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6)

  • 잡초 잡초
  • 1138
  • 0

첨부 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6)
 
 
 
❚굶주림의 문제

세상에는 사람이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참 많습니다. 어쩌면 영원히 해결하기 힘들지도 모르는 문제들입니다. 먼저 ‘평화’(平和)라는 낱말이 떠오릅니다. 모든 인간은 전쟁과 다툼이 없는 평화를 염원하지만 오늘도 세상 곳곳에는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냉전시대에 공산주의가 사라지면 지구상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공산국가가 붕괴되었지만 우리 기대대로 지구상에 전쟁이 사라졌습니까? 아니지요. 오히려 인종 간에, 종교 간에 전쟁은 더 처참하게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뿐입니까? 질병은 또 어떻습니까? 오늘날 정말 과학이 발달하고 의학도 발달했지만, 그래서 인간의 수명은 길어졌지만 오늘날 이 엄청난 과학과 의학으로도 정복 못하는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암처럼 무서운 불치병들이 말입니다.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하던 새로운 질병이 계속 나타나 우리를 괴롭힙니다. 20세기의 흑사병(페스트)라고 하는 에이즈도 아직 정복하지 못하고 있는데 요즈음에는 신종 플루라는 질병까지 나타나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합니다. 요즘 다른 곳은 물론이고 교회들도 이 신종 플루 때문에 상당히 걱정합니다. 교회학교에는 이미 신종 플루 때문에 아이들 교회 안 보내는 집도 있다네요. 그런데 앞으로 에이즈니 신종 플루니 하는 병들을 의학으로 정복한다 하더라도 그 다음에 반드시 또 다른 질병이 나타나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할 것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굶주림의 문제입니다. 아직도 세상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잘 살게 되어도 여전히 인간 사회에는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오늘날 세계가 생산하는 식량은 현재 세계인구의 두 배를 먹여 살리고도 남을 정도로 많습니다. 한 마디로 식량과잉공급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세계 인구의 절반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이 설교를 하고 있는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어린이의 비율이 절대적으로 높습니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발표에 의하면 지구상에는 매 5초 마다 한 명씩 10살 미만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이제는 먹고 살만해져서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것이 지구상의 한쪽 편에는 먹을 것이 너무 많아 다이어트를 해야 하고 또 다른 지구상의 한쪽 편에서는 굶어 죽어가는 사람이 생기는 모순 덩어리의 세상인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작년 2008년 상반기 기준 결식아동 숫자가 61만 7천 명에 이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순이요 문제입니다. 아마 우리나라가 아무리 잘 살게 되어도, 또 인류가 아무리 잘 살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해도 이 굶주림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물론 이 육신의 배고픔, 굶주림 때문에 죄 짓는 사람도 많습니다. 배고픔이 사람을 죄 짓게 합니다.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안 넘을 사람 없다”는 말처럼 굶주림은 사람을 범죄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들을 소위 ‘생계형 범죄자’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육신의 배고픔 때문에 죄 짓는 사람은 차라리 그래도 순진한 사람들이라 하겠습니다. 

이 세상에는 충분히 배가 부른데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갖기 위해, 더 배부르기 위해 죄 짓는 사람이 있습니다. ‘폭식증’(Bulimia nervosa, 暴食症)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너무 굶어서 뼈만 앙상한데도 음식을 아예 거부하는 거식증(拒食症)과 반대로 폭식증은 음식을 조절할 능력이 없어져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다고 느끼지 않는 증세입니다. 많이 먹는데도 뇌가 배부르다고 느끼지 못하는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먹고 싶고 또 먹고 싶어서 토해가면서까지 먹습니다. 

옛 로마의 귀족들은 그들이 정복한 세계 각국의 진미들을 가지고 와서 먹고 마시다가 배가 부르면 옆에 가서 일부러 토해내고 다시 먹곤 했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자기 배를 신으로 삼은 자들”(빌 3:19)이라는 상당히 충격적인 표현을 썼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배’는 물론 밥 먹는 육신의 배를 뜻하지만 나아가 우리 인간의 ‘욕심’을 뜻합니다. 아무리 줘도, 아무리 채워도 도무지 만족할 줄 모르는 우리의 욕심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보다는 욕심 그 자체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 더 큰 문제가 됩니다. 아무리 돈을 벌어도 더 갖고 싶고, 나보다 더 돈 많은 사람만 보이고, 아무리 권력과 인기를 얻어도 더 큰 권력과 인기를 갖고 싶고, 아무리 행복한 가정과 건강을 주셔서 만족할 줄 모르고 더 다오, 더 주시오 조르는 것이 욕심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이 욕심 때문에 배가 부른데도 또 먹고, 그만하면 살만 한데도 더 얻기 위해 결국 죄를 짓게 됩니다. 이 끝없는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 법입니다(약 1:15). 우리는 육신의 배고픔을 넘어선 끝없는 인간의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결국 육신의 배고픔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배고픔뿐 아니라 다른 것에 배고프고 주린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예나 권력에 굶주려 그것만 먹으면, 그것만 움켜쥐면 모든 것을 얻고 영원히 배가 부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돈과 쾌락에, 어떤 사람은 인기에, 어떤 사람은 자녀에 주리고 목마릅니다. 

하지만 이 모든 주림과 목마름의 특징은 아무리 그것을 얻어도 영원히 배부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름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고파서 죄를 짓든, 배불러도 죄를 짓든 간에 내 육신의 배를 부르게 하겠다고 아무리 발버둥치고 죄까지 지어봐야 근본적으로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누구도 인간의 노력에 의해 근본적으로 배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아무리 육신의 배가 불러도 또 배고프고 또 뭔가 허전하고 더 갖고 싶어 영원히 배고프고 목마른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굶주리고 목마른 모든 자들아, 정말 너희가 배부르기 원하느냐? 배부르고 싶어서 죄까지 짓고 사느냐? 아니다. 세상에서 너희를 배부르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어봐라. 몇 시간만 지나면 다시 배가 고파진다. 세상에서 재물을 실컷 소유하고 남부럽지 않게 살면 배가 부르겠느냐? 아니다. 아무리 가지고 아무리 소유해도 너희는 여전히 배고프고 목마를 것이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온 대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우리가 배고파하고 목말라 해야 할 것은 세상적인 음식이나 부나 명예나 소유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이 말씀하신 ‘의’(義)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사용하신 ‘의’라는 낱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입니다. 성경에서 디카이오쉬네, 즉 의는 우리가 흔히 ‘의’ 하면 떠올리는 공의나 정의라는 개념보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뜻합니다. ‘의’란 옳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의로운 사람, 옳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사람의 노력으로, 올바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직 우리가 의롭고 올바른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리인 ‘이신칭의’(以信稱義)가 오직 믿음으로, 다른 말로 하면 오직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의, 즉 옳음과 의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문제뿐 아니라 인생의 모든 배고픔과 목마름을 해결할 방법은 오직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데서만 해결되는 줄 믿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육체적 생명이 음식과 물에 달려 있듯이 우리의 영적 생명은 ‘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존 맥아더 목사라는 분은 놀라운 지적을 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모든 사람을 하나님에 주리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갈망하고 하나님을 찾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죄 때문에 이런 하나님에 대한 주림을 엉뚱한 것으로 채우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아무리 엉뚱한 데 가서 주림을 채우려 하면 뭐합니까? 번지수가 잘못 되었지요. 

이 굶주림과 목마름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만나야 채워지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엉뚱한 데서 찾으니 마음속 저 깊이 자리 잡은 갈증과 배고픔은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람이 아무리 잘 살고 배불러도 하나님을 못 만나면 늘 허전하고 갈증과 굶주림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참 통찰력 있는 지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굶주린 사람들, 인생의 굶주림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떡으로, 빵으로 내놓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런 목마른 사람들을 위해,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에게 주신 것처럼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기 바랍니다. “나는 무엇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인가?” 돈인가? 쾌락인가? 명예와 인기와 권력인가? 가족과 자녀인가? 그렇다면 나는 예레미야 17장 13절 말씀처럼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린 자”입니다. 정말 내 배를 부르게 하고 목마름을 해결해주실 생수의 근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못 믿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내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면 복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참된 배부름을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또 한 가지, 오늘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하실 때 이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말이 참 뜻이 깊습니다. 여기서 ‘주린’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페이나오’인데 굶주림(hunger)을 뜻하는 말입니다만 그냥 “오늘 점심 굶었더니 배가 고프네” 정도가 아니라 배고파 죽을 만큼 진짜 굶주림을 뜻합니다. 당장 먹지 않으면 굶어 죽을 만큼 절박한 굶주림 말입니다. 또 ‘목마른’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딥사오’인데 이건 진짜 목마름을 뜻합니다. 

사막에서 며칠 동안 물을 못 마셨다면 어떻게 될까요?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가고 온 몸이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이 ‘딥사오’라는 낱말은 정말 목말라 죽을 지경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런 굶주림과 목마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고 마시면 마실수록 더 마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배고픔도 점점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밥 한 끼 먹으면 다신 안 먹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아침 먹었으면 점심도 먹어야 하고 저녁도 먹어야 하듯 교회 한 번 나오면 우리의 영적 배고픔과 목마름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주님 만나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면 만날수록 은혜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만나고 싶고 더 받고 싶어지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은 그토록 하나님을 잘 알고 하나님을 자주 만나고 은혜도 많이 받은 사람이면서도 “이만하면 됐다. 이만하면 은혜도 받을 만큼 받았고 이만하면 충분하다.” 결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 42:1)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의 특징입니다. 그렇습니다. 배고 고파 본 사람만 배고픔을 아는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배고프다가 무언가를 먹을 때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음을 아는 것처럼 은혜도 받아본 사람만이 그 맛을 압니다. 우리는 영원히 주님을 만나고 그 의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갈망해야 합니다. 아니, 은혜 받으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목사가 제발 은혜 좀 사모해라 소리 안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끊임없이 은혜를 사모하며 의를 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직도 기억나실 겁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16강에 오르자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완전히 온 국민이 축제 분위기였습니다. 생각도 못했던 성적을 거두자 펄쩍펄쩍 뛰고 서로 얼싸안고 축하하고 난리였습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우리나라를 16강을 이끈 명장 히딩크 감독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아직도 배가 고프다!” 16강 진출에 만족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이만하면 잘 한 거라고, 이 정도만 해도 대단하다고 하던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영적으로 이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은혜는 아무리 받아도 배고픈 법입니다. 은혜도 받아 본 사람이 그 맛을 아는 것처럼 은혜 받아보고 그 맛을 알고 의를 구하는 자는 영원히 은혜를 사모하고 더 큰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시편 107편 9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저는 이것을 ‘영적 폭식증’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여러분도 밥만 찾는, 나를 채워주지도 못하는 육신의 양식만 찾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영적 폭식증에 걸린 사람 되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정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말입니다. 이 사람이 정말 배고픈지 아닌지 어떻게 압니까? 정말 배고픈 사람은 음식을 주면 마다하지 않습니다. 체면 차리며 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은 아직도 배가 덜 고픈 것입니다. 정말 배고프면 체면이고 뭐고 게걸스럽게 먹게 됩니다. 다윗이 왜 하필 토끼도 아니고 소도 아니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시 42:1)라고 고백했을까요?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은 단순히 목마름을 해결하는 차원이 아니라 생사가 걸린 문제입니다. 사슴은 온혈동물로 몸이 열이 많습니다. 그래서 항상 물을 마셔 몸의 열기를 식혀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사냥꾼들은 사슴을 찾으려고 산을 헤매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냥 시냇가에서 숨어서 사슴이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 기다리다 보면 사슴이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시냇가로 오는데 그때 사슴을 잡으면 됩니다. 사슴은 시냇가에 가면 자기를 노리는 포수가 있음을 분명히 압니다. 

하지만 물을 마시지 않으면 죽기 때문에 목숨을 내놓고 물을 마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다는 말은 단순히 영적 목마름을 잠시 해결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생사를 걸고,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만나기를 갈급하고 은혜 받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사슴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갈급하고 있습니까? 정말 목마른 사람은 이렇게 행동합니다.

잠언 27장 7절에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정말 배고프면 이것저것 안 가립니다. 체면도 없습니다. 체면 따지고 상황 따지고 맛 따지는 것은 아직도 배가 부르다는 증거입니다. 군대에 처음 가서 훈련소에 들어가면 군대밥, 짬밥이라고도 하지요, 이것을 잘 못 먹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집에서 얼마나 좋은 음식,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았는데 아무래도 군대 짬밥은 아직은 질이 떨어집니다. 

그러니 입맛에 안 맞아서 처음 몇 끼는 잘 못 먹거나 숟가락을 뜨는 둥 마는 둥 하는 젊은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렇다고 요즘 군대가 옛날처럼 밥 안 먹는다고 군기 빠졌다고 기합 같은 것 주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가만 놔두면 됩니다. 며칠만 굶어보세요. 제발 먹지 말라고 해도 먹습니다. 그것도 밥 한 톨 한 남기고 박박 긁어먹습니다. 안 먹는 것, 가리는 것은 아직 배가 부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배고픈 사람은 어떤 상황도 안 따진다니까요. 뭘 주어도 게걸스럽게 먹어치웁니다. 

정말 배고픈 사람이 음식 안 가리고 맛도 안 따지는 것처럼, 그래서 쓴 것도 달게 먹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를, 그 은혜를 사모하고 진정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먹습니다. 심지어 그것이 아주 쓴 것이라도, 아주 쓴 고난이라도 기꺼이 받습니다. “하나님이 주셔도 좋은 것만, 맛있는 것만 골라 먹겠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뭐든지 먹겠습니다. 아무리 쓴 것이라도 거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는 줄 알고 뭐든지 달게 받겠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이런 사람에게 계속 쓴 것만 주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주님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부를 것임이요” 하는 말은 헬라어로 ‘코르타조’입니다. 이 낱말은 동물에게 먹이를 잔뜩 줘서 배부르게 만들어 주는 것을 뜻합니다. 완전한 만족을 뜻하는 것이지요. 

이 완전한 인생의 만족은 오직 ‘의’를 통해서, 즉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혹시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좀 쓰고 힘들지라도 마다하지 말고 받아먹으십시오. 고난도 아픔도 말입니다. 거기에도 뜻이 있고, 하나님의 크신 계획이 있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자녀들 좋아하는 음식만 주면 큰일 납니다. 애들은 싫다고 맛없다고 마다하지만 영양을 위해, 성장을 위해 꼭 필요하면 억지로라도 먹입니다. 쓴 고난도 같은 이치입니다. 

우리가 그 쓴 것도 달게 받아먹는 까닭은 그것이 지금은 쓰고 힘들지만 반드시 내 주림을 채워주고 목마름을 해결해 줄 영원한 복이 거기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런 말을 합니다. “목사님, 이번 고난을 통해 제가 20년 교회 다녀도 한 번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고 애쓰지 못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고난이 너무 힘들지만 저는 이것 하나만은 분명히 배웠으니 이 고난도 하나님 은혜입니다.” 이게 바로 ‘의’입니다. 

이와 같이 언젠가 마라의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 주신 것처럼 우리 주님이 우리 인생의 모든 쓴 것을 단 것으로 바꾸어 주시고 나의 영혼을 만족하게 하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완전한 만족을 주실 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사야 58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우리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의를 이루고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반드시 영혼의 만족을 얻어 물 댄 동산 같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이 참된 복이, 이 완전한 만족과 배부름이 바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