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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롬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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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롬 8:28)

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렐루야!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랑합니다.

저는, 지난 주 화요일(15일), 이곳 익산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곳으로 이사하기 몇 주 전 난생 처음 한 번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이곳을 찾아오기 위하여 인터넷에서 지도 검색하다가 익산이 대단히 문화적인 도시라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익산 나들목(IC)에서 교회로 들어오는 지도를 살펴보다가 ‘(건설 중)’이라고 표시 된 ‘오페라 하우스’라는 글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오페라 하우스는 단지 음악의 한 장르를  공연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도시의 문화적 수준을 가늠하게 하는 시설입니다. 호주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는 도시의 품격을 세계적으로 드러냅니다. 2014년, 서울 노들섬에 오페라 하우스를 건설한다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익산에 오페라 하우스를 공사 중이라니! 
  
 하지만 익산 오페라 하우스는 사람들이 이미 사시더군요. 아파트 이름이었습니다. 저의 무식이 빚어낸 엄청난 착각이었습니다. 익산에 대한 하나의 재미있는 기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익산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워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따뜻한 환영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오해도 하고 착각도 합니다. 때로는 많은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의 삶에 전혀 문제가 없었을 때는 한 번도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 있는 모든 교회의 고향이자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의 한 대상인 예루살렘 교회조차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교인들에게 음식을 만들어 섬기는 구제 때문에 헬라파와 히브리파로 갈라져 불편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를 통하여 오히려 사도들은 본래적 사명인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게 되었습니다(행 6:4). 자칫 소모적인 싸움이 될 수 있는 문제였지만 도리어 교회 조직을 세우고 사도들은 본질적인 사명에 충실하게 되었습니다. 은혜 안에서는 실패도 유익이 됩니다.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28절 전반 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먼저, 주목하려고 하는 말은 ‘우리가 알거니와’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지 사실을 이야기 합니다. 여기서 ‘알다’[/에이도]는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I.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마치 안개 속에 쌓여 동서남북이 분간되지 않는 경우들이 허다합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저 뜬 구름을 잡으려고 하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불가지론자’(不可知論者)들이 있습니다. 성경도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고전13:9)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과 우리가 경험한 것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의 은사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사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체험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애매모호하여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은 아닙니다. 신앙은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확실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고 확실한 것을 말합니다.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흔들리지 않는 진리를 붙들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확실한 것은 없다고 말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분명하고 확실한 진리를 붙들고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들이 알아야 할 것 중에 한 가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28절 후반 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사도 바울이 분명하게 알고 있는 것은, 그의 경험으로 통하여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할 그것은


II.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합력하여 이룬다.[/쉬넬게오]는 것은 ‘동역자가 되다’ 즉 ‘함께 일하다’는 것입니다. 함께 동료가 되어 서로 도와가며 일하는 것이 합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동료가 되어 좋은 결과를 가져오도록 일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무관심한 사람도 있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훼방하는 사람도 있는 가운데서 그들이 우리의 동료가 되어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얼핏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관점에 볼 때라야만 이해가 됩니다. 우리가 아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이루시느니라.’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작은 눈으로 볼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보이는 일들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는데 나름대로 쓰이도록 하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진행을 사람의 머리로 헤아릴 수 없을 지라도 결국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인생에 헤아릴 수 없는 일들이 있을 지라도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할렐루야!

그렇다면 무엇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까?
   
다시 28절 후반 절을 보겠습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할 것은 모든 것입니다.


III.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모든 것(all things)’이라는 말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은 ‘그저 만사가 다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전체와 최소한도 8:12이하의 긴 말씀 속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18절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이라고 하였습니다. 7장 마지막 부분에서 사도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고 탄식하였습니다. 8:22에서는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하였습니다. 모든 것이라는 말은 고난을 포함하여 모든 것입니다. 나아가 힘들고 어려운 일들에 더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좋은 일뿐만 아니라 나쁜 일도 포함하여 모든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뿐만 아니라 하기 싫은 일도 포함하여 모든 일입니다. 순종하는 일뿐만 아니라 순종하지 않는 일도 포함하여 모든 일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함께 동료가 되어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갑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도 결과적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가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는 ‘육체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심각한 질병이었습니다. 그것은 눈이 침침하고 눈곱이 끼는 안질이거나, 사람들 앞에서 거품을 내며 쓰러지는 간질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 성령이 임하고(행 19:6), 질병이 떠나갔습니다(행 28:8). 심지어 바울이 사용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갔습니다(행 19:12). 그런데 정작 그 자신의 병은 낫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세 번씩이 간절하게 기도하였지만 그가 들은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그의 질병은 그를 자만하지 않게 하는(고후 12:7) 동료였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하는(고후 12:9) 동료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모든 것이 -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는 것도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가도록 돕는 친구가 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제가 잘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너무 유명한 사람이기에 여러분 중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이 있을 터이니 우선 그의 이름을 편하게 영어 이니셜로 J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J는 불행한 가정에서 성장을 하였습니다. J의 아버지는 여성편력이 심하였던지 그에게는 배 다른 형제들이 여럿이 있었습니다. 유독 그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편애에 J는 형님들의 미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급기야 J는 형님들에 의하여 인신매매를 당하였습니다.
   
이 J가 누구인지 여러분은 아시지요? 영어로 ‘Joseph’, 우리가 잘 아는 ‘요셉’입니다. 그는 이복형제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갔습니다(창 37:28). 그의 형은 형이 아니라 그를 팔아버린 ‘웬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요셉의 형들은 동생 요셉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애굽으로 유학 보낸 사람들입니다. 

애굽에서 요셉은 성실하게 일하였지만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주인마님이 그를 유혹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에게 죄를 씌워서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창 39:20). 그런데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주인마님은 요셉을 애굽의 최고 일류대학에 시험도 보지 않고 넣어준 사람입니다.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들어가 애굽의 높은 관리들과 지내면서 애굽의 정치와 행정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애굽 왕의 음식을 담당하는 고급 관리를 만나 그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부탁하였으나 그로부터도 2년이라는 시간을 더 감옥에서 지나야 했습니다(창 40:23). 신세를 지고도 모르는 채 한 배은망덕한 관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를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게 한 사람입니다. 애굽의 고위 관리가 곧바로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면 기껏해야 감옥에서 나오는 정도였을 것인데 바로의 꿈을 해석하여야 할 가장 적절한 때 그를 기억하고 바로에게 추천하였기 때문에 총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먹은 형들이, 자신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다고 모함을 해서 감옥에 넣은 보디발의 아내가, 은혜를 입고도 잊어버린 애굽의 고위 관리가 요셉의 동료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요셉을 괴롭게 하는 사람이요, 모함하는 사람이요,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악한 꾀를 오히려 선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질병이 즐거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친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질병의 고통은 자신이 한 없이 나약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원망하고 낙심할 수도 있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려고 이런 어려움을 주시는가를 살펴보면 질병을 친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웬수’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역시 그 웬수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을 이루게 하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협력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 모든 것이 잘 될 것 같지만 거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지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더욱 기도하고 하나님께로 돌아 갈 수 있습니다.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겪는 것이 좋은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의 선을 이루는 동료가 될 수 있습니다. 흔히 살아가면서 연륜이 쌓인다고 합니다. 이 때 연륜은 나무의 나이테를 가리킵니다. 나이테는 나무가 자랄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있고 쑥쑥 잘 자랄 수 있는 따스한 여름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항상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는 나이테가 없습니다. 그런 나무도 나름대로 유용하게 쓰이지만 나이테가 있는 나무라야 목질이 단단하여 유용하게 쓰입니다.

시편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
   
여러분은 자신의 탄식과 고난과 슬픔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습니까?
   
아멘!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삶에서 경험하십시오. 우리는 사실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탄식할 때 우리만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성령께서 탄식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와주셔서(롬 8:26)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가도록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모든 일이 합력되는 것입니다. 성령님 안에서 우리의 슬픔도 기쁨도, 고난도 영광도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여러분에게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는 믿음의 눈이 열려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까? 안 되는 사람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까?
   
다시 28절 전반 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지만 항상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은 누구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IV.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1988년 8월 8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88서울 올림픽이 열리는 해의 8월 8일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 날, 저는 다음 주일의 설교 준비를 하기 위하여 설교 준비 노트에 요한복음 3:16을 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를 막 쓰는 순간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온 몸으로 믿어지면서 가슴은 벅차오르고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다니!
   
저는 그 이후 감정적으로 높고 낮음이야 있었겠지만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미력하나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어려운 순간도 있었고, 어떡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황에 빠지기도 하였고, 몹시 견디기 힘든 사고도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가 고백한 것처럼 감히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 15:10)이라고 저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입니다. 먼저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사랑을 베푸시고 그 사랑을 깨달아 알라고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성공 같으나 실패입니다. 
   
갈릴리 바닷가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옵고도 고기 잡으려 가노라는 베드로를 따라 고기 잡으러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찾아오셔서 그들의 빈 그물을 채워주셨습니다. 떡과 생선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왜 세 번씩이나 나를 모른다고 하였냐고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살아난 나를 보고도 어찌하여 다시 고기 잡으러 왔느냐고 나무라지도 않
으셨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믿음이 없느냐고 추궁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요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6)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 21:17)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는 물음이도 합니다. 우리는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다만 그 사랑을 보시고 우리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으로 부르신 것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때로는 교회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마음 상하는 일도 있고, 몸을 헤치는 일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는 슬픔과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교회를,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다.
   
이제 그 사랑에 메여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기로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작은 몸짓으로 하나님을 사랑을 세상에서 실천합시다.

자신의 삶과 교회의 자리와 이 민족의 역사에서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것을 보기 위하여 하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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