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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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마 5:6)
1990년대 후반에,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놀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13억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이 大國이, 어떻게 장쩌민 주석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통치가 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2) 중국은, 공산당 혁명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가 아닙니까? 60년 전, 모택동과 그의 소수의 동지들이 그 넓은 땅과 13억이나 되는 중국을 어떻게 공산화시킬 수 있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간지 신문 기획시리즈에서 ‘新中國 60년’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또 한 번 중국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후진타오는 오늘도 20․50년 뒤 중국에 대한 전략적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중국이 어디 있으며, 또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중국을 그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개방을 부르짖으며 공산주의를 하는 사람도 20․50년 뒤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는 대로, 팔복은 여덟 가지의 각각 다른 복이라기보다 ‘八重福(eight-fold)’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입니다. 마치 비가 온 후에, 하늘에 걸린 무지개(물방울)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로 보이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팔복 중, 네 번째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네 번째 복 안에도, 나머지 팔복의 복이 다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배부름의 문제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서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다른 배가 너무 불러서 고민입니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아보신 경험 있으시지요. 열이면 일곱 여덟은, “살 빼십시오. 특히 뱃살이 문젭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못 먹어서 고생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서 탈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가 그렇게 부른데도, 우리 인생은 전혀 배부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 아닙니까?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지금은 ‘신건강인센터’ 원장으로 활동하시는 유태우 박사님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절대빈곤의 후유증으로 위가 너무 커져, 너무 많이 먹는 習慣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구역회 모일 때, 구역장님들에게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심방가시면 고기 대접하시지 말라”고요(대게 목사님들, 체격이 비대합니다. 그냥 많이 대접하는 것이, 결코 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교우님들 얼마나 말씀 잘 들으시는지요! 고기대접은 하지 않으시는데, 다른 것으로 그 이상을 채우신다는 겁니다.
그 마음, 왜 이해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많이 드십시오하는 勸食文化보다는 半食(1/2)을 권하는 것이, 상대방을 더 잘 대접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가 아니지요.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하는 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합니다. 놀라운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무리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셔도, 배부름의 복은 받지만 절대로 肥滿症에는 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입니까? 자신의 軟弱함, 죄인 된 자기 인생에 뻥 뚫린 ‘하나님 없음’의 빈 공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는 영적 갈망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이, 인간이 굶주림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진단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그가 말년에 쓴 미완성 작품인 ‘팡세’라는 책 있잖습니까?; 구약성경 족장시대의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난 신앙체험을 쓴 책).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인생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삶의 빈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배부름을 얻습니다.
우리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구약에서 말하는 예언자적인 예언 선포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의 전달자이지요(神言運搬者). 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기준삼아서 그 시대상을 해석하던 자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시대를 정죄하고 판단하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자들의 신앙과 삶을 ‘자기가 의롭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삶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예언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義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하나같이 고백한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 자기의 부끄러움, 죄인 됨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들 모두가, 다 머뭇거렸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도무지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듣는 순간, 땅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조아렸습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 모세”하며 부르시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며 대답하지요(650년만의 부르심; 창 15, 13-16).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모세는, 겁에 질려 몸을 숨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렸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머뭇거렸습니다. “내가 누구관대”하며 말입니다.
웃시야 왕이 52년 통치를 끝내고 癩病으로 죽자, 남 왕국 유다는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백성들이, 크게 낙망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가 절망 중에 있는 백성의 마음을 쓸어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온 땅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의 성전 문지방에 있는 이사야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합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1-5).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수제자 시몬 베드로, 그가 예수님 앞에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무릎을 꿇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 8).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울도(그렇게 당당하고, 의롭던 그였지만), 주님의 임재 앞에서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예언자들의 영성이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당당함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머뭇거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영적 자부심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하셨습니다. 여기 ‘가난하다’는 말씀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가난이 무엇일까요? 빈곤하여 궁핍한 것을 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의 의미는, 물질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 1-4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하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가난의 의미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을 우리는, 아이들의 순수함, 태평스러움, 단순한 믿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의미라면, 아이들의 영악함은 무엇으로 말해야 합니까?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쁜 것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어린아이들을 하찮게 대하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의 문화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묻자,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 낮추라”는 말씀은 자신을 시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가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는 이야깁니다. 어린아이가 하찮다는 말이 아니지요. 당시 사회가 그러했기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자기존재가 시시하고 하찮은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는 눈이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어린아이가 주말에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100원이라도 받았다면, 아이는 그 용돈을 자기가 집안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빵을 구운 代價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용돈 100원은, 전적으로 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선물이고,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마음 가진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인생의 눈이 지금 여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가오는 내일, 미래를 응시하면서, 오늘을 사는 자를 말합니다. ‘눈’(시각, 관점, 기준)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의 갈망까지 바뀐 사람입니다. 갓 태어난 독수리 새끼의 눈에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둥지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차츰 둥지가 얹혀 있는 나뭇가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나뭇가지는, 커다란 나무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숲 위로 높이 날아오른 독수리는 자신이 살던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맞대어 있고, 그 나무들은 다시 거대한 숲을 이루고, 그 숲 옆에는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과 호수가 있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 쯤 될 때, 독수리는 비로소 자기가 예전에 살던 ‘옛 둥지의 정체’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 2a)는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본받다'(imitate)가 아니라 ‘순응하다’(conform, 사회 규범, 관습에 순응하다)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사회 규범, 관습, 문화 속에 들어 있는 세속적인 가치에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理由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this eon)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는 세대”(coming eon)를 바라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습니다. 순응하지 않기 위해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삶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14장 찬송 아시지요?
이 세상은 요란 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구주의 뜻 준행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악한 일 참 많으나 주 은혜를 생각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육신의 눈 못 볼 때에, 신령한 눈 더 밝히사 저 천성 문 보게 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 은혜로 성결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 가네. 아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비록 이 세대 가운데 살지만 이 세대의 가치, 문화, 관습, 방식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오는 세대”(coming eon)인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오늘을 분별하며 삽니다. 그런 삶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복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배부름의 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의의 주림과 목마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때로 자기 인생의 좌표로 삼았던 신앙과 신학의 원칙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시편73편의 시인 ‘아삽’이 그런 인물입니다. ‘아삽’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였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송하며 사는 신앙을 이끌던 음악감독입니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철칙 같은 한 가지 신앙(신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삽이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실족할 뻔 하였던 사건들을 많이 목도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넘어질뻔 하게 했고, 실족하게 할 뻔 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확고부동한 신앙과 실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불일치의 문제’였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자를 질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災殃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시 73, 1-7).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불일치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거의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아삽’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투자했던 자기 신앙과 가지고 있던 신앙의 기준을 하나님으로부터 환불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게 혼돈스럽고, 절망스럽던 어느 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순간에,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다 달리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惡人들의 終末의 실상이 어떠한 것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荒蕪하게 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全滅하였나이다”(시 73, 19).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하늘에서 主 外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主 밖에 내가 思慕할 이 없나이다”(25). 그렇습니다. 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눈이 바뀐 자입니다. 영적 갈망이 바뀐 자입니다. 아삽처럼, 예배자로 서서, 이 세대의 현상에 고정되었던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을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배부름의 복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1990년대 후반에, 처음 중국에 갔을 때 놀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1) 13억이나 되는 인구를 가진 이 大國이, 어떻게 장쩌민 주석이라는 사람에 의해서 통치가 되고 있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2) 중국은, 공산당 혁명에 의해서 건국된 나라가 아닙니까? 60년 전, 모택동과 그의 소수의 동지들이 그 넓은 땅과 13억이나 되는 중국을 어떻게 공산화시킬 수 있었는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일간지 신문 기획시리즈에서 ‘新中國 60년’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또 한 번 중국에 대해서 놀랐습니다. “후진타오는 오늘도 20․50년 뒤 중국에 대한 전략적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중국이 어디 있으며, 또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중국을 그려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혁개방을 부르짖으며 공산주의를 하는 사람도 20․50년 뒤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팔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아시는 대로, 팔복은 여덟 가지의 각각 다른 복이라기보다 ‘八重福(eight-fold)’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른 이해입니다. 마치 비가 온 후에, 하늘에 걸린 무지개(물방울)가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깔로 보이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산상수훈 팔복 중, 네 번째 복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복입니다. 네 번째 복 안에도, 나머지 팔복의 복이 다 들어 있다는 뜻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배부름의 문제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에서만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다른 배가 너무 불러서 고민입니다. 병원에 가서 건강검진을 받아보신 경험 있으시지요. 열이면 일곱 여덟은, “살 빼십시오. 특히 뱃살이 문젭니다”는 말씀을 듣습니다. 못 먹어서 고생하는 사람, 거의 없습니다. 배가 너무 불러서 탈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배가 그렇게 부른데도, 우리 인생은 전혀 배부르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볼 문제, 아닙니까?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로 계시다가, 지금은 ‘신건강인센터’ 원장으로 활동하시는 유태우 박사님에 의하면, 한국인들은 절대빈곤의 후유증으로 위가 너무 커져, 너무 많이 먹는 習慣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구역회 모일 때, 구역장님들에게 부탁드렸습니다. “목사님들, 심방가시면 고기 대접하시지 말라”고요(대게 목사님들, 체격이 비대합니다. 그냥 많이 대접하는 것이, 결코 위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랬더니, 우리 교우님들 얼마나 말씀 잘 들으시는지요! 고기대접은 하지 않으시는데, 다른 것으로 그 이상을 채우신다는 겁니다.
그 마음, 왜 이해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제는 많이 드십시오하는 勸食文化보다는 半食(1/2)을 권하는 것이, 상대방을 더 잘 대접하는 방법이 아닌가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가 아니지요. 무엇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하는 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해야’합니다. 놀라운 것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아무리 먹고 또 먹고, 마시고 또 마셔도, 배부름의 복은 받지만 절대로 肥滿症에는 걸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입니까? 자신의 軟弱함, 죄인 된 자기 인생에 뻥 뚫린 ‘하나님 없음’의 빈 공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는 영적 갈망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프랑스의 수학자요 철학자였던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1623-'62)이, 인간이 굶주림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잘 진단해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그가 말년에 쓴 미완성 작품인 ‘팡세’라는 책 있잖습니까?; 구약성경 족장시대의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만난 신앙체험을 쓴 책). 그렇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인생에)는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삶의 빈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이 채워져야 합니다. 그럴 때, 배부름을 얻습니다.
우리는 오해하기 쉽습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란, 구약에서 말하는 예언자적인 예언 선포를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의 전달자이지요(神言運搬者). 또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기준삼아서 그 시대상을 해석하던 자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시대를 정죄하고 판단하던 자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자들의 신앙과 삶을 ‘자기가 의롭다’고 자랑하고 싶어서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를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의 신앙과 삶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언자들이 바리새인들과 다른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예언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義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을 때 하나같이 고백한 것을, 보지 않습니까?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 자기의 부끄러움, 죄인 됨 때문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들 모두가, 다 머뭇거렸던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해서 도무지 자신감이 없었던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을 듣는 순간, 땅바닥에 엎드려 얼굴을 조아렸습니다/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 모세”하며 부르시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며 대답하지요(650년만의 부르심; 창 15, 13-16).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모세는, 겁에 질려 몸을 숨깁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머뭇거렸습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머뭇거렸습니다. “내가 누구관대”하며 말입니다.
웃시야 왕이 52년 통치를 끝내고 癩病으로 죽자, 남 왕국 유다는 혼돈에 빠지고 맙니다. 백성들이, 크게 낙망했습니다. 그 때 ‘이사야’가 절망 중에 있는 백성의 마음을 쓸어안고,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을 갈망했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온 땅에 충만한 여호와의 영광의 성전 문지방에 있는 이사야에게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황합니다. “화로다. 나여,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 6, 1-5).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수제자 시몬 베드로, 그가 예수님 앞에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무릎을 꿇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 8).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사울도(그렇게 당당하고, 의롭던 그였지만), 주님의 임재 앞에서 그 자리에서 꼬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이게 예언자들의 영성이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당당함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사람입니다. 자기 정체성에 대하여, 머뭇거림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너무 자신만만하고, 당당하고, 영적 자부심 가지고 있다면, 그 마음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하셨습니다. 여기 ‘가난하다’는 말씀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가난이 무엇일까요? 빈곤하여 궁핍한 것을 말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난의 의미는, 물질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8, 1-4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하신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가난의 의미가 가장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을 우리는, 아이들의 순수함, 태평스러움, 단순한 믿음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런 의미라면, 아이들의 영악함은 무엇으로 말해야 합니까? 가르쳐주지 않아도, 나쁜 것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말씀은, 어린아이들을 하찮게 대하던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의 문화와 관련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묻자, 예수님께서 한 어린 아이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여기,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라, 낮추라”는 말씀은 자신을 시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왜요? 예수님 당시, 유대사회가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그러했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스스로 자기 존재를 하찮은 존재로 여겼다는 이야깁니다. 어린아이가 하찮다는 말이 아니지요. 당시 사회가 그러했기 때문에, 자기를 그렇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자기존재가 시시하고 하찮은 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바라보는 눈이 겸손해질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름’의 복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사회의 어린아이가 주말에 아버지로부터 용돈을 100원이라도 받았다면, 아이는 그 용돈을 자기가 집안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빵을 구운 代價로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용돈 100원은, 전적으로 분에 넘치는 아버지의 선물이고, 사랑이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그 마음 가진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는 것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그 인생의 눈이 지금 여기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다가오는 내일, 미래를 응시하면서, 오늘을 사는 자를 말합니다. ‘눈’(시각, 관점, 기준)이 바뀐 사람입니다. 그래서 삶의 갈망까지 바뀐 사람입니다. 갓 태어난 독수리 새끼의 눈에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둥지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차츰 둥지가 얹혀 있는 나뭇가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나뭇가지는, 커다란 나무의 일부분이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숲 위로 높이 날아오른 독수리는 자신이 살던 나무가, 다른 나무들과 맞대어 있고, 그 나무들은 다시 거대한 숲을 이루고, 그 숲 옆에는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과 호수가 있다는 것도 보게 됩니다. 그 쯤 될 때, 독수리는 비로소 자기가 예전에 살던 ‘옛 둥지의 정체’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성을,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 2a)는 말씀으로 권면합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로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을 보면 '본받다'(imitate)가 아니라 ‘순응하다’(conform, 사회 규범, 관습에 순응하다)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사회 규범, 관습, 문화 속에 들어 있는 세속적인 가치에 순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理由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들도, 이 시대 속에 살아가고 있는 자들임에는 틀림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this eon)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는 세대”(coming eon)를 바라보며,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오늘을 사는 자들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순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했습니다. 순응하지 않기 위해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사는 삶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의 방식이라는 겁니다. 우리의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414장 찬송 아시지요?
이 세상은 요란 하나, 내 마음은 늘 편하다 구주의 뜻 준행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이 세상은 늘 변하고, 험악한 일 참 많으나 주 은혜를 생각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육신의 눈 못 볼 때에, 신령한 눈 더 밝히사 저 천성 문 보게 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내 마음과 내 영혼이, 모든 욕심 다 버리고 주 은혜로 성결하니, 참 기쁜 복 내 것일세. 이 육신의 복락보다, 신령한 복 더 좋으니, 내 맘과 뜻 다 합하여 저 천성만 향해 가네. 아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비록 이 세대 가운데 살지만 이 세대의 가치, 문화, 관습, 방식을 따라 살지 않습니다. “오는 세대”(coming eon)인 새 하늘과 새 땅,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삶에 시선을 집중하면서, 오늘을 분별하며 삽니다. 그런 삶이 곧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삶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복이 주어집니다. 인생의 배부름의 복이 주어집니다.
그런데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의의 주림과 목마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때로 자기 인생의 좌표로 삼았던 신앙과 신학의 원칙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경험을 할 때도 있습니다. 시편73편의 시인 ‘아삽’이 그런 인물입니다. ‘아삽’은 성소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였고, 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송하며 사는 신앙을 이끌던 음악감독입니다. 그가 평생, 가지고 있던 철칙 같은 한 가지 신앙(신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삽이 거의 넘어질 뻔 하였고, 실족할 뻔 하였던 사건들을 많이 목도한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넘어질뻔 하게 했고, 실족하게 할 뻔 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확고부동한 신앙과 실제 인간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보편적인 사람들의 삶의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 ‘불일치의 문제’였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만한 자를 질투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災殃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시 73, 1-7).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찌, 이런 불일치 현상들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문제였습니다.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거의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아삽’은 지금까지 하나님께 투자했던 자기 신앙과 가지고 있던 신앙의 기준을 하나님으로부터 환불받고 싶었던 겁니다. 그렇게 혼돈스럽고, 절망스럽던 어느 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비로소 그 진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거룩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그 순간에, 세상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성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되는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이 일순간에 다 달리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惡人들의 終末의 실상이 어떠한 것을 목도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荒蕪하게 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全滅하였나이다”(시 73, 19).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하늘에서 主 外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主 밖에 내가 思慕할 이 없나이다”(25). 그렇습니다. 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눈이 바뀐 자입니다. 영적 갈망이 바뀐 자입니다. 아삽처럼, 예배자로 서서, 이 세대의 현상에 고정되었던 눈을 들어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가을에,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배부름의 복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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