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누어 주라 (막 8:1~10)

  • 잡초 잡초
  • 451
  • 0

첨부 1


나누어 주라 (막 8:1~10)


애당초 있지 않았다면 아쉬움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있기는 했는데 문제는 필요한 만큼 가지질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참으로 마음이 아픕니다. 아니 그것 때문에 때로는 목숨이 왔다 갔다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소유에 집착하는지 모릅니다. 할 수 있으면 많이 가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여도 내 노력만 가지고는 필요한 것만큼도 채울 수 없을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나는 죽을 힘 다해도 겨우 하나를 얻을까 말까 할 때조차 다른 사람은 너무도 쉽게 다섯을 얻고 열을 얻고 백을 얻을 때는 참으로 내가 왜 사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게 바로 수준차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그 수준차를 인정하기는 해도 그래도 나도 그만큼 가지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왜 생기는지는 몰라도 괜히 나만 손해 보는 것과 같은 기분이 들 때는 정말 속상합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다고 해도 남들만큼 가지지 못했다고 하는 아픔은 무어로도 위로가 안 됩니다. 모두가 다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거나 부족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어려움은 그렇기에 말로 다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우리 인생에 있어서 꼭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부족하거나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 알라고 하셨습니다. 문제는 그 먹을 것조차도 턱없이 부족하거나 없을 때입니다. 우리는 식사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먹을거리가 준비되어 있지 못해서 힘들어하던 때가 있을 것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식사가 준비될 수 있는 경우라면 기다리면 됩니다. 그렇지만 그 기다리는 것조차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너무 지쳐 있다거나 배고픔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한 가난한 집에 밤늦게 손님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 사람에게는 손님에게 대접할 먹을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을 찾아 찾아온 손님을 대접할 빵을 좀 달라고 문을 두드립니다. 하지만 이웃은 매정하게 거절합니다. 이미 잠자리에 누웠으니 안 되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찾아온 사람이 끈질기게 문을 두드리니 어쩔 수 없어서 일어나 빵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먹는 문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생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뭐 한 끼 굶는다고 죽기야 하겠냐고 하지만 기도하기 위해서 굶는 것과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누구는 기도하기 위해서 굶는 것이 더 힘들다고 하는 분도 계시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그건 기도 시간이 지나면 먹을 수가 있습니다. 먹을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때가 되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정말 아픕니다. 조금만 지나면 먹을거리가 준비될 수 있다면 그건 그냥 화나 내고 지나갈 수 있는 문제이지만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때가 된다고 한들 여전히 먹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이라면 그래서 물로 배를 채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라면 그 혼자서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큰 무리들을 가르치시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은지 사흘이나 되어 먹을 것이 다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 무리를 그냥 굶긴 채 돌려보내게 되면 그들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는데 가는 도중 기진할까 염려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로서는 답답한 노릇입니다. 그곳은 광야로서 그 많은 무리들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기에는 턱이 없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 주님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뱃세다 광야에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던 주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저들에게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 무리를 앉게 하시고 그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게 하였더니 그 무리들이 다 배불리 먹고도 남은 것이 일곱 광주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히 여기시는 주님의 성품을 우리는 여기서도 보게 됩니다. 그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주라.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나 고아 그리고 나그네와 레위인과 제사장들을 위해 추수할 때 일부를 남겨 두라고 하셨고 삼년에 한 번씩은 또 다른 십일조를 내어 그들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곧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필요한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잠언 11:24~25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하여지리라”고 했고 누가복음 6 : 38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결국 나누어 주는 것은 도움을 받는 사람뿐만 아니라 주는 사람까지도 복을 누리게 하는 비결임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나누어주는 밑바탕은 어디까지나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받는 자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누어주는 것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 이전에 우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함께 아파해주는 마음이야 우리가 나누어주는 기쁨을 갑절이 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런 주는 자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필요한 것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육신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생명입니다. 피를 많이 흘려서 위독한 사람들을 위해서 헌혈을 하는 이유도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는 우리 몸 안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지는데 만들어진지 삼 개월이면 용도 폐기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분해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만큼 새로운 피를 내 몸에서 만들어 냅니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렸다던가 하면 그 피를 내 몸에서 만들어낼 시간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를 대신 넣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헌혈이 필요한데 한번에 300 그람 내지 400 그람까지는 헌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두 달 후에는 헌혈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내 몸은 더 활성화가 되는 셈입니다. 내 몸은 그만큼의 피를 뽑아냈다고 해도 크게 지장이 없지만 피를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피야말로 생명줄입니다. 그나마 그 피가 있어야 생명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피는 육체의 생명을 잠시 연장시켜 줄 수 있을 뿐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세상을 살다가 죽어 심판을 받고 멸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영원한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하박국 2:4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요한복음 3:16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 요한복음 5:24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비결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것은 못 주더라도 이 영원한 생명만은 꼭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정한 때가 이르기까지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받고 안 받고는 그쪽의 문제입니다. 나는 상관치 말고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도 뒤로 미루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날이 언제까지일는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이제 그만 하면 아무리 장사라도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생명줄을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방해 세력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훼방꾼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훼방꾼의 훼방이 무력화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방해 세력들이 다 물러가고 그 생명을 위해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게 될 때 생명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으십시오. 가장 귀한 생명을 나누는 일에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데 있어 필요한 것을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9~15을 통해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해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신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으로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서 풍성함을 누려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다움은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열매를 맺는 삶입니다. 

요한복음 15:5~12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의 열매를 말씀하였거니와 이 사랑만큼 중요한 것이 없는데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어야 하느냐 하면 목숨까지도 내어줄 수 있는 사랑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친구로 또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는 우리 역시 이런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평안과 기쁨을 함께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하고 서로를 든든하게 세워가는 자로서의 삶을 함께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주님을 닮아갈 수 있도록 주님에 관해서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은바 은혜를 함께 나누고 우리의 삶을 함께 나누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라고 거듭 말씀하시면서 그 이유는 내가 너희와 함께 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역대상에서도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시는 다윗이 항상 이기는 자가 되었다고 했고 창세기는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는 요셉이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결국 우리가 깨닫는바 풍성한 삶을 누리는 비결은 하나님과의 동행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함께 날마다 동행해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 안에 깨어 있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혼자서는 가기 힘든 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함께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좋을 때나 슬플 때나 힘든 때나 평안한 때나 언제든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 하나 되는 비결을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것이 사랑하는 것입니까? 서로 사랑하라는 것은 내가 먼저 사랑하는 것이요 그 사랑은 내 목숨까지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아낌없이 주고 또 주는 그래서 더 풍성이 얻게 되는 귀한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성경의 소선지서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개하고 돌이키게 되면 더 이상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임을 말씀하여 줍니다. 그런데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만히 그 심판이 결코 분노에 찬 그런 모습이 아닌 오히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임을 알게 됩니다.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의 긍휼이야 말로 진정 하나님의 사랑의 밑바탕입니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죽어 심판받고 불못에 던지울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도무지 그 어느 구석 하나 봐줄만한 것이 없는 죄악덩어리들을 하나님은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긍휼이 있기에 우리가 죄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하심이 바로 긍휼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우리에게 부족한 것들이 있는 것을 보시며 우리들의 연약함을 보십니다. 그래서 그 부족한 것을 채우심으로 우리로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 가운데로 들어갈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곧 비움입니다. 

나를 비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게 될 때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내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아니 도움조차도 청하지 못하고 한편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나에게 있는 작은 것일망정 그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는 한 마디로 말하면 정입니다. 속고 또 속으면서도 뻔히 속는 줄 알면서도 여전히 믿어주는 사랑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내 마음을 비운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여기 물가의 칠병 이어의 기적을 누린 사람들은 자기마치 배고픔의 시간을 적어도 여러 끼니 견뎠을 것입니다. 

사흘 동안이나 주님과 함께 하며 말씀을 듣는 가운데 배고픔도 잊을 수 있었던 저희이기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허기진 채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기에 고픈 배를 움켜쥐고 견뎌내는 그들이 참으로 불쌍했기 때문입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들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참으로 눈물겹습니다. 어찌 주님께서 굶주린 채로 놓아둘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기에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그냥 거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거저 주시는 은혜 거저 주시는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런 아름다운 마음 자기를 비우는 마음이 또한 곁들여져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주님은 칠병이어를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비록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밑바탕에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이 들어있다면 바로 거기에서부터 놀라운 기적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아니 내가 먼저 하나님께로부터 그런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나도 한 때는 죄인이었습니다. 아니 아직도 죄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에게는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은 우리가 주님 앞에 눈물로 엎드릴 때마다 내 손을 다정하게 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내 눈의 눈물을 씻기시며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 주님의 마음을 우리의 마음 가득히 담으십시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그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심장으로 시작을 하십시오. 그러면 거기서부터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맺어지게 되고 우리가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놀라운 일들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기적의 산 증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