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출 13:3~10)

  • 잡초 잡초
  • 290
  • 0

첨부 1


우리가 들려줄 이야기 (출 13:3~10)


[모세가 백성에게 선포하였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곧 당신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이 날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거기에서 당신들을 이끌어 내신 날이니, 누룩을 넣은 빵을 먹어서는 안 됩니다. 첫째 달인 아빕월의 오늘 당신들이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주님께서 당신들의 조상에게 주신다고 맹세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당신들은 이 달에 다음과 같은 예식을 지키십시오. 

당신들은 이레 동안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며, 이렛날에는 주님의 절기를 지키십시오. 이레 동안 당신들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먹어야 하며, 당신들 영토 안에서 누룩을 넣은 빵이나 누룩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 날에 당신들은 당신들 아들딸들에게, ‘이 예식은, 내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해주신 일을 기억하고 지키는 것이다’ 하고 설명하여 주십시오. 이 예식으로, 당신들의 손에 감은 표나 이마 위에 붙인 표와 같이, 당신들이 주님의 법을 늘 되새길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강한 손으로 당신들을 이집트에서 구하여 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이 규례를 해마다 정해진 때에 지켜야 합니다.]

• 참 교육을 향한 여정을 시작해야
기독교교육진흥주일인 오늘 저는 국가공무원법과 선거법 위반으로 재판을 받던 전교조 소속 교사들이 법정에서 행한 최후진술 가운데 나오는 한 증언을 소개하는 것으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얼마 전 10일짜리 자원봉사 활동을 다녀왔다. 학생들의 농촌 체험 활동인데 교사로서 자원봉사를 했다. 그런데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한 학생이 개미들을 밟아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다가가서 그러지 말라고 하면서 왜 약한 개미들을 죽이냐고 물었다. 죽여도 된다고 대답한다. 너는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혀도 좋으냐라고 물었다. 

그래도 좋단다. 여기까지도 많이 놀랐는데 더 놀라운 대답이 이어졌다. 힘센 니가 개미를 죽이듯이 너보다 힘센 사람이 너를 괴롭히면 너는 죽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좋으냐라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한다. “나는 죽어도 좋아요”라고. 왜 그러냐고 물으니 아이는 대답한다. “학원을 안 가도 되잖아요.” 나는 너무 놀랐다. 그 아이는 8살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학원을 다섯 개를 다닌다고 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이 이렇다. 이런 교육을 바꾸자는 것이 나의 소망이다. 이것이 죄인가?(<오마이뉴스>, 2009년 8월 17일, <<녹색평론>> 108호 김종철의 <민주주의를 위하여2>에서 재인용)

이념과 생각의 차이를 넘어서 아이들을 이렇게 모질고 거칠게 만드는 현실이 참 두렵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리는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파괴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그런 아이들의 변화된 모습에서 일종의 묵시록적인 공포를 느낀다고 말합니다. 교육제도는 수시로 바뀌고,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없는 학부모들은 그 변화에 맞춰 맞춤형 대비를 해주는 사교육시장에 목을 맵니다. 그러지 못하는 부모들의 자괴감은 깊어갑니다.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일제고사는 학교간의 서열을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것이 틀림없고,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그 학교의 ‘평균점수를 갉아먹는’ 골칫덩이로 취급받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든 자녀들을 좋은 학교에 넣고 싶은 부모들은 거주지를 이전하느라 정신이 없을 테고,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자기가 다니는 학교와 주거지로써 자신의 사회적 신분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요즘 인사청문회에 나오는 고위 공직자 후보자들의 도덕성 문제가 연일 제기되고 있습니다. 논문 중복 게재, 세금 탈루, 다운 계약서 작성, 재산 등록 누락, 위장 전입…이게 우리 사회 상층부 사람들이 살아가는 법입니다. 빈곤의 경계선상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이들은 그저 허탈할 뿐입니다. 지도층의 탈선 가운데 자녀교육을 잘 시키려는 마음에서 하는 위장전입 쯤은 눈감아 줘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위장전입조차 하지 못하는 부모를 둔 아이들은 부모의 무기력을 원망하지는 않을까요?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조차 이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면서 이 잘못된 시대적 관행을 따라갑니다. 우리 아이가 경쟁에서 뒤질지 모른다는 보이지 않는 공포가 스멀스멀 부모들의 마음에 파고들어 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좋은 교육 기회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이야 왜 모르겠습니까만, 우리가 잠시라도 물어야 할 질문은 정말 좋은 교육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 기억의 전승 매체인 부모

오늘의 본문은 출애굽 사건이 막 감행된 시점에 모세가 그 백성들에게 신신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모세는 종살이에서 해방된 기쁨에 대해서도, 저들이 누리게 될 황금빛 미래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자유로의 긴 여정’ 가운데 겪게 될 여러 가지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탈출 공동체에서 세 번이나 거듭해서 당부하는 것은 유월절과 무교절을 잘 지키고 후손들이 그것을 잊지 않도록 잘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곧 당신들이 종살이하던 집에서 나온 이 날을 기억하십시오.”(3a)

유다인들이 이 절기를 지킨 것은 아빕월 열나흩 날 해질 무렵이었습니다. 아빕(Abib)이라는 말은 곡식의 ‘귀’ 즉 이삭을 뜻하는 말인데, 이맘때가 보리 추수가 시작되는 달이었기에 이런 명칭이 붙은 것 같습니다. 그 달 열흘에 사람들은 흠없는 일 년 된 수양이나 새끼를 골라두었다가, 열나흩 날 해질 무렵에 잡았고, 그 피는 받아다가 그 양을 먹을 집의 좌우 문설주와 상인방에 우슬포 묶음에 묻혀서 발랐습니다. 양은 머리, 다리, 내장 모두 불에 구워야 했고, 뼈는 하나라도 꺾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쓴 나물(merorim)과 누룩없는 빵(matzot)을 함께 준비했다가,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고, 서둘러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 아이들은 유월절 식사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의식서인 하가다(haggadah)에 따라서 아버지에게 네 가지 질문을 해야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오늘 밤이 다른 날 밤들과 다른 까닭은 무엇입니까?”입니다. 아버지는 유월절에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기억의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유월절 식사에 동참하면서 자연스럽게 자기들의 역사를 알게 되고, 자기들이 지향해야 할 목표를 명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누룩이 들지 않는 빵과 쓴 나물을 먹으면서 자유가 아무런 대가도 없이 저절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이 날의 의식을 통해 아이들은 자기들의 뿌리가 무엇이고, 조상들이 어떤 대의를 위해 싸워왔으며, 그 과정에서 얻은 교훈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매년 반복하는 그 의례를 통해 아이들은 자기 민족의 기억 속에 합류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유심히 읽은 분들은 ‘너희가 이집트의 노예였던 시절을 기억하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수치스러운 과거는 한시라도 빨리 잊거나 자식들에게 숨기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기들의 족보를 날조하기도 합니다. 물어보십시오. 조상 가운데 조선시대에 양반 아니었던 사람이 있는지. 모두가 다 대단한 집안사람들입니다. 

• 우리가 합류할 이야기는?

유다인들은 어쩌자고 자기들의 그 부끄러운 기억을 자꾸만 상기시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성조들의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곤 했습니다. 부모로부터 조상들의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를 듣는 순간 아이들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렇기에 기억은 ‘내가 그것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이야기들은 옛날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들은 나의 정체성의 일부이기도 한 것입니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의 말이 참 크게 다가옵니다. 그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어떤 이야기, 혹은 어떤 이야기들의 일부로 존재하는가?’라는 보다 앞선 질문이 해명될 때에만 비로소 대답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매혹된 사람들은, 그들처럼 살기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서점마다 처세술을 가르치는 책을 모아놓은 코너가 생긴 것을 보면 현대인들의 관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으로부터 비롯된 생명의 이야기에 합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줄 이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들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의 구원사의 일부가 됩니다. 

이 시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삶은 과연 하나님의 뜻에 대해 ‘아멘’입니까? 우리는 자녀 세대들에게 들려줄 신앙의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까? 예수 믿었더니 모든 게 잘 되더라는 이야기 말고, 예수를 제대로 믿기 위해 분투하고 고생하고 손해 본 이야기 말입니다. 예수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 오해받고, 따돌림 받은 이야기 말입니다. 너무나 많은 이들이 신앙을 너무 사사로운 차원으로 받아들입니다. 

신앙은 개인이 누리는 정신적 편안함이나 욕구의 충족으로 환원될 수 없습니다. 신앙은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시작하셨고, 우리가 주님과 더불어 만들어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바로 그것이 신앙생활의 기쁨이요 보람입니다.

이 자리에는 젊은 세대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부모님들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알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한 이들이 많을 겁니다. 부모들도 자녀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에게 좋은 교육 여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쓰면서도, 우리가 겪었던 신산스런 과거, 즉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싸웠고, 경제 발전을 위해 어떻게 애썼는지, 또 확고한 신앙을 갖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들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매우 중요한 교육적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 참 사람의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기독교 교육이 출발해야 할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부모 세대들이 살아가는 동안 느낀 기쁨과 슬픔, 공포와 희망, 그리고 그 속에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총과 위로를 전해주는 것이 그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조수아 헤셀은 유다인의 교육 과제를 몇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 데((<<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996, 176쪽) 그것은 그대로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라 생각되어 소개합니다. 

첫째, 교육은 학생에게 살아 있는 존재의 신비와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주는 일일 것입니다. 물 한 잔을 마셔도, 식탁 앞에 놓인 음식이나 과일을 맛보면서도, 그것이 우리의 앞에 오기까지 온 우주가 참여해 마련한 것임을 안다면 어찌 감사한 마음이 일지 않겠습니까. 놀람을 가로막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습니다. 놀랄 줄 모르고 경탄할 줄 모르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세상이 어떠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끔찍합니다. 학원에서는 이런 것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이런 감성은 자연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때만 얻어집니다. 

둘째, 자신이 무한하게 값진 존재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빚으로 얻은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야 합니다. 경쟁에 시달리며 사는 많은 이들이 자존감을 갖지 못합니다. 경쟁에서의 패배는 곧 바로 인생의 실패처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잘났든 못났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고 살고 있는 필수적인 것들은 거저 얻은 것이거나 다른 이들을 통해 주어진 것들입니다. 이걸 알면 지나친 비애에도 빠지지 않고, 오만함에 빠질 수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품부된 삶의 몫을 감사함으로 살아낼 뿐입니다.

셋째, 시간 속의 성(聖), 곧 거룩함을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19:2) 하셨습니다. 일상의 모든 순간 하나님의 현존을 자각하고 살 때 우리 삶은 거룩해집니다. 맑아지고 순수해집니다. 

넷째, 축제의 능력을 길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을 경축하며 살기를 바라십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째 기적이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것이라고 말합니다. 요한이 굳이 그 사건을 예수님의 첫 번째 이적으로 기록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계신 곳에는 삶이 즐거운 축제로 변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축제는 혼자서는 누릴 수 없습니다. 다른 이들을 우리 삶 속에 맞아들이고, 또 우리 자신도 기꺼이 손님이 되려는 열린 마음이 있을 때 축제는 시작됩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특정한 기능을 갖춘 사람이 되도록 하는 데서 그칠 뿐 참 사람이 되도록 돕지 못한다면 교육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이야기한 내용들은 오늘의 교육 현실이 거의 포기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너무 늦기 전에 우리의 교육이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합니다. 

기독교 교육은 바로 공교육이 놓치고 있는 이 지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의 사명이 중대합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4:19)라고 말합니다. 교사들은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날이 갈수록 세상은 인간성의 황무지로 변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울면서라도 그 황무지에 참 사람됨의 씨앗을 뿌리는 이들이 필요합니다. 경쟁과 출세에 관한 이야기가 압도적인 세상이지만, 사랑과 섬김과 돌봄을 통해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야기꾼들이 사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습니다. 자녀 세대에게 들려줄 신앙의 이야기가 아직 없다면 이제부터라도 그 이야기를 만들며 사십시오. 주님께서 그 여정 가운데 동행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