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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택한 백성의 의미 (벧전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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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한 백성의 의미 (벧전 2:9~10)

 
내 용 제 기억으로 30여 년 전 미국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이 기억납니다. 한 밤 중에 친구 목사가 전화를 해서 지금 여기 연고자를 잘 알 수 없는 50대의 한 목사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 목사가 장례식을 위해 나서서 수고를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어떤 목사님의 장례식을 제가 나서서 도와드린 일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의 사연은 대략 50세에서 51세가 되는 나이에 돌아가셨는데 5년 전에 미국으로 유학을 오셨다고 합니다. 유학비를 자기가 마련해야 되니까 낮에는 단순 노동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어서 자기도 살고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생활비도 보내고 했으니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또 40대 중반 기억력이 점점 약해지는 시기에 한국말도 아닌 영어로 박사 과정을 하려니 저도 미국에 가서 경험한 일이지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자포자기할 때도 많고 아주 힘듭니다. 

누가 다 돈을 대주면서 공부만 하라고 했으면 그런대로 열심히 하면 되겠지만 모든 경제적인 문제를 내가 해결해서 가족들까지 책임지면서 그 어려운 공부를 영어 단어를 찾아가면서 하려니까 보통 고생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분은 의지가 강하셔서 ‘내가 기어코 이것을 하고야 말겠다.’ 그래서 거의 5년으로 이제 마지막 학기로, 몇 달만 더 끝내면 되는데 마지막 공부하던 교실에서 육체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쓰러지셨습니다. 다시 못 일어나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국에 여러 가지로 수소문해서 사모님과 큰 아들이 미국에 왔습니다. 가족들이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박사 학위를 다 했다고 몇 달만 기다리면 학위를 받고 금의환향할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또, 다른 계획도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에 나오시지 않으면 자녀들을 다 미국으로 데려다가 미국에서 교육을 시킬 계획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두 가지 중에 하나가 거의 이루어질 시기에 좋은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장례식을 치르러 오라고 연락이 오니까 얼마나 슬퍼요? 사모님이 얼마나 슬프게 우시는지 제가 장례식 집례를 못하겠습니다. 같은 목사 입장에서 저 사람이 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생각이 나면서 슬퍼서 어떻게 할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그 목사님뿐만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서 항상 있는 일입니다. 

목회하면서 참 마음 아픈 일을 우리 교인들이 너무 많이 당했습니다. 이것도 제가 한밤중에 전화 받은 일인데 밤 11시 넘어서 4시 사이에 미국에서의 전화는 다 사고입니다. 1시나 2시 경에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저 누구입니다.” 이 아가씨는 방송국 어린이 프로그램을 담당하던 아나운서였습니다. 미국에 공부하러 와서 공부하다가 한밤중에 끔찍한 일을 당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누군데 나 좀 빨리 와서 도와주시고 경찰을 불러주세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데 ‘아, 이거 사고다!’ 그래서 경찰을 불러서 가보니까 어떤 나쁜 놈이 그 아가씨가 혼자 사는 걸 알고 성폭행하러 들어온 것 같습니다. 집의 창문이 열려 있었고 피나는 저항을 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범인의 손가락을 입으로 물었는데 얼마나 강하게 물었는지 손가락이 땅바닥에 끊어졌습니다. 

이 아가씨는 이빨 다섯 개가 빠져서 피투성이였습니다. 저를 불러놓고 소파에 기절해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엄마가 주유소를 해서 버클리 의과대학 졸업시켜서 이제 졸업하고 약혼하고 잘 살려고 하는데 엄마가 경영하는 주유소에 아침에 나가서 도와드리려고 나갔다가 강도의 총을 맞고 쓰려진 청년도 있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집례 했습니다.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면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장례식을 집례 해야 되는 사람인데 뭐라고 설교를 해야 됩니까? 성경에 있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복된 것이다. 하나님 믿고 죽은 사람은 복 받은 것이다.” 그러면 거기서 제가 “아! 성도의 죽음은 복되도다.” 이렇게 설교를 해야 됩니까? 어떤 때는 막 관을 붙잡고 놓지를 않는 겁니다. 막 몸부림을 치는데 미국 같은 나라는 뭐든지 시간에 맞춰야 합니다. 장의사는 시간에 맞게 마치고 물러나야 다음 순서가 있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주지 않으면 복잡한 문제가 생기니까 항상 미리 이야기를 합니다. “11시에서 12시 사이에 마치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떡합니까? 

아무리 슬퍼도 묻으러 가야잖아요? 우는 사람은 울게 내버려 둬야 할 텐데 약속이 있으니까 더 곤란한 문제가 생기니까 “그만 울고 빨리 묻으러 갑시다.” 어떤 때는 목회 활동 가운데서 제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저승사자나 되는 사람인가? 이게 뭔가? 이런 일은 정말 하기 싫다.’ 이럴 때가 정말 많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하나님 백성들의 그러한 고난 삶에 대한 방향 제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배경 설명을 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기독교 박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막 때려잡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다 때려잡아도 괜찮았습니다. “잔멸할새” 하나도 남김없이 다 없애버려도 괜찮다는 겁니다. 정부에서 공문서를 발행해서 사도 바울이 그 공문서를 가지고 왔잖아요? 그러니 살려면 떠나야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흩어졌습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 되었다고 합니다. 

“흩어졌다.” 일종의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유대 영토 밖으로 나가버린 겁니다. 어디로 갔느냐? 베드로전서에 나와 있습니다.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로 흩어졌습니다. 그래서 살긴 살았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터키 중북부 지방으로 끝없이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낯선 외국 땅에 반겨주는 사람 없이 온갖 서러움과 고통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그러한 사람들의 삶의 의미는 뭔가? 

하나님 믿는 것은 그러한 고난의 삶을 살아야 되는가? 베드로가 그들을 향해서 당신들이 살고 있는 삶의 의미는 이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나는 누구인가(Who am I)?”의 문제, 크리스천의 아이덴티티를 확립시켜 주려고 이 성경을 쓴 겁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으로 규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택한 백성의 삶의 의미는 여기 크게 두 가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그 첫째가 뭐냐?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의 소유된 백성은 이 땅의 나그네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서는 나그네란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에게 권하노니” “흩어진 나그네” “너희가 나그네로 있을 때” 그래서 이 말씀에 기초해서 나그네 신학이라는 것이 정립되었습니다. 나그네란 말의 뜻이 뭡니까?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지금 머물러 있는 곳이 내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닌 사람을 나그네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땅은 우리가 잠시 나그네로 발을 붙이고 있을 뿐이다. 이것을 기억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러면 우리는 창세기에서부터 하나님이 택한 사람이나 하나님이 택한 민족의 삶의 모습을 조명해 볼 수 있습니다. 최초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하면 그 사람들이 하나의 삶의 한 역사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 사람들이 산 모습을 보면 지금 우리가 ‘아! 하나님 백성의 삶의 모습은 이것이다.’라고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이 그렇게 작업을 하신 겁니다. 

하나의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모델로 가르쳐주기 위해서 택함을 입은 사람! 인류의 역사 가운데 가장 고난을 많이 겪은 민족은 히브리 민족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영원한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신명기 26장 5절에 뭐라고 말했습니까?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인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말씀하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아람어입니다. 바벨론 제국에 가서 70년 나그네로 살았고 애굽에서 400년 이상을 노예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앗시리아의 침략, 로마의 정복…. 끝없는 고난의 연속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1979년 텍사스 휴스톤에 가서 한인 교회를 개척하고 돌아다닐 때 유대인 랍비가 자기네들 유월절 행사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유대인 랍비가, 이방 사람인 한국인 목사를 초대하는 것은 율법의 파기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다. 못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내가 당신을 초대했다. 보기만 하라.” 그래서 2번이나 초대 받아서 유대인들 유월절 행사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랍비라는 사람이 구슬픈 노래와 설교를 하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집니다. 

설교의 내용은 “우리는 나그네다. 아브라함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나그네 삶을 살았다. 이 나그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온 세상에 흩어놓으심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어떤 뜻이 이루어지기 바라시는 것이다.” 이 랍비는 현대적으로 해석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영화 ‘쉰들러리스트’, ‘히틀러 언더루프’라는 유대인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아이들도 왔는데 쓴 나물을 민족 고난을 생각하며 먹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안 먹습니다. 강제로 먹입니다. “먹어야 돼! 우리 민족 모두가 먹었어! 너도 먹어야 돼.” 아이들이 막 불평하면서 먹습니다. 무교병, 아무 맛도 없는 과자입니다. “이것도 먹어. 우리 조상들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어. 우리도 그 뒤를 따르는 거야.” 나중에는 손들을 붙잡고 빙빙 돌아가면서 슬픈 노래를 부릅니다.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 그렇게 많은 수난 역사를 산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땅을 영원한 안식처로 알지 말라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살았던 인생 여정을 성경에서 바라보면 해답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라함은 자기 고향에서 편안한 종말을 마쳤을 것입니다. 75세나 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데 그날부터 고생의 시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첫 번째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뭡니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나그네로 삼아버렸습니다. “왜 가야 됩니까?” “그것이 내 뜻이니라.” “어디로 가야 됩니까?” “가나안 땅으로 가라.” 야곱도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으로 보내졌을 때 20년 나그네 삶을 살았고 요셉은 17살에 애굽으로 보내져서 110세가 되도록 나그네로 살다가 나그네로 죽었고 모세도 미디안 광야 40년을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이 나그네들은 이렇게 사는 가운데 아주 많은 시련을 경험했습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는데, 10절 말씀이 뭡니까?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먹을 것이 없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애굽까지 내려가서 거기서 불쌍한 나그네로 식량을 구하면서 구차하게 살아갔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아브라함에게 오잖아요? 새로운 걱정거리! 예쁜 아내를 데리고 살다가 바로 왕이 “저 여자 누구냐?” 이국적인 미인이 왔다 갔다 하니까 “아브라함 동생입니다.” “데리고 와라.” 첩으로 데리고 와서 살아버렸습니다. 

이 아브라함은 뭡니까? “동생 데려왔으니까 아브라함에게 식량 좀 주어라.” 아내 뺏기고 얻은 식량을 우질우질 먹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여러 번 말했지요? 아내가 예쁘지 않으신 분들은 감사 헌금을 매주일 내셔야 합니다. 나그네된 것만도 서러운데 이런 가슴 아픈 일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 겪어야 할 삶의 모습입니까? 

야곱은 14년 동안 외삼촌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잖아요? 요셉은 죄도 없이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정직하게 산 것도 고난의 이유가 됩니까? 왜 내가 감옥살이를 해야 됩니까?” 이렇게 말할 수 있잖아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선택한 모델케이스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을 가르쳐 준 것이 성경에 택함을 받은 인물들입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에 너무 마음을 많이 빼앗기지 않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75년 정들고 살았던 굳건한 터전의 고향을 떠나라!” “아니, 내가 성공해서 이제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데요?” 떠났습니다. 애굽 소녀 하갈을 데리고 산지가 17년이나 되었는데 “내쫓아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다.” 이삭을 낳은 다음에 너무 좋아하니까 “그 아이는 번제로 드리라.” “아니, 하나님! 왜 내가 하지 못할 것만 시키십니까?” “잔소리 말고 해라!”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뭐냐? 삶의 목적을 하늘나라에 두고 그것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지불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입니다. 

떠나기 싫은 고향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떠나야 할 때도 있고 버리기 아까운 것도 버려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자기의 분신 같은 아들마저도 제물로 바칠 수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진다는 모델 선언한 택한 백성! 반대로 아무리 힘들고 고난스러워도 하나님이 인도하는 것이면 거기에 단을 쌓고 정착해서 거기에 살아야 합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때로는 실패도 경험하고 때로는 뼈아픈 일도 당하고 어떤 때는 성공하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 건설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운명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이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삶의 의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백성은 나그네로 길을 떠나지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 성경에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무엇을 하라는 것인지 왜 가라는 것인지 그런데 거기에 보면 한 가지가 나옵니다. “다만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으며” ‘아! 내가 모르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 내게 주어져 있도다.’ 

여러분, 출애굽해서 가나안 땅까지 가는 거리는 한 달이면 넉넉합니다. 걸음 빠른 사람은 일주일이면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40년 걸렸습니다. 이유가 뭔가? 하나님의 역사와 내 마음의 소원의 차이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너희가 애굽에서 400년 동안 우상을 섬기고 살았기 때문에 적어도 40년 동안은 이 광야에서 신앙 수행을 해야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서 영원히 하나님의 구원의 빛을 세상에 비출 것이다.” 성경에 위급한 사건이 일어나지요? 뒤에서 애굽 군대가 쫓아왔습니다. 앞에서는 바다가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갈라주셔서 다 같이 건넜다고 했습니다. “왜 보여주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런 줄 알고 살아라.” 부인하는 사람이 한명도 없습니다. 100퍼센트 하나님의 기적을 믿으면서 홍해를 건너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시내산 앞으로 왔을 때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이것이 우리를 인도할 신이라.” 왜 그랬습니까? 400년 동안 애굽에서 하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40년 동안 훈련시키다가 마침내는 애굽 문화에 젖어있는 사람이 다 죽고 없어진 다음 광야에서 출생한 신세대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고 그들을 인도하는 지도자 두 사람만의 믿음을 인정하셔서 갈렙과 여호수아만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내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성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배워야 합니다. 저는 이런 희망을 갖습니다. 

남북통일은 왜 이렇게 안 되는가? 전 세계 그렇게 많은 나라 가운데 우리 대한민국만이 분단국가에서 핵폭탄인지 물 폭탄인지 날마다 얘기하는 겁니까?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저는 공산권에 수없이 다니면서 전도한 사람입니다. 공산당들은 다른 사람 같으면 잘 안됩니다. 그러나 같은 공산 당원들끼리 됩니다. 앞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공산당 교육을 받은 북한의 공산 당원들이 예수를 믿을 때 전 세계 공산당 나라는 저들에게 맡기면 됩니다.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하나씩 하나씩 진행되는 것을 알고 거기에 순종하는 삶의 의미! 이것을 하나님의 택한 백성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이 가르쳐 줍니다. 지금 전 세계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은 분명하게 나타나는 현실이 있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한국인은 앞서가는 사람이 되고 살아남습니다. 

왜 그런가? 오히려 현지인 사람들이 질투할 만큼 세력이 강합니다. 성공합니다. 그것은 그동안 우리 민족이 받았던 훈련 때문입니다. 여기 6·25 세대들은 어떤 고난의 현장에서도 살아남는 법을 배웠습니다. 극기의 훈련, 특공대 훈련을 받고 우리는 살았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영하 5도에 얼어 죽는 사람을 봤습니다. 한국의 추위를 견딘 사람은 시베리아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이 시베리아의 벌목공으로 일해도 다 끄떡없는 겁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삼복더위를 견딘 사람은 사우디 공사를 다 해내었잖아요?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음식은 자극성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자극적인 음식이 우리나라 음식입니다. 맵고 짜고 이런 것을 견디어서 우리 위장은 철통같습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무엇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뭐든지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쓰시는 겁니다. 한국 선교사 어디 가든지 다 견딥니다. 

한국 회사에서 현장 건축하는 사람들은 어디 가서든지 무슨 작업이든지 다 해냅니다. 전쟁 통에 피난살이를 해봤기 때문에 이민생활은 거저먹기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한국 민족과 한국 교회를 사역자로 쓰실 때가 된 겁니다. 지구가 둥글고 매일 돌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를 암시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데 이 세상의 모든 역사, 기독교 역사가 한때는 러시아가, 한때는 영국이, 이스라엘과 로마와 유럽, 그리고 지나간 200년 미국에 의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져 왔는데 지금은 한국이 그렇게 쓰임을 받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제가 예언하겠습니다. 앞으로 20년 후에는 대한민국 교회가 세계 선교의 가장 큰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목사님, 정말입니까?” “그럼요. 내가 여기 20년 동안 그때 봅시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계획성을 믿고 순종하고 또 하나님께서 쓰실 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도록 힘을 그에게 주시는 겁니다. 

오늘 말씀은 예루살렘 핍박으로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져있는 나그네들에게 베드로 사도가 보내는 희망의 편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외국에서 나그네로 이렇게 고통스럽게 살아가지만 우리의 속성이 무엇인가? 바로 이 “나는 누구인가(Who am I)?”의 문제, 크리스천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정해주는 마음! “너희가 누구냐?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의 소유된 백성이라.” “왕 같은 제사장이 뭡니까?” “너는 제사장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너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 나라에 가서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거룩한 나라의 소유된 백성이다. 우리는 왕 같다. 다 제사장이야. 택하신 족속이야. 어디서 살고 고난스러운 것은 문제도 안 돼. 이것이 우리 하나님 백성의 의미야.” 그 기쁨을 잃지 말라고, 그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예수 믿는 기쁨이 있고 당하는 고난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이지, 무당종교만도 못한 믿음을 가질 때는 날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낙심하고 좌절합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예비하신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약속의 땅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는 왕 같은 제사장의 영적 의미를 내 가슴에 품고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서 오늘도 내일도 우리는 찬송을 부르며 내게 주어져 있는 순례의 나그네 길을 힘 있게 달려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다.” 택한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하게 소유된 백성,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현지의 삶의 자리를 매일 믿음으로 정리하면서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하는 바로 여러분과 제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무슨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는가? 성경에 나타난 이 많은 역사를 조명하여 보면서 21세기라는 문화권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믿음으로 정리할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주시고, 주신 사명을 위해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섭리론에서 나를 객관성 있게 바라볼 수 있는 믿음의 역사가 있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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