다 책망을 받았다. 그런데 책망을 받는 사울 왕과 다윗 왕의 태도가 아주 달랐다. 사울은 사무엘에게 책망 받았다. 그러나 사울은 변명으로 일관한다. 반면 다윗은 나단 선지자에게 책망을 받는다. 

그는 한 나라의 왕이었지만, 보좌에서 내려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이 죄를 범했다고 회개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하셨다. 이렇게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책망을 달갑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온유하지 못한 자는, 책망을 받지 못한다. 

(3) 죄를 범한 자에게 온유해야 한다.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여기서 ‘바로 잡아라’(카타르티조)는 말은, 2가지 경우에 쓰였다. 
① 탈골된 뼈를 제자리에 갖다 맞출 때이고, ② 그물이 찢어졌을 때 원래의 상태대로 회복시킬 때에 사용한다. 이 말의 초점은 ‘회복’이다. 범죄한 자를, 더 좋은 상태로 돌려놓음을 말한다. 

그 사람의 잘못을 보았을 때, 사랑하며 안타까운 마음으로 충고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고치지 않는다면, 따끔하게 충고해서 회복시켜야 한다. 예수님은 성품은 온순하지만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무섭기도 했다. 온순함과 온유함은 다르다. 온유는 불의한 일에, 분노할 줄 안다. 

바리새인을 행해 (마23: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호통 치셨다. 이 얼마나 무서운가?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서는 참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하는 일에는 참지 않으셨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 받으시되, 위협하지도 않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 

(4) 공동체의 하모니,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 온유해야 한다. 
하나가 되는데 제일 중요한 것은, 온유한 태도이다. 온유하지 못한 발언, 태도, 인격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개인과, 가정, 그리고 교회가 큰 상처를 받게 되고, 하모니가 깨어진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남에게 큰 상처를 주고서 “남자가 쩨쩨하게 아직도 그런 것을 잊지 못하냐? 잊어라. 나는 앞에서는, 그래도 뒤끝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절제되지 못한 말 때문에, 상대방은 이미 상처를 입고, 신음할 수 있다. 성냄으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에 남긴 상처는, 오래 간다. 

그래서 성도는, 내가 이 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은 어떤 모습으로 받을까? 생각해야 한다. 온유한 자는 다른 사람과 화평하며, 친절하며 이해심이 많기에, 인간관계를 바르게 맺으며 살아간다. 남을 존중히 여기며 서로 격려하며 허물을 덮는다. 온유는 관용을 말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차츰 고독하게 살게 된다. 그 이유는 남을 정죄하고, 비난하기 때문에, 친구가 없어지고, 모두 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형제들과 함께, 이해하고 참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요즘은 자기 위주로 성장해서, 남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생활이 점점 어려워진다. 

(5) 반대자에게 온유해야 한다. 
(딤후2:24-25)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라고 하였다. 

목사는 특별히 온유해야 한다. 특히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을, 잘 다뤄야 한다. 목사도 사람이기에 실수할 수 있으니, 온유해야 한다. 요즘 성도들은, 목사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도들의 잘못을 지적하면, 온유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물론 강단에서 까는 설교를 하면 안 된다. 

모세의 누나 미리암은, 모세가 장가를 들 때, 구스 여인을 처로 맞았다. 구스 여인은 에티오피아 여인으로 피부가 까만 사람이다. 그래서 비방하기 시작한다. 모세는 형 아론과 누나 미리암의 비방 소리에, 아무 소리 않고 침착하게 행동한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모세를 보시고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하신다. 그리고 가만히 있는 모세를 대신하여, 그 문제를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 하나님이 이런 심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 같다. 

“미리암아, 너 얼굴 하얀 것이 그렇게 잘났니? 네 올케 구스 여인이 검은 것이, 너 보기에 그렇게 흉하냐? 그렇게 하얀 것이 소원이냐? 그렇다면 내가 네 얼굴을 새 하얗게 해주마.” 그래서 미리암은 문둥병에 걸렸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해야 한다. 특별히 가진 자는, 더욱 온유해야 한다. 

3. 온유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축복하시는가?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 ‘너희에게 힘이 주어져서, 세상을 정복한다.’가 아니라,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한다. 우리 힘으로 세상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기업으로 얻는다. 

총칼을 가지고 땅을 빼앗는다는 말이 아니니, 싸울 필요도 없고, 빼앗을 필요도 없다. 가만히 있으면 손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유산이다. 남의 것을 훔쳐내는 것도 아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주신다. 이처럼 온유한 자는, 세상에서 손해보고, 무너지는 것같이 보이지만, 승리하는 존재다. 

그러면 땅은 무엇인가? 땅은 이스라엘 민족의 ‘생존의 터’이다. 땅은 성도의 기업이요, 하늘나라의 약속이다. 땅은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의 현장이다. 인간은 땅에서 살고, 주님의 나라는 땅에서 이루어진다. 천국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땅을 약속하심은, 신비한 비밀이다. 그 땅은 가나안 땅이다. 광야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살 땅이다.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시려고 약속하신 땅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곳은,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는 땅이 아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은, 신앙과 성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얻어지는 땅이다. ‘젖’은 땅의 풍부한 소산 품이요, ‘꿀’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다. 인간의 심령 속에 말씀의 젖과 말씀의 꿀이 흘러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땅이다. 이 젖과 꿀이 흘러넘치는 심령은, 곧 천국이 된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기에,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정의가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차별 없이 인권이 존중되고, 자유가 보장되는 땅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을 원하신다. 성숙한 인격이다. 하나님은 온유한 인격을 위해 연단하신다. 주님은 시련을 통해, 온유하도록 만드신다. 

사정없이 때려서, 고집을 꺾어서, 버릇을 고쳐주신다. 우리의 환란과 어려움을 통하여, 하나님은 나를 온유하게 만드시는 것이다. 

결론이다. 나폴레옹은 야욕을 채우기 위해서, 프랑스 영토를 다 차지하고, 유럽 전체를 말발굽으로 점령했으나, 자신이 빼앗은 영토를 다시 다 빼앗기고, 부하들도 그를 다 버리고, 세인트 헬레나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나폴레옹의 마지막 말은 이렇다. 

“나는 오늘까지 나의 영토와 권세를 위해 일했고, 나의 부하를 얻기 위해 싸웠는데, 지금 내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예수는 영토도 없고, 부하도 없이, 십자가 위에서 힘없이 죽었는데, 오늘날 그를 따르는 자는 왜 그리 많은가? 

나는 강한 병정을 모았는데, 그는 사랑을 나눠주었다. 나는 이제야 알겠노라. 온유한 자가 마지막으로 승리하고, 온유한 자가 마지막으로 웃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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